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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원이덕(報怨以德)
원수를 덕으로 갚으라 또는 원한 있는 자에게 은덕으로써 갚는다는 뜻으로, 앙갚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報 : 갚을 보(土/9)
怨 : 원망할 원(心/5)
以 : 써 이(人/3)
德 : 덕 덕(彳/12)
출전 :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조금은 푸근하게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꿈이다. 조금 더 좋은 집이나 조금 더 좋은 음식이나 조금 더 보기 좋은 의복이 사람을 오래도록 푸근하게 할 수는 없다.
그것들은 잠깐 사람을 푸근하게 할 뿐이다. 오래 간직되는 푸근함이란 결국 인간관계의 아름다운 조화에서 나온다.
그러나 사람이 언제나 좋은 사람만 만나고 살아갈 수는 없다. 살아가다 보면 원수 같은 사람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관계는 복잡하게 마련이다. 그런때는 어찌해야 하는가?
보원이덕(報怨以德)이라는 말이 있다.
報(보)는 ‘갚다, 되돌려 주다, 알리다’ 라는 뜻이다. 報恩(보은)은 ‘은혜를 갚다’ 라는 말이고, 報答(보답)은 ‘되돌려 주어 갚다’ 라는 뜻이다. 答(답)은 원래 ‘갚다’ 라는 뜻이다.
怨(원)은 ‘원망하다, 비난하다’ 라는 뜻이다. 怨望(원망)은 ‘원망하며 바라보다’ 라는 말이고, 怨恨(원한)은 ‘원망하고 한탄하다’ 라는 말이다. 望(망)은 ‘바라보다’, ‘恨(한)은 ‘한탄하다’ 라는 뜻이다. 怨(원)에는 ‘원망하는 사람’ 이라는 뜻도 있다. 여기에서 원수(元帥), 앙숙(怏宿)이라는 뜻이 나왔다.
德(덕)은 ‘덕’이라는 뜻이다. 德人(덕인)은 ‘덕이 있는 사람’ 이라는 말이고, ‘후덕한 사람’이라고 하는 경우의 厚德(후덕)은 ‘두터운 덕을 갖춘, 덕이 풍부한’ 이라는 뜻이다.
이상의 의미를 정리하면 보원이덕(報怨以德)은 ‘원망하는 사람에게 덕으로 갚는다’ 즉 ‘나를 원망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덕을 베푼다’ 는 말이 된다.
나에게 원수 같은 사람이 존재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 불행한 사람은 나 자신이다. 내 가슴속에 항상 증오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짧은 삶을 증오하는 심정으로 보낸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그런 상대에게 덕을 베풀면, 상대가 아니라 나의 삶에 여유가 생기며 사랑이 넘치며, 삶이 풍족하게 느껴진다. 이것이 인생을 푸근하게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
노자(老子)의 제63장 은시(恩始)에 나오는 말이다. ‘무위(無爲)를 위해 무위(無爲)를 일삼으며, 맛이 없더라도 맛있는 것처럼 먹는다. 큰 것은 작은 것에서 비롯되고, 많은 것은 적은 것에서 비롯되며, 원수(怨讐)를 덕(德)으로 갚는다.’
爲無爲, 事無事, 味無味. 大小多少, 報怨以德.
이 글에서 보원이덕(報怨以德)은 ‘남들이 자신을 원망하더라도 덕으로 대하라’는 또는 ‘자신에게 원한을 품더라도 복수하지 말라’는 뜻이다.
인위적인 것을 하지 않고 자연적인 것을 한다. 인위적인 일을 하지 않고 자연적인 일을 한다. 인위적인 취미를 가진다. 큰 것은 작은 것에서 생기고 많은 것은 적은 것에서 일어난다.
원수를 덕으로 갚는다. 어려운 일은 쉬운일에서 계획된다. 큰 일은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천하의 모든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된다.
천하의 모든 큰 일은 반드시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 이르므로 성인은 끝가지 크게 되려고 하지 않으므로 크게 될 수 있다.
