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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이 문 열
젊고 유능했던 사법관 한만운(韓萬雲)이 갑작스레 죽었을 때,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애석함과 아울러 솟아나는 의혹을 누를 길이 없었다. 30대(代)로 아직 초반인 나이도 나이려니와 곧고 바른 인품이나 사법관으로서 남다른 재질은 전부터 여러 사람의 촉망을 받아 온 터였다. 거기다가 무슨 남모를 지병(持病)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또 죽을 무렵 하여 특별한 사고나 심한 외상(外傷)을 입은 일도 없었다. 실로 하릇밤 새 거짓말처럼 숨져 버렸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그 돌연한 죽음의 암시라야 기껏 그 전날 밤의 몇 가지 유별난 행동 정도였다.
그 하나는 그 저녁 그가 아직 신혼과 다를 바 없는 아내를 홀로 두고 서재에서 밤을 새웠으며, 그 서재에는 새벽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웃의 젊은 부인네들이 부러워할 만큼 사랑하던 아내인 데다 혹 서재에 볼일이 있어도 자정을 넘기는 일이 없던 그이고 보면 확실히 별난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 밖에 한 이웃은 새벽쯤 그의 서재에서 사나운 외침과 함께 유리창 따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는데, 그 일도 젊은 미망인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녀가 그 소리에 잠을 깨 남편의 서재로 달려갔을 때, 벌써 잠든 듯 숨져 있는 남편 곁에는 부서진 낡은 액자와 거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바랜 어떤 늙은이의 사진 한 장이 널려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더욱 괴이한 것은 겁에 질리다시피 한 그의 유족들로부터 새어 나온 후문(後闇)이었다. 그가 죽은 후 빈소가 차려진 그 서재에서 매일 밤 괴로운 한숨 소리와 흐느낌 섞인 중얼거림이 들려왔다는 것으로, 무엇인가 고뇌와 울분에 찬 그 한숨 소리와 때로는 항의 같기도 하고 때로는 회한에 젖은 탄식 같기도 한 그 중얼거림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영혼은 아직 이승에 머물고 있다는 49 일간 계속됐다는 후문이었다.
그 모든 일은, 그걸 전하는 유족들은 물론 듣는 사람에게까지도야릇한 전율을 일으키게 했다. 그리하여 일종 신비적인 색채까지 띠게 된 그의 죽음은 구구한 억측과 설왕설래(說往說來)로 오랫동안 거리를 떠돌았지만, 그것이야말로 그의 15년에 걸친 어떤 약속의 불행한 이행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1
15년 전의 한만운 소년은, 그때도 남달리 부지런하고 착했지만, 그것 외에는 특별히 뒷날의 입지전(立志傳)적인 성공을 약속하는 어떤 조짐도 뵈지 않는 그저 평범한 산골 소년이었다. 가난한 산촌농가의 아들들이 흔히 그러하듯 그도 10리가량 떨어진 면(面) 소재지의 국민학교를 마친 후 아버지 밑에서 농사일을 배웠는데, 그해가 벌써 5년째였다.
하지만 그해 여름에 갑자기 터진 한 끔찍한 사건이 어쩌면 평범한 농부로 자라게 되었을지도 모를 그를 낯선 운명과 불행한 약속으로 끌어들이고 말았다. 이웃에 사는 어떤 중년 농부가 뒷산 소나무에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된 사건이 시작이었다.
얼른 보아 스스로 목을 맨 것 같은 형태였지만 마을은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소란스러워졌다. 어쩌다 가까운 읍에서 택시 한 대 들어오는 것조차 이야깃거리가 될 만큼 화제에 궁한 시골인 데다 그 죽음이 결코 자살일 리 없다는 마을 사람들의 일치된 추측이 그런 소란의 원인이었다.
사람들이 자살을 부인하는 가장 큰 까닭은 죽은 사람 一 그때 겨우 사십 대 후반이었는데 벌써 윤(尹) 영감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 에게 스스로 목을 맬 만한 동기가 없다는 점이었다. 무지렁뱅이 소작인의 아들로 출발한 윤 영감이었지만, 그야말로 소처럼 일하고 꿀벌처럼 모아 그 무렵에는 제법 산뜻한 기와집에 논마지기까지 장만한 터였다. 못생기긴 해도 남편을 하늘같이 아는 아내와의 금슬도 좋았고 ― 무엇보다도 비둘기 새끼 같은 남매가 한창 사랑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윤 영감의 사람 됨됨이도 그의 자살을 부인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지금이야 그리 드문 일도 아니고, 거기에 놀라는 사람도 없지만 당시만 해도 자살이란 ‘모질고 독한’ 사람이나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恨)이 있는’ 사람만이 저지를 수 있는 끔찍한 일에 속했다. 그런데 윤 영감은 결코 그렇지 못했다. ‘맹물’이란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오히려 반편이 취급을 당할 만큼 맺힌 데 없는 사람이었고, 어떤 사람은 그를 ‘법 없는 세상에도 살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거기다가 윤 영감의 죽음이 타살일 거라는 추측의 근거는 여럿 있었다. 우선 사람들의 의심을 산 것은 그의 시체가 발견된 장소와 시기였다. 시체는 그가 안 보인 지 열흘 만에 가까운 계곡 소나무 가지에 매달린 채 발견되었는데 만약 자살이었다면 그렇게 부패할 때까지 발견되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때는 한창 풀 베는 시절이었고, 또 그 소나무는 초군들이 하루에도 여남은 명씩 드나드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죽었든 간에 적어도 시체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뒤 누군가에 의해 전날 밤 그곳으로 옮겨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다음 의심을 산 것은 전문가가 아니라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뚜렷한 목과 옆구리의 상처였다. 목 왼쪽은 제법 어린아이의 주먹이 드나들 만큼 찢어져 있었고 오른쪽 옆구리도 창자가 비어질 정도로 벌어져 있어 목을 맨 것과는 상관없는 사인(死人)을 짐작케 했다. 그 밖에 윤 영감이 입고 있는 한복이 구김 하나 없이 깨끗하게 풀 먹여져 있다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윤 영감은 평소 차림으로 집을 나갔기 때문에 저고리 동정에 얼룩 하나 없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게 그 아내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윤 영감의 가해자(加害者)에 대해 마을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진 혐의였다. 그들은 한결 같이 황 장로(黃長老)란 사람을 지목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 무렵 그가 죽은 윤 영감과 하루가 멀다 하고 논물 싸움을 벌여 온 탓이었다.
