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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전도법
출 18: 1-12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일 가운데 하나는 전도입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전도하자니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는 사람에게 전도하자니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동안 좋은 관계가 잘못될까 걱정스럽습니다. 그래서 머뭇거리고 주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도에 대해 너무도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막 16:15절을 보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딤후 4:2를 보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잘 믿어보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도 명령 앞에만 서면 위축이 됩니다.
아이들이 제일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숙제입니다. 특히 방학이 끝나 가는데 숙제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두렵습니다. 숙제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학교를 가야하는 아이들 그 마음이 마치 죄지은 사람 같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숙제 밀린 학생처럼 늘 마음이 무겁고, 한편으로 죄송스럽고, 어떻게 해서든지 하긴 해야 할텐데... 하는 마음으로 부담스럽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살피면서 우리가 새로운 용기를 얻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이라도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부담을 떨쳐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순종하여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의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고하매...” 말하자면 모세가 장인 이드로에게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스스로 한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한 것입니다. 모세는 지금 자원하는 마음으로 전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자발적으로 전도한 첫 번째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세는 최초의 전도자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처음부터 자원해서 전도하지는 못했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받았지만 여러 차례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거부했습니다.
우선 자기는 자격이 없다고 핑계를 댔습니다.
출 3:11을 보면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분명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자기는 지난 40년간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살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제대로 제사를 드린 일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산 적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지난 40년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자기가 어떻게 전도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 핑계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지금 신앙생활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내가 어떻게 전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시며 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순종하며 입을 열기만 하면 그 뒤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이번에는 뭐라고 전해야 할지 모른다고 핑계를 댑니다.
출 3:13을 보면 모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말하자면 뭐라고 전해야 할지 모르니 못가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핑계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내가 뭐 알아야 전도하지?” 전도하려고 해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친히 해야 할 말을 가르쳐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요 14:26을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우리가 가서 전하기만 하면 성령께서 할 말을 생각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순종하기만 하면 해야 할 말은 주님께서 생각나게 해 주시고 주님께서 이끌어 가십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는 말주변이 없다고 핑계를 댑니다.
출 4:10을 보면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말하자면 말주변이 시원치 않아서 전도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핑계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자기는 배운 것도 없어서 전도하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자기는 성격이 소심해서 남들 앞에서 제대로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전도하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자기는 말 주변이 없어서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해서 전도하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준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 형편대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도는 말 잘하는 사람은 말 잘하는 대로, 말 잘 못하는 사람은 또 말 잘 못하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성격이 외향적이면 외향적인대로 내성적이면 내성적인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습 그대로 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설득에 손을 들었습니다. 순종하여 애굽으로 갔습니다. 정말 놀랍게도 모세는 위대한 일을 이루어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저들 모두 모세의 말을 듣고 애굽에서 출애굽하게 됩니다. 완강하게 버티던 바로도 끝내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살핀대로 모세는 자격이 없던 사람입니다. 모세는 뭐라고 해야 할 말도 몰랐습니다. 말 주변도 없어서 남 앞에 서기 어렵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섰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명하셨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어린 아이처럼 그 말씀 순종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는 달라졌습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전하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았는데 자원하는 마음으로 전했습니다.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변화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시작은 억지로 마지못해서 전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흐르면 우리 마음에 자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전하기로 작정한 사람이 장인 이드로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전할 사람을 지시해 주셨지만 자원하는 마음이 생기자 모세는 전할 사람을 자기 스스로 찾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전하고자 하는 자원하는 마음이 생기면 우리 마음에 또 전하고자 하는 사람이 떠오릅니다. 전할 대상을 찾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가 전한 사람은 장인입니다. 출 2장을 보면 모세는 나이 40이 되던 때 바로를 피해서 미디안 광야로 피신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여기서 정치적인 망명생활을 무려 40년간 하게 됩니다. 여기서 미디안 여인 십보라와 결혼하게 됩니다. 이 미디안에서 일가를 이루고 살게 됩니다. 이 때 그의 장인 이드로의 따뜻한 배려가 큰 힘이 됐습니다.
이드로는 홀로 도망치듯 애굽을 떠나온 모세를 자기 마을에 정착하도록 허락했습니다. 심지어 자기의 딸을 아내로 주었습니다. 일터를 주고 가정을 이루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모세에게 이드로는 장인이기 이전에 너무도 고마운 은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자기 장인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놀라운 역사를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 크신 은총을 전했습니다. 자기 장인도 그 크신 은총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장인도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자기처럼 큰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요사이 기독교계에 주목을 받고 있는 책 가운데 하나가 [천국은 확실히 있다]라는 책입니다. 토마스 주남이라는 한국계 미국인이 자기의 체험을 정리해서 쓴 책입니다. 이 분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를 받은 분입니다. 지난 7년 동안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천국을 17번 다녀왔답니다. 그러면서 천국은 막연한 상상 속에 존재하는 곳도 아니고, 영적인 어떤 환상 속에 존재하는 곳도 아니라 천국은 실제하고 분명히 믿는 성도들이 들어갈 곳이고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답니다. 그래서 책 제목을 [천국은 확실히 있다.](Heaven is so real)라고 지었습니다.
