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7월 초에 공화 정부 당국은 호세 안토니오를 알리칸테 감옥으로 이송했다. 호세 안토니오에 대한 감시는 매우 느슨해서 마얄데 백작이 면회실에서 그에게 권총을 전달할 정도였다. 팔랑헤당원들이 호세 안토니오를 구출하려는 극적인 계획을 반란 당일과 그 다음날 두 차례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팔랑헤당원들이 거사 도중에 돌격대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구출 팀 3명이 총격전을 벌이다 사살되었다. 그 후로도 그를 구출하려는 계획이 그해 10월 전함 도이칠란트호에서 논의되었으나 독일인 함대 사령관 칼스 제독과 독일 외무부는 이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또 한 차례 실패로 끝난 프로젝트는 독일 어뢰정 일티스(Iltis)호가 연루되어 있었다. 구출 시도가 한 차례 더 있었으나 이번에는 프랑코 장군이 카리스마 넘치는 강력한 경쟁자의 등장을 원치 않아서 좌절되었다고 한다.
독일 어뢰정 일티스 호
호세 안토니오와 동생인 미겔 안토니오를 재판에 회부하는 절차가 10월 3일 알리칸테 인민 재판소에서 열렸다. 두 사람에게는 공화국 전복 음모와 군사 반란 혐의가 적용되었다. 11월 16일에 재판이 시작되었는데, 호세 안토니오는 그 자신과 동생, 제수인 마르가리타 라리오스(Margarita Larios)를 변호할 기회를 얻었다. 예전에 법을 공부한 적이 있었던 그는 인상적인 변론서를 작성할 수 있었는데, 호세 안토니오는 자신이 사형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판사들의 자비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낮추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인생은 파티가 끝날 무렵에 발사하는 불꽃놀이가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동생과 제수의 형량을 낮추는 데는 성공했다.
수감 중이던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
호세 안토니오의 처형은 11월 20일, 그날 오전에 열릴 예정이었던 각료회의에서 종신령으로 형량을 낮추지 않을까 염려한 지역 정부의 주도로 신속하게 집행되었다. 이제 팔랑헤당은 위대한 순교자를 얻었다. 그러나 당은 카리스마 넘치는 강력한 지도자를 잃었는데, 프랑코에게는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프랑코는 공화국의 운명이 거의 결정되는 2년 뒤까지 호세 안토니오의 처형에 관한 뉴스를 통제하고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죽은 경쟁자를 시샘하기에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어서 후에 호세 안토니오를 숭배하는 풍조가 생겨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의 장례식
여기에서 국민 진영 스페인의 군사적 체계 이면에 숨어 있는 경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반란을 주도한 장군들은 수출을 통해 경화(硬貨)를 벌어들임으로써 전쟁 비용을 조달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안달루시아에서 케이포 데 야노는 군인이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능력있는 사업가적 자질을 보여주었다. 케이포 데 야노는 밀수, 사기, 자본 수출을 중죄로 다스렸다. 셰리주, 올리브유, 감귤류 수출업자 같은 외환 취득자들에게는 최고의 우선권을 주었으며, 또한 리스본의 살라자르 정부와 무역 협상을 체결하기도 했다. 수출업자들은 파운드화나 달러화로 들여오는 수납금 전체를 3일 내로 군 당국에 넘겨야 했다. 그러나 중요한 허가권, 독점권, 상업상의 권리 수여는 부패와 폭리를 낳았고, 그것은 점차 국민 진영 스페인 전체의 문제로 확산되었다. 눈치 빠른 사람들에게는 국민 진영에 기부하는 것이 유망한 투자였다. 동시에 자선사업이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성직자, 전쟁미망인, 미래를 생각하는 야심만만한 민간인은 여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한편 거리에서 확성기들이 연일 폭력적인 군대 행진곡인 <죽음의 연인> 같은 음악을 들려주었다.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매일 저녁 ‘나팔수’가 마이크를 통해 지휘 본부로부터 하달되어 내려오는 총통(프랑코)의 일일 지시 사항을 발표했다. 이런 호전적인 분위기에서 도덕적 용기의 표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주목할 만한 행동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은 전쟁에서 강조한 육체적 용맹으로 더욱 두드러진 것이 되었다. 그해 10월 12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기념일에 즈음하여 ‘스페인 종족 축제’가 살라망카 대학에서 열렸다. 거기 모인 청중은 지역 팔랑헤당 다수를 포함하여 대부분 국민 진영을 지지하는 지역 유지들이었다. 단상 위에 자리 잡은 유지들 중에는 프랑코의 아내, 교구민에게 보내는 교서를 발표한 바 있는 살라망카의 주교, 외인구단의 창시자 미얀 아스트라이 장군, 바스크 출신의 철학자이며 대학 학장으로 재직 중이던 미겔 데 우나무노 등이 있었다. 우나무노는 예전에 공화 정부에 크게 실망했던터라 처음에는 국민 진영의 반란에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살라망카 시에서 악명 높은 도발 소령의 주도로 자행된 학살 행위와 자신의 친구들인 살라망카 시장 카스토 프리에토(Casto Prieto), 그라나다 대학 아랍어와 히브리어 교수 살바도르 빌라(Salvador Vila), 가르시아 로르카의 피살을 좌시할 수만은 없었다.