사실 황 장로와 윤 영감은 원래부터 그리 좋은 사이는 못 되었다. 마을의 실력자일 뿐만 아니라 면내에서도 손꼽히는 유지인 황 장로로 보아서는 유일하게 자기 세력권 밖에 있는 윤 영감이 결코 달가운 존재일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논밭을 붙이거나 품을 팔거나 돈을 빌리는 등의 관계로 그에게 예속되어 있었지만, 윤 영감은 그 어느 관계도 필요 없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오히려 자기보다 싼 이자로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후한 품삯으로 일꾼을 빼앗아 가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윤 영감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산으로야 비교가 안 되었지만, 그래도 바이 아쉬울 건 없는 터에 황 장로 쪽에서 먼저 까닭 모를 적의로 나오자 그 또한 냉담과 묵살로 응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윤 영감이 전해에 논 다섯 마지기를 새로 사들인 것을 계기로 그들의 싸움은 겉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윤 영감이 우연히 사들인 그 논은 사방이 황 장로의 논에 둘러싸여 있어 황 장로가 전부터 사 넣으려고 애쓰던 땅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값을 헐하게 매기는 바람에 화가 난 논 임자는 윤 영감을 찾게 되었고, 마침 그동안 모은 돈으로 땅이나 늘릴까 하던 윤 영감은 별생각 없이 그 논을 사들이고 말았다.
윤 영감이 그 논을 사들인 일 자체만으로도 감정이 나쁠 대로 나빠져 있던 황 장로는 그해에 가뭄이 들자 때를 만났다는 듯 논물주기를 거부하고 나왔다. 사람 좋은 윤 영감도 그 일만은 참지 못했다. 자식 죽는 꼴은 보아도 곡식 말라 죽는 꼴은 못 본다는 전형적인 농부의 심성에서였다. 따라서 윤 영감과 황 장로는 사람들의 면전에서 몇 번이나 대판거리로 싸웠고, 한번은 무논 바닥에 엉겨 뒹군 적마저 있었다.
그들의 싸움에 대한 동네 사람들의 태도는 속으로는 언제나 윤 영감에게 동정적이었다. 윤 영감이 논마지기나 장만하고 산다고는 해도 술도가와 과수원까지 가진 황 장로에 비하면 재산이랄 것도 없었다. 거기다가 작은 동네 교회의 장로직을 맡고는 있어도 황 장로는 ‘양잿물’이란 별명이 있을 만큼 악착스러운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해방 전 일본 주재소의 소사로 잔뼈가 굵은 그는, 일제 말의 친일 부역으로 해방 직후 몰매 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었으나 어쨌든 그 덕에 얻은 약간의 재물로 치부를 시작했다. 윤 영감이 안 먹고 안 입어 재산을 모은 데 비해 그는 살인 빼 놓고는 다 했다는 식의 영악스러운 방법이었다. 윤 영감이 그날 집을 나간 것도 그런 황 장로에게 반감을 가진 마을의 식자(識者) 하나가 용수 지역권(用水地役權) 인가 뭔가를 일러 주어, 그 소송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가까운 읍의 사법서사를 찾아 나선 길이었다.
처음 한동안 일은 마을 사람들의 추측대로 돌아갔다. 경찰은 당연히 황 장로를 구속하고 구체적인 증인도 둘이나 찾아냈다. 하나는 떡장수 아낙네로서 그날 황 장로네 집 뒤 비탈길을 지나다 윤 영감이 황 장로 부자(父子)와 멱살잡이하고 있는 걸 보았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황 장로네 농막집 막내로 직접 현장을 목격한 증인이었다. 특히 재미난 것은 당시 국민학교 3학년이던 농막집 막내인데, 그 아이는 학교에서 처음 윤 영감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말을 듣자 급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고, 거참 이상타……. 그 영감쟁이는 장로 할배(황 장로)가 괭이로 찍어 보리 짚가리 속에 감촤 났는데, 우예 산까정 가서 목을 맷이꼬……?”
그리고 뒤이어 사건의 전모가 풍설(風說)로나마 마을을 떠돌았다. 그날 윤 영감은 소송 전에 마지막으로 외딴 황 장로네 집을 찾았다가 마침 집에 있던 그들 부자와 다시 싸움이 붙게 되었고, 거기서 황 장로가 홧김에 휘두른 괭이에 윤 영감이 맞아 죽자 그들은 시체를 보리 짚가리에 감춰 두었다가 며칠 뒤 밤중에 계곡으로 옮겨 자살을 위장했다. ― 대개 그런 내용이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가까운 검찰청까지 넘어갔던 황 장로는 정확히 한 달 만에 무혐의로 풀려 나왔다. 전문(傳聞) 이상의 그 어떤 물증(物證)도 찾아내지 못한 데다 증언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떡장수 아낙네는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설령 그날이 맞다고 해도 멱살잡이만으로 살인까지 단정할 수는 없으며, 또 농막집 막내는 입원 치료가 필요할 정도의 정신 분열증상이 있다는 진단이 있었다. 검시 결과도 일반의 추측과는 달랐다. 윤 영감의 목과 옆구리에 상처가 있는 듯은 하지만 워낙 부패가 심해 반드시 흉기에 의한 것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고, 또 직접적인 사인(死因)은 분명 질식이라는 것이 검시관(檢屍官)의 소견이었다.
