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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과음과 금주령 / 송 기 호 (Ki-Ho Song)
ysoo 추천 0 조회 54 18.12.14 17:4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과음과 금주령

Overdrinking and the Prohibition of Alcohol


송 기 호 (Ki-Ho Song)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약 력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문학박사
한림대학교 사학과 교수 역임


과식에는 과음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에 대해서 샤를르 달레는 1874년에 출간된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하나의 과도는 또 하나의 과도를 빚어내는 것이어서, 과식에는 자연 과음이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음주벽은 이 나라에서 매우 명예로운 일로 되어 있으며, 만약에 누가 정신을 잃도록 술을 마셔도 그를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한국천주교회사』상, 분도출판사, 235쪽)."


지금도 술 먹고 벌어진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근본 원인을 사람이 아니라 술로 돌린다. 술이 사람을 먹었지 사람이 술을 먹은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손님이 오면 으레 술상을 봐 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쓴 일기의 한 구절을 보면, 낯선 사람이 와도 술상을 차리는 풍습을 엿볼 수 있다.


"처음에 잘 곳을 찾았으나 인가가 몹시 드물어서 도적이 무서워 밤을 무릅쓰고 여산군 전원(前院)에 도착하니 밤이 이미 깊었다. 행인들이 집마다 가득 차서 묵을 곳이 없더니 마침 집 하나가 비어 있는데 집 주인이 손님을 맞아 술을 낸다. 술자리가 파할 무렵 종놈이 갑자기 들어와 술이 취한 주인과 서로 다투어 큰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다. 내 종을 엄하게 꾸짖고 취한 주인을 잘 달래서 간신히 싸움을 말리고나서 딴 집으로 옮기려 했으나 밤이 깊어서 부득이 거기에서 잤다(『쇄미록』1591년 12월)."


이처럼 술만 마시면 잦아지는 것이 싸움이요 술주정이다. 다음은 영조가 한 말이다.


"임금이 이르기를, “ … 근래에 술을 금한 후로 마을과 거리에서 서로 욕하고 싸우는 일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믿을 수 있는가?”라고 하니, 병조판서 홍상한이 말하기를, “추조(秋曹: 형조)와 경조(京兆: 한성부)에 서로 싸워 소송하는 일이 영원히 그쳐서 곤장을 칠 일이 없을 정도로 형벌을 거의 쓰지 않게 되었으니, 이것은 금주령의 빠른 효과입니다.”고 하였다(영조실록 32년<1756> 4월 4일)."


우리 민족은 고래로 음주와 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한반도 동쪽에 살던 예족은 10월의 하늘 제사 때마다 주야로 음주와 가무를 즐겼고, 마한도 5월 파종 후에 음주가무를 역시 주야로 쉬지 않고 하였으며, 변한도 음주가무를 좋아했다. 이처럼 한반도 북쪽에서 남쪽에 이르기까지 음주가무를 좋아했기에, 아예『후한서』에서는 “동이족은 모두 토착민으로서,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기를 좋아한다.” 고 총괄적으로 서술하였다.

이런 전통이 있기에 일본인이 개발한 가라오케를 더 즐기고 보편화시킨 것이 우리가 아닌가. 가무는 음주와 항상 따라붙게 되어 있어서 노래방에서는 불법이라도 손님들이 꼭 술을 찾는다.


사진 1. 안압지 출토 주사위


1977년 경주 안압지를 발굴할 때에 흥미로운 유물이 하나 출토되었다(사진 1 참조). 참나무로 만든 14면체 주사위인데, 면마다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주사위를 굴린 사람이 글의 지시에 따라 어떤 행동을 하게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술 석 잔 한번에 마시기
더러운 것을 버리지 않기
시 한 수 읊기
소리 없이 춤추기
팔뚝을 구부린 채 다 마시기
여러 사람이 코 때리기
스스로 괴래만(노래 이름?) 부르기
덤벼드는 사람이 있어도 가만 있기
월경 한 곡 부르기
스스로 노래 부르고 스스로 마시기
누구에게나 마음대로 노래를 청하기
술을 다 마시고 크게 웃기
술 2잔이면 쏟아버리기
얼굴을 간질어도 꼼짝 않기


궁궐 안에 만든 연못에서 발견되었고 술 마시는 것이 많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주연을 베풀 때에 사용하던 놀이기구인 것 같다. 그런데 현재 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유물은 복제품이다.

