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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전을 사모하는 사람
시편 84:1~12
먼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여러분의 정성어린 기도의 후원에 대해서 고마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번 전도여행에서는 하와이에서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집회를 가졌습니다. 지난번 저희 교회에 와서 말씀을 전해 주신 로버트 오웬스 목사님이 섬기시는 하와이 제일 장로교회에서 한미 연합예배를 드리고 그 곳 교역자들과 함께 교회 성장 세미나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하와이 한인 장로교회 예배당 건축을 위한 기공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와이에는 고 이승만 전 대통령께서 독립운동을 하던 때 설립한 교회가 감리교 계통에서 예배당을 가지고 있고, 그 밖에 한인교회가 15개가 있지만 예배당이 없이 그 곳 교회당을 빌려 사용하고 있는 형편인데 이번 65년만에 한국인의 교회, 특별히 장로교회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는 것은 퍽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시고 후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간에는 오리건 주에 있는 포트랜드라는 곳에서 한인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그 곳에 계신 동포들이 모여서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저 멀리 외국에 가서 사시면서도 믿음을 지키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어 열심으로 봉사하고, 생활도 차차 안정되어 가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미국은 우리 나라와는 비교도 하기 어려울 정도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 사람의 사는 것이 가산이 넉넉한 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적으로 바쁜 생활을 하다 보니 피곤하고, 그보다도 영적으로 퍽 메말라서 한국을 그러면서 더구나 한국 교회에서 예배드리던 때를 꿈에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그 심령들이 소생하는 모습이 눈에 뜨일 때 제 몸은 좀 피곤하지만 얼마나 보람을 느끼는지요!
우리 한국 민족은 특별히 축복받은 민족입니다. 이 시대의 제사장 민족으로 세워 이런 모양 저런 형태로 세계 각지에 파송해서 세계 교회를 깨워 주고 있습니다. 외국에 나가 계신 동포들, 특별히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녁 봉독한 시편 84편은 우리가 이미 생각한 바 있는 시편 42편, 43편과 비슷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 시편은 성일(聖日)의 노래로서 시편 150편 중에서도 아름답고 유명한 시 중의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가슴 속에 불타오르는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이 시편을 통해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중에도 이 시편에 경건한 한 성도가 가진 신앙적 열정의 표현이 이처럼 뜨겁게 나타나 있는 것을 볼 때 그들의 신앙생활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국에 있을 때는 우리 나라가 귀한 것을 그렇게 느끼지 못하고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절실히 깨닫지 못하지만, 본국을 떠나 먼 나라에 가서 사시는 분들은 본국에 대한 애국심, 그리고 본국 교회에서 예배드리던 때의 감격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제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전(殿)에 나아와 예배드리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적인 표현은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면 보고 싶습니다.
저는 가끔 전도집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외국에 다녀오는 것이 어찌나 지루하고 길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을 만나고 싶고 궁금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시는 심정이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주일을 지나 삼일기도회가 되기를 기다리다가 나오십니다. 제가 듣기로는 가장 먼 데서 오시는 어떤 자매님은 주일만 지나면 그 날 저녁부터 삼일기도회를 손꼽아 기다리다가 삼일기도회 시간이 되면 차를 타고 제일 먼저 교회에 나오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의 전을 사모하는 마음이 그렇게도 간절한 것을 의미합니다.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시간적이고 상대적인 우리 인간과의 교제를 우리의 역사 속에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사실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예배라는 의식을 통해서 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요, 축복이요, 너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에게 행함이 동반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야고보도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면서 죽은 믿음 가지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육체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육체가 없이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어떤 제도나 의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의식과 제도를 무시하면 거기에는 바른 신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신앙은 전인격적인 것이기 때문에 내용과 형식을 전체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성전을 사모하는 신앙적인 감정은 이 시인의 심령 속 깊은 곳의 표현이요, 아름다운 신앙인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본문 1-2절을 같이 읽으십시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인의 믿음과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성전을 ‘주의 장막’이라고도 했고 ‘여호와의 궁정’이라고도 했습니다. ‘장막’이라고 하면 우리는 모세가 광야에 있을 때 성막을 건축했던 것을 연상하게 됩니다.
비록 소박한 곳이지만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곳이 그립고 아름답게 생각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사람은 자연히 하나님이 계시는 주의 장막을 사모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궁정’이라고 하면 솔로몬이 지은 웅장한 성전을 생각하게 됩니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세계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의 영혼이 여호와의 궁전을 너무 사모하다 보니 쇠약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시편 69편 9절에 보면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시인이 성전을 그렇게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여호와의 성전이 어느 훌륭한 궁전 같은 그 위용 때문에 사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장막이든, 궁전이든 그 형식적인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모신 그 곳, 우리의 믿음이 집중된 상징의 초점이, 그리고 하나님과 서로 만나는 바로 그 곳이 사모하는 마음의 대상이었습니다. 모세의 장막이나 솔로몬이 지은 궁궐 같은 성전이나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치하시는 주권의 소재지요, 명령의 발원지였습니다.