그 밖에도 조사에 따르면, 윤 영감에게도 몇 가지 자살의 동기가 될 만한 일이 있었다. 하나는 그 며칠 전 새끼 밴 암소가 언덕에서 굴러떨어져 죽은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형의 무식을 이용한 윤 영감의 동생이 인감을 위조해 십만 평이 넘는 임야 한 필을 팔아먹은 일이었다. 어쩌다 잃은 십 원짜리 동전 한 닢을 찾기 위해 일껏 재놓은 퇴비 더미를 다시 허물 만큼 무서운 윤 영감의 경제관념으로 볼 때 확실히 그 두 가지 일은 상심거리가 될 만했다. 더군다나 목을 맨 참바는 분명 그의 지게꼬리에 쓰던 물건이었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애매한 대로 윤 영감의 죽음은 자살로 단정되고, 사건은 일단 마무리를 지었다. 석방된 날 황 장로는 집보다 교회로 먼저 달려가 두 시간에 걸친 길고 눈물 섞인 기도 끝에 쌀 열 가마를 감사 연보로 바쳤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기르던 돼지를 잡고 도가의 술을 퍼 날라 그동안의 잘못을 빌었으며, 나쁜 뜻으로 유명하던 그의 소작 조건과 이자와 품삯을 면내의 어느 누구보다도 후하게 바꾸었다.
그런 황 장로의 돌변에 대해 단순한 마을 사람들은 대개 그 사건의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자기들이 그에게 보인 반감과 적의가 그의 탐욕과 인색을 억누른 걸로 생각했지만, 일부에서는 여전히 의심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무력할 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반증도 없다는 점과 남의 일에 속속들이 간섭하기를 꺼리는 시골 사람들의 속성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젊은이들은 좀 달랐다. 그들은 사건이 일단락 진후에도 공공연히 황 장로에 대한 의심을 주고받았으며, 어떤 때는 수사 과정에까지도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다가 평소에 현금 많이 가지고 있기로 소문난 황 장로가 그 사건 후 까닭 없이 과수원을 처분하자 그들의 의심은 그대로 확신으로 변했다. 황 장로는 살인자다. ― 그런 쑥덕거림은 실제 근년까지도 그때의 젊은이들 사이를 오갔을 정도였다.
15년 전의 한만운 소년도 바로 그런 젊은이들 중의 하나였다. 그것도 그들 중 누구보다 윤 영감의 죽음을 타살로 믿는 축이었는데, 그 까닭은 우선 윤 영감과 그와의 남다른 관계에 있었다. 생전의 윤 영감은 그와 앞뒷집 사이였을 뿐만 아니라, 실없이 모여 화투판을 벌이거나 술추렴을 일삼는 동배들을 꺼려서 산에서나 들에서나 어린 그를 무슨 큰 친구 대하듯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약간은 지루하고 약간은 성가시면서도, 몇 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에 그가 알게 된 윤 영감은 결코 그만한 일로 자살할 사람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또 한만운 소년에게는 윤 영감의 살인범으로 황 장로를 의심할 만한 결정적인 근거가 있었다. 실로 우연히도 그는 윤 영감이 실종 중이던 어떤 밤 늦게 윤 영감의 집 부근에서 무엇인가를 집어 나오는 황 장로의 아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러니까 황 장로가 풀려 나오고 사건의 전모가 정식으로 밝혀진 후에야, 그는 그것이 윤 영감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하는 데 유력한 근거가 된 윤 영감의 지게꼬리 (참바)였으리라고 추측했지만 끝내 밖에다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말해 봤자 이미 소용없는 그 말을 다시 입 밖에만 내면 ‘다리몽뎅이를 분질러’ 버리겠다는 아버지의 엄포와 쓸데없는 일로 황 장로의 원한을 살 경우 입게 될 피해를 들어가며 입 다물 것을 바라는 어머니의 간청 때문이었다.
하지만 또래의 젊은이들과 추상적인 의심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는 도무지 그의 마음이 개운해질 리가 없었다. 그가 윤 영감의 사진을 얻어 온 것도 어쩌면 그 불행한 죽음으로 과장된 윤 영감과의 기묘한 우정과, 진상을 알면서도 말하지 못한다는 죄의식 탓이었으리라. 사건이 일단락 지어지고 며칠 안 된 어느 날 무슨 일인가로 윤 영감의 집에 들렀던 그는 확대하여 영정(影幀)으로 쓴 듯한 윤 영감의 사진 한 장을 주웠다. 처음에는 무심코였으나 한참 들여다보는 사이에 문득 그 사진을 간직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중 집으로 돌아와서 그 사진을 들여다보면서는 엉뚱한 말까지 중얼거리게 되었다.
“미안해요, 영감. 만약 내게 그럴 힘이 있었다면 절대로 영감의 원통한 죽음을 그대로 보아 넘기지는 않았을 겁 니다…….”
그런데 그날 밤이었다. 홀로 자는 그의 방에 홀연 윤 영감이 깨끗한 옷차림으로 생시처럼 찾아왔다.
