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평화봉사단
세차장 관리 일을 1년 동안 했을 때, 성호가 학교에 평화봉사단 세미나가 있으니까 관심 있으면 가보라고 했다. 평화봉사단은 개발도상국의 교육, 농업, 무역, 기술의 향상, 위생상태의 개선 등을 목적으로, 미국정부가 청년 중심의 봉사자를 훈련, 파견하는 단체이다. 활동 목표는 봉사를 필요로 하는 나라의 사람들을 만나서 돕는 것, 봉사를 통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에 대한 미국인의 이해를 증진하는 것이다. 평화봉사 단원은 대부분 대학 졸업생 또는 재학 중인 자원봉사자로, 교육, 농업기술, 지역개발, 공중위생, 가내공업 등의 분야에서 현지인과 생활을 같이 하면서 활동한다. 또한 봉사자는 그 나라의 말을 쓰며, 그 나라 사람들의 문화와 관습에 적응해야 한다. 외국으로 가게 되면 단원은 그곳 국민들의 생활과 비슷한 수준으로 살아야 한다. 1961년 3월 1일 공식 출범한 이후 50년간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139개국에서 연인원 20만 명이 참여 했다. 미국 평화봉사단이 한국에 파견된 기간은 1966년부터 1981년까지였고 연인원은 2천여 명이었다. 이 중에는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미국대사, 크리스토퍼 힐 전 미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 등이 포함돼 있다. 캐슬린 스티븐스 대사는 1975년부터 2년 동안 충청남도 예산에서 영어교사로 활동한 바 있다.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등 미국의 한국학자들 중 상당수가 그 일원이었고 5.18당시 참상을 해외로 전한 데이비드 돌린저도 있었다. 평화봉사단의 활동 초기에는 해외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미국 정부의 첨병이자 스파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구소련이 해체한 직후에 자본주의를 배우겠다며 단원들을 받아들였던 러시아는 스파이 행위를 이유로 입국을 거부했었다. 하지만 미국 평화봉사단체는 미 정부와 거리를 뒀고 미국의 이미지를 수출하긴 하지만 미국 정부의 어떤 메시지도 전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학교 내 강당에서 평화봉사단 세미나가 있었다. 200여명의 학생이 참석했었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가는 것 보다는 국가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여행을 간다면 비행기 티켓과 숙식에 돈이 들지 않고, 경력을 쌓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파견지 중에 근래에 관심을 갖고 있던 한국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평화봉사단 지원서를 작성했다. 물론 희망 지역은 한국으로 했다. 서류가 통과되고 일주일 후에 평화봉사단 면접을 봤다. 면접관은 프레드릭에게 왜 한국을 지원했는지 이유를 물었다. 프레드릭은 한국친구 성호를 사귀게 된 계기로 한국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 스스로 도서관에 가서 한국에 관한 여러 책을 봤었고, 한국 전통음악 테이프까지 구해서 들었던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면접관 중에 한국인이 있었는데, 프레드릭의 대답에 흡족한 미소를 보였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중남미 지역을 많이 지원하지만 한국은 지원자가 별로 없어서 경쟁률이 낮았다. 프레드릭은 한국으로 파견 갈 수 있었다. 한국으로의 파견으로 결정된 이후에 프레드릭은 빅터에게 전화를 했다. 빅터는 한국에서의 경험이 나중에 요원으로써 근무할 때에 도움이 될 거라 하면서 몸 건강히 잘 다녀오라고 말했다. 프레드릭은 대학 졸업 후에 꼭 국가안전 보장국의 요원으로써 근무해야겠다고 결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NSA의 고위간부인 빅터에게 자신의 상황을 얘기는 해놔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요 정부기관의 고위 공무원이라면 보통사람은 접할 수 없는 인맥을 갖고 있을 것이고 사람일은 어떻게 풀릴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현지인과의 생활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 한국어 공부를 해야 했다. 전라북도 전주에 있는 중학교의 영어 교사로 파견가게 됐다. 전주시내의 큰 한옥이 있는 집에 평화봉사단원 4명과 같이 생활했다. 당시에는 영어로 원활히 소통할 수 있는 한국인이 드물었기 때문에, 프레드릭은 의사소통의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빨리 한국어를 익혀야 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빅터로부터 한국의 경제상황과 전망에 대한 보고서 작성을 요청받았다. 국가안전보장국에서 한국의 경제 상황에까지 관심을 갖는 게 의아했지만, 전공이 경영학과이고 프레드릭 자신도 향후에 한국의 경제가 어떻게 나아가게 될지 궁금했었다. 한 달 동안 한국의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빅터에게 보낼 한국 경제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서 보냈다. 한국어 실력을 늘리기 위해 언어교환을 계획했다. 영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한국인을 찾기 위해 전주의 전북대학교의 써클룸이 모여 있는 건물 내부의 게시판에 영어, 한국어 언어 교환하고 싶은 사람을 모집한다고 프레드릭이 머물고 있는 집의 전화번호를 남겼다. 일주일이 지나자 3명의 전북대 학생들에게 연락이 와서, 프레드릭까지 4명의 그룹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모임을 만들었다. 여학생 2명과 남학생 1명이었다. 모임은 45분은 영어로 대화하고 45분은 한국말로 대화를 하는 방식으로 했다. 딱히 주제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만날 때 마다 서로 대화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여러 주제에 대해 얘기를 할 수 있었다. 역사, 종교, 교육, 가족관계, 연애, 영화 등에 대한 대화를 하면서 한국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었고 한국어 실력도 늘릴 수 있었다. 차츰 한국 친구들도 생기고 주말에는 그들과 어울려 대학교정의 잔디밭에서 막걸리를 마시기도 하고, 당구장에서 내기 당구도 쳤다. 그렇게 별 탈 없이 2년간의 한국에서의 평화봉사단원 파견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