만일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전이 없다면 그들은 지휘관 잃은 사병들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의 성전,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계신 그 곳에 마음의 초점이 집중되어 있지 아니하면 패잔병이나 낙오병 같은 지리멸렬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장 3절에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뭐랬습니까?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이 시인은 하나님의 뜰에서 다시 그의 자리를 얻게 되기를 사모했고 부르짖었으며, 그가 쇠약해질 정도로 끈질기게 졸라대었고, 지연되는 것을 거의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몹시 바라보면서 기도로써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은 여호와의 뜰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예배는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셔서 한 분 한 분이 모두 하나님을 만나뵙기를 바랍니다.
3-4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기서는 성전에 거하는 자들의 복이 얼마나 큰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제단에 대한 그의 사모하는 마음을 훌륭하고 놀랍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이 성도가 얼마나 주의 전을 사모했으면 참새나 제비가 성전 처마에 보금자리를 두고 있는 것이 부럽다고까지 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제단에서 멀리 떨어진 궁전에서 살기보다는 오히려 그 제단 가까이에 있는 새둥우리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시편 55편 6절에 보면 “날개를 펴고 날아가서 광야에 거하기를” 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성도는 하나님의 전 가까이 있는 것을 그렇게 원했습니다. 성도의 하나님을 사모하는, 그래서 주의 전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표시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주의 집 가까이 있는 것이 너무나 좋아서 멀리 이사가지 못하고 예배당 근처에 그대로 계신 분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적인 의미로 말하면 인간의 만족과 기쁨이 바로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라고 해석해도 될 것입니다. 세상적인 면으로 생각해서 궁전 같은 것이 있습니다. 많은 돈을 모은 것, 지식을 얻은 것, 권력을 누리는 것 모두가 인간이 만든 궁전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참 만족이 없습니다.
왜요? 인간은 겉으로 보면 다른 동물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 육신 안에 영혼이 있기 때문에, 이 영혼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 전에는 참 평안과 참 만족이 없습니다. 세상의 것이 궁궐이면 최고이지만 그것이 참 만족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여호와의 집에 새들이 깃들이는 것이 부러울 정도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만족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희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했습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는 다만 외모로만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가 아니고, 고난 중에서도 주를 찬송할 수 있는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여기 ‘항상’이란 말의 뜻은 ‘아직도’라는 말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어려운 가운데 있지만 그래도 주를 찬송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특징이 바로 그것입니다.
즐거울 때, 모든 것이 형통할 때 노래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항상 주를 찬송할 수 있는 일은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세요. 어려울 때, 캄캄할 때 찬송하면 어려움을 이기게 되고 캄캄함이 밝은 빛으로 변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의 경우가 그렇지 않습니까? 저들이 고통 속에서 억울한 처지에서 부른 찬미는 빌립보 간수를 회개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였고, 그 곳에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들이 감옥에서 풀려나게 된 것만이 기적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5절에 그 말씀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로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정말 이 말씀이야말로 얼마나 복된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주께 힘을 얻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힘을 얻는 자와 대조가 되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권세나 금력이나 지식의 힘을 의지하는 것은 강해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상한 갈대 지팡이 같은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던 그 당시의 애굽도 하나님 보실 때에는 갈대 지팡이, 그것도 상한 갈대 지팡이로 보였습니다. 세상을 의지하는 사람의 마지막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께 힘을 얻은 자는 복이 있습니다.” 잠언 18장 10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했습니다.
시편 146편 3절 이하에 보면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3-5절)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 있는 사람은 범사에 복이 됩니다. 들어와도 나가도 복이 됩니다. 일어나도 넘어져도 복이 됩니다. 건강해도 병들어도 복이 됩니다. 아들이든 딸이든 복이 됩니다. 붙어도 떨어져도 복이 됩니다. 우리의 모든 풍족함이 그리스도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어떤 사람이 주께 힘을 얻습니까? 이사야서 40장 31절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주님을 앙망하는 사람이 새 힘을 얻습니다.