“참으로 고맙네…….”
그렇게 말하는 윤 영감은 울먹이고 있었다.
“이미 끝난 이승의 일에 이토록 연연해선 안 되지만, 하도 원통해서……. 그래, 자네 낮에 한 말은 진심인가? 힘만 있다면, 나처럼 약하고 힘 없는 이의 원통함을 보아 넘기지 않겠다고 한 것 참말인가?”
그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네. 내 힘껏 뒤보아줌세. 이승의 일에 간섭한 죄로 어떤 업화(業火)가 미치더라도 한번 자네를 힘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 보겠네. 물론 자네도 자네 몫의 수고는 해야 할 테지만…….”
그러다가 문득 윤 영감의 얼굴이 불신과 의혹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 담보는 있어야겠네. 자네가 내게 걸 것은 생명뿐인데…… 그래도 괜찮겠나? 만약 나와의 이 약속을 어기면 죽을 각오가 돼 있나?”
그는 섬뜩했지만 소년다운 용기로 윤 영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윤 영감은 눈물 젖은 얼굴로 몇 번이고 감사를 거듭하더니 올 때처럼 홀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꿈 같기도 하고 환영(幻影) 같기도 한 나타남과 사라짐이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다면 낮에 얻어 온 윤 영감의 사진이 원인 모를 습기에 젖어 번들거리는 점이었다.
완전히 정신을 차린 후에 그는 다시 한 번, 윤 영감의 제안을 되살려 보았다. 으스스했지만 대답만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지요. 목숨 걸고 지키지요. 그렇게 약속은 이루어졌다.
2
그 뒤 한만운 소년의 삶은 일찍이 예상되던 궤적에서 벗어났다. 윤 영감과의 약속이 있고 한 달도 안 돼 갑자기 나타난 삼촌이 발단이었다.
해방 전 징용으로 일본에 끌려가 죽은 줄만 알았던 그 삼촌은 돈 많은 재일 동포로 귀국하자마자 옛집을 찾아왔다가, 하나뿐인 형의 아들이 무지렁뱅이 농군으로 자라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서울로 데려갔다.
삼촌은 만년(晩年)을 고국에서 보낼 양으로 그곳에다 몇 가지 새로운 사업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덕택에 일단 한(韓) 소년과는 인연이 없어 보이던 학업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삼촌의 경제적인 뒷받침에다 훌륭한 교사들의 지도 아래 그는 중등교육과정을 속성으로 이수하고 한두 해 재수를 거쳐 마침내는 목표했던 명문 대학의 법과생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급격한 변신(變身)이 겨우 5년 만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데는 그 자신의 명석한 두뇌와 남다른 노력도 큰 몫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그는 자기 몫의 노력은 스스로 다한다는 윤 영감과의 약속에 비교적 충실했다. 그 시절에 흔히 빠지기 쉬운 여러 가지 어리석음 ― 여인들과의 덧없는 감정의 유희나 앞뒤 없고 부박한 탐락(貪樂) 또는 삶에 대한 터무니없는 회의와 비관 따위에 빠져드는 일 없이, 오직 자기의 길만을 열심히 가고 있는 그는 마치 처음부터 사법관이 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러나 한동안 순조롭기만 하던 그의 앞길에도 시련은 왔다. 고국에 돌아와 이것저것 무리한 사업을 벌였던 그의 삼촌은 채 일곱 해도 못 채우고 부도(不渡)를 낸 뒤 올 때처럼 갑자기 일본으로 돌아가 버렸다.
“귀국 자체가 그렇지만, 지금 생각하면 지난 일곱 해 모두가 마치 무엇에 홀려 보낸 것 같구나. 가만히 두어도 되게 되어 있는 일본의 업체는 제쳐 놓고 내가 여길 와서 무엇을 했는지……. 꼭 악몽에서 깨난 것 같다.”
그것이 쫓기듯 공항으로 달리는 택시 안에서 삼촌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한 탄식이었다. 오로지 그 삼촌에게만 의지해 학업에 몰두해 있던 그에게는 뜻 아니한 불행이었다.
용기와 신념마저 잃지는 않았지만, 삼촌이 돌아가 버린 후의 나머지 대학 생활은 참으로 괴로웠다. 그는 뼈를 깎고 살을 가르는 기분으로 시간을 쪼개어 학비와 함께 생활비까지 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재학 중 합격이라는 애초의 계획은 무너지고 그는 마침내 고급 건달로 아무도 돌봐 주는 이 없는 서울거리에 혼자 남겨지고 말았다.
실로 참담한 세월이었다. 직장을 구하려면 안 될 일도 없었으나, 사법관에 대한 집념 때문에 졸업 후에도 그는 계속 가정교사로 눌러앉아 있었다. 사법고시 준비를 한다는 명분은 있었으나 스물예닐곱의 청년으로서는 너무 처량한 몰골이었다.
거기다가 그를 더욱 비참한 심경으로 몰아넣은 것은 여자였다. 우리 삶에서 홍역과 한가지로 누구나 치르게 되어 있는 것이 여인과의 사랑이고 보면, 아무리 자신의 길에만 골몰해 있는 그라고 해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대학교 상급반 시절에 그에게도 한 여자가 나타났고, 그녀는 곧 그의 삭막한 젊음을 비춰 주는 별이었다. 졸업후 두 번째 시험에 떨어지면서부터 취직을 졸라 대던 그녀는 채 그해가 가기도 전에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렸다.
