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인 설교를 보고 싶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에 대한 한림원의 평가 문장 중 "시적인 산문" 운운한 대목에 지펴 든 생각의 단편.
목사의 설교나 신부의 강론도 시적인 리듬과 운치가 살아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좌중을 은은한 감동의 침묵으로 잠재우고 심오한 신적 현존을 경험하도록 인도하기엔 200만의 힘세고 큰 집단 통성기도보다 그런 설교가 더 효과적이다.
그러기 위해...
모든 것을 너무 다 한꺼번에 말해버리고 잡다하게 설명하며 큰소리로 윽박지르듯 설교하기보다 침묵과 명상의 여백을 시적으로 살려내면 좋겠다.
유치원생 설득하는 수준의 초보적인 알레고리 성서해석을 "영적인 해석"이라 포장하여 억지 권위를 꾸미거나, 느낌적 느낌 차원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것, 직관적으로 깃든 단편적 인식을 '하나님이 내게 이런 마음을 강렬하게 주셨다'고 인습적으로 뻥치는 버릇도 넘어섰으면 좋겠다. 기-승-전-할렐루야/아멘! 식의 자기도취적이고 천편일률적인 간증도 지양하는 게 좋겠다.
윷놀이에서 서너 번 윷이나 모가 연속으로 나올 확률이 희박해도 불가능하지 않고 더러 실현되는 법인데 이런 우연의 현상에 신비의 연막을 치며 하나님의 뜻 운운하는 허풍과 과장을 좋은 신앙인 양 선전하는 레토릭도 극복하면 좋겠다.
예수의 비유와 어록은 말할 것도 없고 성서에는 시적인 산문이 풍성하다. 심지어 숱한 갈등상황에서 수시로 논쟁과 변증을 펼쳐야 했던 사도 바울마저도 빌립보서 2장과 고린도전서 13장을 비롯해 곳곳에 숨구멍처럼 운문체의 찬송시를 담아냈는데 그것을 강파른 교리와 건조한 신학으로 뒤집어버리는 게 설교자의 근성이라면 이런 젬병이 따로 없다.
이런 병통을 넘어 그 대신...
이 시대의 설교가 일상의 소박한 경험과 진지한 관찰, 타인의 고통과 만물의 신음에 공명하면서 나즈막한 음조로, 서툰 언변이라도 조리 있게, 그러나 사람살이의 모호한 층층켜켜를 넉넉하게 품은 심성을 극진하게 우려내 무한과 영원의 유일한 기표인 하나님의 심연으로 청중을 안내하는 설교, 시대 제약적 한계 내에서 고뇌하되 애써 싸워 이뤄내야 할 자유와 평등, 공의와 평화의 보편타당한 가치와 의미를 전파하는 설교로 거듭나길 기대해본다.
시적인 설교를 하려면 시를 많이 읽고 분석도 해보면서 비평적 감식안을 키워야 한다. 문학소녀풍의 센티멘탈리즘을 넘어 좋은 시와 뛰어난 시, 졸작과 평균작을 구별하는 안목도 길러야 한다. 언젠가 돌산도 갈릴리교회 김순현 목사님의 서재를 방문했는데 서재 한 면이 시집으로 1천 권도 넘게 빼곡히 채워진 걸 보고 김 목사님의 설교 영성의 수준과, 날마다 교회 앞 정원을 가꾸며 사시사철 수백종 꽃을 피워내는 그분의 신학적 미학의 속살을 가늠해본 적이 있다.
시적인 설교,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 차정식 교수 (페이스북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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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에 절망
뛰어난 글 솜씨 부럽다. 시 같은 말과 시 같은 글 쓰는 분들이 부럽기만 하다. 따라 해도 안될 것을 알기에, 나는 포기했다.
내 글은 무미건조 자체다. 글과 말을 정확히 하는 김상봉 교수님, 시인처럼 단어를 고르는 차정식 교수님, 부드럽게 뜻을 펼치는 백승종 교수님, 평범한 말속에 정확함을 담은 양희삼 목사님 등 내게 글과 말의 스승이시다.
읽고픈 책 많아도 참고 참는다. 자제력 없는 나는 참아야 한다. 해야 할 일 위해 하고픈 일 삼가야 한다. 내 그릇대로 옹졸하게 사는 수밖에...
- 김근수 선생 (제주도. 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