1.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 같이
모든 싸움이기고 근심 걱정 벗은 후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같이
주 앙모하는 자 주 앙모하는 자 주 앙모하는 자 늘 강건하리라
2. 주를 앙모하는 자 걸어가 걸어가 고단치 않네
길을 잃은 양떼를 두루 찾아다니며 걸어가 걸어가 고단치 않네
3. 주를 앙모하는 자 달려가 달려가 피곤치 않네
천성 문을 향하여 면류관을 얻도록 달려가 달려가 피곤치 않네
4.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같이
은혜 안에 뛰놀며 주의 영광 보리라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같이
주님께로부터 힘을 얻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 것이 아닌 주님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대로가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안에서 그의 행복을 찾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사람은 주께로 인도하는 모든 길, 그들의 은혜를 충만하게 하고 주님과의 교제를 지속시켜 주는 길을 기뻐합니다.
그들은 이와 같은 길을 행할 뿐 아니라 그들 마음 속에 그것을 둡니다.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은 거기에 이르는 길을 언제나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눈은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하며 깊이 생각하면서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골로새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지 말라”(골 3:1-2)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하셨습니다.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원만한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이 막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그 길이 막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한 사람은 그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없습니다. 죄의 사함을 받을 때만이 하늘로부터 유쾌하게 되는 날이 임하는 것입니다.
6절에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심령은 이제 다시 그 성전에서 물러나와 눈물과 한숨만이 차 있는 이 세상에 살게 된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이 눈물의 곳을 샘물이 솟는 곳으로 변화시키는 새로운 창조 역사를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그 심령이 변화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을 얻은 사람은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다른 의미로는 눈물을 흘리며 눈물 골짜기에 씨를 계속 뿌린 사람은 기쁨으로 생명의 샘에서 거두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맥빠지지 아니하면,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했습니다. 사실 눈물을 흘려 보지 못한 사람은 참 기쁨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눈물의 골짜기를 지낸 후 이른 비 같은 하나님의 은혜, 성령의 단비를 받으며 하나님을 뵙는 일을 영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회개의 문을 통과하지 아니하고는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7절을 보세요.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힘을 얻고 더 얻은 심령이 아니면 이 비극적인 역사를 다시 뒤집어 놓아 새로운 희망의 역사를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인과 같이 모든 힘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고 그 성전을 중심으로 한 참된 예배를 통해서 얻어지는 이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에 살면서 새로운 역사 창조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삼일기도회의 의미가 큽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거룩한 산 시온에서 하나님을 뵈올 때까지 중단없이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리이다”
오랜 여행에서도 지루한 것이나 피로를 모르고 예루살렘으로 가까이 올수록 더 생기 있고 활발해지고 점점 힘을 얻으러 나아갑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생활입니다.
세상에서 믿음 없이 사는 사람들은 젊어서는 세상에 붙어 정신 못 차리고 살다가 나이가 많아지면 피곤하고 지쳐서 죽지 못해 살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불쌍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얻기 때문에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지만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계속 힘차게” 나아갑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잎이 청청한 나무처럼” 계속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나아가는 길에는 하나님이 은혜를 더하여 주십니다. 은혜 위에 은혜를,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하십니다. 마침내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각 나타나” 그에게 영광을 드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은혜 속에서 자라는 사람들은 드디어 영광 속에서 완전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전진하는 생활, 발전하는 생활, 성장하는 생활, 결실하는 생활입니다.
끝으로 8-12절까지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결의가 나타나 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란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란 칭호를 쓸 때 한 말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꼭 받고야 만 것을 뜻함인 줄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뿐 아니라 ‘살펴 주시는’ 분이십니다.(9절)
10절에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 원문에는 기도하는 이유를 말하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이 시인은 주님의 전에서 하루를 사는 것이 다른 곳에서 천 날을 사는 것보다 나음을 경험했고, 악인의 장막에서 호사를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가 되어 사는 것을 더 행복하게 느끼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사람이란 다 장수를 원합니다. 그래서 진시황은 삼신산 불로초를 구했고, 한무제는 승로반을 설치해서 이슬을 받아 먹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장수의 복보다 더 귀한 복이 여기 있습니다. 주님의 집에 거하는 생활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가지는 생활입니다.
11절에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전에 거하는 생활이 그렇게 좋은 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해는 모든 생물을 살리고 그 빛으로 밝혀 사물을 분별하게 하며, 또 기쁨을 줍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고, 진리로 우리의 영혼을 밝혀 주시고, 그 영력으로 우리를 기쁘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시는 방패이십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했는데,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의 성도를 돌아보시는 호의요, 영화는 하늘로부터 임하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정직히 행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사는 생활을 하는 자, 곧 요셉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바로 살아 모든 좋은 것으로 넘치게 축복받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성전 중심, 예배 중심이 복의 통로입니다!
