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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역사속 그녀는 과연 어떻게 몽골로 갔을까? |
기황후를 알기전에 잠시 역사의 뒤로 돌아가야 한다. 몽골제국의 칭기즈칸은 알다시피 몽골을 인류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갖게 하고 죽은 희대의 정복자였다. 닥치는대로 이웃 나라를 정복해나가던 몽골은 중국 대륙까지 여지 없이 무너트리며 대제국을 건설했으며 몽골은 고려에 무려 7번이나 그 공격을 감행한다.
고려는 강화도로 조정을 옮기면서까지 끈질기게 30년간 몽골에 저항을 했지만 결국 몽골에게 항복을 하고 만다. 하지만 끈질긴 저항은 몽골로부터 다른 문명처럼 완전히 복속해 소멸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독립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와 같은 100년의 치욕적인 주권 간섭 속으로 들어간다. (칭기즈칸이 죽고 그의 아들 쿠빌라이칸이 몽골의 수도를 지금의 베이징으로 옮기고 국호를 원나라를 고치고 황제가 된다. 고려 역시 칭기즈칸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은 것은 아니다.)
이후 고려는 수많은 왕권 침탈은 물론 태자들은 꼭 원나라 수도로 볼모처럼 잡혀가야 했다. 이뿐 아니라 백성은 더심했다. 원나라의 정복전쟁을 위해 수많은 공물을 강탈 당했고 가장 충격적인 것은 어마어마한 사람들을 매년 원나라로 가야만 했는데 특히 군인이나 원나라에 부족한 여성들을 착출해갔다. 이를 공녀라고 불렀으며 이들은 원나라 고위 관직인들의 첩이되거나 그대로 팔려나가 기생이 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바로 기황후가 이 공녀 출신으로 원나라의 궁녀가 된다.
MBC 신돈에서 나온 기황후.. 딱 봐도 마녀의 느낌이.. |
사실 기황후가 원나라 궁녀로 들어가기까지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의 도움이 컸는데 이 고용보는 고려 출신으로서 원나라가 자신들이 지배하던 한족이 관직에 들어오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썼던 고려 출신 환관이었다. 몽골인들은 한족이 들어오는 것을 막다보니 그 숫자는 부족하고 학식이 있던 고려인을 많이 썼던 것이다.
여튼간에 머리 좋은 고용보는 일부러 기황후를 당시 원나라 황제였던 순제의 곁에 배치 했고 고려에 귀양 갔던 적이 있던 원나라 황제 순제는 고려여인 기황후에게 금방 빠져들고 만다. 하지만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했던가? 당시 순제의 제1황후였던 타나시리는 순제가 황제가 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정적 집안의 딸이었을 뿐 아니라 순제와의 사이도 좋지 않아 순제의 총애를 받는 기황후를 곱게 보지 않았다. 그 질투심에 기황후에게 채찍질은 물론 인두로 살을 지질 정도였다고 하니 참으로 무서운 몽골여자였다.
그리고 결국 기황후가 순제의 총애를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 타나시리 가문에서 모반을 일으켰고 곧 실패로 돌아가게 되면서 순제는 타나시리를 포함해 그 가문을 싹 쓸어버린다.
MBC 기황후에서 기황후 역을 맡은 하지원 |
모반사건 이후 순제는 기황후를 1황후자리에 앉히고 싶어했으나 당시 몽골인이 아니면 황후가 될 수없다는 법을 들어 신하들이 반대했기에 기황후를 1황후자리에 올리는 것은 잠시 미뤄두었다. 하지만 순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기황후에게 이제 1황후자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기황후는 순제의 총애를 바탕으로 조정의 권세를 잡기 시작했는데 자신을 이 자리까지 이끌어 온 고용보를 황실의 재정을 맡아보는 자리에 두어 그 자금을 바탕으로 조정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이후 기황후는 순제를 압박하여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의 자리에 올리고 같은 고향출신인 박불화를 군사책임자로 삼아 군사권도 장악했다. 기황후의 권세는 나날이 높아져 몽골에서 오히려 고려의 풍속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고려양이라고 불렀다. 전해진 바로는 기황후가 전파한 고려 양식이 원나라 고위층으로 침투되면서 원나라 고위층들은 더 많은 고려 여자를 원했지만 나중에 기황후가 공녀제도를 금한다고 한다.