이 책에서 한번은 주님께서 자기를 지옥으로 데려가셨다는 것입니다. 그 지옥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나오는데 여기서 자기가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을 보게 됐답니다. 바로 자기의 어머니와 자기 친구들 자기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 가운데 먼저 세상 떠난 사람들 그들이 그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있더랍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특히 자기 어머니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아 너무 고생했고 주님의 도움으로 겨우 그 얼굴 표정만큼은 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천국이 확실히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반드시 그곳에 들어가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 뿐 아니라 먼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저 천국에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장차 우리는 천국에 들어갔는데 우리가 사랑하던 그 사람들이 천국에서 만날 수 없다면 그 때 우리 마음이 어떨까요?
그래서 우리는 먼저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해야 합니다.
사실 그대로를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의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고하매”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장인에게 자기가 지금까지 체험한 일들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살을 붙이거나 설득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를 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이 내게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 그것을 그대로 전하기만 했습니다.
기자정신을 나타내는 말로 카파이즘이라는 말을 쓰는 모양입니다. 일평생 전쟁터를 누비며 종군기자로 전쟁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전하다가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지뢰를 밟아 사망한 로버트 카파라는 기자를 기리기 위해 생겨난 말이랍니다.
실제로 종군기자들은 이 기자정신 카파이즘에 투철한 사람들입니다. 목숨을 걸고 생생한 전쟁의 현장에 뛰어듭니다. 그리고 자기가 보고 겪은 사실만을 보도 합니다.
그런데 때로 그 보도가 전쟁의 흐름을 바꾸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기도 합니다. 실제로 최초의 종군기자로 일컬어지는 런던 타임스의 윌리엄 러셀 기자가 크림 전쟁에 참전하여 전쟁 기사를 썼습니다. 그 기사를 보고 나이팅게일이 전선으로 달려갔습니다. 여기서 적십자 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CNN방송의 아만푸어 기자는 “기사를 내보내면 즉시 관심을 보내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전쟁터로 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전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겪고 체험한 것을 있는 그대로 전하면 됩니다. 남에게 들은 이야기나 공부해서 알게 된 이야기는 힘이 약합니다. 자기가 예수 믿으며 체험한 이야기 예수 믿고 난 뒤에 변화된 것들 이런 것들을 전하면 됩니다.
성령께서 그 사실이 전해지는 과정에 역사하십니다. 듣는 사람의 심령을 움직이십니다. 구원의 문이 열리고 축복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일부러 과장하거나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다른 것을 가미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더욱 없는 사실을 덧붙여서는 안 됩니다. 내가 만난 예수, 내가 체험한 하나님의 역사를 전하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살펴봐야 합니다.
첫째, 예수 믿고 난 뒤에 내게 일어난 변화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가 우리 심령 가운데 들어오신 후에 우리에게 참 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큰 형수님이 시집을 오셔서 제가 결혼해서 분가할 때까지 오래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형수님이 저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지요. 처음에 이분에게 전도를 할 때 전혀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지난 뒤에 교회를 다니시게 됐는데 교회 다니게 된 동기를 말씀하시면서 제 이야기를 하시더라구요.
“삼촌은 어려서 무척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늘 어두웠는데 예수 믿고 나더니 사람이 달라졌어요. 적극적이고 대범하고 또 밝아졌어요. 나도 좀 그렇게 되보고 싶어서 예수 믿기로 했어요”
형수님 말씀을 듣고 보니까 그렇더라구요. 제가 정말 예수 믿고 많이 변했더라구요.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고 변한 이야기를 전하시면 됩니다.
둘째, 예수 믿고 난 뒤에 좋은 점을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 믿고 나니까 안 믿었으면 어떻게 할 뻔 했나?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선 믿음이 생겨서 염려 근심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돼서 좋습니다. 그리고 죄사함을 받고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올 수 있게 돼서 좋습니다. 뿐만 아니라 좋은 교회에 와서 성도들과 믿음 안에 교제를 나누게 돼서 좋습니다. 저 천국 갈 소망을 가지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게 돼서 좋습니다. 인생의 새로운 목표가 생기고 보람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돼서 좋습니다... 열거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고 좋은 점을 이야기 하시면 됩니다.
셋째, 예수 믿고 생긴 일들을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 믿고 나니까 예수 때문에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어떤 분은 병 고침을 받았다고 좋아합니다. 어떤 분은 가정이 평안해 졌다고 좋아합니다. 어떤 분은 사업이 잘된다고 좋아합니다. 어떤 분은 속 썩이던 자식이 변했다고 좋아합니다. 어떤 분은 물질적인 복을 많이 받았다고 좋아합니다. 갖가지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고 생긴 일들을 이야기 하시면 됩니다.
