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의사가 왔다. 내 주치의도 집도의도 아닌 그녀는 가슴을 열고 상처를 살피더니 소독을 하고 붕대를
갈아주었다. 드레싱을 한 것이었다. 그 덕분에 내가 가슴에 무엇을 두르고 있는지 알았다. 유방수술 환자용
특수 브래지어로 한쪽 어깨가 없었다. 앞쪽에 벨크로를 붙여 열기 쉽게 해놓았다. 드레싱을 하고 난
그녀가 옆에 놓고간 예전 붕대는 몹시 두꺼웠다. 그 붕대는 가제 가운데 솜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두께가
이센티가 넘어보였다. 그 두께의 솜을 반으로 접어 상처에 댄 다음 특수 브래지어를 채워놓았던 것이다.
아플 때는 상처를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은 법이다. 어지간히 나은 다음이라야 그 상처를 들여다볼 여유가
생기는 것, 그 때만 해도 내 가슴에 난 상처가 얼마나 크고 긴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훗날, 퇴원하고 나서도 한참뒤, 의사가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주사를 가슴에 꽂아 물을 두 번이나 뽑아 낸
다음, 빨려나가는 느낌이 환히 올 정도로 큰 그 주사를 가슴에 넣어 뽑아 낸 다음 반창고를 붙이고나서
샤워를 해도 된다고 허락했을때 욕실에서 바라본 내 가슴 상처는 충격적이었다. 사라진 가슴에 십오센티는
될법한 수술 흔적이 대각선으로 길게 그어져 있었던 것이다. 배액줄을 꽂았던 구멍 흔적은 시퍼랬다.
가슴속에 사리고 있던 배액줄은 어찌나 긴지 빼도빼도 한없이 나왔다. 하여간 상처를 보지 않았던 것은
당시에는 고개를 수그리기도 힘들었지만 허리를 똑바로 펼 수도 없었기 때문에 볼 수 없기도 했다. 목을
돌리거나 고개를 수그리는 동작 하나에도 가슴 근육을 쓴다는 것을 누가 알까. 팔을 사용하는데도 가슴
근육이 필요하다. 당시 내 팔은 겨우 벌어지기만 했다. 어깨 높이까지도 올라가지 않았다. 우리가 당연히
사용하는 모든 근육,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동작은 투쟁의 결과인 것을. 팔을 드는 동작 하나에도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지도 퇴원후 팔 운동을 하면서 알았다. 만세하는 동작을 하기까지 무려 몇주가
걸렸던 것이다. 그것도 무한한 고통을 참아가면서. 하지만 무엇보다도 두려웠다. 상처를 마주하기가 몹시
두려웠다. 보지 않으면 상처가 없을 것이라고, 보지 않으면 괜찮다고 믿는 어린아이처럼.
"이XX님, 3층 분만실로 가실게요."
간호사가 와서 쪽지를 건네준다. 저녁 늦은 시간, 9시가 가까웠는데 분만실이라니. 하여간 가라니까 간다.
입에는 가제를 물고 딸아이와 함께 간다. 3층에 내리니 분만실은 고요하기 짝이 없다. 입구로 들어서니 옆에
대기실이 있다. 작은 대기실에는 의자들이 놓여있고 저 안쪽으로 티브이가 놓여 있어 누군가 티브이를 보고
있는 중이다. 기다리는 보호자일까. 남자를 바라보면서 버튼을 눌러 문을 열었다. 들어가는 우리를 남자가
바라본다. 들어서니 오른쪽으로 방이 두개 있다. 작은 방은 신발을 갈아 신는 곳인듯 신발장이 놓인 방이
하나, 그 앞에는 슬리퍼가 그득하고 다른 하나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 왼쪽은 큰 방이 있어 그 안으로 여러가지
물품이 보인다. 저 안쪽에서 빛이 비쳐나온다.
"엄마. 여기 인터폰을 하라고 쓰여 있었어. 들어오는 게 아닌가봐. 나가서 인터폰을 해야 할 것 같아."
도로 나간다. 딸아이가 인터폰 수화기를 들고 벨을 누른다.
"누구세요."
"6층 간호사가 여기로 가라고 해서 왔어요. 여기서 드레싱을 해준다고 하는데요."
"6층 간호사가 가라고 했다고요? 확인해보고요."
기다린다. 한참을 기다린 다음에야 녹색 수술복을 입은 간호가가 나온다. 그녀가 문을 열어준다.