대개 가볍게 승낙을 하는 것은 반드시 믿음성이 적고, 너무 쉬운 일은 반드시 어려운 일이 많다. 이 때문에 성인은 도리어 쉬운 것을 어렵게 여기므로 마침내는 어려운 것이 없게 된다.”
어떤 사람과 원수 관계가 되면, 그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 자가 있고, 반면에 은덕으로써 갚는 자가 있다.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을 원한으로 갚는 일은 그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며, 그러나 원한을 누그러뜨리고 은덕으로서 갚는다는 것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로는 쉽지 않은 일이다.
노자(老子)는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노자는 천하의 모든 일은 처음부터 크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작고 쉬운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다.
한국 속담에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이것과 반대되는 말이며, 불구대천지원수(不俱戴天之怨讐; 한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원수라는 뜻)와 배은망덕(背恩忘德)도 함께 새겨둘 말이다.
무위(無爲)를 주지로 하고, 무슨 일에도 욕심내지 않고 담담한 태도로 대처한다. 어떤 경우에도, 원한에는 덕을 갖고 보답한다.
난사(難事)는 용이할 때에 처리하고, 대사(大事)는 소사(小事) 중에 수습한다. 어떠한 난사도 용이한 데서 생기고, 어떠한 대사도 미세한 것에서 시작된다.
도(道)를 체득한 성인은, 처음부터 대사를 이루고자 않는다. 그러므로 성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도대체가 싸게 받는다는 것은 불신의 근본, 용이한 일에는 곤란이 붙게 마련이다. 성인은 어떠한 용이한 일에도 곤란을 각오하고 시작한다. 그러므로 벽에 부딪히는 일이 없다.
이에 관련해서 말인데, 공자(孔子)는 ‘원한에 보복함에는 덕을 갖고 한다.’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부정했다.
공자는 온화한 상식위에 기초하여, 시시비비(是是非非) 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노자(老子)는 도(道)위에 입각하여 무차별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노자와 공자는 입장이나 방향을 다르게 하면서도, 미묘하게 교차하고, 교차하면서 두둘어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후, 중국의 지도자였던 장개석(蔣介石) 총통은, 폭거에 보답하는데 덕으로 갑는다 하여, 일본군의 죄행을 용서하였다.
장개석은 유가(儒家)의 문도(門徒)로써 알려져 있지만, 그러한 그로 하여금, 이와 같은 노자(老子)의 말씀이 적용되었던 것이다.
중(重)은 경(輕)의 뿌리이다
육중(肉重)하다는 것은 경솔함보다는 낫고, 고요함은 소연(騷然)함보다 낫다. 그러므로 군자는 온 종일 여행을 했어도, 가볍게 마차를 멀리하고자 하지 않으며, 소란스러운 곳에 몸을 처해서도, 차분히 몸을 간추려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임금 된 자도, 경솔한 몸가짐은 엄히 지켜야 한다. 경솔하게 굴면, 국정을 파탄시키며, 함부로 움직이면, 왕위까지 잃어 버리고 만다.
처세(處世)의 요체도 동(動)보다는 정(靜), 경(輕)보다는 중(重)에 있다고 한다. 경거망동(輕擧妄動)않는 것이다. 경(輕)이나 중(重)이 위험을 피하고 보다 안전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비자(韓非子)는 중(重)이란 Top이 권력을 보지(保持)하고 있는 상태, 정(靜)이란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라고 하였다.
[참고]
도덕경(道德經) 第63章
爲無爲, 事無事, 味無味, 大小多少, 報怨以德, 圖難於其易, 爲大於其細,
天下難事, 必作於易, 天下大事, 必作於細, 是以聖人終不爲大, 故能成其大, 夫輕諾必寡信, 多易必多難, 是以聖人猶難之, 故終無難矣
爲無爲(위무위)
성인께서는 베푼다는 생각 없이 아낌없는 베풂으로 세상을 다스리므로
事無事(사무사)
복(福)되지 않거나 길(吉)하지 아니함이 없기에(無事), 불상사(不祥事)가 일어나지 아니하며,
味無味(미무미)
달거나 짠 것도 아니고, 시거나 쓴 것도 아니며, 감칠맛은 더욱 아니어서 어디에도 치우친 바 없는 맛이며,
大小多少(대소다소)
본바탕(小)을 위대하다 여기며, 하찮은 것(少)을 소중하게 여기고,
報怨以德(보원이덕)
억울하다고 여기는 응어리진 마음을
아우르고 보듬어 감싸 덕(德)으로 풀어주시며,
圖難於其易(도난어기이)
아무리 어려운 일일지라도 수월하게 풀어주시고,
爲大於其細(위대어기세)
버겁게 여겨지는 큰일일지라도 미미하게 여기시며,
天下難事(천하난사)
이 세상에서 아무리 어려운 일일지라도,
必作於易(필작어이)
반드시 수월하게 마무리 지으십니다.
