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부루나 칼럼 Ⅰ
말리부 개울가에서 금강경을 읽다
글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지난 일요일, 여남은 명의 길동무들과 나성의 말리부 크릭 주립공원을 다녀왔다. 길거리가 한적한 일요일 아침이라 우리 집에서 고속도로를 달려 한 시간이 조금 덜 걸렸다.
“주중에도 이렇게 차가 잘 빠진다면 좀 좋을까?”차만 탔다면 시시콜콜 교통 법규 지도에 열심인 옆자리의 아내가 오늘은 별로 몽매한 남편을 계몽시킬 건덕지가 없는지 이윽고 카톡 체크에 더 자주 눈을 돌린다. 프리웨이를 내려 굽이치는 산기슭 길로 접어드니 길가에 노란 들꽃의 무리가 붓질처럼 스쳐 간다.
드디어 공원 입구에 다다랐다. 하루 입장료가 15불인데 노인네라고 1불을 깎아 준다. 이제는 그런 게 별로 서운하지도 않고 반갑지도 않다.
말리부(Malibu)는 잘 알려진 동네 이름이다. 우선 부자가 많고 부자들의 전망 좋은 집이 많아서다. 지금도 백인이 절대다수다. 전형적인 바닷가 부촌 이미지인데 유명인사들의 저택과 별장이 많다고 하지만 내가 들어가 본 집도 없고 아는 명사의 이름도 없다. 처음부터 너무 그림의 떡이라서 그랬나? 그저 전에 태평양을 끼고 해안도로를 달리며 올려다봤을 때 한참 동안 그런 큰 집들이 언덕 위 숲에서 여기 저기 고개를 내밀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해안 산지의 반대편으로 파고 들었으니까 그저 인간이 별로 다치지 않은 자연 공원이 눈앞에 펼쳐질 뿐이었다.
미국은 어디나 으례 그렇듯이 이 동네도 본래 인디언 원주민이 살던 곳인데 공원 안 몇 군데 그 흔적이 있다고 안내문에 써 놓았다. 물론 지금은 원주민의 발뒤꿈치도 볼 수가 없다. 몇 군데 땅이름만 남긴 채.
말리부란 말도 본래는 여기 수천년 살아오던 추마시(Chumash) 인디언의 말로 ‘후말리오(Humaliwo)’라고 했던 것이 변한 건데 ‘물결 소리 세찬 곳’이란 뜻이란다. 그 밀려오는 물결 가운데 가장 세찬 것이 백인들의 물결이었고 그 다음은 무어지? 자본주의의 물결? 그 다음은?
1542년에 스페인 정복자가 배를 맨 기록이 있는데 그 후의 역사는 미국 서해안의 여느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게 야금야금 이른바 문명세계에 편입되었다. 그러다 근년에는 세찬 물결 대신 걸핏하면 세찬 불꽃이 피어올라 그 값나간다는 저택들을 홀라당 태우곤 하는데, 그래서 뉴스를 통해 한국에서도 그리 낯설지 않은 이름이 되었다. 그런데 몽땅 타 버린 집의 주인이 별로 울고불고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문화 차이도 있겠지만 실은 다들 보험 정도야 잘 들어 놓을 만치 넉넉해서, 설마 그럴리야 하겠냐만 속으로는 은근히 웃고 있다는 속설도 없지 않다더라.
서론이 길었는데, 미국 기준으로는 그리 넓은 것도 아니지만 1천만 평(1224 에이커, 33.24 평방 킬로)이 넘는 이 공원의 입구 근처(우리 고향 말로는 어디 '입새'에라고 한다)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조금 기다려 아홉 시가 다가오니 오늘을 같이 할 사람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낸다. 수십년 같은 모임을 해 온 사람도 있고 얼마 전에 알게 된 사람도 있다. 다 한국사람이고 다 부처님과 인연이 있다. 부부도 있고 혼자 온 사람도 있으며 사정이 있어 뜸하다가 오랜만에 온 한 사람은 한국에서 방문 온 아들을 데리고 와 인사를 시킨다. 지난 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제 어머니 자리를 채우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데 후생이 가외라, 아들이 아버지보다 키도 덩치도 더 크고 잘 생겼으며 말도 시원시원하고 예의도 바르다. 그 얼굴이며 옆모습에 아버지는 물론이요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이 어려 스친다. 곧 손자가 태어난다는 이 예비 할아버지는 흐뭇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렇게 한 쪽은 사라져 가고 다른 한 쪽은 돋아나 자라나는 것이 우리의 하루하루인가 보다.
귤이며 과자 같은 주전부리로 입가심을 한 후 길을 따라 우리는 출발하였다.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은 전에 혼자서 여기에 와서 무려 여섯 시간 동안이나 여러 갈래의 산책길(trail course) 가운데 하나를 골라 따라갔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되돌아왔다고 한다. 우리는 나이도 나이인지라 왕복 세 시간 남짓으로만 잡고 이야기 꽃을 피우거나 사진을 찍으며 느릿느릿 길을 걸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노란 들꽃으로 뒤덮인 언덕이요 산기슭이었다. 그 가운데 드문드문 서 있는 너도밤나무(Oak Tree)의 풍경이 미국스럽고 캘리포니아스러운데 날씨마저 알맞게 따스하고 시원해 이게 다 오늘 모임을 주선한 회장의 덕분이라고 덕담을 던졌다.
미국에 살면서부터 봄이면 온 산천을 휘덮는 이 꽃이 무엇인가 궁금했는데 물어보니 겨자꽃(Wild Mustard, Brassica Kaber)이라고 누가 일러준다. 겨자씨로 만드는 머스타드, 핫도그 먹기 전에 토마토 캐첩과 함께 찍찍 짜내 바르는 바로 그 소스 색깔이다. 캘리포니아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피는 꽃이란다. 마치 시래기 무우청 같은 검푸른 잎사귀 위로 쭈욱 꽃대가 뻗는데 이들의 군락을 멀리서 보면 마치 ‘폭삭 속았수다’에서 본 제주도 유채밭 같다.