그 충격은 컸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길에 어지간히 지쳐 있던 그에게 가해진 그 새로운 충격은 그로 하여금 그 겨울의 시험을 포기하게 하는 대신 어느 대우 좋은 기업체에 입사(入杜)하는 형태로까지 몰고 갔다. 그런데 그 입사 첫날이었다. 환영회에서 잔뜩 술에 취해 돌아온 그는 오랫동안 책상 위에 얹혀 있던 윤 영감의 사진을 한쪽으로 몰아붙이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 영감, 나더러 어쩌란 말이오? 언제까지 궁상맞은 꼴로 되잖은 시험 준비나 하고 있어야 한단 말이오?”
그러고는 옷도 벗지 않은 채 곯아떨어졌던 것인데, 그 밤 다시 윤 영감의 방문을 받았다.
“가세.”
윤 영감은 전에 없이 엄한 얼굴로 그의 손목을 잡았다. 뼛속 깊이 한기가 스며들 만큼 차가운 손이었다. 그는 놀라 그 손을 뿌리치며 항의했다.
“내가 왜 영감을 따라가야 합니까? 나도 할 만큼은 했습니다. 지금까지 10년 세월 단 한시라도 내가 그 약속에 소홀했던 적이 있습니까? 단 한 번이라도 공부 이외의 일에 곁눈을 판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10년 전의 초동 시절과 마찬가지로 무력합니다. 설마 영감은 내가 식칼이라도 품고 가서 황 장로 부자를 찔러달라는 뜻은 아니겠지요?”
그런 항의에 윤 영감의 엄한 표정이 조금 풀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여전히 어둡고 실망에 찬 표정이었다.
“못난 사람, 벌써 도회적인 안락에 깊이 젖어들었군. 그래, 지금이 옛날 무거운 나뭇짐을 지고 산등성이 치닫던 시절보다 더 못 견딜 건 뭔가? 더구나 자네는 이제 겨우 스물일곱, 뭣 때문에 그리 성급하게 구는가? 정말 실망했네.”
“성급이 아니라 지친 겁니다. 한시바삐 그 약속을 이행하고 나도 나의 삶을 즐기고 싶은 겁니다.”
그는 거리낌 없이 말했다. 세월과 배움에 의해 그의 정신이 조금씩 눈뜨기 시작하면서부터 줄곧 마음속을 짓늘러 온 진실이었다. 윤 영감도 지지 않았다.
“그럼 자네는 개인 기업체의 말단 직원이 되어서도 나와의 약속을 이행할 수 있다고 믿는가?”
“그동안 영감님은 왜 가만히 계셨습니까? 내가 이렇게 되도록 보고만 있는 영감님은 애초의 약속을 모두 지켰다고 믿습니까?”
그러자 윤 영감도 잠시 흠칫했다. 이윽고 다시 입을 연 그의 목소리는 완연히 달래는 투였다.
“힘을 다했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이렇게 오지 않았나? 내 하나 일러 줌세. 이제 거의 때가 다 되었네. 자네 몫의 노력만 다한다면 다음번은 틀림없네, 나를 믿고 ― 꼭 한 번만 더 해 보게. 반드시 될 걸세. 자, 오늘은 이만 가겠네.”
윤 영감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튿날부터 출근을 포기하고 다시 궁색한 가정교사로 눌러앉아 공부에 몰두한 그는 과연 그 이듬해에 무난히 사법관이 되기 위한 시험을 통과했다. 열일곱 산골 소년으로 고향을 떠난 지 꼭 열한 해의 일이었다.
3
다른 사람에게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그에게 있어서 합격 후의 한동안은 나날이 즐거운 봄이요, 흥겨운 잔치 같았다.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러운 짐이 아니었으며 ― 그때까지 심신을 괴롭혔던 여러 가지의 괴로운 추억들도 이제는 다만 뒷날의 입지전(立志傳)을 더욱 풍성하게 할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았다.
그만의 특별한 행운도 그의 삶이 그대로 축복처럼 느껴지는 데 한몫을 단단히 했다. 연수(硏修) 시절에 새로운 은인이라고도 할 만한 대학 선배 하나를 만나게 된 일이었다. 실무 실습을 나갔던 어떤 부처의 장(長)이었던 그 선배는 왠지 그를 처음 대하던 순간부터 살가워하며 업무에서 퇴근 후의 술자리까지 자상한 부형(父兄)처럼 굴었다. 선배라고는 해도 20년 가까이 나이 차가 나고, 직위로는 거의 까마득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일개 연수생(硏修生)에게는 지나치게 느껴질 만한 호의였다. 그러다가 석 달을 기한한 그 실습이 끝나던 날이었다. 그 선배는 퇴근하는 그를 자기의 승용차에 억지로 태우면서 말했다.
“한 군과의 인연을 이것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아. 오늘은 우리 집에 가서 한잔하지. 어쩌면 평생을 드나들게 될 집일지도 모르니 미리 알아 두는 것도 좋을 거야.”
그렇게 끌려간 그 선배의 집에서 만난 것이 뒷날의 아내였다. 고급 관리의 맏딸답지 않게 검소하고 다소곳한 여자로 그때는 아직 어떤 여자 대학의 가정과에 적을 둔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 선배의 호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딜 가든 상관없다고는 하지만 사람은 출발이 중요해. 마침 그쪽에 아는 사람이 있어. 손을 써 두었는데…… 첫 발령지는 내가 시키는 대로 가도록 하지.”
뒷날의 장인은 이렇게 말하며 그의 첫 부임을 동기들이 모두 부러위하는 어떤 자리로 힘써 주었다. 아름답고 현숙한 아내감과 좋은 처가와 관리로서의 든든한 배경을 한꺼번에 얻어 낸 셈이었다. 한만운은 그런 행운 또한 윤 영감의 은밀한 도움에 의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무렵의 어느 밤에 나타난 윤 영감의 얼굴은 전에 없이 흐렸다.
