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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평민 의병장
글,편집: 묵은지
요즘 한일간에 뜬금없는 레이더 공방으로 상당히 우려스러울 정도의 군사,외교적 마찰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데 그 발단의 원인은 우리 해군함인 광개토대왕호가 일본 해상 초계기를 향하여 레이더 공격을 가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우리 군은 이에 즉각적으로 '도리어 일본의 초계기가 우리 함정에 접근하여 위협 비행을 했다'고 반박 성명을 내면서 양국간에 진위 공방을 펼쳤는데 이런 민감한 때에 일본은 또다시 해상 초계기를 우리 함정 바로 옆까지 접근하는 위협 비행을 시도해 이는 일본이 군사적 마찰을 유도하여 이슈화하려는 의도로 이들의 교활함을 의심케 만들었습니다. 일본은 북한과 중국의 위협을 핑계삼아 군비를 증강하면서 군사 대국을 향한 야욕을 채우고 있는 가운데 이러한 해상 도발을 자행해 군사적 위기감을 조성하여 이를 빌미로 자국민의 관심과 정치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은 물론 매년 늘려가는 자국의 방위비에 대한 비판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이렇게 일본은 매번 자신들의 이익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주변국들을 끌어들여 마찰을 일으키고 이를 이용하는 비열한 짓으로 일관하였으며 우리도 그동안 역사를 통해 알 수 있지만 이렇게 막되먹은 일본의 꼼수에 수없이 말려들어 고통을 당하며 지내온 것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명색이 한 나라의 대궐이라 하면 그 나라의 통치자이자 정신적인 지주인 임금이 머무는 곳으로 대궐은 백성들의 공경심과 자존심이 깃든 곳이라 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대궐을 지키는 사람은 간곳이 없었고 일본이란 나라의 칼잡이들이 조선의 대궐을 제집 드나들듯이 함부로 들이닥쳐 조선 백성들의 국모인 왕비를 궁중안 마당에 끌어내어 시녀들과 함께 칼로 무자비하게 죽이고 시신을 불태웠으니 그 사건이 바로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벌어진 '을미사변'입니다. 을미사변은 전무후무한 초유의 잔혹사건으로 조선 백성들에게는 도저히 이해못할 일본의 야만적인 행위로 분통터질 일이었지만 난세의 기로에 서있는 망국 조선을 그대로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으며 전후 사정이 어떻든 간에 나라가 얼마나 부실했으면 이런일이 버젓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라는 한심스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일본의 잔혹스런 짓이 빗어낸 참혹한 상황들이 생각하면 할수록 묵은지의 울화를 치밀어 오르게 합니다.
얼마전 묵은지는 모처럼 짬을 내어 말모이라는 영화를 관람하였는데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 내용을 잘 알겠지만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조선어학회(현 한글 학회 전신)의 역할과 활약상을 그린 내용으로 나라 빼앗긴 설움을 뼈저리게 당하며 살아가는 모습들을 생생히 잘 묘사한 영화였습니다. 당시 일제는 우리 국민을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려는 창씨 개명과 함께 우리 말, 우리 글을 말살시켜 황국 신민화로 만드는데 열 올리던 시기였으며 이즈음 한 가족의 홀아비 가장으로 살고있는 김판수(유해진 분)라는 평범한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민족의 혼이 담긴 우리말의 중요성을 깨달아 이를 목숨걸고 지켜가는 활약상을 그린 영화입니다. 간악하고 교활한 침략자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어떤식으로 탄압을 하였는지를 실감나게 영상으로 보여준 영화였지만 사실 이런 일제의 잔인하고 뻔뻔하기 이를데 없는 민낯은 이미 그들의 포악성을 엿볼 수 있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나 있었습니다.
당시 궁궐안팍 주변에는 1500여명이라는 경비병력과 용병들까지 주둔하고 있었으나 일본군에 이미 포섭된 일부 친일 병력외 나머지 모두는 겁을 먹고 아예 무기와 군복을 벗어던지고 냅다 도망을 쳤으며 대궐에는 그나마 연약한 궁녀들 몇몇만이 남아 일본 폭도들에게 대항하며 끝까지 죽음을 불사하고 왕후를 감싸 안아 도피시키려 하였습니다.
