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김지명|
대체불가 외
이야기는 번역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목소리 들리는 동안
방사형으로 엉킨 눈빛들이 거미집을 짓고 있다
민들레 총포가 날기 직전
손에 쥔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리기 직전
북쪽으로 두 손을 모은 목련꽃 몽우리
촛불 기도 같다
고 들려온다
학교 풍경을 잘라 내 앞에 펼치는 후배 목소리는
번역기를 돌린 것 같아 가볍게 통과할 수 있다
약간의 웃음으로 혼자가 되었다
목련이 그렇듯
매달리지 않을 곳엔 매달리지 않은
체면을 좋아하는 편이라
언어를 골라 쓰는 편이라
나는 표정을 흘리지 않는다
모임이 끝나고
번역을 안주 삼아 술자리 깊어지면
모자라는 안주가 필요한 법
나를 보는 듯 보지 않은 듯
사람이 미운 데 없으면 더 밉지 않냐?
선배의 한차례 웃자고 하는 말이 지나가고
창백한 웃음은 혼자가 되었다
주워 담을 말은 골라 주워 담고
어디서든 살아갈 줄 아는 배회형 거미같이
널직 널직 주변을 활용해 유려한 문장을 뽑아 쓰는
말이 서 말
대체불가 후배
마음대로 될 것 같아
납작납작해지다가
내 지원 신청서 파일이 누락되었다는 소문
나는 없는 사람이라는 말
세상은 눈에 잘 보이는 광고를 좋아해
임용 통지를 손에 쥔 후배는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만져지지 않는다고 했다
벚꽃이 진눈깨비로 흩날리는 날
살아있다는 것은 실은 아픔이 살아있다는 것
선량한 차별*은 지나가고
약간의 웃음으로 세상과 맞서려는
나는 아무에게도 번역되지 않는 혼자였다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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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훔친 사람들
눈에서 심장까지 거리를 재고 싶다면
노을 지는 스데롯 극장* 언덕으로 오세요
아침 식탁에서 기도한 한 소절이 살아와 움직이는 화면을 만날 수 있어요
언덕에는 앞사람 뒤통수 보지 않아도 될 의자가 있고
술과 안주로 환호할 준비가 필요해요
언덕 의자에 앉아 생의 첫 장면 혹은 마지막 장면을 볼지 모르는데
제의는 덕목이지요
불꽃에 펑- 하고 날아올라
잠시, 내가 되었다 내려오고
불꽃이 펑-하고 튈 때마다
젊어져
오십이었다가 삼십이었다가 어릴 적 기분이 되는 걸까
이국의 크리스마스 전날 폭죽놀이 아니에요
여의도 불꽃 축제 폭죽놀이 아니에요
신의 입김으로 시작된 영화라 하네요
전능하신 신은 구경꾼의 심장 박동수를 알고 있을 텐데
저 앞 가자 지구의 사원 병원 소방서 놀이공원 극장 박물관 호텔 마지막 학교 위로
쿵, 하는 폭탄 소리에 박수로 환호하는 관객들
방방에서 뛰어오르듯 시원한 가슴을 만지고
웃으며 쓰러지며 증오와 차별의 박수를 언덕에 묻으면
그만일까
신은 공중에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고르는 중일까
안방에서 24시간 걸프전 생중계를 감상하던 그날 이후
새로운 신을 언덕에서 감상하는
신스틸러들의
멋진 신세계
신은 두려움만이 우리를 가르친다고 하네요
*이스라엘 남부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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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명|2013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시집 『쇼펜하우어 필경사』. 『다들 컹컹 웃음을 짖었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