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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구합시다
창세기 32:13~32
하란을 떠나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나선 야곱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이 있으면서도 형 에서가 마중 나온다는 소식을 들을 때 기쁜 것보다는 두려움이 앞서게 되었습니다. 여러 해 전이었지만 형에게 못할 일을 저지른 야곱은 마음에 큰 부담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두려워하며 근심 중에 싸여서 고민하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의 사자들이 나타나서 그에게 용기와 확신을 주었습니다. 앞에서 지켜 주고 뒤에서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 받았을 때 야곱에게는 담력이 생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야곱은 그 나름대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창세기 32장 13절 이하에 보면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과 대면한 야곱은 이제 선물을 통해서 에서와 우정을 갖기 위해 세심하게 노력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에서를 두려워해서 에서의 손에서 자신을 구해 주기를 하나님께 구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두려움 때문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저 어떤 대책도 강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만을 바라고 기도만 하고 앉아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한 다음에는 우리의 기도를 우리 노력을 통하여 제2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에는 몇 가지 과정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 7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앉아서, 혹은 서서, 혹은 누워서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구한 것을 찾아야 합니다. 방에서 돈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 찾게 해 달라고 기도만 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이 아니라 방을 쓸고 뒤지며 찾습니다. 찾는 것도 기도입니다. 찾지 않으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모든 사색과 노력을 다 기울이면서 하나님의 섭리에 의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막연히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부딪친 일을 어떻게 신중히 다루어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시는 중에 응답하십니다.
성난 에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야곱은 아주 귀한 선물을 보냈습니다. 그것은 좋은 옷이나 값진 보석이 아니라 580마리의 가축이었습니다. 사실 그때 야곱에게 좋은 옷도 값진 보석도 없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보냈습니다. 그처럼 많은 가축을 선물로 보낼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야곱을 번영토록 축복해 주셨는가 하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매우 지혜롭게 처신했습니다. 그의 재산의 일부를 떼어 줌으로 나머지를 구하는 것이 모든 재산을 다 빼앗기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나친 욕심 때문에 결국은 다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지혜 있는 일은 아닙니다. 조그만 일에 인색해서 큰 일에 손해를 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야곱은 이 선물들이 야생 동물만 사냥하고 길들인 가축들은 많이 갖지 못한 에서의 마음에 들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양들은 얼룩진 양들이었기 때문에 얼룩지고 점 있는, 색깔이 있는 양을 에서가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잠언에 보면 “뇌물은 임자의 보기에 보석 같은즉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케 하고 선물은 그 사람의 길을 너그럽게 할 뿐 아니라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한다”고 했습니다.(잠 17:8, 18:16, 21:14)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우리에게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과 화해할 수 없다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만 합니다.
매튜 헨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과 평화를 아무리 값비싸게 산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참 잘 샀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야곱은 에서에게 아주 겸손하게 자기의 의사를 전했고 그것도 아주 현명한 방법으로 하도록 종들에게 일렀습니다. 17절과 18절을 보세요. “그가 또 앞선 자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엣 것은 뉘 것이냐 하거든 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보면 야곱이 꼭 에서에게 ‘주’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야곱은 580마리의 가축을 여러 떼로 나누어 보내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같은 말을 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그의 선물들이 귀하게 보이도록 했고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 자기의 공손한 자세가 에서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입니다.
인간성이 지니고 있는 선에 대한 우정 있는 신뢰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인간성이 지닌 악에 의해서 빚어지는 많은 불행을 예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만일 자기가 에서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 주면 에서도 야곱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24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과 씨름하는 야곱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호세아 12장 4절에 보면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야곱은 그의 아내들과 아이들을 도와 강을 건너게 하고, 혼자 있고 싶어 홀로 남아 하나님 앞에 자기의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다시 한번 털어 놓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는 쉬지 말고 해야 한다고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쉬지 않고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은총을 허락해 주시고야 맙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했을 때 천사가 그를 붙잡았습니다. 야곱과 천사와의 씨름은 우리 한국식 씨름이나 일본식 씨름하고는 다르고 서로 붙잡고, 싸우는데 한번 넘어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복할 때까지 하는 씨름이었습니다. 엎치락 뒤치락 하기를 밤새껏 했습니다.
호세아는 “야곱이 울며 간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무기는 눈물과 기도였습니다. 그의 싸움은 몸의 싸움이 아니라 신앙과 거룩한 바램이 부딪치는 영적인 씨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말해서 야곱의 자손인 우리도 야곱이 한 씨름과 같은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20년간 서로 헤어져 있는 동안 에서는 동생을 용서해 줄 수 있는 관대한 사람이 되었는데 야곱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잠언 28장 1절에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고 했습니다. 왜요? 두려워서 그럽니다. 야곱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죄책감 때문에, 그의 형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다했고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까지 벌였습니다. 이는 밤이 다하도록 끝나지 않는 씨름이었습니다.
20년 전 야곱은 지금의 얍복강가의 브니엘에서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벧엘이라고 불려지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었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벧엘은 그와 같은 황홀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후 브니엘에서의 야곱의 생은 아주 달랐습니다. 그는 가장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였으며 그러는 가운데 환도뼈가 부러지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브니엘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은 벧엘에서와는 달리 불구가 되는 만남이었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을 만나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다른 모습이고 하나님도 다릅니다. 삶이란 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두 사람 사이의 모든 만남은 그것이 아무리 오랜 기간의 사귐이라고 할지라도 각각 다릅니다. 우리가 강물에 발을 담그나 똑같은 강물에 발을 담글 수는 없습니다. 왜요? 강물은 항상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확증했으며 축복해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브니엘에서는 씨름이 벌어져 야곱이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환도뼈가 위골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먼저 내 속에 있는 무엇이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너 자신을 부인하고 네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야곱 속에 있던 그 무엇이 브니엘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를 치십니다. 우리가 죽어야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의 능력은 약함 가운데서 온전하게 된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응답을 기억합니다.(고후 12:9) 야곱은 그가 온전했을 때보다 더욱 완전한 절뚝발이가 되었습니다.