궁궐의 난리를 눈치채고 이들을 막으려 출동했던 훈련대장 홍계훈과 도성 수비대원 일부는 광화문 근처에서 일본군과 친일파 병력들에 의해 죽음을 당했으며 왕후를 끝까지 지키려 저항하던 궁내부 대신 이경직 역시 이들에게 두 팔이 잘려 나가며 살해 되었습니다. 졸지에 왕후를 잃은 고종은 곧바로 건천궁(경복궁) 장안당으로 자리를 옮기고 일본 공사 미우라에게 사람을 보내 자초지종을 물으며 대책을 마련하느라 전전긍긍하였지만 교활한 일본은 오리발로 일관했고 그들의 술수는 한술 더 떠서 이 사건을 시아버지인 흥선 대원군과 며느리인 민 왕후 사이의 권력 암투로 꾸미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때마침 건축일로 궁중에 머물러 있었던 러시아인 사바티와 궁중 경비의 일로 근무 중이었던 미국인 윌리엄 다이 등 시해 사건의 외국인 목격자 2명에 의한 진술에 일본의 이같은 터무니없는 흉계는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가담자들(한성신보 사옥 앞에서 촬영)
자신들이 저지른 참상과 흉계가 탄로날 것이 염려 되었던 일본은 급히 고종에게 압력을 넣어 친일 인사들로 이뤄진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게 하였고 이들로 하여금 사태의 수습을 서두르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벌인 수습과정에서의 무리수는 도리어 역효과가 되어 명성황후의 시해의 과정과 폐위를 시키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왕후의 복위를 요청하는 상소가 빗발쳤으며 국내외적으로도 여론이 악화되고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일본과 김홍집 내각은 폐후를 취소하며 백성들의 악화된 여론을 무마하려 했지만 도리어 일본의 만행이 만천하에 들어나게 되어 덩달아 열강들의 여론이 악화 되었고 그동안 감금되다시피 했던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일어났습니다.
◀을사늑약 당시 내각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뒤 명을 내려 김홍집 일파와 유길준, 조희연, 정병하 등을 을미4적의 역도라 규정하고 이들이 꾀했던 왕후 재간택 문제와 폐비에 관련된 사항 등을 포함한 국정 운영에 관한 모든 일들을 무효화 하였습니다.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고종은 그곳에서 무려 1년여의 도피 생활을 하면서 조선을 통치하였는데 이런 모습은 조선이 얼마나 외세에 의지하려 했는지를 잘 보여준 것이었으며 열강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으로 보일수 밖에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고종은 그 와중에도 측근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면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면하고자 자주의지를 대내외에 널리 표명하고 땅에 떨어진 국가의 위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새로운 제국으로서의 면모로 탈바꿈 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드디어 고종은 도피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덕수궁으로 환궁하여 1897년 10월 12일 이른 새벽 시간에 지금의 을지로 입구와 소공동 사이에 있었던 환구단(전 조선호텔내 정원에 위치)에 나아가 천제를 올리며 스스로 황제즉위식을 갖고 일본 자객들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한 자신의 부인인 민 왕후를 명성황후로 책봉, 추존하였으며 그 다음날 13일, 아침일찍 황후의 빈전에 제사를 치룬 고종은 아침 8시에 태극전에서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대내외에 반포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안으로는 황제 중심의 국가 기틀을 탄탄히 하고 밖으로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자주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지키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입김 한 번 훅! 하고 불면 날아가버릴 것 같은 만만한 조선이라는 땅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일본은 또다시 청일전쟁에 이어 1904년 2월 8일, 러시아와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전쟁을 시작하였는데 세계 여론으로는 곰(러시아)과 생쥐(일본)의 싸움으로 평가되던 러일전쟁을 2년 가까이 치루고 기어이 승리를 거두어 1905년 8월 29일 미국 포츠머스에서 미국의 중재로 러시아와 조약을 성사(공식 조인 날짜 9월 5일)시켰습니다. 이 공로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지만 이들 열강들의 노리개가 된 대한제국으로서는 이때부터 일본에 노골적인 침략의 제물이 되면서 이 조약은 결국 후에 을사늑약으로 이어지며 대한 제국이라는 나라가 완전히 멸망 당하는 화근이 되었습니다.