전도는 안 해 본 분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지금 쉬고 있는 분들에게도 짐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쉽게 생각하고 지금 시작해야 합니다. 처음에 억지로라도 순종하는 마음으로 시작해 보십시오. 멀리서 찾지 말고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겪은 일들을 있는 그대로 말해 보십시오.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사람
출 18: 1-12
기독교적인 인간상, 혹은 성서적인 인간상이 무엇일까요? 믿음의 삶을 살면서 우리 안에 이루어나가야 할 어떤 인간상의 모델이 있다면, 저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그를 통해 한 민족을 이루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 축복의 통로가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됨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내 자리가 너무 아쉽게 느껴지고, 내 주변의 사람들이 “당신은 정말 우리의 축복이었소, 당신은 우리 가정의 축복이요, 우리 직장의 축복이요, 우리 사회의 축복이었소, 당신이 있음으로 우리가 삶의 의미를 발견했소”라고 기억해 줄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내가 없어지자 누군가 말하기를 “시원하다”라고 말한다면 참 곤란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늘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30분만 같이 있으면 너무 불편하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면 굉장히 부담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같이 있으면 참 편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분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의 어려운 문제들이 다 해결되고, 삶의 용기도 생기고, ‘나도 기도하면 되겠구나, 아 정말 하나님의 은혜는 놀랍구나’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 주변이 이런 친구목사님들이 몇 분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분이 지금 종교교회 부목사로 있는 천세기 목사님입니다. 감신 4년 후배인데, 나이는 저보다 한 살 많습니다. 그래서 둘이 서로 같이 맞먹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천목사님을 만나면 참 마음이 편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겪은 여러 가지 아픈 문제들을 같이 나누기도 하고, 서로 조언하기도 하고, 그냥 별 의미 없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데, 언제나 헤어질 때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사우나를 하고 나온 기분입니다. 목회의 지혜도 생기고, 힘도 생기고 참 좋습니다. 저는 오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의 짐이 되고 있습니까? 축복의 통로가 되고 있습니까?
장인 이드로와의 만남
우리가 아는 것처럼 수많은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위 환경도 어려웠고, 함께 광야를 걸어가면서 많은 갈등들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이 바로 오아시스와 같은 휴식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모세에게는 눈에 보이는 오아시스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위로와 축복이 필요했습니다. 지독하게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 애굽의 악한 습관과 노예근성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스라엘은 지도자 모세에게 있어서는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이제 모세는 지쳤습니다. 그는 애굽을 떠난 후 한번도 제대로 쉬지 못했고,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불신앙으로 모세 자신이 심한 마음의 상처를 얻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광야생활의 대부분을 백성들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 즉 재판하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홀로 앉았고 백성들은 모세를 만나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이런 모세의 삶이 얼마나 피곤했을까요?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위해 휴식과 위로를 얻을 수 있도록 한 축복된 만남을 주선해 주셨습니다. 바로 장인 이드로와의 만남입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의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세를 찾아왔습니다. 먼 광야 길을 걸어 찾아온 것입니다. 모세는 아내 십보라와 만나고 두 아들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모세가 그의 아내 십보라와 두 아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는 도중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셔서 십보라가 급하게 두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것 까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 후에 모세가 언제 십보라와 두 아들을 장인에게로 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본문 3-4절을 보면 모세는 자기 가족들과 꽤 오래 떨어져 있었구나 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 두 아들을 데렸으니 그 하나의 이름은 게르솜이라 이는 모세가 이르기를 내가 이방의 객이 되었다 함이요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보십시오 모세는 아내와 두 아들을 만나는 순간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 주셨던 은혜를 기억합니다. 과거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던 바로 그 때를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인 이드로와의 만남을 단순히 가족모임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지친 모세에게 회복과 위로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준비한 사건으로 보아야 합니다. 모세는 장인 이드로를 통해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굉장한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믿음의 위로였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세우는 지혜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모세가 어떻게 믿음의 위로를 받게 되었는지 살펴보십시다. 장인 이드로의 본래의 이름은 르우엘입니다. ‘이드로’라는 말은 직분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뛰어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당시 사제나 제사장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1절에서도 그는 미디안의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이드로는 당시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로 계시된 것처럼 정확하게 하나님을 알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이드로는 집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낸 놀라운 일에 대해 듣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모든 고대 근동지역의 사람들에겐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거대한 나라 애굽에서 해방된 사건, 그것도 홍해가 갈라지고 놀라운 기적의 소식들은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도 집에서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냥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에 대해 더 분명하게 듣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딸과 손자 둘을 데리고 광야를 통과하여 모세를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장인 이드로가 모세를 만난 그 자리에서 제일 먼저 관심을 가지고 주고 받은 내용이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8절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의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고하매’ 라고 말합니다. 또 9-11절을 보면 장인 이드로는 모세의 이 말을 듣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베푸신 은혜를 기뻐하며 모든 신보다 크신 여호와를 찬양하게 됩니다. 장인 이드로의 관심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듣는 것입니다. 이것을 듣기 위해 일부러 모세를 찾아온 것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듣고는 드디어 이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히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그는 이제 내가 알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감격을 가슴에 소유한 사람입니다.
