우리 앞집, 그리고 한 집 건너 옆집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다.
외출 중에 보니 부코를 잔뜩 창고에 넣고 있었다. 부코 장사를 시도하는지 여쭈어보니 그건 아니었다.
곁에 있던 옆집 아저씨 설명해 주기를 우리 빌리지에 부코 파는 아들이 있는데 잠시 맡겨 둔 것이라 한다.
그런데 옆집은 아들 집, 그 옆집은 딸 집인데 함께 사는 모습 보기 좋다.
고대 사회는 자녀가 많아야 자랑이다.
다윗은 부인을 많이 두어 자녀가 많았는데 문제도 많았다.
암논을 죽인 압살롬은 다윗을 피해 도망갔지만
요압의 개입으로 겨우 예루살렘에 왔다.
하지만 아물지 않은 상처에
섣부른 주선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다윗은 여전히 압살롬에 대한 심기가 불편했고,
2년 동안 압살롬을 만나주지 않았다.
죄송하고 두려운 마음이,
냉대와 철벽에 서운함만 쌓였다.
어찌 보면 압살롬은 비운의 캐릭터 같다.
그에게 아들 셋이 있었는데 일찍 죽었는지 후손을 이을 자가 없었고,
무남독녀 외동딸은 동생 다말의 이름으로 지었다.
얼마나 응어리진 상처가 많았을까?
물론 그의 외모는 다윗 못지 않게 탁월했다.
특히 그의 머리털은 샴푸 CF에 찍어도 손상 없는 모발이었고,
자른 머리털 무게가 근 2.6kg이 되니
탈모로 고통당하는 탈모인들 가발이 벗겨질 정도이다.
출중한 외모, 탁월한 리더십, 주도면밀함...
목적 중심의 삶은 마치 신약의 사울을 보는 것 같다.
아름다운 머릿결도 결국 그의 심장을 찌르는 도구가 되었으니
그의 인생이 참으로 비참해 보인다.
어찌 보면 다윗이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의 죽음을 그토록 아파했던 이유도,
자신의 죄의 결과와 동시에 그의 구멍 난 인생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 때가 있는 것 같다.
사랑해 주어야 할 때,
친구가 되어 주어야 야 할 때,
손 내밀어 줄 때,
받아주고, 용서해 줄 때...
그때를 놓친 다윗의 눈물이 강이 된다.
폐지와 깡통으로 고된 노동에 지치신 연로하신 부모님께서
손에 쥐어진 구겨진 지폐를 건너 주신다.
얼마나 힘들게 버셨는지 알기에,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시는지,
얼마나 우셨는지 아들로서 면목이 없다.
압살롬은 적어도 자기 아들이 죽었을 때 아버지 다윗을 생각해야 했다.
아버지의 심정으로 다윗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했다.
오죽하면 다윗이 얼굴 한 번 보여 주지 않았을까?
다윗은 압살롬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깨우치고 돌이키기 원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방문을 걸어둔 것 같지만,
실은 매일 열어놓고 기다린 것이다.
이번주 주일, 부코 주스를 주문했다.
시원한 부코 주스가 벌써부터 갈증을 해갈하는 것 같다.
우리 부모님께 한번 맛보여 드리면 좋겠다.
언제나 이곳에 오셔서 맛있는 것 사드릴까?
그날이 오기를 기도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