나라 바깥의 이같은 열강들의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나라 안에는 항일의 의지를 불태우며 전국 곳곳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가운데 강원도 태백산을 무대로 일어났던 신돌석의 의병 활동은 대한제국 최초로 평민 의병장에 의해 일어난 의병 운동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었습니다. 항일투쟁 초기 의병 운동은 거의가 사회 지도층이거나 주로 양반가의 유학자들이 중심으로 일으킨 거병이었기에 18세의 젊은 나이의 평민 신돌석이 일으킨 의병 운동은 조선의 시대적 관념으로는 다분히 생소하게 보여질 수는 있겠으나 당시의 긴박한 나라의 어려운 상황과 처지를 생각한다면 신분을 따질 겨를없이 누구라도 일본을 상대로 봉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며 이렇게 민중기반 중심으로 일어난 항일 투쟁은 나라를 위하는 애국심과 민족 정신이 반드시 양반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전유물만은 아니라는 항일 운동의 또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신돌석은 1878년 11월 26일 경북 영덕 도곡리의 평범한 농가에서 출생한 평민 출신이었는데 을미사변이 일본의 만행으로 밝혀지면서 전국적으로 항일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신돌석도 당시 18세 나이였지만 이들처럼 영덕에서 처음으로 의병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신돌석은 같은 경북 출신인 의병대장 김하락, 유시연 등과 연합하여 경북지역 동해안 일대에서 거듭 큰 전과를 올리며 활발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영덕 전투에서 그만 일본군에 대패를 한 김하락의 죽음으로 의병들이 해산되면서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05년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 이후 신돌석은 그의 동생 신우경과 함께 10년 가까이 중단했던 의병 투쟁을 위해 재차 거병을 하였고 일본의 교활한 행태에 분노한 민중들을 이끌고 울진, 원주, 영주 등 동해안 일대와 강원 내륙 지방까지 세력을 확대하면서 조선 백성들의 탄압에 앞장선 친일 세력들을 처단하고 일본군 시설의 파괴와 일본 선박을 여러척 격침시키는 등 태백산 호랑이로서 명성을 떨치며 혁혁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같은 신돌석의 대활약은 전국의 의병들에게도 알려져 경북일대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명성이 떠오르게 되었으며 이후 전국의 의병들을 모두 통합하여 효과적으로 이끌기 위한 '13도 창의군'이 결성되면서 총 대장 이인영으로부터 영남지역을 지휘하는 교남창의대장에 선임되어 허 위, 민긍호, 이강년 등과 같은 대부분이 사회 지도층으로 구성된 의병대장 가운데 신돌석은 평민으로서 당당하게 의병대장으로 그들과 나란히 같은 대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신돌석은 특유의 전법으로 강원지역과 경북지역을 오르내리며 해안선과 태백산, 소백산 등지에서 큰 전과를 올렸는데 산악지대가 많은 지역의 특수성을 살린 게릴라 전법은 지리에 어두운 일본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명성은 일본군내에서도 자자하게 입소문이 났으며 신돌석 부대가 나타났다고 하면 두려움에 떨며 우왕좌왕 했다고 전해졌습니다.
신돌석의 민족적 의식은 주자학을 중심 사상으로 내세우는 조선의 유림들이 지녔던 사상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는데 비록 자신은 평민이었지만 어떤 누구보다도 단군의 자손으로 민족애가 높았다고 자부하였습니다. 평민이었던 그가 의병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부친인 신석주의 역할이 매우 컸는데 부친의 생각이 남달라 평민인 자신의 처지를 물려받을 아들 신돌석에게 서당에 곡식을 바쳐가면서 공부를 시켜 글을 깨우치게 하였으며 부친의 그같은 헌신적인 자식의 장래를 염려하는 정성에 신돌석은 평민 출신 의병장 이었지만 의병장으로서도 다른 쟁쟁한 유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항일 투쟁을 전개해 나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평소 부지런하여 그동안 억척같이 모은 자신의 가산을 아낌없이 몽땅 털어가며 아들 신돌석이 항일 투쟁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도움을 주었으며 며느리 한씨는 물론 그의 일가 친척들도 조금도 주저하거나 망설임없이 한결같은 애국심으로 항일 투쟁 전선에 뛰어 들었습니다.
▲경북 영덕 도곡리에 있는 신돌석 장군의 생가
신돌석이 활동하던 지역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기만 했던 일본군은 조급해지기 시작했고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펼쳤지만 신돌석 의병부대가 워낙 신출귀몰한지라 번번히 허탕을 치게 되면서 신돌석에게 거액의 포상금까지 내걸면서 체포에 열을 올렸습니다. 결국 일본군이 내건 포상금이 먹혀들어 1908년 겨울,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은 경북 영덕 눌곡의 자신이 머물던 거처에서 어이없게도 포상금에 눈이 먼 자신의 부하에게 암살을 당하는데 태백산 호랑이로 명성을 날리던 그 답게 격렬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를 한 것도 아니고 무슨 단지 몇푼의 포상금 때문에 내부의 소행으로 죽음을 맞아야 했던 현실이 묵은지로서도 기가막히고 억울한 일일 뿐이었습니다.