믿음의 위로가 되는 사람
그러므로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믿음의 위로가 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사건이후 광야의 길을 걸어오면서 이렇게 이드로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한 일이 없었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솟아날 때도, 하늘에서 만나를 내렸을 때도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때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격으로 기뻐하고 예배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드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감격할 뿐 아니라 12절에 보면 하나님께 예배하였습니다. 번제물과 희생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왔고 아론과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떡을 먹었습니다. 장인 이드로의 방문은 모세 자신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놀라운 역할을 한 것입니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께 대해 간절히 알고 싶어하는 이 한사람, 장인 이드로를 통해 놀라운 위로와 힘을 얻게 됩니다. 모세는 수십, 수백 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려 있는 한 이방인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지 못하는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였고 지친 마음에 새 힘을 얻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장인 이드로는 모세에게 믿음의 위로가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한 사람,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믿음의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서로에게 믿음의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강퍅해질 대로 강퍅한 우리들이 어느 날 복음에 관심을 가지는 불신자를 만나게 되고 예수님에 대해 알기 원하는 그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베푸신 놀라운 사랑에 대해 말하다가 우리 자신이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상처의 치유를 받게 됩니다. 전도는 참 이상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말하면서 내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 가슴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슴 설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을 위로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바로 말씀을 사모하는 자를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르는 한 불신자를 만나게 하심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 불신자에게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다 내가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전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복된지 모릅니다. 반대로 전도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로와 힘을 얻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도가 되지 않고 새로운 신자가 없는 교회는 참 불행합니다. 은혜를 나누는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인 제가 막 힘을 얻을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한 사람을 만날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목사는 힘을 얻습니다. 보통 제가 전도 집회를 나가면 전하는 말씀이 거의 일정합니다. 물론 교회마다 조금씩 다른 말씀을 증거할 수 있지만 대부분 저는 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청량리 역에서 찬양노방 전도할 때 일어났던 구원의 사건들을 간증하고 또 전도에 대해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저는 똑 같은 말씀을 전하는데, 그런데 왜 그 말씀이 지겹지 않지요!, 저는 제가 예수님 만난 사건을 간증하면서 제 마음이 다시 예수님을 체험합니다. 전도에 대해 선포하면서 제 가슴이 뜁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을 만나서 예수님을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신나는지 모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세례식을 하는 것을 참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한 사람이 10주 동안의 양육을 끝내고 세례 간증문을 읽고 세례를 받는 것을 보면 예배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에게 내가 처음 예수 만났을 그 때의 감격을 회복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울면서 세례 간증문을 읽습니다. 그 때 제가 교우들의 표정을 가만히 보면 같이 우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아마 처음 예수 만났을 때의 감격이 되살아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갈급하여 세례 받는 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의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계속 새로운 신자를 만나고 또 전도하기를 원합니다. 서로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믿음의 위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혜로운 모사와 같은 사람
두 번째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지혜로운 모사가 되는 것입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에게 믿음의 위로와 힘이 된 것 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놀라운 지혜를 주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튿날 모세는 백성들을 재판하기 위해 재판석, 당시로서는 아마 바위 위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재판 자리에 앉았고 백성들은 자신들의 각종 문제들을 가지고 모세에게 나아와 서로 시시비비를 가리고 모세의 판결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 공동체는 거의 이백 만 명 정도라고 생각할 때 이 일은 보통일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백성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렸고 모세는 모세대로 이 일로 지쳐있었습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이것을 보고는 ‘이것은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는 모세에게 몇 가지를 충고를 하게 됩니다. 이드로가 발견한 문제점은 모세 혼자서 이 일을 다 하는 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인가를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드로는 모세에게 “그대가 하는 일이 선하지 못하도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선하지 못하다는 말은 모세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운다든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세는 열심히 일한 사람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은 열심히 일했지만 효율성은 없었습니다. 이드로는 정확하게 이 문제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1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와 그대와 함께한 이 백성이 필연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중함이라 그대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장인 이드로가 볼 때도 모세가 쓰러지기 직전까지 간 것 같습니다.
대체로 삶의 현장에서 직접 힘든 싸움을 하는 사람은 오히려 상황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는지, 심지어 이기고 지는 것조차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이 때 필요한 사람이 바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바둑을 하거나 장기를 두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기려는 마음을 가지고, 욕심을 부리면서 바둑에 열중하는 사람은 전체가 안보입니다. 그러나 멀리서 훈수를 두는 사람은 잘 보입니다. 욕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멀리서 객관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드로가 바로 훈수를 두는 사람처럼 모세와 이스라엘의 문제를 보았습니다. 또 운동경기 중에 선수들은 경기에만 열중하기 때문에 경기의 전체 흐름을 잘 모릅니다. 우리는 멀리서 보니까 이쪽으로 저쪽으로 패스해라 왜 그 모양이냐? 라고 소리치고 다 아는 것 같지만 경기 중에 있는 선수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 때 중요한 사람이 감독과 코치입니다.
