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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37) 은총과 공로의 균형을 통해 추구하는 참행복
오만한 주체에서 겸손한 응답자로…은총 따르면 찾아오는 행복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흔히 자신의 한계를 망각한 채 모든 일을 스스로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다는 근대적 자아의 환상에 빠져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자본의 위력은 인간이 스스로를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전능한 주체’로 착각하게 만들었으며, 행복 또한 개인의 노력과 성취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전유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율성 신화는 역설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완벽을 향한 무기력한 질주와 실존적 허망함을 낳을 뿐이다. 신앙인은 현대의 흐름 안에서 인간의 노력을 긍정하면서도, 그 모든 활동의 근원이자 완성인 하느님의 은총을 어떻게 인식하고 자신의 공로와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인간 본성의 능력과 은총의 필연성, 그리고 그 안에서 작용하는 공로의 의미를 정교하게 분석함으로써 우리에게 중용의 길을 제시한다.
은총의 본질과 인간 본성의 한계에 대한 고찰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은총(gratia)’이란 일차적으로 인간의 자연적 능력 위에 더해진 초자연적인 선물이다. 인간의 지성은 본래 ‘자연적 빛(lumen naturale)’을 지니고 있어 감각적 사물을 통해 자연 질서의 진리를 인식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렇지만 신앙의 영역이나 영원한 생명과 같은 고상한 목적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빛, 즉 ‘신앙의 빛(lumen fidei)’ 또는 ‘은총의 빛(lumen gratiae)’이 필요하다.(I-II,109,1)
특히 범죄 이후의 인간 본성은 마치 병자와 같아서 초자연적 선뿐만 아니라 자연적 선조차도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온전히 성취할 수 없는 나약한 상태에 처해 있다.(I-II,109,2) 토마스는 인간이 하느님을 모든 것 위에 사랑하고 계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부패한 본성을 고치는 ‘치유하는 은총(gratia sanans)’이 필수적임을 강조한다.(I-II,109,3-4) 치유하는 은총 없이는 십계명과 같은 명령조차 인간에게 폭력적인 억압으로 느껴질 뿐이며,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죄의 늪에서 일어설 수 없다.(I-II,109,7) 따라서 현대인이 믿는 ‘무한한 자아’의 환상을 깨뜨리고,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넘어서는 영원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외부로부터 오는 초자연적인 조력이 필요하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은총의 체계적 구분
토마스는 은총이 작용하는 방식과 목적에 따라 이를 정밀하게 구분하여 신앙인의 삶 속에서 은총의 위치를 설명한다. 먼저 은총은 인간을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만드는 ‘성화 은총(gratum faciens)’과 타인의 구원을 돕기 위해 거저 주어지는 ‘무상 은총(gratis data)’으로 나뉜다.(I-II,111,1) 또한 인간의 의지가 선으로 향하도록 먼저 움직이는 ‘작용 은총(gratia operans)’과 이미 선으로 움직인 의지가 그 선을 이룰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협력 은총(gratia cooperans)’의 구분은 인간 행위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어떻게 협력하는지를 잘 보여준다.(I-II,111,2)
토마스는 은총의 결과를 다섯 단계, 즉 ‘치유하고, 작용하고, 협력하고, 인내심을 주고, 영광스럽게 만드는 것’으로 요약한다.(I-II,111,3) 이러한 세밀한 구분은 은총이 단순히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인간이 죄로부터 일어나 성화의 길을 걷고 궁극적으로 지복직관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에 걸쳐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실재임을 드러낸다.
인간의 의화와 자유 의지의 역할
현대인의 주체성 강조와 달리, 토마스는 인간이 하느님께 돌아서는 ‘의화(義化, justificatio)’의 과정 자체가 하느님의 움직임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I-II,109,6)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을 그 본성에 따라 움직이시기에, 인간의 의화 역시 자유 선택의 움직임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섭리하신다.(I-II,113,3) 의화는 죄의 용서와 은총의 주입을 포함하며, 이는 인간 영혼을 새로운 상태로 변화시키는 ‘성화 은총’의 효과다.(I-II,110,1)
토마스는 의화가 ‘무로부터의 창조’보다 더 위대한 초자연적 선을 종착점으로 삼는다고 보았다.(I-II,113,9) 신앙인은 자신의 결단력이 구원을 만들었다는 자만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유로운 응답조차 하느님의 은총이 선행하여 가능해진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공로(功勞)와 은총 사이의 정교한 균형
공로(meritum)에 대한 논의는 은총과 인간 노력의 관계를 정립하는 핵심이다. 엄격한 정의의 관점에서 보면 무한한 하느님과 유한한 인간 사이에는 대등한 거래가 성립할 수 없으므로 인간이 내세울 수 있는 공로는 존재하지 않는다.(I-II,114,1)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당신의 도움을 받아 선행을 쌓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도록 질서를 정해 놓으셨다.