발굴 직후에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서 특별히 제작된 전기 오븐에 넣어 서서히 말렸는데, 온도 조절기가 불량해서 화재가 나 완전히 재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1천년 이상 지하에 있다가 세상 구경을 하자마자 사라져버린 것이다.


우리나라 술은 크게 탁주, 청주, 소주의 세 가지로 나뉜다. 탁주는 농사짓는 농민들이 주로 마셔서 농주(農酒)라고 하거나 막 걸러서 마신다고 해서 막걸리, 흰 색이라 해서 백주(白酒)라고 하였다.

청주는 맑게 걸러낸 술로서 약주(藥酒)라고도 불렀다. 정종이라고 흔히 부르는 일본식 청주와 우리 청주는 만드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증류주인 소주는 포도주와 함께 고려시대에 원나라로부터 전래된 술이다. 다음은 포도주에 관한 고려시대 기록이다.


"무진일에 원경 등이 원나라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왕에게 포도주를 하사하였다(『고려사』충렬왕 11년
<1285> 8월)."


술을 증류하는 방법은 멀리 아라비아로부터 몽고를 거쳐 소개된 것으로서, 아라비아어로 아락이라 하고 원나라에서는 아라길, 만주어로 알키, 평안북도에서는 아랑, 개성에서는 아락으로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랑주는 소주를 고고 난 찌꺼기로 만든 것으로 질이 낮고 독한 소주를 가리킨다고 한다. 또 원나라 군대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주둔했던 안동에서 전통주라고 하는 안동소주가 나온 것도 그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과 술 자리를 할 때면 소주의 한자가 어떻게 되는지 묻곤 했었다.

소주병에는 술 주(酒)가 아닌 다른 글자가 쓰여 있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소주 주(酎)라 하니, 진한 술 또는 세 번거른 술이란 뜻이다. 지금은 상표에 한자가 아주 작게 써 있어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또 소주에 이슬로(露)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소주를 증류하여 맺힌 방울을 연상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술은 오래 보관하기가 어렵다. 막걸리의 보존기간은 4~5일 정도이고 오래되면 산화되어 맛을 잃어버린다. 다음은 1880년대에 여행한 프랑스인이 쓴 우리나라 술의 품평이다.


"조선의 술은 대개 붉거나 흰색으로, 쌀이나 밀 또는 그밖의 곡물로 빚어내며, 발효하기 전 단계에 불붙은 숯을 집어넣음으로써 맑은 빛깔을 낸다. 그것은 질적인 면에서 중국이나 일본의 술을 저만치 따돌릴 만한데, 입천장에 착착 달라붙는 그 부드러운 맛이 흡사 우리의 포도주를 연상시켰다.

비록 알콜도수가 좀 높기는 하지만 너무도 맛이 좋아서 친구들을 위해 프랑스에도 좀 가지고 가고 싶었다. 그러나 운반할 수 있게 포장된 것도 아니었고, 결정적으로 장시간 보관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쉽지만 포기해야 했다(샤를 바라 지음, 성귀수 옮김, 『조선기행』눈빛, 182쪽)."


술이 시어버리면 설탕을 타서 먹었던 기억도 있다.
집에 오래 두지 못하니, 필요할 때마다 술 파는 집에 가서 주전자로 사다 마시곤 했다. 그런 심부름을 한번쯤은 해보았을 것이고, 가져오는 도중에 주전자에 입을 대고 맛을 본 경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명절 때 술을 거르고 남은 지게미를 먹고 취한 적도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어려서부터 그렇게 술을 배웠다.
술을 파는 주막은 양반보다는 하층민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다음은 일제강점기 술집을 묘사한 내용이다.


"조선인의 술집은 조선인의 생명이라고 부를 만하다.

주옥(酒屋) 즉 ‘술집’ 은 집 뒤편에 긴 장대를 세우고, 그 끝에 기름종이를 발라 대충 만든 장방형 제등(提燈)을 낮이고 저녁이고 높이 매달아 논다. 저녁에는 밀랍 초에 불을 붙인다. 이 술집은 술을 파는 것으로서, 단골은 거의 하등사회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양반은 결코 보통 술집에 출입하지 않는다.

… 술은 조선 잔으로 안주 포함하여 한 잔에 5전이라 하므로 제법 싼 가격인데, 두세 잔 마시면 배가 나오므로 근래에 일본인·조선인 노동자 출입이 많다(나이토 론쇼,『 古蹟と風俗』1927, 241쪽)."