우리는 내쳐 골짜기를 파고들었다. 길은 좁아지고 가끔 마주치는 다른 등산객들이 누구나 먼저 양보를 한다. 그들이 멈춰 서 있는 옆, 늙은 나무 둥치에는 기막히게 같은 색깔로 위장한 도마뱀이 납짝 붙어 숨을 죽이고 있다. 훤출하고 야릿야릿한 백인 소년, 소녀가 다른 곳에서보다 자주 보인다.
골짜기를 막은 호숫가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쉬다 다시 길을 나섰다. 팻말을 따라가니 큰 의무병 찝차 한 대가 길가에 버려져 있는데 앞 범퍼에 매시(MASH) 라고 쓰여 있었다. 미국 TV 연속극에 나온 그 매시다. 그러고보니 이 골짜기가 그 연속극 촬영지였나 보다.
조금 더 올라가니 그 당시 연속극의 배우들과 장면이 박힌 안내판이 있고 거의 다 찌그러진 작은 찝차와 좀 큰 트럭, 세계 중요 도시까지의 이정푯말, 그리고 그 응급구조 헬리콥터의 착륙지점을 주먹돌로 둘러 만든 큰 동그라미가 땅바닥에 남아 있다. 그 찌그러진 찝차에 들어가 앉아 사진에 찍히려니 바라보던 백인 아줌마가 거기서 오늘 아침에 뱀이 나왔다고 한다. 하기야 잠깐 세월에 이무기가 나와도 괜찮을 만치 오랜 세월처럼 삭아가는 것이 이런 철물인가 보다.
삐뚤빼뚤 여러 나무 팻말이 못 박혀 달린 이정표를 보니 서울까지의 거리가 34 마일에다 54 킬로다. 그렇다면 여기가 어디쯤일까? 동두천 근처? 아니면 의정부? 더 북방? 아무튼 여러 흉내로 시청자들의 눈속임(?)을 잘 하긴 했을 성싶은데, 그러나 헬리콥터가 날아 넘어오던 저 가까운 산봉우리는 너무 다르다. 둥그스럼하게 나이 든 한국의 봉우리가 아니고 삐죽빼죽 어리고 젊은 티가 나는 미국의 거친 산이다.
어쨌거나 CBS 방송에서 1972년부터 1983년까지 방영한 이 매시 (M*A*S*H, 4077th Mobile Army Surgical Hospital, 4077 육군 기동 외과 병원)는 많은 미국사람들에게 한국에 대한 중요한 인상 자료가 됐는데, 미국 노인들이 요즘 한국 방문을 하면서 인지부조화를 겪는 큰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 뿐만 아니다. 그 더빙한 연속극을 본 많은 한국사람들의 미국에 대한 인상자료가 됐을 법도 하다. 그것도 거의 좋은 쪽으로만. 내 머리 속에도 앨런 알다 라는 주인공 이름이라든지 서민적이고 선해 보이던 그 배우들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서로에게 원한이 없을지라도, 서로를 죽이고 죽임을 당하던 그 실재 현장의 비참함을 이 조촐하게 남겨진 촬영장에서 상상으로만 잡아내기는 어려웠다.
되돌아 내려오는 길목에 또 다른 안내판이 눈에 띄었다. 1968년에 나온 영화 ‘혹성 탈출(Planet of the Apes)’의 촬영지다.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올라갈 때는 못 보던 꽃 내려올 때 보았네’였다. 고국에서 학생 때 단체로 극장에서 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것이 혜택인지 폐해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우리는 할리우드의 그물에서 멀리 못 빠져나간 세대인 것 같은데, 그 원숭이들의 세계에도 우리처럼 악한 원숭이, 착한 원숭이가 섞여 있음은 하나의 일깨움이었던 것 같다.
그 뿐인가? 개울에 놓인 작은 알루미늄 다리를 건너며 누군가가 ‘콰이 강’의 다리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자갈길 양쪽에 엉킨 나무 둥치 중간에 떠내려가다 걸린 나뭇가지라든가 지푸라기 같은 것을 보고도 이게 무슨 홍수 영화의 한 장면은 아닐까 상상을 했으니까 말이다.
마침내 우리는 주차장에 있는 본대로 돌아와 낡고 두터운 나무 테이블에서 김밥과 떡으로 점심을 먹었다. 굵은 목재를 켜서 발처럼 가지런히 엮은 머리 위의 지붕이 햇볕을 반쯤 가려 주고 있었고 바람은 조금 서늘해져 옷을 껴입었다.
먹는 일을 마치자 우리는 다같이 조계종 교육원에서 만든 우리말 금강경을 읽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거룩한 비구 천 이백 오십 명과 함께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습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공양 때가 되어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걸식하고자 사위대성에 들어가셨습니다. 성안에서 차례로 걸식하신 후 본래의 처소로 돌아와 공양을 드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습니다.”
누구는 이 한 장면 묘사에 금강경 전체, 아니 팔만대장경 전체가 가름 된다고 한다.
아무튼 부처님은 자리에 앉으시고 우리는 긴 나무 테이블에 두 줄로 앉았다. 그리고 저 매시와 얽힌 죽음과 다침, 그리고 그 혹성에 굼실대던 검은 머리의 꾸부정했던 다른 중생들, 아, 그리고 오늘, 5.18의 피붙이마저 잊고 글줄을 따라 읽어 갔다.
(2025. 5.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