"보호자분은 여기 계세요."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간다. 기구가 잔뜩 놓인 넓은 공간을 지나 또 다른 공간으로 들어간다. 여기가 분만장인
모양이다.
"어? 안녕하세요. 수술 잘 되었죠?"
누군가 들어오면서 인사한다. 낯이 익다. 산부인과 외래 다닐 때 수술 일정을 잡아주던 바로 그 여의사다.
"어머. 기억하시네요. 수술 잘 받았어요. 오늘 드레싱 하러 왔어요."
"그래요. 어디 여기 올라와 누우세요."
옷을 갈아입고 수술대에 올라가 눕는다.
"흠. 수술 흔적이 작네요. 보통 십센티는 째기 마련인데."
"아, 조금만 째달라고 졸랐거든요. 칠센티만 째겠다고 약속하시더라구요."
"그래요? 근종이 십센티가 넘었는데 신경쓰셨구나. 간호사. 마땅한 크기의 반창고가 없는데 육층에 연락해서
반창고 좀 내려달라고 해요. 환자분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상처를 소독한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흠, 6층에서 반창고가 오기는 왔는데. 이건 너무 크네. 삼센티면 되는데 이건 육센티 넓이 반창고잖아. 외과에서는
이렇게 큰 반창고를 쓰나보지."
"글쎄, 아마 내가 살이 쪄서 거인이 되어서 큰 반창고를 쓰라고 내려보내준 거 아닐까요."
그녀가 웃는다.
"간호사. 이거 말고 다른 거 찾아봐. 우리 거 뭐 없어?"
나를 수술대위에 놓아둔 채 그녀는 여러 서랍을 뒤적인다.
"찾았어. 여기."
그녀가 상처위에 반창고를 붙인다.
"다 되었습니다. 다음 번엔 여기 내려오지 말고 가슴상처 드레싱할 때 한꺼번에 해달라고 하세요."
"네. 고맙습니다."
고요한, 몹시 고요한 분만실을 나선다. 산모의 신음소리가 들려와야 할 분만실이 이처럼 조용하다니. 입구를
나서니 딸아이가 일어서 다가온다. 순식간에 적막이 몰려든다. 낮에 그토록 붐비던 병원이다. 부산했던 만큼
인적이 끊어진 밤은 더 고요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대기의 낱장 하나하나가 적막에 잠겨있어 분만실 골목을
나서는 발자국 소리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병원에서는 온갖 일이 일어나므로 온갖 생각이 다 나기 마련이다. 인적 없어 으스스하게까지 느껴지는 삼층에서는
바람 한점 불어올 때마다 깜짝 놀란다. 황급히 엘리베이터를 탄다. 육층으로 올라오니 비로소 사람들 모습이
보이고 덩달아 훈기가 돈다. 삼층이나 육층이나 온도는 똑같을 터인데 약한 마음은 불안한 느낌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은 한없이 약한 인간이 아닌가. 주변상황에 따라 흔들리고 내 몸의 상처에 따라 흔들리고 생각에 따라
흔들리는....
올라와보니 옆자리 환자의 남편이 와 있다. 그도 와 있다.
"남편들이 뭔 고생이여. 여자들이 아프니 엄한 남편들이 고생하네."
제주도 할머니가 말한다. 안쓰러워하는 느낌이 배어나온다.
"그러게요. 남편들이 고생이네."
대장 용종 환자가 맞장구친다.
내 생각은 다르다.
남편들이 아프면 당연히 아내가 보살피지 않겠는가. 할머니는 자식들이 장성했으므로 며느리들의 보살핌을
받는다. 그 며느리들은 두 명 다 교사였다. 방학중이라서 간병이 가능했던 것인데. 그들이 교사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방학중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위암 환자는 거의 혼자다. 그녀의 남편은 매번
늦은 시각에 왔다가 잠시 있다가 갔다. 내 옆 유방암 환자의 남편도 매일 밤 왔다. 내 남편은 딸아이와 한번
교대했고 나중에는 동생과 한번 교대했다. 몹시 피곤했을 것이다. 그런 것을 보고 하는 소리였는데. 세대가
다르니 간병하는 사람도 다르다. 젊은 세대는 남편, 나이 든 세대는 자식들이 간병한다. 더 젊은 사람이라면
어머니가 간호할 것이다. 할머니는 간병이란 여자의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할머니가 다람환타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면 뭐라고 했을까. 병에 걸린 아내, 그녀는 수술 들어가기 전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한다.