19세기 말 쯤에 술집에는 목로(木)술집, 내외(內外)술집, 사발막걸리집, 모주(母酒)집, 색주가가 있었다고 한다. 목로주점은 서서 마시는 선술집이고, 내외주점은 행세하던 집 노과부가 생계에 쪼들려 건넌방이나 뒷방을 치우고 넌지시 파는 술집이고, 사발막걸리집은 사발로 막걸리를 파는 간이 목로주점이고, 모주집은 술찌꺼기를 다시 걸러서 만든 술을 파는 집이요, 색주가는 여자가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부르고 매음까지도 하는 집이다. 이 가운데 조선후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이 목로주점과 색주가라고 한다(강명관,『 조선의뒷골목풍경』145~146쪽).


평양 기생 66명에 대해서 짤막하게 논평한 책인 『녹파잡기』에는 늙은 기생이 술파는 얘기가 나온다.


" 취련은 아주 통통하고 몸집이 크지만 검무를 출때는 물찬 제비처럼 민첩했다. 이제는 늙어서 연광정 앞길에서 목로주점을 한다(한재락 지음, 이가원·허경진 옮김,『 녹파잡기』김영사, 61쪽)."


조선후기 지도에는 주막집을 그린 그림이 몇 점 있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그림이 대표적인데, 여기서 신윤복의 그림을 보겠다(그림 1 참조).

철쭉 꽃이 핀 담장 너머로 주모가 남색 치마를 입고 술을 막 따르려 하고, 그 왼쪽으로 사내 아이가 손님을 바라보고 있다. 손님은 모두 다섯 명인데,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은 이제 술을 마시고 젓가락으로 안주를 집으려 하고 있고 그 옆으로 두 사람이 서 있다. 그 너머로는 두 사람이 이제 술을 마실려는지 약간 떨어져서 뭔가를 의논하고 있다. 야외에 설치된 허름한 부뚜막에는 솥이 두 개가 걸려 있고 그 주위로 술잔과 안주 그릇이 놓여 있다. 그 안쪽 바닥에는 크고 작은 술단지 두 개가 놓여 있고, 술을 따라두는 넙적한 그릇과 술대접도 보인다. 여기서 주모는 국자에 술을 떠서 팔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림 1. 조선후기 주막(신윤복)


그림 2. 중국 사천성 팽현의 화상석 그림


이런 광경은 김홍도, 김득신의 그림에서도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막집 풍경이 중국 한나라 때의 화상석 그림(그림 2 참조)에서도 비슷하게 보여서 1천 5백년 이상 내려온 전통임을 상상할 수 있다. 화상석이란 돌에 그림을 새긴 것으로서 한나라 때에 유행하였다.


왼쪽 지붕이 있는 집에 받침대가 있고, 뒤쪽의 상인이 손님으로 부터 돈을 받고 있다. 오른손으로는 주발같은 것을 손님에게 건네 주고 있다. 받침대 위에는 접시가 두 개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먹고 마시는 곳으로 생각된다. 받침대 주변에는 몇 개의 단지가 놓여 있는데, 술을 담은 곳으로 생각된다 (하야시 미나오, 『돌에 새겨진 동양의 생활과 사상』두남, 87~88쪽).


이런 목로주점이 고대로부터 끊이지 않고 내려온 것을 알 수 있다. 기록에는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아마 고대로부터 이런 전통이 있었지 않을까 생각된다.
술이 있으면 안주가 있게 마련이다. 안주(按酒)는 과거에 안주(安酒)라고도 썼으니‘술 마실 때에 속을 편하게 하는 음식’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정현이 달아놓은 주석에, “ … 술을 마시면 마땅히 안주가 있어야 속을 편하게 한다.”고 하였다. 지금 세속에서 주효(酒肴)를 안주(安酒)라고 말하는데, 한나라 시대부터 이미 있었던 말이다( 『성호사설』시문문, 안주)."


다음은 정조 때에 안주에 대해서 채제공이 지적한 말이다.


"비록 수십 년 전만 해도 술집의 안주는 김치와 자반 따위에 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백성 습속이 점점 교묘해지면서 신기한 술 이름을 내놓기에 힘쓰고, 푸줏간의 쇠고기나 시장의 생선을 따질 것도 없이 태반이 술안주로 들어갑니다. 진수성찬과 맛있는 탕이 술단지 사이에 어지러이 널려 있으니, 시정의 연소한 사람들이 특별히 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데도 오직 안주를 탐하느라 삼삼오오 손을 잡고 술을 사서 마십니다. 이 때문에 빚을 지고 신세를 망치는 사람이 부지기수이니 통탄할만 합니다. 시장에서 반찬 값이 날로 뛰어 귀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일성록』정조 16년<1792> 9월 5일)."