신돌석의 이런 죽음을 두고 여러가지 설이 있었는데 부하 김상렬의 삼형제에 의해 도끼로 살해되었다는 설이 개중에는 가장 사실에 가깝지만 그밖에도 신돌석의 고종 사촌인 김자성이 죽였다는 설이 나돌기도 했으며 역시 친가 형제인 김도윤 등에 의해 살해를 당했다는 등 모두 주변인의 이름이 거명 되었던 것으로보아 안타깝게도 측근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암튼 묵은지가 화가 치밀어 굳이 뒷얘기까지 들추어 낸다면 거액의 포상금이 탐나 신돌석을 죽인 어리석은 이들은 그 거액의 포상금을 타내려 일본 헌병대에 신돌석의 머리를 잘라 가져갔으나 일본 헌병들은 생포하지않고 죽여서 가져 왔다는 이유를 들어 이들에게 포상금을 한푼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돌석은 사회 지도층이나 양반가도 아닌 평민의 신분으로 굳이 자신이 선뜻 나라의 위기를 도맡아 나섰다는 것에 그의 남다른 민족 정신과 애국심을 짐작케 하는데 이런 그의 적극적인 행동과 뛰어난 리더십에 적어도 그의 주변에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시기의 조선은 근대화로의 변화와 외세의 심한 간섭을 받고있는 시대적 배경의 영향으로 민족주의가 유입되기 시작했고 뜻있는 사학자나 새로운 사상가들은 과거 신분질서를 옹호하는 봉건적인 유교 사상을 뒤로하고 애국계몽사상을 펼치면서 조선에 주권과 민족 정신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신분에 얽매이지 않는 평등을 외치며 구국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신돌석은 이같은 민족주의 운동에 많은 영향을 받아 실제로 자신이 항일 투쟁을 중단하였던 지난 10년에 가까운 시기는 이러한 자신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단군의 배달 민족 정신을 고취시키고 더불어 동학사상의 손병희, 대한광복회의 박상진, 의병장 민긍호나 이강년 등을 접하면서 이들을 통해 항일의 의지를 불태우며 많은 것을 배움으로써 사상적 기반을 다지는 기회로 삼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누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고
낙목이 가로놓인
조국을 탄식하네
남아 27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가
문뜩 가을바람이 부니
감개만 이는구나
1905년 경북 울진 평해에 있는 월송정에서 신돌석이 읊은 시로 당시의 나라를 위하는 심정을 담담하게 잘 표현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의 나이 18세에 거병하여 시작된 항일 투쟁은 평민 출신이라는 신분의 장벽을 뛰어넘어 의병장으로써 태백산 호랑이라는 명성을 날리며 맞섰지만 신식무기로 잘 무장된 일본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무너뜨리기에는 너무도 버거웠습니다. 하지만 신돌석은 이에 굴하지 않고 용맹을 떨치며 일본군들을 상대로 끝까지 항전을 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자신이 간절히 소원했던 조국의 자주 독립이라는 바램을 이루지도 못하고 돈 몇 푼에 눈이 먼 어리석은 부하의 배신으로 암살을 당하면서 1908년 11월, 만30세라는 통한의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나라는 임금이 잃었는데 백성들이 목숨바쳐 나라를 찾아야하는 이런 답답한 비현실적인 상황은 다시는 이 나라에서 일어나지 말기를 바랄뿐이고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이런 일본의 레이더 문제같은 억지 행위도 옴짝달싹 못하게 곧바로 응징할 수 있도록 우리가 지닌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저 혼자 살겠다는 개인의 사심으로 신돌석과 같은 애국자를 잃게하는 어리석음은 결국 우리들 모두의 불행과 손실임을 당연하게 알고 있음에도 그러한 사실을 그르치고만 것은 무책임하게 어리석고 안타까운 우리의 과거였습니다. 그렇다고 후회로 여기고만 있기에는 외부의 또 다른 상황들이 물밀듯이 다가오고 있어 지금이라도 늦었다 생각말고 우리 모두가 반면교사하는 마음으로 이를 명심하여 미래를 바라보는 큰 뜻을 마음에 담아 어떤 위기가 닥쳐와도 위정자나 국민들이 협심하고 힘을 모으며 굳건하게 대처해 나간다면 지금처럼 억지 추태를 보이고 있는 아베나 일본의 과열 국수주의자들 같은 일부 몰지각한 인사가 더이상 우리에게 억지같은 그런 무작한 술수획책이 통하지 않음을 스스로 깨달아 더는 넘보지 못할 것으로 묵은지는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