"내똥 니가 받아내."
첫댓글 저도 그러네요.남편들이 아프면 아내들은 전력을 다해 매달려야 하고
남편들은 한번씩 시간 내어 들여다 보는게 대다수인데 주위에서 그걸 안되하다니 참내.
할머니라서 그러신 거지요. 어르신들이야 그 사고에 젖어 살아오셨는데 별 수 있나요.
솔직히 말하면 희야님은 남성에 대한 편향된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 같아요. 하긴 우리가 살아온 과정이 그러하기 때문에 달리 할 말은 없지만 좀 그래요. 아파 보면 우리의 아무리 하찮은 신체 부위라도 그 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새삼 깨닫게 되지요. 더구나 여성에게 있어서 가슴의 중요성이란 말할 수 없을 테지요.
ㅎㅎ 우리 역사와 제도를 살펴보다 보면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일례로 요즘 여성들이 아기를 안낳는 이유도 바로 그 제도 때문이거든요. 아기를 키우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고 있다 하더라도 지키지 않는 사주들 때문이고 자신만 편하고자 집안 일을 거의 하지 않는 남편들 때문이고 남편들에게 그 사고를 불어넣은 주변환경 때문이지요. 어디 그뿐일까요. 여성들도 그런 사고에서 빠져나와야. 남성 위주 사회는 당장은 남성들에게 좋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그 폐해가 드러나기 마련이지요. 서구 역시 강력한 남성위주 사회였지만 요즘 점차 전환되어가고 있는 것은 그 제도의 결점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
제 산행 친구들은 수술 부위야 어떠하건 삶에 감사하다가 시간들이 지나면 뱃살을 떼어 가슴 성형을 하며 좋아라하기도 합니다.희야님은 한가지 수술도 버거운데 두가지를 치르셨으니 몸과 맘 고생이 오죽하셨겠냐 싶네요.제 대학 동창이 수술 할수도 없는 곳의 말기에 발견된 환자인데 남편이 단 한번만 병실에서 잤다며 서운해 하였었어요.그런데 최근 그 남편이 전립선 암이라는데 친구가 남편더러 "쌤통이다"라고 말했다면서 밝게 웃더라고요.어쩌니 저쩌니 해도 아픈사람만 답답한 노릇입니다.
문화인류학자 누군가 이런 말을 했죠. [여성들이 수백만 년 간 모계사회의 수장으로 높은 지위를 누리다가 남성우위 세상으로 바뀌어 2쳔 년 정도 지났는데, 다시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 그런 경향이 농후하다. 남자 위주의 가부장제에 너무 시달려온 결과 아예 여자 아이를 낳지 않는 풍조로 수십 년간 지내온 것이다. 즉 여자 숫자를 확 줄이는 무언의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여자 숫자가 적어지면 여자가 우대받는 사회로의 회귀는 급속도로 빨라진다. 그 어떤 혁명보다도 무서운 혁명이다. 한 때 남녀 출생비가 126:100까지 간 적도 있다. 남성들이여! 지금이라도 정신차려라. 과도한 누림은 과도한 반발을 부르게 마련이다.]
여성들의 두뇌가 한수 위 인가 봅니다.^^
전 요즘 참 기분 좋습니다. 미나리 잘게 썰어 고추장 놓고 참기름 놓고, 계란후라이 한 개 놓고, 밥 비벼먹기를 좋아하는데, 오른팔을 수술해서 잘 못 비비니까 마눌님께서 아침마다 막 비벼줍니다. 아침마다 호강하고 있죠. 호호호. 난 비벼달라고 말한 적 없는데, 맨날 비벼 주니 밥맛이 아주 끝내주네욤.호호. 근데 이렇게 비벼주는 걸 꼭 남존여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눌 아프면 저도 얼마든지 비벼드리려고 맘 먹고 있습니다. 부부간에 남존여비 의식 자체가 필요 없는 게 아닐까효?? 비벼주고 싶은 맘이 절로 일어나지 않나효??
ㅎㅎㅎ비벼주고 싶습니다.
희야님. 남자들은 애초에 보호, 간호, 뭐 이런 단어 자체에 익숙하지 못한 것 같더군요. 오래전에 시아버지 뇌졸중으로 편찮으실 때 환자가 남자인데도 우리집 영감은 제가 아버님께 하는 일의 반도 못 해내더군요. 마음은 안 그렇겠지요?
어서 어서 이겨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