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는 29일 기존의 계엄령과 총동원령을 내년 2월 7일까지 90일간 더 연장했다. 러시아 주도의 평화 협상을 거부하고 젤렌스키 대통령의 '승리 플랜'을 밀어붙이는 우크라이나(의회)로서는 당연한 수순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우크라이나에게 불길한 낌새는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지난 5월 동원령 강화이후 늘어났던 동원 규모가 최근 눈에 띄게 줄었다. 최고라다(의회)의 코스텐코 의원은 훈련중인 신규 병력 수가 3만5,000 명에서 2만 명으로 떨어졌다고 밝혔다. 리트비넨코 국가안보회의 서기(우리의 안보실장 격)가 29일 예비병력 16만명을 추가로 확보하기 위해 동원령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다. 우크라이나의 동원 군 병력이 이미 150만명에 이른다고 하니, 인구나 경제에 미칠 영향력 등을 감안하면 거의 목에 찼다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 훈련하는 우크라군/사진출처: Army.mod.uk
하지만, 전쟁 판도는 계속 러시아 우위로 기울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의 드미트리 마르첸코 장군(소장)은 29일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의 (돈바스) 방어 전선이 무너졌다고 말하더라도 새로운 군사 비밀을 발설하는 게 아니다"며 "적은 이미 셀리도보에 진입했고, 더 나아가 전략 요충지인 포크로프스크를 향해 전술적 공격을 가할 태세"라고 주장했다. 마르첸코 장군은 우크라이나 방어선이 무너진 주요 원인으로 탄약및 병력 부족, 군통제 시스템의 부재를 들었다. 싸울 사람도, 무기도 부족하고, 이를 통제할 시스템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통상 총체적 난국이라고 한다.
그 결과, 독일 일간지 디 벨트는 러시아군이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기록적인 속도로 우크라이나 영토를 점령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10월이 채 끝나기도 전(27일 현재)에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의 땅 478㎢를 새로 점령했다는 것인데, 8월에도 477㎢, 9월에도 459㎢나 차지했다. 스트라나.ua는 러시아군이 셀리도보 뿐만 아니라, 남쪽의 쿠라호보 인근 마을 세 곳으로 진격중이라고 전했다.
쿠르스크 지역으로 투입되는 러시아 방어군/영상 캡처
제3 돌격여단의 쿠하르추크 대대장도 "(우크라이나가 선언한) 1991년 국경으로 도달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젤렌스키의 '승리 플랜'에도 담겨 있지 않다"고 승전 목표 설정에 의문을 표시했다. 또 '제2의 프리고진(2023년 6.24 군사반란 주도)이 나온다'는 희망도 없다고 덧붙였다.
스트라나.ua는 "전쟁을 동결(휴전)하는 게 우크라이나에게는 좋은 선택이라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늘어났다"고 전했다. 물론, 우크라이나는 단연코 이를 거부한다.
그러나 전쟁 종식 지지자들은 현재 전황과 서방의 대(對)우크라 군사 지원 능력, 향후 전망 등 현실적인 판단을 근거로 '현 전선에서의 휴전'론을 편다.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NYT)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공개를 거부한 '승리 플랜'의 비밀 조항에는 토마호크 미사일의 제공 요구가 들어있다고 28일 보도했다. 이라크 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토마호크 미사일의 사정거리는 2,400km. (젤렌스키 대통령의 또다른 요구사항인) 서방 미사일의 러시아 본토 공격이 허용된다면, 토마호크 미사일이 모스크바를 때리는 장면을 머리에 떠올릴 수 있다.
또 모스크바가 토마호크 미사일 공격을 받으면 가만히 있을까? 상상 가능한 시나리오는 '핵무기'다.
미국의 한 고위 관리는 익명을 전제로 NYT에 “젤렌스키 대통령의 이같은 요구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했고, 다른 전문가들도 "젤렌스키 대통령의 승리 플랜은 비현실적이며, 거의 서방에 떼를 쓰고 있다"고 약간 짜증을 냈다.
당혹스러운 것은, 우크라이나가 '승리 플랜'에 제시한 장거리 미사일의 러시아내 타격 목표가 미국 등 나토(NATO)의 공급 가능 미사일 수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이 계획을 미국 등 서방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았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서방이 제공한) 장거리 미사일의 러시아 본토 공격 허용 거부에 "놀랐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하지만 서방 분석가들은 "우크라이나 당국은 처음부터 이 계획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비하고 있다"고 믿는다.