MBC는 이 부분에서 모든 역경을 뿌리치고 원나라의 황후가 되어 고려인들로 당시 세계 최고의 강대국 원나라의 조정을 채우고 고려의 문화를 원나라에 전파 했다는데 그녀를 의인으로 생각 하는 것 같으나... 이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였지 절대 자신의 조국 고려를 위했던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후에 나온다.
기황후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
여튼 기황후가 원나라를 장악하자 덩달아 득을 본 것은 고려에서 그녀를 보낸 그녀의 가족들이었다. 특히 기황후의 오빠 기철과 기원에게 원나라는 최고 황후의 오빠로서 참지정사와 한림학사라는 공직을 주었고 고려에서 역시 그들을 부원군과 덕양군에 임명하며 왕족아닌 왕족의 대우를 했다. 당시 기씨집안은 고려 최고의 세도 가문으로서 고려 왕실을 좌지우지 했으며 기황후 역시 자신이 마치 고려의 왕인 것 처럼 행세하며 고려를 흔들었다.
더군다나 당시 기철과 기원은 충혜왕(주진모)이라는 고려의 최대 쓰레기 왕이 집권할때였기 때문에 그들을 제어 할 자는 아무도 없었고 남의 토지를 빼았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급급했다. 덕분에 당시 고려의 백성들은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으며 아무런 희망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충혜왕이 죽고 충목왕과 충정왕 마저 몇년을 살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 뒤 원나라의 고려 내정간섭을 용서하지 않고 반원정책을 쓴 공민왕이 왕위에 오른 후 누이의 권세와 원나라를 업고 설치던 기철 등의 친원세력을 섬멸하며 그의 가문도 끝이 난다. 여기서 기황후는 자신의 가문에 대한 복수를 하고자 원나라 군대를 보내 고려를 치지만 최영장군의 활약으로 원나라 군대는 패해 도망가게 된다.
자신의 나라를 타국의 군대를 이끌고 쳤던 기황후를 ... MBC에서는 희대의 영웅적인 여인으로 표현하려 한다...
기황후. 영원한 권력은 없다. |
기황후는 자신의 아들을 황제에 앉히기 위해 자신을 그토록 총애했던 순제를 황위를 물러내길 강권했고 이를 거부한 순제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원나라 조정은 황제파와 황후파의 싸움으로 엎치락 뒤치락 했고 당시 원나라 지배계급이었던 몽골족 보다 월등히 그 숫자가 많은 한족의 불만은 커질대로 커져갔다.
기황후는 1황후였던 바얀후투그가 죽자 자신이 1황후에 결국 오르며 그 권력의 정점을 찍었으나 한족들의 도적집단인 홍건적이 나라 곳곳에 창궐하면서 원나라 황실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어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이끄는 대군이 원나라의 수도를 점령하자 원나라 황실은 피난에 피난을 거듭했고 이후 기황후의 모습은 역사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고려로 돌아와 우리나라 지금의 연천에 묻혔다는 소문은 있으나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찾을 수 없다.
이제 지켜보자. 기황후의 인생은 물론 드라마나 영화에 쓰여도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파란만장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다. 사실 안에 이야기를 넣어 만드는 수준을 벗어나서 그 사실 마저 바꿔버린다면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기황후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하지원이 연기 했던 기황후를 지지할 것이다. 그녀의 가족들이 고려에 했던 행동과 적국의 군대를 등에 업고 자신의 조국을 공격했던 기황후는 우리 기억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단지 고려양이라고 해서 몽골에 우리 문화를 유행시켰고 공녀를 금지시킨 ... 그녀가 했던 이롭다 하는 사실 밖에는 남지 않을 것이 뻔하다. 더군다나 고려 왕조 최대의 쓰레기 패륜아 충혜왕(주진모)이 남자주인공을 맡으며 기황후와의 사랑을 논한다고 하는데..... 이 역시 말도 안되는 역사 왜곡이다... 드라마이기 이전에 역사는 역사다. 역사가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지 드라마가 역사를 마음대로 바꾸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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