야곱이 불구가 된 것은 또 다른 중요한 목적을 이루는데 기여했습니다. 그는 “이것이 내가 얍복강가에서 가졌던 꿈이었던가? 하나님이 거기서 정말 나를 만났던 것인가?”라고 물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저는 다리는 그의 여생에 그의 생에 있었던 하나님의 간섭을 항상 기억나게 해 주었습니다.
그의 환도뼈가 부러졌던 그 씨름 이후에 야곱은 하나님께 축복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과 겨루는 저 당돌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은 정말 괴짜 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종래 물리칠 수가 없었습니다.
야곱은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를 축복해 주지 않으면 당신을 결코 떠나 보내지 않겠습니다.” 얼른 생각하면 너무 염치없는 일이 아닙니까? 야곱이 무엇을 잘한 것이 있어서 이렇게 하나님께 달려듭니까? 야곱에게는 이렇게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에는 염치고 체면이고 생각할 여지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을 지나가시는데 가나안 여자 하나가 쫓아오면서 소리소리 지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계속 소리 지르니까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께 “선생님 아까부터 저 여자가 쫓아오면서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는데 이거 시끄럽습니다. 그저 말씀 한 마디 하셔서 돌려 보내십시오.”
그때 예수님 말씀이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그때 이 여자가 예수님께 가까이 와서 절을 하면서 “주여, 저를 도와주세요”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그 여자에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설명이 필요합니까? “나는 이스라엘 사람을 위해 왔기 때문에 이방인 개 같은 너와는 상관이 없어.” 하는 말씀이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 자신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말씀 듣기 위해 피곤을 무릅쓰고 예배당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에게 “개 같은 당신들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라고 말했다면 어떨까요? 아마 난리가 날 것입니다. “개? 개? 우리가 개야? 너는 무엇이냐? 안 주면 말 것이지 우리가 개야?” 하면서 달려들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여인을 보세요.
“주님 옳습니만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제게 그 부스러기라도 좀 주세요.” 이때 예수님이 감격했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런 큰 믿음의 소유자로 주님의 인정을 받아 우리 소원대로 이뤄지는 축복을 다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감히 “하나님, 나를 축복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야곱이 하나님께 기도한 그 내용을 좋아합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구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루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양다리 걸치는 식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의 자녀에게 축복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우리는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것을 원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있어도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뿐이고 하나님은 늘 우리를 치유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당신이 나를 축복해 주지 않으면 당신을 결코 떠나 보내지 않겠습니다.” 하면서 졸라댔습니다. 어떻게 보면 억지 같은 기도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달라고 할 권리가 있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줄 의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마태복음 7장 9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된 우리에게 언제나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로마서 8장 32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십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이 얼마나 논리적입니까?
하나님께 있어서 그의 아들 예수님보다 귀한 존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들까지도 우리 위해 내어 주셨는데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은사입니다.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이만큼 살았으면 하나님께 청구 드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고 솔직히 말해서 염치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인정해 주셔서, 무조건 사랑하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의 자녀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고 싶어하시고 우리도 또한 하나님께 아무 공로 없어도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줍소서
여러분, 야곱이 하나님께 매달려 “나를 축복해 주지 않으면 당신을 결코 떠나 보내지 않겠습니다.” 했는데 무슨 축복을 바랬을까요?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야곱이 더 많은 돈을 원했을까요? 야곱이 더 많은 가축을 요구했을까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야곱의 기도는 그 차원이 높고 그 마음의 문도 열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의 방법까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좋은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볼 때 좋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까지도 다 합력해서 좋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믿을 만합니다. 의지해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좋은 것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1.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2.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네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3. 한없는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네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브니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했고 그가 그것을 요구했을 때 그는 그것을 받았습니다.
야곱이 받은 축복은 삼중적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야곱의 고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축복하시기 전에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께 자기의 이름을 말하는 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속이는 자’란 뜻입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를 속였고, 그의 형을 속였고, 그의 장인을 속였습니다. 야곱이 이 하나님의 물으심에 대답함으로 그의 현재적 존재와 과거의 존재 그리고 그의 과거의 행위를 전부 털어놓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인인가를 고백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사하심을 베푸시고 하늘로부터 유쾌하게 되는 날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여러 가지 축복이 많지만 죄사함을 받은 축복 이상의 축복이 더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할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십니다.
야곱이 그의 이름을 고백한 후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이름을 받았습니다. ‘속이는 자’라는 이름 대신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뜻인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회심을 의미합니다.
회심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주관하도록 허락하는 생의 전환기를 뜻합니다. 우리가 그동안은 하나님과 빗나가는 생활을 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하나님과의 만남은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시몬은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사울은 바울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바나바라는 이름을 초대교회에서 받게 되었습니다.
끝으로 야곱의 축복은 신앙의 걸음입니다.
이제 이스라엘로 불리우게 된 야곱은 그의 상대에게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대답하지 아니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알 필요가 없습니다.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손을 붙잡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 필요가 없다. 너는 나를 신뢰하고 신앙으로 걸으면 된다.” 야곱의 생을 바꿔 놓은 밤이 가져다 준 결과는 형 에서와의 화해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우리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야곱처럼 하나님과 씨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의 모습을 고백해야 하고 용서받아야 합니다. 새 이름으로 새 삶을 시작하며 믿음의 걸음을 걷게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