우크라이나 당국의 대비책은 뭘까? 둘 중의 하나다. 러시아와의 평화협상, 아니면 나토외에 다른 나라를 전쟁판으로 끌어들이는 것.
NYT는 "젤렌스키 대통령은 최근 의회 연설 등을 통해 국민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했다는 점을 각인시킨 뒤, 희생양을 내세워 우크라이나가 협상에 나설 수 밖에 없다고 설득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군사 지원 여력도 부족하다고 전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는 연간 100만 개 이상의 포탄을 생산한다는 유럽연합(EU)보다 3배나 더 많은 포탄을 만들고, 북한과 이란으로부터 포탄 공급을 받고 있다"며 "목표에는 미달되지만, 러시아는 월 3만 명(계약병)을 신규 모집함으로써 최근 몇 달 동안의 병력 손실을 충분히 메우고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도 이 전쟁을 영원히 계속할 수는 없지만, 우크라이나가 먼저 한계점에 도달할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는 게 이코노미스트의 결론이다.
우크라이나 동원 대상자가 키예프 콘서트장에서 징병관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영상 캡처
실제로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28일 "우크라이나 동원 조치의 강화는 우크라이나가 처한 어려움을 보여준다"며 "자원 병력은 동이 났고, 징병 대상 남성들은 동원을 피해 몸을 숨기거나 불법탈출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사회적인 긴장도도 덩달아 고조되고 있다고 했다.
WSJ은 "러시아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인구가 우크라이나보다 4배나 더 많다"면서 "우크라이나는 2023년 여름의 반격작전과 러시아 쿠르스크주 공격으로 병력 부족 문제가 더욱 악화되었다"고 지적했다. 또 우크라이나 군대의 탈영병 문제도 심각하다고 했다.
1주일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의 해리스 후보가 승리하더라도, 최전선에서 전쟁을 멈추자는 화두는 적극적으로 추진될 수 있다고 NYT와 이코노미스트는 전망했다. 우크라이나 당국만이 이에 단호히 반대하고 있다.
북한군으로 추정되는 병력에서 러시아군이 물품을 배급하는 장면/영상 캡처
이같은 상황에서 공교롭게도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 문제가 터졌다. 우리의 안보를 위해서라도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성급한 결론은 자제해야 하는 이유가 몇가지 있다.
우선 우크라이나 전쟁의 현 판세다. 바둑판으로 치면, (우크라이나군의 장군급 인사가 인정했듯이) 우크라이나의 대마(돈바스)는 곧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 상대의 수읽기를 흐트러뜨리는 전략으로 러시아의 집 안으로 뛰어든 과감한 행마(쿠르스크주 공격)는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24일 카잔 브릭스 정상회의 결산 기자회견에서 "쿠르스크에서는 우크라이나군 2천명이 포위망에 갇혀 있다"며 "굳이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조급하게 대응(공격)할 상황이 아니다"고 말했다. 포위된 우크라이나군이 항복하거나 우크라이나로 탈출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피력한 것이다.
푸틴 대통령의 말이 사실이라면, 북한군이 굳이 쿠르스크 지역에서 우크라이나와 싸울 이유는 없다. 북한군의 쿠르스크 파견은 사실이겠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후방에서 러시아군의 포위망을 더욱 굳건히 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러시아에 제공된 북한산 미사일 시스템의 운영시, 이를 지원할 전문가들이나, 현대전의 양상이나 정보, 작전을 탐지하고 수집하려는 요원들의 러시아 파견은 누구나 예측 가능하다. 푸틴 대통령과 세브로프 외무장관이 누차 지적한 대로, 나토 역시 첨단 무기의 원활한 운용을 위해 우크라이나에 관련 전문가들을 파견한 상태다. 이를 숄츠 독일 총리가 인정하기도 했다.
우리가 군 전문가들을 우크라이나로 파견한다면, 서방과 비슷한 수준에 머무는 게 맞다. 북한군의 동향이나 정보 획득, 현대전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 정도면 충분하다. 미국도, 나토도 조금씩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발을 빼려는 상황에서, 우리는 전체 판세와 전망, 개입의 장단점을 정밀하게 분석한 뒤 움직여도 늦지 않다. 미국과 나토는 우리나라의 우크라이나 개입을 두손 들고 환영할 것이다. 궁지에 몰린 젤렌스키 대통령도 자신이 던진 낚시밥을 우리가 덥석 물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