저는 우리교회에 지혜로운 일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앞장서서 일하는 사람들도 필요합니다. 뒤에서 묵묵히 기도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리나 더욱 필요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내 놓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어떤 단체이든 이런 브레인 그룹이 얼마나 있느냐가 그 단체의 영향력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목사 한 사람의 카리스마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일수록 더 병들기 쉽고,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모세는 하루 종일 열심히 일을 했지만 모세자신도 지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지치게 하는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열심히 주를 위해 봉사한다고 하지만 교회 일로 상처입고 지치게 됩니다. 그것은 지혜가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가진 사람이 이 시대에 얼마나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모사가 없기 때문에 영적 전쟁에도 집니다. 제갈공명같은 군사가 있으면 좋겠지요. 모사는 마치 코치와 같습니다.
혹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런 삶의 코치가 있습니까?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은 지혜로운 상담자가 되어 이렇게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답을 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방향을 잃고, 목적을 잃었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찾아가서 상담할 데가 없습니다. 속에 있는 것을 이야기할 데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성행하는 것이 점치는 것입니다. 700-0000의 전화서비스가 그래서 인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업인이 무당을 찾아다니고 정치인이 점을 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땅에는 진정한 상담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점장이가 사람들의 과거를 좀 알아 맞추면 ‘용하다’고 합니다. 과거는 좀 알아 맞추지만 삶에 답을 주지는 못합니다.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면 부적을 붙여봅니다. 부적도 역시 답이 아닙니다. 이 때 우리는 불신자에게 지혜로운 상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역으로 지친 모세에게 이드로는 좋은 상담자, 지혜로운 조언자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코치요 가장 좋은 상담자라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름이 기묘자, 모사라는 말이 너무 좋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이지요.(사9:6-7) 이 말은 ‘놀라운 상담자’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 진정한 상담자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우리의 창조자요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과거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은 현재 우리와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만이 아니고 그 분은 우리의 미래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죽을 날도, 우리가 만날 모든 일도 다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같은 상담자가 이 땅에는 없습니다. 주님은 삶의 코치, 가장 놀라운 상담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가장 좋은 상담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을 세우고 조직하는 일
세 번째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것은 지혜를 가지고 창조적인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모세에게 있어서 장인 이드로는 모사와 같은 지혜로운 충고자였습니다. 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무엇을 제안했습니까? “그대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출18:21) 이 말은 ‘조직을 만들어라’ 라는 말입니다. ‘네 혼자서 다 하려고 하지 말고 중간지도자를 세워라 그리고 그들과 협력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천부장이란 말 그대로 천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사람, 백부장은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사람, 십 부장은 열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정말 좋은 제안입니다. 이드로의 이 지혜로운 제안은 이스라엘을 한 나라로 세우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을 세우고 조직하는 일에 달려 있습니다. 단순하게, 그러면서도 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조직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전도 팀이 전 세계를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조직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직적으로 일하되 무섭게 일했습니다. 회의나 의논을 많이 하는 단체치고 제대로 되는 단체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회의는 짧게, 기도는 많이, 그리고 모든 조직이 풀가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드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공동체를 조직하는 일만이 아니라 함께 일할 사람들의 선택의 기준까지 제시합니다. 그가 말한 재덕이 겸전한 사람이란 세 가지를 갖춘 사람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째는 진실무망한 자입니다. 이것은 신실한 사람, 성실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불의의 이를 미워하는 자입니다. 욕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뇌물을 받지 않을 사람이지요. 이드로는 이 세 가지 조건에 맞는 사람을 세우라고 충고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뽑은 일군들, 중간 지도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일입니다. 20절에 보면 이드로는 모세에게 이들을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라고 말합니다. 좋은 일군들을 세우고 조직하는 일, 행정을 바르게 하는 일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교회의 기능을 다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받은 일군을 세우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말씀으로 훈련되지 않는 사람이 어떤 일을 맡게 되면 오히려 그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상처를 입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된 제자가 되는 것은 교회의 목표입니다. 교회는 존재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교회의 존재가치는 건물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주고, 복음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중에 어떤 누구도 말씀의 훈련이 필요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목사인 저도, 장로님이나 권사님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좋은 믿음의 일군이 되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 말씀으로 훈련받은 좋은 중간 지도자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본문 출 18장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모세가 그 장인을 보내니 그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니라” 장인 이드로는 모세에게 지혜로운 충고자가 되고 모세의 사역에 코치와 같은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유유히 사라질 줄 알았습니다. 장인 이드로가 노욕이 생겨서 모세의 일을 간섭을 했다든지, 끝까지 남아서 모세의 짐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축복의 존재였습니다. 모세를 위로하고 모세에게 지혜로운 충고를 하고 그리고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끝까지 축복의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에게 짐이 되지 마십시오. 축복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축복의 통로로, 가정에서 축복의 통로로, 그리고 직장과 사회에서 축복의 통로가 되어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자가 되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에 믿음의 위로가 되었고, 지혜로운 충고자가 되었던 이드로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교회에 많이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장인을 만나는 모세
출 18: 1-12
18장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를 찾아와서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드로의 방문은 모세에게 대단한 위로를 경험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모세에게 지난날을 회고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였고, 믿음이 새로워지게 하였으며, 장인의 신앙도 확고해지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모든 힘든 결정을 혼자서 내려야 하고 혼자서 책임져야 했습니다. 모세는 지쳐있었습니다. 그는 애굽을 떠나 온 이후로 한 번도 제대로 쉰 적이 없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으키는 반역과 불순종으로 심한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죽고 싶을 정도로 좌절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마침내 휴식과 위로를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장인 이드로를 만나게 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장인은 모세를 찾아와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그 놀라운 일들을 알아주고, 격려해주며, 함께 감사하고 경배했으며, 이드로는 믿음의 확신을 얻고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모세와 이드로의 만남의 의미였습니다.