영조 때의 엄한 금주령이 정조 때에 풀리자 이처럼 술과 안주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은 뒷 시기까지도 김치나 자반 정도에 만족했을 것이다. 1800년대 말에도 주막에서 명태, 돼지고기, 김치뿐인 안주와 술을 팔았다고 한다(김상보,『 조선시대의음식문화』162쪽).

흔히 안주로 빈대떡을 먹기도 하는데, 빈대떡의 재료인 녹두는 찬 성질이 있어서 술 마신 후에 열을 풀어주기 때문에 서로 궁합이 잘 맞는다고 한다.


술은 국밥과 함께 먹기도 하였다. 다시 임진왜란 때의 일기를 보자.


"이제 20여 년 만에 왔기에 술국집 춘화에게 옛날 일을 물었더니 자세히 대답해준다(『쇄미록』1592년 3월)."


주인공이 과거에 머물렀던 전라도 영암에 오랜만에 들려서 그곳 소식을 들었던 곳이 술국집[酒湯]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국밥을 탕반(湯飯)이라고도 했는데 탕반은 설렁탕, 장국밥, 곰탕을 함께 일컫는 말이었다.
시장이 서는 곳에는 술과 먹기 간편한 국밥을 팔게 되었으니, 자연히 시장이 발달했던 서울 무교동이나 경기도 안성의 국밥이 유명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음주가 있으면 금주령도 있게 마련이다. 술은 사람에게 유익하다고 하여 백약의 으뜸[百藥之長]이라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 하여 광약(狂藥)이라고도 불렀다. 특히 가뭄과 기근이 들면 곡식 소비를 줄이기 위해서 금주령을 내렸다. 그러다가 비가 오거나 곡식이 익게 되면 금주령을 해제하였으니, 고려시대 말부터 이러한 기록이 자주 보인다.
이러한 금주령의 개폐 사례를 하나 보겠다.


"사헌부에 지시하기를“이 달 18일부터 술을 금하니, 만일 이를 범한 자가 있거든 그 정상의 경중에 따라 차이가 있게 죄를 매기라.”고 하였으니, 날이 가물기 때문이다(세종실록 13년<1431> 5월 14일).
금주령을 폐지하였다<이른 곡식이 이미 익었기 때문이다.> (중종실록 4년<1509> 8월 6일)."


다음 기록은 술이 얼마나 쌀을 축내는지 잘 보여준다.


"곡식을 허비하는 것으로 술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니, 술은 반드시 금지해야 할 대상이다.

… 이제  서울과 큰 도시에는 양조장 수효가 끝이 없고, 큰 마을의 경우 한 양조장에서 1년에 쌀 수천 말을 소
모하니, 이는 가난한 집의 10년 먹을거리에 해당한다. 또 시골 시장에는 술집이 3분의 1을 차지하니, 그 소모되는 쌀이 과연 얼마나 많겠는가? 만약 술을 일체 금지한다면 흉년이 들더라도 백성들이 굶주림을 면할 것이다(『성호사설』인사문, 주금(酒禁))."


이처럼 곡식을 축내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일시적인 금주령뿐 아니라 왕의 특별 지시로 금주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영조 때에 유복명이 상소한 내용을 보면, 태종과 세종, 숙종과 영조가 특별히 그런 조치를 내렸다고 한다(영조 19년<1743> 3월 26일).


태종은 즉위한 직후에, 금주령을 내려도 술 마시는 자가 그치지 않는 것은 자신이 끊지 않았기 때문이라하여 술을 올리지 말라고 명령하자 나랏사람들이 감히 마시지 못했다고 한다. 태종 17년(1417)에는 수원부사 박강생이 감찰하러 온 사람들을 초청하여 염소를 잡고 술자리를 마련했다고 하여 문제가 되었다.
농사철에 금주령을 내렸는데 이를 어겼다는 것이다.
그는 이전에도 전력이 있었으니, 사헌부에서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박강생은 지난번에도 이웃고을의 수령과 관할지를 벗어나 안양사(安養寺)에 모여서 소주(燒酒)를 강권하다가 김문을 죽게 하였는데 아직도 고치지 못하고 있습니다(태종실록 17년<1417> 윤5월 22일)."