天下大事(천하대사)
이 세상에서 가장 버겁고 힘든 일일지도,
必作於細(필작어세)
반드시 세세한 일이라 여기시기에 간단하게 마무리 지어버립니다.
是以聖人終不爲大(시이성인종불위대)
그러하기에 성인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힘겨운 일이 없으시어 베푼다는 생각을 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故能成其大(고능성기대)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없다 여기는 일도 수월하게 다루시는 것이며,
夫輕諾必寡信(부경낙필과신)
스스로를 굳게 믿으시기에 쉽게 들어주시는 것이고,
多易必多難(다이필다난)
온갖 고난을 물리쳤기에 많은 일들을 쉽게 마무리 짓는 것입니다.
是以聖人猶難之(시이성인유난지)
그러므로 성인께서는 어떠한 일이라도 미미하게 여기시어,
故終無難矣(고종무난의)
처음부터 끝까지 어렵게 여기시지 않는 것입니다.
보원이덕(報怨以德)
북한이 비무장지대(DMZ)에서 목함지뢰에 이어 포탄 공격까지 감행한 사실에 대해 유감을 표현했다. 이를 두고 받아 들여야 한다는 보원이덕(報怨以德)의 관용적 입장과, 강력하게 응징해야 한다는 적극적 입장으로 의견이 나뉜다.
공자는 논어 헌문편에서, '원한을 덕으로 갚는 것(以德報怨)'에 대한 제자의 물음에 '원한은 바른 것으로 갚고, 은덕은 은덕으로써 갚아야 한다(以直報怨 以徳報德)'고 했다.
현실에 입각한 중용적 발상에서 나온 균형 잡힌 공자의 답변이다. 공자의 '바른 것, 즉 정직함(直)으로 원한을 갚는다'는 표현은 언뜻 보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일맥상통하는 '원한은 원한으로 갚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서, '남이 나에게 잘 대해 주면 나도 그를 잘 대해 줄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잘 대해 주지 않겠습니다'는 자로(子路)의 말과, '남이 나를 잘 대해 주면 나도 그를 잘 대해 줄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상황에 따라 적절히 도를 지키겠습니다'는 자공(子貢), 그리고 '남이 나에게 잘 대해 주지 않아도 나는 그를 잘 대해 줄 것이다'는 안회(顔回)의 말에 대해, 공자는 촌철살인의 평을 내린다.
자로의 경우는 '야만적 행위', 자공은 '친구 간에 가능한 일', 안회는 '가족 간에 가능한 일'이라 했다. 공자는 이를 선악의 개념으로 파악하지 않고, 관계의 문제로 접근한 것이다.
노자 제63장에 있는 '보원이덕'에 대한 왕필(王弼)의 주석을 보면, '작은 원한은 갚을 것이 못 된다. 커다란 원망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하는 것, 그것을 따르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덕이다(小怨則 不足以報, 大怨則 天下之所欲誅 順天下之所同者 德也)'라고 했다.
여기서 작은 원한은 개인의 사적 원한이요, 큰 원한은 사회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공도(公道)를 의미한다. 왕필의 주석은 공자의 '정직함(直)으로 원한을 갚는다'는 말과도 통한다.
북한의 반복된 만행에 대해 '전선을 지키겠다'며, 전역을 연기한 장병들이 계속 늘어난 점, SNS에 당장이라도 전선으로 나가 싸우겠다는 2030 예비군과 젊은이들의 인증샷과 댓글이 쇄도했던 점 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사적 원한이 아니요, 공론이자 백성의 생각이 자연스레 행동으로 표출된 '보원이덕'의 참 실천인 것이다.