따라서 공로는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귀속되며, 그다음으로 인간의 자유 의지에 귀속된다. 영원한 생명은 인간의 자연적 능력을 넘는 것이기에 인간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이를 얻을 자격이 없지만, 성령의 작용인 ‘성화 은총’을 통해 하느님과 우정의 관계에 놓일 때 비로소 영생에 합당한 공로를 세울 수 있게 된다.(I-II,114,2-3) 공로란 인간의 자력적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은총의 열매를 하느님의 안배 안에서 다시 그분께 돌려드리는 거룩한 질서의 회복이다. 토마스는 공로가 이기적인 자기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행해질 경우에만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고 보았다.(I-II,114,4)
은총의 시대적 증언과 신앙인의 태도
오늘날 모든 것을 자신의 공로로 돌리려는 ‘위장된 자기 구원론’에 맞서, 토마스는 ‘인간은 최초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으며, 오직 무상의 선물로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I-II,114,5)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신앙인은 자신의 노력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토대 위에서만 유효함을 인정하는 겸손함과, 동시에 주어지는 은총에 성실히 협력하여 사랑의 공로를 쌓아야 하는 책임감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 ‘궁극적 인내(perseverantia finalis)’의 은총 또한 자신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이끄심에 달려 있음을 고백할 때(I-II,114,9), 인간은 비로소 현대의 오만에서 벗어나 진정한 행복인 지복직관의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38) 인간의 행복을 실천하기 위한 나침반: 올바른 양심
보편적 이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끊임없이 양심 갈고 닦아야
현대 사회에서 이기주의가 확산되고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는 ‘이익 중심주의’가 팽배해짐에 따라, 인간 내면의 도덕적 지침인 양심의 목소리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무엇이 옳은가”라는 근본적 질문보다 “무엇이 나에게 이득인가”라는 도구적 합리성에 매몰되어 있으며, 이는 공동체의 윤리적 기반을 위협하는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양심론을 검토하는 것은 현대인의 도덕적 주체성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토마스는 인간이 선을 지향하고 악을 피하기 위해 내면의 주관적 확신과 객관적인 자연법적 이치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지를 정교하게 분석했다.
양지’와 ‘양심’의 구분과 역할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도덕적 판단 구조를 보편적 원리인 ‘양지(良知, synderesis)’와 구체적 행위의 적용인 ‘양심(conscientia)’의 역학 관계로 설명한다. 양지는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와 같은 자연법의 제일 원리들을 파악하는 자연적 습성(habitus)이다.(I,79,12) 이 원리들은 인간 영혼에 각인된 ‘영혼의 불꽃’과 같아서 결코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즉, 인간은 본성적으로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알 수 있는 빛을 내면에 지니고 있다.(「진리론」 17,2)
반면, 양심은 이러한 보편 원리를 구체적인 개별 사안에 적용하는 지성적 ‘행위(actus)’를 의미한다. 토마스는 양심을 ‘다른 것과 함께 알려진 지식(cum alio scientia)’ 혹은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의 적용(applicatio scientiae ad aliquid)’이라 정의한다.(I,79,13) 여기서 중요한 학술적 통찰은 양심이 ‘실천적 삼단논법’의 구조를 갖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양지는 ‘모든 악은 피해야 한다’는 대전제를 제공하고, 이성은 ‘학교폭력은 악이다’라는 구체적 사실에 근거한 소전제를 도출하며, 양심은 ‘이 학교폭력을 피해야 한다’는 최종적인 실천적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양심이 오류를 범하는 지점은 무류한 원리인 양지가 아니라, 소전제를 설정하거나 대전제를 개별 상황에 대입하는 추론의 과정이다. 즉, 보편 원리는 확고하나 구체적 적용 과정에서 이성이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이처럼 양심이 보편 원리를 개별 행위에 적용하는 이성적 활동임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왜 양심이 왜곡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양상을 분석할 수 있다.
