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2. 지금까지 말씀을 듣고 보니 주둔지를 어디로 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이동외과병원 다음으로 얼마 안되어서 건설 및 수송부대가 중심이 되는 비 전투부대의 증파를 하였는데 그때에는 임무와 주둔지를 어떻게 결정하였는지 증파 과정도 곁들여 설명해 주십시오.
(답) 먼저 증파 과정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우리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이 월남에 파견되어 현지활동을 시작한지 약 3개월이 지난 1964년 12월 18일 “브라운”주한미국대사가“박정희”대통령을 방문하고 긴박한 월남사태와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면서“존슨”미국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였습니다. 한국군의 증파를 요청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박대통령은 미국정부의 뜻을 받아드려 12월20일 “김성은”국방장관에게 월남지원을 위한 비전투부대 증파에 관하여 연구보고 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합동참모회의의장“김종오”대장은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수차례 걸쳐 UN군사령관“하우즈”대장을 방문하고 월남파병에 따른 여러 문제에 관하여 협의하였습니다.
12월 24일은 “크리스마스 이브”였으나 합참의장공관에 소집된 합동참모본부 간부들에게“김”의장은 그간“하우즈”장군과 극비리에 만나서 한국군 월남 증파에 따르는 제반문제에 대하여 협의한 내용을 설명하고 27일 다시 만나기로 하였으니 그때까지 모든 연구자료를 마련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김 의장은 그 자리에서 선발대를 되도록 빨리 현지에 파견해야 되겠는데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겠느냐? 고 간부들에게 물었으나 별다른 의견이 나오지 않자 김 의장은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이번에 파견할 부대가 비전투부대라고는 하지만 월남의 현지정세로 볼 때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니 지난번 제1차 파병 때 선발대장으로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이훈섭”장군이 다시 수고를 해 주었으면 하는데 어떻게들 생각하시오?」모두 찬성함으로써 나는 또다시 증파부대의 선발대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1개월후인 1965년 1월 20일 월남정부로부터 한국군의 추가지원을 요청하는 공한을 외무부장관이 접수하였습니다. 한국정부는 이 공한을 받고 즉각 그 동안 검토해오던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으며 국무회의는 1월 8일 국방부가 제시한 월남공화국지원을위국군부대의해외추가파견에관한 국회 동의 요청안을의결하였습니다. 한편 이날 국방부는 월남의 긴박한 사태를 고려하여 국군의 월남지원군파견에 앞서 현지를 답사하고 사전에 필요한 교섭과 협조를 하기 위하여 저를 또다시 대장으로 하는 제2차파병선발대를 사이공에 파견하였습니다. 우리 선발대가 극비리에 미군용기를 이용하여 사이공에 도착한 것은 65년 1월 10일 16시경이었습니다. 그날은 월남정치에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던 12월 20일 사태를 수습하고, 민정으로 복귀한 다음날 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선발대가 그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배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중요 사태였으므로 선발대의 현지활동에 앞서 당시의 월남정세를 먼저 간략하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제1차파견때 발생하였던 소위 8월 정변때 군사혁명위원회의 3인 위원회가 “칸”장군의 약속대로 10월 24일“판 칵 수”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후임 수상에는“트란 반 후응”사이공 시장을 임명하였습니다. 이때“칸”장군은 3군 최고사령관으로 물러앉아 군의총수직만 맡았습니다. 11월 4일 새로 임명된“후옹”수상은 정치가나 종교인을 제거하고 각분야의 전문가들을 기용하여 조각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조치는 정치권에 깊숙이 파고든 불교계와 카톡릭계의 반감을 한꺼번에 맞아들이게 되었으나 그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취임한지 얼마 안되어서 불교계와 카톡릭교도들의 종교세력의 데모로 지난 8월 정번을 방불케 하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이때의 베트콩의 공작분자가 침투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월남 학생들도 다시 데모를 벌렸습니다. 학생과 종교인들의 데모는 더욱 과격해져 급기야는 국가원수의 관저에까지 쇄도하기에 이르러 결국 군 장병이 출동하였으며 11월 25일에는 사이공 일각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정부 데모를 다스리기로 하였습니다. 계엄령 선포를 계기로 학생들의 반정부 운동은 일단 진정되었으나 그것도 잠시일뿐 12월에 들어서면서 불교도의 움직임은 다시 활발해졌습니다. 월남 불교총연맹은 성명을 발표하고 “후옹”정권의 탄압정책을 비난하면서「미국은 “후옹”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 하라」고 촉구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후옹”정권이 걔속 유지되고 있는 것은“테일러”미국대사의 책임이라고 규탄하였다.