세종 때에는 술 마시는 것 자체를 금한 것이 아니라 취하도록 마시는 것을 금지한 것으로 보인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연회에서 술을 거나하게 마시는 것을 엄중히 금지하고 있으나 밤을 이용하여 술자리를 벌이는 사람들이 흔히 있는데, 이것은 순찰하는 자가 체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밤에 술을 마시다가 발각되면 곧 그 날 그 지역을 순찰한 관리를 추궁하여 중죄로 다스리게 하소서.” 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8년<1426> 1월 19일)."


성종 때에도 술 한 병 정도는 금하지 않았다.


"임금이 대사헌 이서장에게 이르기를“지금 바람이 계속 불고 비가 오지 않으니, 금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백성들이 술 한 병 정도 지니는 것은 금하지 말라.”고 하였다(성종실록 6년<1475> 4월 9일)."


그래서 중종 때에 박호는“한 병의 술은 금지하지 않기 때문에, 심한 자는 죄를 받지 않으려 하여 술이 아무리 많아도 반드시 병으로 운반합니다.”고 지적하였다. 이리하여 중종 22년(1527) 5월에는 병술마저 금지시켰다. 또 중종 36년(1541)에는 술을 빚는 데에 쓰이는 누룩도 매매하지 못하게 하였다.
금주령을 아주 엄격하게 지시한 왕은 영조였다. 그는 재위 기간 내내 엄하게 금주령을 시행하였다.


"이때 임금이 엄한 법으로 술을 금지했으므로 이를 범한 사람이 종종 처형되었다. 또 이웃을 연좌시키는 법을 만들어서 한 집에서 금주령을 범하면 세 집이 같이 죄를 받게 하니, 백성들이 매우 두려워 했고 뭇 신하들도 감히 간하지 못하였다(영조실록 39 년<1763> 11월 22일)."


단속이 엄하면 편법도 생겨나게 마련이다. 중종 24년(1529) 11월에 이임이 왕에게 아뢴 내용을 보면, 단속해보았자 세력 있는 사람들은 다 빠져나가고 못나고 가난한 백성들만 잡혀온다고 지적하였다.
단속을 이유로 돈을 뜯어내는 폐단도 생겨났다.


"우의정 김상로가 말하기를“금주령 이후에 술집으로 이름난 곳이면 형조와 한성부의 구실아치들이 별도로 금란방(禁亂房)을 설치하여 날마다 돈을 징수하며 기존의 법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 외의 벌금 물리는 폐단은 일일이 들기 어렵습니다. … ”고 하였다(영조실록 28년<1752> 12월 20일)."


관청의 벼슬아치들 아래서 일을 보던 구실아치들이 몰래 술을 파는 곳에 가서 돈을 뜯어내는 비리가 퍼졌던 모양이다. 그러기에 김상로가 두 관청의 폐단을 고치도록 건의하였고 영조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보다 앞서는 기록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도 보인다.


"또 아뢰기를, “금주령을 단단히 타일러 지시한 뒤로 술집으로 이름난 곳은 모두 술 빚는 일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송교(松橋) 근처 큰 술집 하나는 내자시(內資寺)에서 도장을 찍은 증서를 높이 걸어놓고 임금께 바치는 술이라 말하면서 법을 맡은 관청들에서 손을 대지 못하게 하고 제맘대로 매매하여 꺼리는 것이 없습니다.

내자시의 해당 관원을 먼저 파직하고 서원(書員: 아전)은 해당 관청을 시켜 가두고 죄를 주소서.”라고 하니, 아뢴대로 윤허하였다(영조 실록 4년<1728> 9월 16일)."


금주령을 엄히 내리더라도 예외적인 사항은 있었다.


"예조에 지시하기를“ … 환갑잔치, 혼인, 제사, 노인 봉양, 활쏘기, 노인병으로 약을 복용하는 경우 및 병 술을 가진 자 외에는 이전대로 내외에서 술을 금하도록 하라.”고 하였다(성종실록 16년<1485> 9월15일)."


이미 언급하였듯이 조선 전기에는 일반인도 술 한병 정도는 허용했다. 그밖에 특별한 일이 있을 경우에도 예외적으로 허용하였다. 그런데 여기에는 병 치료용으로 마시는 경우가 포함되어 있다.

술 마시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점을 노렸다. 특히 상층부 사람들은 약으로 쓴다고 핑계대면서 청주를 마셨다고 한다. 양반이 주로 마시던 청주를 약주(藥酒)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기획 : 남경필 편집간사



대한토목학회

THE MAGAZINE OF THE KOREAN SOCIETY OF CIVIL ENGIN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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