“왜 그곳으로 가지 않았나?”
그곳이란 고향을 관할하는 지방 사법관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는 약간 뜨끔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발령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네 자신도 애써 그리로 가려 들지는 않았지.”
“그것도 사실입니다. 그럭저럭 시험은 되었다고 하지만 저는 아직 실무에 어두운 애송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가 본들 제가 무얼 하겠습니까? 좀 더 경험과 식견을 쌓은 후에 돌아가 처리하겠습니다.”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을 텐데.”
“물론 저도 살인죄의 공소시효가 15년밖에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몇 년은 더 여유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나온다면야 할 말은 없지만……. 어쨌든 약속은 잊지 말게. 또…… 사람에게 지나치게 은혜의 빚을 지지 말고.”
“그건 무슨 뜻입니까?”
“자넨 지금 상대편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어.”
그러면서 윤 영감은 다시 한 번 깊숙한 우려의 눈길로 그를 보았다. 그러나 까닭을 묻는 그에게 끝내 더 이상의 설명은 해 주지 않았다.
그 뒤 윤 영감이 다시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1년쯤 지났을 때였다. 그사이 선배의 딸은 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오랜 묵계를 이행하듯 그녀와 약혼했다. 윤 영감이 거의 힐난에 가까운 표정으로 그를 찾아온 것은 바로 그 약혼식이 있었던 밤이었다.
“자네는 큰 잘못을 저질렀네.”
“무얼 말씀입니까?”
“그 여자와 결혼해서는 안 돼.”
“그건 우리들의 약속과 상관없는 일 아닙니까? 영감이 무슨 권리로 남의 결혼까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겁니까?”
이미 약혼녀에게 깊이 빠져 있던 그는 거기서 불끈하며 따졌다. 윤 영감은 성난 기색을 애써 억누르면서 침중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관계가 있지……. 그러나 자네의 결의만 확고하다면 그 일은 더 따지지 않겠네. 다만 한 가지 일깨워 줄 게 있어. 이제 정말 날이 얼마 남지 않았네. 빨리 그곳으로 가야 해.”
“…….”
“물론 장인 될 사람이 놓아주려 들지 않겠지만, 이제 더 이상 여기서 세월을 허비할 여유가 없어. 사실을 설명해 봐야 통하지 않을테니 결혼 조건으로 그곳에 돌아가는 걸 내세워 보게. 그렇게까지 나오는 데야 그 사람인들 어쩌겠나? 하여튼 꼭 기억하게. 채 두 해도 남지 않았네.”
그제야 그도 약간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급격하게 변한 생활과 사랑스러운 약혼자에 취해 이따금씩 잊기는 했지만 그 약속, 그것은 단순히 윤 영감을 향한 것 이상 그 자신과 삶 자체에 대한 약속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가 가고 싶은 지방 관청의 이름을 댔을 때 이상하게 흐려지던 장인의 얼굴이었다.
“하필이면 왜 그곳에…….”
4
고향을 관할하는 지방의 사법관청에 내려오자마자 그는 미뤄 두었던 윤 영감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데 착수했다. 10여년 전에 종결된 사건을 재수사하는 일의 어려움은 이미 전부터 예측해 온 터였지만, 막상 손을 대고 보니 그것은 어려움 이상 하나의 막막함이었다. 그때도 없던 물증(物證)이 십여 년이 지난 후에 갑자기 나타날 리도 없고, 그때도 채택되지 못한 증언이 또한 10여 년 세월이 지났다 해서 갑자기 증거 능력을 획득하게 될 리도 없었다. 더군다나 수사의 대상인 황 장로 부자는 그사이 더욱 힘을 키워 이제는 사법관인 그조차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인물들이 되어 있었다. 재산이 고향 면을 벗어나 군(郡) 전체를 휘어잡은 외에도 부자가 다 같이 무슨 의원(議員), 무슨 조합의 장(長) 따위 건들기 만만찮은 지방 유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만운은 성실하고 끈기 있게 윤 영감의 죽음을 추적했다. 일단 고향 땅을 다시 밟게 되자 10여 년 전의 순수함과 용기가 되살아난 덕분이었다. 그는 희미해진 사람들의 기억을 일깨워 모으고, 옛날의 증인들을 새로 찾아보았다. 모두가 소용없는 일이었다. 세월은 사람들의 기억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고, 증인도 완전히 백치가 되어 떠도는 황 장로네 농막집 막내뿐이었다. 대신 낌새를 알아차린 황 장로 부자는 직접 간접으로 그에게 회유와 압력을 되풀이했다.
그럴 때 그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이 별 기대 없이 농막집 막내를 데리고 찾아갔던 어느 정신과 의사였다.
“이 청년을 지배하는 것은 극심한 공포와 욕구불만, 특히 억제된 표현 본능입니다. 너무 오래 방치해 두었지만 전혀 희망이 없는 건 아닙니다.”
그것이 그 젊은 의사의 소견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한만운이 다시 찾아갔을 때는 이렇게 권해 왔다.
“장담은 못 하겠지만, 사이코 드라마[心理劇] 를 구성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방면에 밝은 선배님 한 분을 소개해 드리죠. 거기 가서 상의해 보십시오.”
그에 따라 한만운은 평생에 처음으로 기묘한 연극 한 편을 구경하게 되었다. 무대는 황 장로네 외딴집, 주인공은 황 장로 부자와 윤 영감 ― 모든 것은 되도록 10여 년 전 상황과 비슷하게 꾸며졌다.