5절에 의하면, 모세가 찾아온 장인을 만난 곳은 하나님의 산인 호렙산 아래였습니다. 이 호렙산은 모세에게 잊을 수 없는 곳입니다. 과거에 피난살이할 때 살아남기 위해서 양치기로 숨어 지내던 산이요, 그 산에서 양을 치다가 하나님께 애굽으로 가서 내 백성을 건지라는 소명을 받은 산이며, 엊그제는 그 산에서 지팡이를 잡은 손을 들고서 기도하면서 아말렉을 물리쳐 승리했던 산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동안 헤어졌던 아내와 아들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장차는 그 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40일을 금식하며 지내며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선포하시는 율법을 받고, 성막의 설계도와 법궤에 넣을 십계명 새긴 돌 판을 받게 될 산입니다.
호렙산은 신약 교회의 상징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곳이며, 사명을 부여받는 곳이고, 세상과의 모든 싸움에서 승리하는 기도를 드리는 곳이며, 잃어버렸던 것들을 되찾고 새 삶의 방법을 배우는 곳입니다. 그런 면에서 호렙 산은 신약의 교회의 상징이고, 거기서 모세가 이드로를 만나는 장면은 우리가 교회에서 성령을 만나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모세가 십보라와 두 아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는 도중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셔서 십보라가 급히 차돌을 취하여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였다는 것까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언제 아내와 아들들을 처갓집으로 돌려보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모릅니다. 혹시 죽을 뻔 했던 그날 바로 처자를 돌려보냈는지, 아니면 애굽에 도착했다가 바로와의 싸움이 점점 치열해질 때에 가족들을 염려하여 돌려보냈는지 모르지만 모세는 가족들을 돌려보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족들을 장인이 데리고 온 것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 호렙산에 가까이 오게 되었는데, 그곳은 이드로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이드로는 자기 사위인 모세가 인도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동네 부근으로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모세의 가족들을 데리고 찾아왔습니다.
3-4절에 보면 “그 두 아들을 데렸으니 그 하나의 이름은 게르솜이라. 이는 모세가 이르기를 내가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 함이요,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그 두 아들을 만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백성들의 불신앙과 광야의 거친 환경과 싸우는데 지쳐서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그 은혜를 다시 기억하게 해 주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자기 동족을 도우려다가 일이 잘못되어 애굽 사람을 살해하게 되었고, 그 일 때문에 지명수배를 받고 도망쳤는데, 그때 미디안의 제사장인 이드로의 집으로 피신하여 그 집의 일곱 딸 중에서 장녀인 십보라와 결혼하였고, 거기서 40년을 살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바로의 칼날로부터 지켜주셨고 살아갈 터전을 주셨는데, 그때 하나님의 섭리로 이룬 가족이 십보라요 게르솜이요 엘리에셀입니다. 그들을 만나는 순간 지난날의 모든 기억과 감동이 새롭게 모세의 가슴속에서 치밀어 올랐을 것입니다.
모세와 이드로의 만남은 단순한 가족 간의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히 알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만남은 모세에게 대단한 위로와 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지켜주셨고 인도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들끼리 만나는 만남은 만남 자체만으로도 서로 간에 은혜와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떠올리지도 않고 자기 살아가는 얘기, 물질 자랑이 중심이 된 만남은 서로에게 상처와 낙심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주 가지는 만남은 어떤 만남입니까? 하나님을 중심에 둔 만남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1절에 보면,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하나님이 모세에게와 자기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을 다 듣고 왔다고 되어있습니다. 이드로가 그 일을 어떻게 들었는지는 모릅니다. 모세가 사람을 보내어 가족들의 안부를 물으며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전해 주었는지, 아니면 사막을 지나는 상인들에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대충 알고 왔다는 말입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제사장이었지만 이방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기는 알지만 바로 알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드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행하신 일들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텔레비전도 없었고 통신위성도 없었지만, 그런 큰일은 온 세상에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이드로는 그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에 관한 소식을 더 듣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 것이라고 확인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찾아온 것입니다.