분명 이전과 다른, 한국인의 새로운 모습이다. 즉 정직을 기반으로 하는 '보원이덕'으로, 난국 극복을 위해 분연(憤然)히 일어섰던 옛 의병의 정기(正氣)와도 같은 것이다.
학교 교육에서도 기층문화의 뿌리로부터 살아 움트는 이 충의문화(忠義文化)를 한국정신으로 승화, 발전시키는 새 전기를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보원이덕(報怨以德)
우리는 정말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오는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의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다고 합니다.
한 때 남북은 서로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지내왔습니다. 정말 수십 년간을 두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삿대질을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남북의 정상이 한 자리에 앉는 날이 코앞에 닥쳤습니다.
노자(老子)의도덕경(道德經) 은시장(恩始章)에 '덕으로 원수를 갚는다(報怨以德)'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마치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예수의 말씀처럼 원수를 덕으로 갚으라는 뜻입니다. 역시 성인의 마음은 다 같은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가 공자(孔子)에게 묻습니다. '어떤 사람(老子)이 원한을 덕으로 갚아야 한다고 했는데 어떻습니까?'
그러자 공자는 '무엇으로 은혜로운 덕을 갚을 것인가? 곧고 정직함으로 원한을 갚고, 덕은 덕으로써 갚아야 하느니라(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라는 답변을 했습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럼 링컨에게는 에드윈 스탠턴이라는 정적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링컨이 대통령이 되기 전 변호사를 하고 있었을 때, 링컨을 '애송이요 시골뜨기'라고 모욕하는 언사를 일삼던 사람이 유명한 변호사 에드윈 스탠턴이었지요.
링컨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에도 반대당(민주당)에 소속된 사람이자, 그 당시 법무장관으로 정적 가운데서도 그를 가장 비난하는 이도 스탠턴이었습니다.
스탠턴은 성품이 아주 강직하며, 또한 독설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지요. 그는 대놓고 링컨을 비난하며 아주 심한 모욕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선거기간 동안 미국 전역을 다니며 링컨을 헐뜯고, 그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으며, '깡마르고 무식한 자'라고 놀려댔습니다.
심지어 스탠턴은 인신공격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링컨의 얼굴을 한 번 보십시오. 그 얼굴이 도대체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될 얼굴입니까? 저는 고릴라를 잡기 위해서는 아프리카로 가야만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링컨의 고향에 가면 얼마든지 고릴라를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스탠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대통령에 선출되었지요. 이때도 스탠턴은 '링컨이 대통령이 된 것은 국가적 재난'이라며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이런 스탠턴과는 달리 링컨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차기 행정부를 조직하면서 놀랍게도 자신을 그토록 비난했던 스탠턴을 전쟁장관(현 국방장관)에 임명했습니다.
모든 참모들이 스탠턴의 등용에 재고를 건의하자 링컨은 '나를 수백 번 무시한들 어떻습니까? 그는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으로 국방부 장관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래도 스탠턴은 당신의 원수가 아닙니까? 원수를 없애 버려야지요!'
참모들의 이런 말에 링컨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수는 마음속에서 없애 버려야지요! 그러나 그것은 '원수를 사랑으로 녹여 친구로 만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과거 자기를 비난했던 스탠턴의 모든 잘못들을 깨끗하게 용서해 주었으며, 자질을 높이 평가해서 국방장관에 임명했던 것입니다. 스탠턴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링컨을 잘 도와 남북전쟁에서 승리했으며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습니다.
1865년 4월, 링컨이 암살을 당했을 때 제일 슬퍼했던 사람이 바로 스탠턴이었습니다. 그는 링컨의 시신 앞에서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여기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누워 있습니다. 이제 그의 마음은 인류 역사상 영원히 기념되어질 것입니다.'
스탠턴은 며칠 동안 지칠 줄 모르고 수도를 방어하고 음모자들을 체포하려고 노력하면서도 걷잡을 수 없이 슬퍼했고, 누군가 링컨의 이름을 꺼내기만 해도 주저앉아 통곡을 했습니다.