미얀 아스트라이
20세기 스페인 문학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미겔 데 우나무노. 스페인 내전 당시 살라망카 대학에 재직 중이던 우나무노는 국민 진영 지지자였음에도 공개석상에서 팔랑헤당과 반란군을 비판했다. 결국 그는 이 일로 가택 연금을 당했고 그해 말 사망헀다.
카스토 프리에토
살바도르 빌라
의식이 시작되자마자 프란시스코 말도나도(Francisco Maldonado) 교수가 카탈루냐와 바스크의 민족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그것이 ‘국가의 암 덩어리’이기 때문에 파시즘이라는 매스로 도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때 식장 뒤에서 누군가가 “죽음 만세(Viva la muertte)!”라는 군단 전투 구호를 큰 소리로 외쳤다. 전쟁의 망령을 한쪽 팔과 한쪽 눈으로만 지켜보아야 했던 미얀 아스트라이 장군이 일어서더니 같은 구호를 재차 외쳤다. 이어 팔랑헤당원들이 프랑코의 아내가 앉은 자리 바로 위에 걸려 있는 프랑코 장군의 초상화를 향하여 일제히 팔을 올리고 파시스트식 경례를 하면서 “만세(Viva)!"하고 외쳤다.
이어 우나무노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음이 잦아들었다. 그의 조용한 음성은 이전의 소음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여러분들은 모두 제가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제가 누군지도 알고 있고, 제가 가만히 침묵한 채 앉아 있지 못할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침묵은 때로 거짓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침묵이 묵인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도나도 교수님의 연설에 대해 한마디 하겠습니다. 바스크인과 카탈루냐인들을 욕하는 교수님의 갑작스러운 연설에 담겨 있는 모욕적 언사는 털어버립시다. 아시다시피 저는 빌바오오에서 태어났습니다. 여기 계신 주교님은 그분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카탈루냐인입니다. 방금 저는 “죽음 만세!”라는 시체 애호적이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오침을 들었습니다. 평생을 역설에 과해 얘기하며 살아온 저는 그 방면의 전문가로서 이 기이한 역설이 저에게 혐오감을 주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얀 아스트라이 장군께서는 불구의 몸이십니다. 아무런 저의 없이 말하건대 그는 전쟁 불구자입니다. 그는 말하자면 세르반테스 같은 사람입니다.
불행히도 지금 스페인에는 너무나 많은 불구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지 않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불구자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미얀 아스트라이 장군께서 대중 심리의 패턴을 그대로 따라하시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픕니다. 세르반테스의 위대한 정신을 갖지 못한 불구자는 그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불구를 만들어내는 일에서 불길한 위안을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얀 아스트라이 장군께서는 새로운 스페인을 창조하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가 추구하고 있는 창조는 그 자신의 이미지와 그 자신의 외관을 닮은 부정적인 창조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채 분명히 한 것처럼 스페인을 불구로 만들려고 합니다.
미얀 아스트라이 장군은 우나무노의 연설을 들으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를 더는 억제할 수 없었다. 장군은 단지 “지식인에게 죽음을! 죽음 만세!”라고 더 큰 소리로 외칠 뿐이었다. 팔랑헤당원들은 그 외침을 반복해서 따라했고, 군 장교들은 권총을 빼들기 시작했다. 장군의 호위병들은 실제로 우나무노의 머리에 소총을 겨누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것이 우나무노의 저항의 외침을 막지는 못했다.
이곳은 지성의 성전이고, 저는 이 성전의 고위 사제입니다. 이 성전을 모독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당신들입니다. 당신들은 야만적인 힘을 차고 넘치도록 가지고 있으므로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누군가를 설득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설득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 당신들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의 투쟁에는 이성도 정당성도 없습니다. 제가 당신들에게 스페인을 생각하라고 권해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우나무노는 연설을 잠시 멈추고 두 팔을 옆으로 떨어뜨렸다. 그는 체념한 듯 조용한 목소리로 “이상입니다”라는 말로 연설을 마쳤다. 프랑코의 아내가 그곳에 있었던 덕분에 우나무노는 현장에서 험한 꼴을 당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일 그녀의 남편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더라면 프랑코는 우나무노 살해를 결코 막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에도 우나무노가 총살을 당하지 않은 것은 그가 국제적으로 저명한 철학자였다는 것과 로르카의 피살이 해외에서 불러일으킨 반발 때문이었다. 우나무노가 한 연설의 정확한 내용은 공표되지 않았다. 살라망카의 신문들은 다음날 다른 사람들의 연설은 다 실었지만 우나무노의 연설은 싣지 않았다. 그러나 우나무노는 그 일이 있고 나서 약 10주 후에 자신이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로부터 ‘적색분자’ 또는 ‘반역자’라는 저주에 찬 비난을 듣고, 깊은 상심에 빠진 채 눈을 감았다.
첫댓글 지식인들에 대한 탄압이 상당했군요 반대를 용납안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