이드로는 자기 사위가 유명하게 된 것에 대하여 궁금증이 생겨서 온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이 내 사위인데 내가 도와주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공치사 하거나, 처음에는 별로 신통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가보니까 정말 엄청난 일을 하고 있더라고 자랑할 자랑거리를 찾아서 온 것도 아닙니다. 그는 모세를 통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를 듣는 순간,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에 관하여 궁금증이 가득 찼습니다. 자기가 한평생 제사 드렸던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라, 구체적인 하나님을 알고 싶어졌고, 바로를 쳐부숴버린 대단한 하나님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찾아온 것입니다.
한번 비교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와 이드로의 태도가 얼마나 다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전부 직접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열 가지 재앙들을 다 보았고 홍해가 갈라지는 현장에 거기 있었으며, 그 기적으로 살아난 장본인입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날마다 먹은 당사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님을 의심했고 원망했으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이드로는 멀리서 듣기만 하고도 그 하나님에게 빠졌습니다. 그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싶어서 먼 길을 달려온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온 장인 한 사람 때문에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수백만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려 있는 한 이방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필요한 위로와 격려가 이런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한 사람의 모습이 목회자를 힘이 나게 하고 격려를 줍니다. 습관에 매여 교회를 드나드는, 변화 없는 천명이 아니라,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는 한 사람 때문에 사명감이 되살아나고, 힘이 생기고,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의 종들의 위로가 되어 주십시오.
이드로는 그냥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세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할 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모세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만난 아내와 두 아들이었습니다. 바로가 무서워서 이방에 객이 되었고, 한 순간도 마음이 편치 못했던 피신하던 시절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미디안에서 가정을 이루고는 얼마나 위로를 받았고 하나님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때의 하나님에 관한 고백을 아이들의 이름에 담아 두었습니다. 아들들의 이름을 보십시오, 게르솜은 ‘내가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엘리에셀은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벗어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아들들의 이름 속에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고스란히 간직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가장 힘들어하고 지쳐있는 때에 그들을 다시 만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문제는 수많은 백성들의 원망이었습니다. 그들의 배신과 그들이 준 상처가 모세의 마음속에 가득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마음은 실망과 상처로 가득 차 있었고 심신이 지쳐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인이 데리고 온 아내와 두 아들을 보았을 때, 그의 마음은 가장 가난하고 비참했던 시절로 되돌아갔습니다. 백성들의 원망으로 머리가 아팠던 일들을 잊고 옛날 남의 땅에서 숨어 지내던 시절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만나 주셨고, 어떻게 자기를 선대해 주셨는가를 다시 기억했고, 말할 수 없는 감사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때에 도우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도우신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 사건이 모세에게 대단한 위로가 되었고, 그의 믿음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은혜와 감격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가장 낮은 곳에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은혜가 있고 성공한 자리에 감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를 되돌아볼 때 은혜가 다시 회복되고, 감사가 다시 차오르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원치 않는 상황을 당하였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고 계시다면, 지난날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시고 믿음과 평안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장인이 자기를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밖으로 달려 나가 예의를 갖춰서 장인을 맞이했습니다. 모세는 장인이 이방인이라고 해서 무시하고 진 밖에서 만나지 않았습니다. 절하고 입 맞추고 진 안으로 모시고 들어가서 정중하게 모셨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안부를 묻습니다.
모세는 겸손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은혜를 잊지 않은 사람입니다. 모세가 가장 힘들 때 갈 곳 없는 그를 받아준 사람이 이드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딸까지 주어 사위를 삼았고, 그가 큰일을 위해서 애굽으로 가면서 돌려보낸 아내와 아들들을 맡아 주었습니다. 장인이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모세는 그 고마운 장인을 맞으며 밖에 나가서 겸손히 맞이했던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배은망덕자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망하고 맙니다. 우리는 오늘도 그런 사람들을 자주 만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은혜 입은 사람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를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해 주는 분들을 잊지 말아야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와 장인이 만나서 나눈 대화는 단순한 안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나눈 대화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8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길에서 그들이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고하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일들은 이드로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열 가지 재앙과 장자를 죽이신 일, 그리고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은 구원하시고 애굽 군대는 수장시키신 놀라운 일은 이미 세상에 다 아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드로는 밖에서 소문으로 들은 것보다 더 자세한 내용을 모세에게 직접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건성건성 듣지 않고 자세히 들었습니다. 이드로는 모세로부터 애굽을 나온 후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경험했던 고난과,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을 다 들었습니다. 이드로는 모세에게 직접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들으면서 얼마나 은혜가 되고 얼마나 많은 것을 깨달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9-11절입니다.
