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은 삼한의 정통성을 이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대한(大韓帝國)이라 반포하고 주로 경운궁 경(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에 머물렀으며, 순종은 즉위한 다음 창덕궁에 거처하였습니다.
일제는 주인 없는 경복궁의 부지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탈취하고, 경복궁의 많은 전각들을 헐어서 팔아버렸는데, 4,000여 칸이 훼멸되었다고 합니다. 경복궁 훼절의 결정판은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의 흥례문과 좌우 행각 등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은 것입니다. 광화문의 좌향도 관악산을 향하던 것을 조선신궁이 들어선 목멱산을 바라보도록 동쪽으로 조금 틀어놓았습니다. 2001년 옛 조선총독부 청사가 헐리고 흥례문 일원을 복원할 때, 광화문도 목재로 원되고 본래의 좌향을 찾았습니다.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
궁궐은 그 용도에 따라 한 나라의 법통을 잇는 법궁法宮, 임금이 통치행위를 하던 정궁正宮, 화재와 변란 등 변고가 생겼을 때 옮겨가는 이궁離宮, 능 행차, 피난, 피접을 가는 과정에서 묵는 행궁行宮, 특별한 목적으로 지은 별궁별ㅎ別宮으로 나뉩니다.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고, 대한제국의 법궁은 경운궁입니다. 정궁은 임진왜란 전까지는 경복궁이고, 그 이후는 창덕궁입니다. 경희궁과 선조가 몽진에서 돌아온 뒤에 머문 경운궁은 이궁입니다. 행궁으로는 사근 행궁, 북한산성 행궁, 남한산성 행궁, 화성 행궁, 온양 행궁 등이 있습니다. 상왕인 태종을 위해 세종이 세운 수강궁과 그 수강궁 터에 할머니, 어머니, 작은어머니 세 분을 모시기 위해 성종이 지은 창경궁은 별궁입니다.
조선 건국 초기에 경복궁과 창덕궁을 함께 축성하여 두 궁궐이 시기별로 정궁의 역할을 달리 하였지만, 법궁의 위치는 여전히 경복궁의 몫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의 전범典範인 주례周禮에 맞게 경복궁을 축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