“틱 트리 쾅”등 3명의 고승이 “후옹”정권 타도를 외치며 단식투쟁을 선언하자 500여명의 승려들이 그 뒤를 따라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이러한 과격한 투쟁에도 굴하지 않고“후옹”수상은 강경하게 이에 대처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군의 뒷받침을 해주겠다고 약속한“칸”장군의 언약은 실속이 없었습니다. 사태가 복잡해지고 반 “후옹”투쟁이 격화되자 일단의 젊은 장성들은 주요지휘관회의를 열고 사태가 악화된 것은“칸”장군이 불교도와 무원칙한 타협과 숙청된 장성들에 대한 복직 등 9․13구테타 미수사건 주모자에 대한 미온적인 처리 등으로 인한 일들이 모두 못마땅하다는데 의견을 같이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진행된 회의는 칸의 군통수권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군사협의회라는 기구를 창설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실제로는 칸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한 기구로 조직된 것이었습니다. 12월 초순 미군사원조사령관 “웨스트모얼랜드”장군이 소장파장성들의 리더격인“티우와키”등 10여명의 지휘관들을 관저에 초대하여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이때에 워싱턴에서 돌아온 테일러대사는 그들에게 정치적 단합을 강력하게 호소하고 그 무렵 그들이 저지런 일련의 사태는 월남에 충실한 우방들까지도 실망시키고 있다고 충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들은“테일러”대사와의 묵계를 아랑곳하지 않고 군사협의회에서 “칸”장군에게 정치적 개혁을 단행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하였습니다. “웨스트모얼랜드”장군은 사태의 심각성을 우려하여“칸”장군과 만난 자리에서 군사협의회의 정치적 요구를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라고 충고하였습니다. 그러나“칸”은 8월 25일 불교도와 학생들의 압력에 굴복하였듯이 이번에는 소장파 장성들과 협의하는 길을 택하였습니다.“칸”은 소장파들의 요구대로 국가협의회에 참여하고 있는 장성 중 복무기간이 25년이 넘은 사람을 퇴역시키도록 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불교도, 극렬분자에 대하여 강경한 조치를 취하고“후응”내각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촉구하면서「정쟁은 지향하고 베트콩 소탕에 전념하자」고 호소하였습니다. 정치원로들은 그들의 정치적 개혁요구를 거부하였습니다. “칸”장군은 이러한 사태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12월 20일 국가평의회를 해산시키고 반“후응”투쟁의 선봉에 나섰던 정치가, 학생, 불교도 등을 체포하고“두옹 반 민”장군을 비롯한 이른바 “달라트파”장성 5명을 퇴역 조치 하였습니다. 소장파장성과 3군 총사령관 칸 장군의 과격한 행동을 보고“테일러”대사는“후응”수상에게 군부의 조치를 묵살해 버리도록 권고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칸”은 뉴욕“헤럴드 트리분지”와의 회견에서“테일러”대사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법으로 월남내정에 간섭하고 있다고 통렬하게 비난하면서「우리는 월남의 독립과 월남국민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모든 희생을 각오하고 있으며 어떤 외국의 정책도 이를 맹목적으로 추종할 생각이 없다」고 폭탄선언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어「“테일러”대사는 미국의이익에도 역행하는 인물이며 우리에게는 달갑지 않은 존재이다」라고 정면으로 공격하였습니다.“테일러”대사는 체포된 정치지도자를 석방하라고 요구하며「이러한 통치가 계속된다면 원조를 재검토하겠다」고 경고하였습니다. 미국무성은 특별성명을 발표하고「월남 정부는 군부의 부당한 간섭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테일러”대사의 활동을 지지하였습니다.“칸”장군은 미국의 이러한 태도를 비난하면서 소장파 장성들의 태도가 옳다고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월남 문제에 대하여 미국은 간섭하지 말라」고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월남의 언론도「미국이 월남군을 지휘하려 든다」고 미국을 비난하는 논조의 보도를 하였습니다.
“칸”은 월남의 젊은 장성들에게 자기는 미국의“꼭두각시”가 아닐뿐더러 대미 관계에서 얼마나 당당하게 대처하고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실추된 자신의 위치를 되찾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칸은 이제 더 이상 미국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명확하게 밝힌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12ㆍ20사태로 인한 일련의 정치적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친 뒤 군부는 미국과 월남 국민의 강력한 저항을 이겨내지 못하고 1965년 1월 9일 다시 실권을 민간정부에 반환함으로써 20일만에 민정으로 다시 복귀하고 월남의 정치위기는 일단 그 고비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12ㆍ20 정치적 소요 사태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미국과의 관계는“칸”장군이“후옹”수상에게 정권을 반환하고 뒤로 물러섬으로써 일단락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무성은 1월 11일 월남정부와 추가원조 문제 협의를 재게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12일에는“후옹”수상과 월남주재 미국 대사가 공동성명을 통해「미국과 월남의 우호관계는 더욱 긴밀하여졌다」고 발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