첫날은 황 장로 부자와 윤 영감의 시비까지만 했다. 윤 영감이 찾아와서 시비가 벌어지고, 멱살잡이에서 함께 엉겨 나뒹구는 것까지 보여 주었지만 농막집 막내의 반웅은 전혀 없었다. 세 번을 반복한 뒤 다음 날은 괭이로 찍는 장면을 더해 보았다. 몽롱하게 보고 있던 농막집 막내의 눈길에 차츰 긴장의 기색이 떠올랐다. 하지만 역시 세 번 반복해도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그다음 날엔 괭이로 찍고 보리 짚가리에 끌어다 감추는 광경까지 나갔다. 드디어 변화가 나타났다. 농막집 막내가 돌연 떨며 이상한 괴성과 함께 손발을 내젓기 시작했다. 의사가 그걸 보며 재촉했다.
“말해, 마음대로 말하란 말이야.”
그러자 농막집 막내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기어 나 ― 와. 기, 어 나와.”
보리 짚가리에 감추어진 윤 영감의 시체를 향해서였다. 윤 영감 역의 배우가 피를 흘리며 기어 나왔다. 그러나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라 멍청히 서 있는 황 장로 부자 역(役)의 배우에게 농막집 막내가 다시 말했다.
“목을 졸라. 새끼로.”
배우들이 그대로 하자 농막집 막내는 다시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축 늘어진 윤 영감의 시체를 보리 짚가리로 끌고 가려 하자 또 불평스럽게 웅얼거렸다.
“곰방대가 없어. 괭이에 찍혀 부러진 곰방대 말이야.”
그러나 소도구로 준비된 곰방대가 없어 그날의 연극은 거기서 끝났다.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윤 영감의 사인(死因)이 질식이었던 까닭을 알게 된 까닭이었다.
그 뒤 그 연극이 진행됨에 따라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이 나왔다. 그날 범행에 사용된 괭이와 거기 맞아 부러진 윤 영감의 곰방대는 황 장로네 못 쓰는 우물에 던져졌다는 것, 피 묻은 윤 영감의 옷은 다시 빨아 다림질까지 한 후 갈아입혔다는 것, 그리고 농막집 막내는 당시 열한 살의 나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심한 위협과 강요를 하급 수사기관과 그 부모들로부터 번갈아 받았으며 그 때문에 종내에는 머리까지 돌아 버렸다는 것 따위다. 특히 모든 연극이 끝난 후 의사가 무엇이든 마음대로 외쳐도 좋다고 말했을 때 그 농막집 막내가 보인 반응은 처절한 데마저 있었다.
“윤 영감은 장로 할배가 죽였다아…….”
“괭이로 찍고 목을 졸랐다아…….”
거의 삼십 분 가까이나 통곡처럼 되풀이된 부르짖음이었다.
5
황 장로네 집에는 정말로 10여 년 전 간이 상수도가 들어오면서 막아 버린 우물이 하나 있음을 알아낸 한(韓) 사법관은 이튿날 정식으로 수색영장을 신청했다. 윤 영감의 곰방대라면 그도 금세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 일어났다. 그 사건 관계의 옛날 서류를 뒤적이던 그는 뜻밖에도 그때의 담당관이 바로 자신의 장인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제야 그는 윤 영감이 자기의 결혼을 말리던 것, 그리고 내려올 때 까닭 모르게 흐려지던 장인의 얼굴을 놀라움으로 떠올렸다. 그는 한달음에 장인을 찾아 서울로 올라갔다.
“음……. 그런 일이 있었던가.”
일의 전말을 듣고 난 장인은 무거운 어조로 탄식처럼 말했다.
“나는 자네가 정말로 유령 따위와 약속을 했다고는 믿지 않네. 그것은 하나의 비유이고, 실은 법의 보편 원리, 또는 양심 같은 것에 대한 스스로의 약속이었겠지.”
“그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어쨌든 빙장 어른께서도 그 사건에 석연하지 못한 점이 있음을 느끼시지 못하셨습니까?”
“물론 나는 그 윤 영감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단정하는 데는 주저했네. 그러나 그보다 더 의심스러운 것은 풍문에서 말하는 바로 황 장로란 사람의 살해 동기였지. 하급 수사관, 검시관, 물증 증인 그 어떤 것도 그의 살인을 인정하기에는 부족했어. 따라서 나는 별수 없이 ‘의심이 있을 때는 유리하게’라는 법 격언에 따라 그를 석방했을 뿐이야.”
“그 어느 과정에서든 금력(金力)이 작용했으리란 의심을 가져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 의심도 했지. 모두가 한결같이 황 장로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려고만 애들을 썼지.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것이 황 장로의 무혐의를 돕는다고 생각했어. 내 경험에 의하면 그 계통의 사람들이 돈을 받는 것은 사건에 자신이 있을 때 한해서였지.”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어떤 체계이건 거기에는 일련의 흐름이 있기 마련이네. 그것이 아래로부터 올라온 것이건 위에서부터 내려가는 것이건 한번 그 흐름이 시작되면 개인은 아무도 거역하지 못해. 설령 그가 지휘하는 입장에 있을지라도. 그런데…… 그때는 황 장로의 무죄를 밀고 가는 것이 하나의 흐름이었지.”
“그렇다면 법은 왜 있습니까? 법관의 양심은?”
“그것들도 그 흐름을 거역하지 못하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예는 지극히 사소하고 상식적이어서 얼른 이해가 안 될 테지만, 조금만 기본적인 것으로 눈길을 돌리면 사태는 명백해지지. 나치의 법, 또는 스탈린이나 중남미의 법을 보게. 법조문에는 그 어느 것도 별 다른 문제가 없네. 아니, 오히려 그 시대 그 사회의 이상(理想)이 집약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지. 다른 것은 다만 그 적용을 결정하는 어떤 흐름뿐일세.”