(시 84:1-12)
오늘 주제가 예배입니다. 오늘 제목은 '성전 중심, 예배 중심이 복의 통로입니다' /할/
▶1924년 올림픽 경기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습니다. 여기에 참석한 선수 중에는 스코틀랜드의 육상 선수 에릭 리델이 있었습니다. 그는 100미터 경기에 참전하기 위하여 여러 달 동안 맹훈련을 했습니다. 올림픽에 참여한 스포츠 기자들은 리델 선수를 100미터 경기의 우승 후보로 내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경기 일정이 주일에 잡혀 있어서, 그의 마음에는 심한 갈등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조국의 명예를 위해서는 뛰어야 하지만, 신앙 양심으로는 도저히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고 운동장을 달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믿은 그는 경기를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팬들은 크게 실망했고, 그를 격찬한 사람들은 모두 그를 바보로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습니다.
며칠 후 그 주간에 뛰게 되어 있던 스코틀랜드의 400미터 경기 선수가 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리델 선수는 자기가 훈련한 경기 종목의 4배나 되는 힘든 경기지만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고 신청했습니다. 100미터 경기 선수가 400미터 경기를 47.6초의 기록을 세우고 당당히 우승을 했습니다. /할/
▶미국 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자카리 테일러 장군이 헌법에 의해 1849년 3월 4일에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는데, 마치 그 날이 주일이었습니다. 신앙이 독실한 테일러 장군은 취임을 거절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적인 행사이므로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간청했으나, 전혀 먹히지 않았습니다.
헌법에 따라 임기가 만료된 11대 대통령 제임스 녹스 폴크는 대통령직에 하루 더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서 주일 12시부터 월요일 12시까지 24시간 동안 그 자리를 메울 임시 대통령을 상원이 선출해야 했습니다. 상원은 상원의장 대이빗 라이스 앨치슨을 선출했습니다.
하지만 임시 대통령 앨치슨 상원 의장은 토요일 밤에 잠든 후에 하인이 깨워주지 않아 자신의 임기를 잠으로 다 보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미국이 세계를 이끄는 강대국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나라를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지 않겠습니까? /할/
①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는 출애굽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풀려나는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야 했을까요?
출5:1-3절에서 보면 모세가 바로 왕에게 선언합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이스라엘이 누구입니까? '내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누구의 허락을 받고 있습니까? 지금 이들은 애굽의 바로의 지배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짓눌려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 백성'으로 부르셨는데 여전히 세상에 발목 잡혀 살고 있지 않습니까?
죄와 심판에서 이미 주님이 해방시켜 주셨음에도 여전히 세상에 끌려 다닌다면 참된 출애굽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 끌려 다니고 돈에 무릎 꿇고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끌려 다니지 말고 자유 함을 얻어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아멘!/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원하셨을까요? 한마디로 예배를 위한 출애굽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내보내라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는 출애굽의 목적을 선언합니다. 출5:1절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출애굽의 목적은 절기를 지키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출애굽 후 그들이 지켜야 할 중요한 절기들이 만들어집니다. '유월절, 오순절, 수장절'이 중요 절기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은총과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그 분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예배의식입니다.
이런 요구에 대해 바로가 거절합니다(2절). 왜 바로는 보내지 않으려 했을까요? 경제적 이유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노동력을 통해 경제를 움직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세상에 묶여 사는 이유도 경제적 이유가 아닌지요?
바로의 거절 앞에 모세는 다시 요구합니다. 3절에서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다시 요구합니다. 역시 이유는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출애굽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사하는 백성의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잘 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들이 고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바른 예배자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에게 예배처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오틀런드'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예배는 인간이 하는 일 중 가장 숭고한 것이요, 가장 가치 있는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이유도 바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하게 위함이었습니다. 출3:12절에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예배)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할/
예배가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배가 중심이어야 합니다. 이것만 바로 이루어지면, 그리하여 내 영혼이 소생하고 성숙하게 되면 모든 문제가 절로 풀립니다. /아멘!/
②그렇다면 예배가 무엇입니까?
원어의 뜻은 '엎드린다. 경배한다'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한문의 뜻은 '하나님 앞에 예하고 무릎 꿇어 경배한다는 뜻이 예배'라고 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예배를 섬기는 것으로 생각해서 영어의 섬긴다는 단어 Service(서비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예배를 영어로 worship인데 '가치를 돌리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최상의 가치를 돌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최고의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출세하고 성공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믿/
㉠예배의 궁극적인 관심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용서받는 것'입니다.