“이드로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모든 은혜를 베푸사 애굽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을 기뻐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사람의 손 밑에서 건져내셨도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히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드로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모세로부터 직접 들었을 때, 소문으로 들었던 것보다 훨씬 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깨닫게 되었고, 대단한 확신가운데 서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에 대한 그의 신앙은 소문을 듣거나 지식으로 배워서 믿는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왔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드로는 이제 확실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바로 그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라고 증거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1절에 “이제 내가 알았도다.”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어떤 일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이런 결실이 어디서 온 것입니까? 내가 다 알고 있다고 하는 자세가 아니라, 말씀을 더 들으려고 하는 자세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더 알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들려주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전에 알았던 것을 더 분명히 알게 하실 뿐 아니라, 그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진리들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으면 들을수록 새롭습니다. 성경을 다섯 번째 읽을 때에 깨달은 진리가 다르고 열 번째 읽을 때 깨닫는 진리가 깊고 심오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할수록 엄청난 진리가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는 아무리 갈급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말씀을 아무리 많이 읽고 들어도 그것은 체하거나 부작용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진리를 깨닫게 하고 확신의 자리에 서서 찬양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앞에 나아와 기도하다가 그것이 해결되자마자 제 길로 가버리고 맙니다. 세속적인 한두 가지 문제를 해결 받고는, 이제는 무슨 더 볼일이 있겠냐는 식으로 하나님을 떠나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은혜와 진리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드로의 태도와는 영 다른 모습입니다.
예를 들면 병을 고쳐볼까 하고 교회를 찾아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병 고침을 받고 나면, 더 이상 하나님께 열심내지 않습니다.
병을 고쳐 주셨으면, 병 고침 받은 사실로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은혜를 발견하고, 이제는 병을 고쳐 주시는 그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모시기 위해서 그분께로 더 가까이 나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시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표면적인 문제를 해결 받은 것으로 다 된 줄 아는 천박한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드로처럼, 하나님이 행하신 그 놀라운 일에 대하여 더 이상 들으려고 하지 않으며,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엄청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들으려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설교를 듣고서 설교자에 대한 평이나 하고,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걸리는 설교가 나오면 분을 품고 거부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입니까? 그런 사람은 이미 불신자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일을 직접, 그리고 상세히 들어야겠다고 찾아온 이드로는 모세에게 직접 듣고는 외쳤습니다. “이제 내가 알았도다.” 무엇을 알았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내가 알았도다.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고 크시도다. 그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무엇까지 주실 수 있는지를 이제 내가 알았도다. 내가 누구를 향하여 제사를 드리고 내가 누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도 내가 알았도다.” 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을 했습니다. 이제는 그의 삶 전체가 하나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사모한 사람이 받은 은혜요, 어느 시대에나 말씀을 사모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여러분, 날이 갈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양으로는 다함이 없고 깊이로는 끝이 없습니다. 말씀을 깨달았으면 더 깊은 것을 깨닫기 위해서 다가서고, 은혜를 받았으면 더 큰 은혜를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만천하를 향하여 “내가 이제 알았도다." 라고 선언하는 성숙하고 확고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2절에 보면,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가져왔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으니라." 고 했는데, 그들이 하나님앞에서 제사를 드리고 교제했다는 말입니다. 참된 예배 뒤에는 참된 교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누어 먹은 떡은 무교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게 된 장인과 모세가 함께 성찬식을 했다는 말이 되는데, 성찬식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구원하신 하나님과 한 가족으로 교제하는 예식입니다. 구원자와 구원받은 인간이 하나 되고, 구원받은 사람들 끼리 하나가 되는 진정한 교제의 상징이 성찬식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진리를 알고 믿는 자가 마지막에 받는 구원의 상징입니다. 모세의 장인이 성찬에 참여했다는 것은, 이방인인 그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고, 그것은 모세의 간증을 들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모세가 자세하게 들려준 간증 때문에 장인의 바른 신앙이 확립되었고, 감사와 찬양과 바른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그들이 성찬을 나누게 된 것입니다.
이 모두가 모세가 하나님을 바르게 간증한 결과물들입니다.
이드로는 모세에게 지난날의 은혜를 기억나게 해주어 위로를 주었고, 모세는 장인에게 자기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일들을 상세히 이야기 해줌으로서 믿음을 세워주었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족과 이웃에게 나누어줌으로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믿음을 키워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평탄한 길이 아니라 긴장과 투쟁이 연속되는 광야 같은 길입니다. 우리 안에서는 아직도 변화되지 못한 본성이 성령을 거스릅니다. 정욕 때문에 눈이 어두워서 깨닫지 못했는데, 지나고 나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여 마음이 황폐해진 것이 발견됩니다. 혈기 한 번 낸 것 때문에 충만하던 기쁨이 간곳이 없이 사라지고, 습관적으로 행동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리 떨어져 버린 자신을 발견하며 후회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믿든 잘못 믿든 하나님 편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아말렉같은 사단이 끊임없이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바르게 지속하며 전진하려고 한다면 누군가의 은혜와 격려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사람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고, 자기에게 행하신 주님의 일들을 증거 하여 광야 같은 세상에서 신앙생활 하는 우리가 서로에게 위로와 구원의 열매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