드라마 <참교육>을 통해 본 이완된 양심과 완고한 양심
양심은 형성 과정과 환경에 따라 왜곡될 수 있으며, 이는 후대 학자들이 정립한 ‘이완된 양심(conscientia laxa)’과 ‘완고한 양심(conscientia stricta)’으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왜곡은 단순한 심리적 현상을 넘어 인간의 도덕적 자유와 책임 있는 실천을 저해하는 장애물이 된다.
심각한 교육 현실에 대해 주목하게 만든 드라마 <참교육>에 등장하는 사례들은 이러한 왜곡된 양심의 실태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드라마 속 가해자들은 동료 학생이나 교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이 받는 벌에 분노한다. 이는 도덕적 규칙을 무시하거나 마비된 상태인 이완된 양심의 전형이다. 반면,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타인의 불행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빠져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괴로워하는 이들은 완고한 양심에 갇혀 있을 수 있다.
여기서 교권보호국 사무관의 역할은 실천적 삼단논법의 오류를 바로잡는 외부적 원조로 해석된다. 그들은 피해자에게 ‘이 불행은 당신의 행동 때문이 아니다’라는 올바른 소전제를 제공함으로써, 피해자의 잘못된 추론을 교정하고 그들을 불필요한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즉, 양심의 교정은 인간을 법의 맹목성으로부터 해방시켜 진정한 도덕적 자유로 이끄는 과정이다. 양심의 왜곡은 단순히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주체로서의 책임과 직결되기에, 우리는 올바른 양심을 형성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된다.
올바르게 살아있는 양심의 형성과 도덕적 책임
토마스에 따르면, 양심은 그것이 올바르든 그릇되든 언제나 인간을 구속한다. 만약 자신의 양심이 어떤 행위를 악이라고 판단했는데도 이를 행한다면, 비록 그 행위가 객관적으로 선일지라도 주관적으로는 악을 선택한 것이 되어 죄를 범하게 된다.(「진리론」 17,4)
그렇다면 드라마의 가해자들처럼 이완된 양심에 따라 악행을 저지르고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죄가 없는 것인가? 토마스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양심에 따랐더라도, 그 행동이 태만이나 고의에 의한 ‘극복할 수 있는 무지(ignorantia vincibilis)’(I-II,19,6)에 근거하고 있다면, 죄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즉, 인간은 자신의 양심을 올바르게 형성해야 할 도덕적 책임을 지고 있다.
반대로 완고한 양심으로 고통받는 이들은 자신에게 책임이 없는 ‘불가피한 무지’나 상황적 한계를 이성적으로 식별함으로써 지나친 가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따라서 인간은 잘못된 양심을 고수할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양심을 교육하고 정보를 제공하여 올바른 양심으로 형성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
양심,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을 향한 지성소
양심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핵심이자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지성소이다.(사목헌장 16항) 양심은 주관적 자아가 멋대로 진리를 만들어내는 장소가 아니라, 이미 영혼 안에 존재하는 객관적 진리와 법을 증언하는 증인의 역할을 수행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권고했듯, ‘내면으로 들어가라’는 외침은 자신의 주관적 욕망에 침잠하라는 뜻이 아니라, 내면에 이미 현존하는 보편적 이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의미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생생하게 들려오는 올바른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인간은 비로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기적 존재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도덕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 결국 올바른 양심을 형성하고 그 판단에 충실히 따르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완성하고 지복에 이르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드라마 <참교육>이 보여주는 왜곡된 양심의 비극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왜 양심의 빛을 밝히고 그것을 생생하게 살아있도록 닦아나가야 하는지를 일깨워 준다. 올바른 양심이야말로 인간을 자유롭게 하며 진정한 행복으로 이끄는 유일한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구역반장 월례연수] 사랑 <생태>
- 생태계 보호는 신앙인의 근본적 사명 -
오늘날 우리는 전에 없던 거대한 생태적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먼 미래의 문제처럼 여겨졌던 기후위기가 이제는 우리의 삶 한가운데에서 현실이 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름철의 기록적인 폭염과 겨울철의 혹독한 한파, 예측하기 어려운 집중호우와 가뭄, 대형 산불과 해수면 상승은 더 이상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자연재해는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고 있으며,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가장 먼저 큰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동시에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과 소비 중심의 생활 방식으로 인해 수많은 생물종이 멸종 위기에 놓여 있고, 숲과 바다, 강과 토양은 빠르게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하신 세상이 인간의 탐욕과 무관심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서울 세계청년대회(WYD)가 제시하는 영적 가치 가운데 ‘사랑’의 세 번째 주제가 ‘생태’라는 사실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생태 문제가 단순히 과학적 연구나 사회 정책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앙 안에서 반드시 실천해야 할 사랑의 문제임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사람 사이의 관계 안에서만 생각하기 쉽지만,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사랑은 훨씬 더 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소중히 여기고 돌보는 것 또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창조 세계를 보호하는 일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며, 동시에 이웃과 미래 세대를 위한 책임 있는 사랑의 행동입니다.