㉡최고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배의 중요성에 대하여 세 가지로 말합니다.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요. 또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성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예배보다 더 소중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배 없는 봉사, 예배 없는 충성은 헛된 열심입니다. 그리고 예배보다 더 급한 것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배는 오늘 못 드리면 다음에 드리면 되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예배는 그 순간 지나쳐 버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세상일은 오늘 못하면 내일 하면 됩니다. 그러나 예배는 오늘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놓치면 영영 돌아오지 않습니다. /믿/
또한 예배는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해서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가면 잊혀집니다. 들에 피어있는 꽃과 같습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주님 앞에 몸과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는 죄 많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능력을 덧입는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이것은 천국은행에 저축하는 것과 같습니다. 천국 은행은 절대로 파산 당할 우려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시고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주시며 축복을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최고의 관심은 예배입니다. 예배 성공이 인생 성공이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래서 예배가 축복입니다. /할/
㉢성경에는 성전 중심, 예배 중심으로 살았던 인물들이 다 주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용맹자 다윗은 성군이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자의 사람이었습니다. 순결자 욥은 티 한 점 없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로운 사람으로 예배 중심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한결같은 신앙자 에녹은 300년을 하루같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신앙의 충신 다니엘은 숫한 모함과 위협과 사자 굴에 던져져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하나님께 일편단심의 마음을 드렸던 예배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할/
그 중에서도 아브라함은 빼놓을 수 없는 신앙의 위인이요 바른 예배 자입니다. 아브라함의 일생 중에서 가장 극적인 모습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대목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해서 몇 가지 분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아브라함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이고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하란에서 촌 노인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으로부터 75세 나이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너는 이곳을 떠나라, 내가 네 자손에게 복을 주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 /할/
복중의 복은 선택받음의 복입니다. 그 많은 부족들과 유목민들이 있었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기적 같은 복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 아이를 바라보는 행복, 키우는 기쁨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래도 가장 행복한 삶은 가정의 행복이고 자식을 키우는 행복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 그 말은 사랑하는 독자 아들을 죽여 각을 떠서 제물로 바치라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귀를 의심하고 헛소리를 들은 줄로 착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눈앞이 캄캄했고 황당해 했을 것입니다. 열 개 중 하나를 바치라면 그렇게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돈을 얼마 바치라면 기쁘게 바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100세에 겨우 얻은 그 아들을 잡아서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현실이었고 분명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결단해야 합니다. 명령에 순종하든지 거역하든지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100세 얻은 아이를 내 놓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정한 예배는 그것을 내 놓아야 예배가 됩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마음으로 해야 그것이 진정한 예배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결단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결단할 시간이 3일간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아들을 바치라는 장소까지 가는데 3일이 걸렸습니다. 그 3일간의 시간은 아브라함의 피를 말리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3일간의 시간', 아무리 생각해도 할 짓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조석으로 생각이 변했을 것입니다. 거역하자니 준엄한 하나님의 명령이 기다리고 바치자니 아까움이 사무쳐 왔습니다. 그러나 결단해야 합니다.
그때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이 아내와 상의한 흔적이 없습니다. 아내와 상의했으면 결단에 더 장애가 주어졌을지 모릅니다. 혼자 고민하다가 마침내 아브라함은 아이를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출발합니다. 짐꾼을 시켜 불 피울 장작을 메우고 아이를 걸리고 3일 길을 가는 동안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드디어 목적지가 가까워 오자 아이가 물었습니다.
'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준비하시리라' 또 침묵이 흘렀습니다. 도착해서 제단을 만들고 장작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아이를 결박해 놓고 칼을 빼 들었습니다. 이 대목이 하이라이트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잡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해서 모든 것을 부정하고 순종하기 위해서 100세에 얻은 아들에게 칼을 댑니다. 대단한 용기입니다. 대단한 믿음이고 대단한 순종입니다. 그래서 그가 비로소 아브라함이 되었고 믿음의 아버지가 되었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이를 결박하고 칼을 빼 들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 내가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 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고 성경을 밝히고 있습니다. /할/
왜 아브라함의 예배가 그렇게 소중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 십자가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갑자기 나타난 그 양은 이다음에 나타날 제물 되시는 예수의 모형이고 그림자입니다. 그 양이 대신 죽음으로 이삭을 살려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죽음으로 오늘 우리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창세기에서 이미 예수를 죽이심으로 우리를 살리시는 십자가의 모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요구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복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아브라함이 결국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합니다. 그리고 전무후무한 복을 약속 받습니다.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을 즉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할/
㉣우리는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인간은 죄인이며 그 때문에 멸망 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롬3:10절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지은 인간은 사망,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멸망을 향해 가는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롬5: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죄와 사망에서 건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롬12: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할/
이처럼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즉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 즉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궁극적인 목적이 예배인 것처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의 삶의 목적은 예배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경시하는 사람은 구원의 은혜와 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올바른 예배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할/
바울은 생애의 마지막이 다 되어갈 때,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그리고 믿음의 자손인 우리들에게도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할/
경건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심장이 멈추면 인간이 죽듯이, 예배가 멈추면 신앙도 죽습니다. 뇌가 거의 다 죽은 식물 인간도, 만약 그의 심장이 뛴다면, 소생의 희망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심장이 멈춘다면, 인간은 곧 바로 죽습니다. 혈액과 산소가 공급되지 않는 인체는 죽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심장부인 예배가 죽는다면, 그리스도인은 곧 바로 죽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이미 식물 인간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경건 훈련의 핵심은 예배 훈련입니다. /아멘!/
㉤바른 경건의 예배의 시작은 죄인인 것을 깨달을 때 오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는 늘 성전을 드나들면서 기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는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이제는 죽음이구나! 이제는 끝장이구나!' 하면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토해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보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자신의 죄가 보였습니다.