“지나친 자기 비하 아닙니까? 그것으로 그 사건에 대한 빙장 어른의 결백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이 계통에서의 30년 가까운 내 공직 생활을 모독하지 말게.”
“그럼 그동안 수천 수백 건 처리하셨을 여러 사건 중에서 유독 이 일만은 10여 년이 넘도록 어떻게 그리 상세하게 기억하십니까?”
“그때 나는 어떤 중앙 부처의 요직에 내정되어 발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네. 그 사건을 손쉽게 그리고 빨리 처리하고 떠날 마음뿐이었지. 10여 년이 되어도 개운하지 못한 기억으로 그 사건이 남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 혹시 어떤 소홀함이 있었을는지도 모른다는 느낌 때문이네.”
“…….”
“부탁이 있네. 자넨 지금 완벽하게 그 사건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오산이야. 운 좋게 그 우물에서 문제의 곰방대를 찾아낸다 한들 그걸로 모든 게 해결될까? 그런 면에서 지난 10여 년간 연마될 대로 연마된 그들 부자로부터 자백과 다른 보강 증거를 얻어 낼 수 있을까? 다만 자네 자신이 상할 뿐이야. 더구나 자네를 도와 일할 사람들 중 몇몇은 그 일이 뒤집어지면 독직(瀆職)의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야.”
“…….”
“또 있네. 나는 이미 말한 대로 30년 가까운 세월을 이 계통에서 일했네. 지금은 그 정상(頂上)에 가까운 어떤 자리를 놓고 경합중이지. 그런데 자네가 하려는 일은 사건의 번복과는 상관없이, 내 경합자에게는 나를 공격할 좋은 자료가 되네. 이만 묻어 두게. 설령 그때 내 판단이 틀렸다 해도 흘러간 오류는 이미 되돌릴 수가 없어. 또 어쩌면 그것이 정의일 수도 없고…… 황 장로 부자가 무죄하다는 가정에서 지난 10여 년간 수없이 이루어진 갖가지 관계는 또 어쩌겠나? 그래도 이대로 묻어 둘 수는 없나?”
그러나 그와 같은 사태는 그의 사무실에서도 일어났다. 장인을 만나고 번민에 차 돌아온 그를 늙은 부친이 초췌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너에게 일러둘 게 있다.”
전에 없던 일이라 한만운은 대답 대신 멀거니 부친을 바라보았다.
“그때 황 장로 아들에게 윤 영감네 지게꼬리를 풀어 준 것은 나였다.”
실로 짐작조차 못 한 일이었다.
“대가로 무얼 받으셨습니까?”
“그때 돈으로 십만 원에 가깝던 빚을 탕감해 주었다.”
“아버님은 진작부터 아셨군요.”
“그렇다. 장로 어른이 법정에 서게 되면 나도 서야 한다.”
“돌아가십시오.”
“아비 구실은 제대로 못했다만 그래도 아비는 아비다 나를 봐서라도…… 황 장로의 일은 그대로 덮어 둬 다오.”
그렇게 보면 윤 영감의 약속은 처음부터 이행이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한만운이 여러 날 동안 고심한 흔적은 있었다. 그 자신의 요청에 의해 발부된 수색영장이 거의 일주일이나 그의 서랍 속에 들어 있었던 것도 그 한 예였다. 하지만 끝내 집행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서기를 불러 그 수색영장을 내어주며 말했다.
“필요 없게 됐어요. 적당히 처리하쇼.”
6
그 뒤 1년, 사법관 한만운의 생활은 겉으로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초조함과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그는 윤 영감을 만나 볼 수 있으면 지난 약속을 없던 것으로 하고 싶었다. 그 약속으로 얻게 된 모든 것 ― 그의 지식, 학력, 사회적 지위, 재산, 그 어떤 것도 그걸 위해서는 기꺼이 되돌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윤 영감은 왠지 오지 않았다. 영매(靈媒)를 대하는 심령학자처럼 그는 윤 영감의 사진을 잡고 수없이 말을 건넸지만 대답은 언제나 침묵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 윤 영감에 대한 안도와 비례해서 자기가 이미 얻은 것에 대한 애착이 완연히 되살아났을 무렵 느닷없이 마지막 밤이 왔다.
“이제 날이 다 되었네. 오늘 밤으로 황 장로의 공소시효는 만료됐어. 자, 약속대로 가세.”
그렇게 기다려도 오지 않던 윤 영감이 무슨 일인가로 서재에 나와 있던 그의 손을 잡으며 싸늘하게 내뱉은 말이었다. 그제야 윤 영감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알아챈 한만운은 갑작스러운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우선 옛 약속을 취소해 달라고 빌어 보았다. 소용이 없었다. 그다음은 간절하게 용서를 구해 보았다. 그러나 윤 영감은 여전히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몇 시간에 결친 읍소(泣訴)도 애원도 마찬가지였다.
“영감, 하지만 내 잘못만은 아니었단 말이오…….”
그것이 이 세상에서 그가 한 마지막 말이었다. 다음 순간 윤 영감의 세찬 끌어당김에 그의 영혼은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육신의 문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 일단 육신을 벗어난 후에도 이 세상에 대한 애착에서까지 자유롭지는 못했던 그의 영혼은,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얻어 떠날 때까지의 49일 동안 흐느낌과 탄식 속에 자신의 빈소가 있는 서재를 배회할 수밖에 없었다.
(1982년)
2016년 11월 29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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