세계청년대회는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 신앙을 나누고 시대의 징표를 읽으며, 복음적 삶의 방향을 모색하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서 생태 문제를 성찰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를 외면하지 않고 함께 고민하며 응답하겠다는 다짐입니다. 특히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앞으로의 세상을 살아가고 책임져야 할 주체입니다. 지금의 생태 위기는 미래 세대가 가장 직접적으로 감당해야 할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젊은이들은 창조 세계를 돌보고 회복하는 사명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15년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깊이 응답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현대 사회가 직면한 생태 위기를 단순한 환경 문제로 축소하지 않고, 인간의 삶 전체와 연결된 문제로 바라보셨습니다. 특히 회칙에서 제시하는 ‘통합 생태론’은 인간과 자연, 경제와 사회, 문화와 영성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인간 사회 안의 불평등과 가난, 무절제한 소비와 개발 중심의 경제 구조는 환경 파괴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생태 문제의 해결 역시 단순히 기술적 방법이나 제도적 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인간 삶의 방향 자체가 변화되어야 하며, 사회 전체가 새로운 가치관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통합 생태론은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물과 전기, 먹는 음식, 소비하는 물건 하나까지도 지구 환경과 연결되어 있으며, 다른 이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무심코 사용하는 일회용품 하나가 바다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지나친 소비와 낭비가 더 많은 자원 착취와 환경 파괴를 불러오게 됩니다. 반대로 작은 절제와 실천은 공동의 집인 지구를 보호하는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생태적 삶은 거창한 활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안에서 시작되는 작은 변화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또한 우리에게 ‘생태적 회개’를 촉구합니다. 생태적 회개란 단순히 환경 보호에 대한 정보를 알고 관심을 가지는 수준을 넘어, 우리의 삶과 마음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지나친 소비와 편리함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필요 이상의 소비와 낭비를 줄이고, 창조 세계를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며 감사하는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맡기신 세상을 돌보는 청지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바라보며, 자연을 함부로 이용하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형제자매로 존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곧 생태 영성으로 이어집니다. 생태 영성은 자연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고,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창조주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작은 생명 하나 안에서도 하느님의 숨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생태 영성은 단순히 환경 보호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넘어, 감사와 절제, 나눔과 돌봄의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또한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모든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이러한 생태 영성은 우리의 일상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될 수 있습니다.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재활용을 생활화하는 일, 전기와 물을 아껴 사용하는 일, 가까운 거리는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 음식물을 남기지 않는 일 등은 모두 창조 세계를 보호하는 소중한 실천입니다.
서울대교구장이신 정순택 대주교님께서도 2023년 9월 1일 특별 사목 교서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배우고 실천합시다>를 통해 이러한 생태적 전환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교구장님께서는 본당 사목협의회 안에 생태환경분과를 설립하여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생태 사목을 펼쳐 나가도록 권고하셨습니다. 특히 생태 사도직 단체 ‘하늘땅물벗’의 설립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늘땅물벗’은 신앙 안에서 생태적 책임을 실천하며, 다양한 교육과 캠페인, 기도와 실천을 통해 공동체가 함께 창조 세계 보전에 참여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단순히 환경 보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삶이 하나로 연결되는 생태적 신앙 실천의 길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지키고 돌보는 일에 모든 신앙인이 함께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자연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실천하며, 사랑과 책임의 마음으로 창조 세계를 보살피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참된 사랑의 삶을 실천하게 될 것이며,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도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회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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