그동안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보니 자신의 불의 함과 거짓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이 정도면 누가 문제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 앞에 서보니 자기 속에 있던 찌꺼기와 같은 더럽고 부정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을죄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6:5절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만 중의 왕이신 하나님을 뵈었던 그는 감히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없음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아뢰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을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내가 얼마나 부족한 피조물인지를 고백하면서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이 바른 예배드림의 시작입니다. /아멘!/
㉥예배를 드릴 때 중요한 것은 예배자 자신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거짓 예배는 가인이 드렸던 예배입니다. 그는 첫 인간 아담의 첫 번째 아들입니다. 그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예배가 실패했다고 말씀합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이름도 불렀습니다. 자신이 1년 동안 지은 농사의 결실을 하나님께 정성껏 준비해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가 드린 예배의 내용과 형식은 다 갖추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반면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성경은 '가인과 그의 제물'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가인을 받지 않고 가인의 제물까지도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찬양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과 예물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드리는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네가 예물은 갖고 왔느냐? 네 마음은 도대체 무엇이냐?'라고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예배를 드릴 때 제물은 하나님께 드리지만 나는 제물로 드려지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바른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참된 예배자가 없는 것을 보면서 아파하시고 탄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참 예배자가 없고 거짓 예배자가 가득하다는 것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1:11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시간을 내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제물을 드리는 것을 귀하게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찬양하고 기도하고 우리의 삶을 주님께 헌신하는 것을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하는 마음입니다. 예배하는 마음이 없이 일꾼이 되면 교만해집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일했는지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마음속에 기쁨과 감사가 있기보다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뽐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해집니다. 예배 없는 봉사, 예배 없는 기도, 예배 없는 헌신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1:12절에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들먹거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나왔다고, 예배를 잘 드린다고 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성전 마당만 이리저리 밟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1:15절에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삶에서는 다른 사람을 조롱하고 악을 행하고 불의를 행한다면 그 예배를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속에 있는 미움과 분노를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다 씻어내어 부정과 악을 그치고 선과 정의를 행하며 고통 받는 이웃을 도우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예배는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억지로, 하품하며, 졸며 드려지면 의미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강요와 어머니의 성화에 의해서 그리고 어려서부터 믿어왔으니 안 믿을 수는 없고 믿자니 귀찮고 그래서 억지로 나와 앉아있는 믿음이 진정한 예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배는 자발적 행동이어야 하고 자발적 순종이어야 하고 전적인 헌신의 머리 숙임이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이런 순종으로 이삭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 날 인류 최대의 진정한 감동의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족한 마음으로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하셨는데 '네가 아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을 즉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게 하고, 네 씨로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할/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한 것은 다 이런 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좋은 작품은 따뜻한 아랫목에서 어느 날 쉽게 만들어진 작품이 아닙니다. /할/
③성전 중심, 예배 중심의 사람 다윗의 고백을 본문에서 들어보겠습니다.
㉠표제에 보면 '고라 자손의 시,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라고 나옵니다.
여기 '영장'이란 말은 성전 예배의 음악을 관장하는 성가대장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깃딧'은 당시 음악에 사용된 악기를 가리킵니다.
고라는 모세에게 반역한 사람으로서 그 일족이 멸망당했는데 그 와중에 살아남은 소수의 자손 가운데 이렇게 신앙이 좋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고라 자손은 당시 성전의 봉사자였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시편이 고라 자손의 저작이 아니라 다윗의 시편을 고라 자손이 노래한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특별히 시온 산에 있는 성전을 사모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흔히 '성전의 기쁨을 찬양한 찬양 시'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GKF/
㉡다윗은 성전 중심, 예배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몽땅 받았던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바라보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2). /할/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몽땅 받았던 이유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다윗은 한 평생 '눈물과 회개'의 제사를 드린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집을 너무너무 사모하고 사랑한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성전 중심, 예배 중심의 사람입니다. /할/
다윗은 하나님의 집을 간절한 마음으로 앙망하고 사모했습니다.
시27:4절에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사는 것을 자기의 평생의 소원이고 평생의 기도제목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위한 열성이 자기를 삼켰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시69:9). 사람들이 다윗보고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고 했을 때 다윗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122:1). 다윗은 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시65:4절에서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할/
⑴다윗이 성전 사랑을 보십시오!(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는 감탄사입니다. 그리움이 있어야 인생에 감탄사가 나타납니다. 사랑의 열정이 있어야 인생에 감탄사가 나타납니다. 왜 우리의 인생이 맥없이 흘러갑니까? 그리움과 사모하는 열정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그리움과 사모함, 영적인 열망이 사라지는 순간 신앙은 추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신앙은 변질되고 습관적인 신앙으로 바뀝니다. 내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과 감사가 사라집니다.
신앙이란 그리움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할/
여기 '장막'은 성전이 지어지기 전에 이름입니다.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텐트 식으로 되어있는 장막이었습니다. 장막은 사랑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장막의 겉은 하얀 천이 둘러쳐 있고 그 가운데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장막이 쳐있습니다. 바람을 맞고 햇빛을 맞고 비를 맞고 하며 오랜 세월을 지나왔습니다. 외모로 볼 때는 전혀 영광스럽고 화려해 보이지를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인은 그 장막을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 안에 주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집보다도 자기의 궁전보다도 하나님의 집을 사모하고 사랑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다윗은 자기 개인의 소유를 모두 바쳐서 성전 건축을 준비했습니다.
대상29:2-4절에 '내가 이미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예비하였나니 곧 기구를 만들 금과 은과 놋과 철과 나무며 또 마노와 박을 보석과 꾸밀 보석과 채석과 다른 보석들과 화반석이 매우 많으며 성전을 위하여 예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에 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므로 나의 사유의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곧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천은 칠천 달란트라'
다윗은 참으로 하나님께 큰복을 받은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의 칼날에서도 지켜주셨고, 어떤 전쟁에서도 이기고 승리하게 하셨고, 통일왕국의 임금으로 세우셨고, 그의 후손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복인가? 예배 중심, 성전 중심의 삶이 축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아멘!/
⑵다윗은 성전을 사모하다가 병까지 들었습니다(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다윗은 얼마나 성전을 사모했는지, 주의 장막을 그리워하다 못해 이젠 병을 얻을 지경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윗의 성전사랑을 노래한 27편에 보면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이것이 다윗의 신앙입니다. 그는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고 싶었습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성전을 사모하며 살고자 했습니다.
여기 '사모한다'는 말은 '사랑한다, 그리워한다, 바라다, 열망한다, 혹은 관심을 갖는다'는 뜻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사모할 때 그것은 사랑에서 나오고, 그리움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온통 마음과 생각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모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성전이 그립고, 보고 싶고, 떠나있으면 궁금하고, 관심에서 멀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아멘!/
⑶다윗은 성전을 거처 삼고 주님과 영원히 동행하며 살기를 소원했습니다(3-4).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다윗은 성전을 자기 보금자리로 삼고 싶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0절에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성전의 하루가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좋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호화스럽게 사는 것보다 성전의 문지기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고백합니다. 한마디로 성전을 자기의 거처, 집, 보금자리로 삼겠다는 말입니다. /할/
실제로 고라 자손들은 성전에서 살았습니다. 성전이 그들의 처소였습니다. 성전이 힘을 얻는 곳이었고, 위로를 받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눈물골짜기를 지나는 곤고한 인생 길에 성전은 가장 큰 위로와 힘을 얻는 곳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성전이 거쳐가 되고, 보금자리가 되었다는 말은 성전이 그만큼 편하고 좋았다는 말일 것입니다. 편안하고 안전한 곳에서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교제하고, 위로 받고, 섬기며 지냈습니다. 성전 중심, 예배 중심은 교회를 거처 삼고 교회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언어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성전 사랑이 넘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⑷우리는 성전에서 힘을 얻고 시온의 대로가 열리는 곳입니다(5,7).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할/
사람들은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줄을 대려고 합니다. 돈 있고 권력이 있는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뇌물을 주고, 그것이 발각이 되어 수십 년 동안 쌓았던 명예를 짓밟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힘을 얻는 대상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에게서 힘을 얻는 것은 그 누가 주는 힘보다 더 큽니다. 왜냐하면 주님보다 더 큰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40: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할/
우리가 주님을 의지할 때 새 힘을 얻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재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을 그 누가 당할 수 있겠습니까?
모세의 후계자였던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출신이었습니다. 모세는 애굽 바로 왕을 열 가지의 재앙으로 이기고 홍해 바다를 가르고 이스라엘 200만 백성들을 만나와 생수로 먹이며 광야 40년을 인도했던 불멸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모세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수1:5-6절에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아멘!/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말씀입니다. /믿/아멘!/
⑸성전은 눈물 골짜기를 성공적으로 통과하는 곳입니다(6).
어떻게 눈물 골짜기를 성공적으로 통과할 수 있습니까? 다윗은 '주께 힘을 얻고' 힘을 주님께 얻어야 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 눈물의 골짜기를 만나면 부모나 형제 친척 또는 친구에게 도움을 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약간의 위로나 물질적인 협력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인 도움은 주지 못합니다.
인생에게 진정한 힘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죽음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누가 생명을 주며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준단 말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눈물의 골짜기를 걸어가는 인생에게 진정한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오늘날 믿는 우리에게 무한한 능력과 권능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시18:1절에서 다윗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고, 시43:2절에서는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안타깝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59:16절에서는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믿는 자가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시43:5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할/
⑹다윗은 성전에서 기도하며 살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8-9).
진정한 교회사랑은 성전을 거처 삼고, 이제 그곳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성도들의 성전사모곡의 감동만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기도'로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할/ 시편은 시고, 찬양이지만 또한 기도입니다. 기도의 관점에서 시편을 보아야 합니다.
특히 본문의 구절마다 기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만군의 여호와여'로 시작합니다. 2절에도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라고 했고, 특히 8절과 9절에서 성전을 향한 시인의 기도를 잘 보여줍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만군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소서'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것이 성전사랑, 교회사랑입니다. 우리가 진정 교회를 사랑하면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기도에 우선순위를 교회에 두어야 이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한 우리의 기도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그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를 통해서 찾아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성령과 은혜로 충만한 교회, 기도와 열정으로 세워 가는 교회였습니다. 행4:31-35절에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줌이라'
여기서 교회를 향한 세 가지의 기도제목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한마음과 한뜻, 둘째는 섬김과 봉사, 그리고 셋째는 전도와 선교입니다.
교회는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야 합니다. 요17:11절에서 예수님이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한뜻을 이루고, 한마음으로 모아져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교회의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또한 교회를 위한 기도에는 섬김과 봉사가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섬김의 공동체입니다. 그것을 위해 성도들을 모으십니다. 그것을 위해 직분과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섬김과 봉사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이 일을 하는 곳입니다. /할/
▶백범 김구 선생은 '나의 소원'이라는 글에서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식민지 국가에서 부귀 영화를 누리고 사는 것보다, 자주 독립 국가에서 문지기로 사는 훨씬 더 의미 있고 기쁜 일이라는 것입니다.
백범 선생의 이 말은 오늘 본문에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 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10절)라는 고백과 같습니다.
여기서 '다른 곳'이란 하나님 없이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에서의 삶이 어떻습니까? 일례로 세상에서는 사람을 평가할 때도,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외모와, 재력, 학벌 등으로 평가합니다.
쉽게 말하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차를 타고 다니고, 어느 지역에 살며, 몇 평 짜리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사모님'이 되기도 하고, '아줌마'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치장하고, 위장해야 합니다. 경기 불황 속에서도 수입 명품과 외제차가 불티나게 팔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정이라는 것이 '나 자신'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얼마짜리냐'라는 상품으로 취급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의 백성'으로 아주 소중한 존재로 인정하시고 계십니다. /할/
▶이제 임기가 얼마 안 남은 이명박 대통령은 독실한 신자로써 장로님이십니다. 그분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사회적으로 대단한 위치에 있었고, 매우 바쁜 분인데도 주일이면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차량 안내 위원으로 봉사를 했습니다.
장로님이 기자들의 질문에 '다른 무엇보다 주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의 차량을 안내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최고의 영광스런 자리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성전을 사랑했던 장로님의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고 병 낫고, 승진하고, 사업이 번창한 것도 행복한 일이지만, 주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 자체를 기쁨으로 여길 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은 성도인줄 믿습니다. /할/아멘!/ (2012년 12월 2일 대예배설교)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