링컨을 보내면서 자원해서 조사를 맡은 사람도 역시 스탠턴이었습니다. 그는 울먹이며 이렇게 조사(弔辭)를 낭독했습니다. '링컨은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링컨의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시대의 위대한 창조자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덕으로 원수를 갚는다(報怨以德)'는 말이요? 이제 원수같이 지내던 남북의 정상끼리 만나 구원(舊怨)을 풀고 상생(相生)으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제발 두 지도자가 마음을 열고 덕으로 감싸 안아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의 문을 활짝 열면 좋겠습니다.
남북 정상회담에 앞서 두 지도자가 갖추어야할 마음의 자세를 어떻게 가지면 좋을까요?
첫째, 해원과 상생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먼저 남북에 쌓인 아픔에 대해 '해원(解寃)과 상생(相生)'의 기운이 돌아야 합니다. 그 해원과 상생의 문을 열려면 서로의 마음부터 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서로의 마음은 꽁꽁 걸어 잠그면서 상대방의 마음 문을 먼저 열라고 하면 그 마음의 문이 열릴까요?
둘째, 서로 줄 수 있는 것부터 주어야 합니다.
지금 북한 주민들은 기아에 허덕이는데 우리는 쌀이 썩어 동물의 사료로 준다고 합니다. 왜 이 썩어나가는 쌀을 썩기 전에 북한 주민들에게 주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렇게 서로 줄 수 있는 것부터 주는 것입니다.
셋째, 서로 믿어야 합니다.
두 분의 지도자는 역사적인 대업을 성취하려는 찰나에 와 있습니다. 그 대업을 성취하는 데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입니다. 서로 의심하면 어떤 일도 이룰 수 없습니다. 믿음만이 역사의 죄인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서로 속이면 안 됩니다. 보원이덕(報怨以德)입니다. 덕(德)이라는 글자를 '큰 덕' 자라 합니다. 능히 육도와 사생(六道四生)을 감화시킬 근본이 이 덕입니다.
이번 회담에 두 분이 덕으로써 임하고, 모든 것을 화(和)와 유(柔)로써 해결하면, 능히 강(剛)을 이길 수 있고 촉(觸)없이 남북화해와 통일의 문을 열 수 있지 않을 까요!
▶️ 報(갚을 보/알릴 보)는 ❶회의문자로 죄를 짓고(幸) 다스림을 받은(문자의 오른쪽 부분인 글자 복 사람을 복종시키는 모양, 다스리는 모양) 사람이라는 데서 갚다를 뜻한다. 죄받다, 대답하다, 갚다의 뜻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報자는 ‘갚다’나 ‘판가름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報자는 執(잡을 집)자와 又(또 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報자의 금문을 보면 수갑을 찬 죄수를 잡으려는 듯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글자의 형태로만 본다면 같은 시기에 그려진 執(잡을 집)자와 비슷하다. 다만 報자에는 又(또 우)자가 있으므로 수갑을 차고 있는 죄수를 붙잡아두고 있는 모습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죄수를 붙잡아둔 모습이 왜 ‘갚다’라는 뜻을 가지게 된 것일까? 報자에서 말하는 ‘갚다’라는 것은 사실 벌을 받아 죗값을 치르라는 뜻이다. 그래서 報(보)는 ①갚다 ②알리다 ③대답(對答)하다 ④여쭈다 ⑤치붙다 ⑥재판하다 ⑦판가름하다 ⑧공초(供招)받다(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다) ⑨간통(姦通)하다, 간음(姦淫)하다 ⑩나아가다, 급(急)히 가다 ⑪갚음 ⑫알림, 통지 ⑬신문, 신문지 ⑭처형,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갚을 상(償), 갚을 수(酬)이다. 용례로는 일반에게 알리는 새로운 소식을 보도(報道), 알리어 바치거나 베풀어 알림을 보고(報告), 근로의 대가로 주는 금전이나 물품을 보수(報酬), 입은 혜택이나 은혜를 갚음을 보답(報答), 원수를 갚음을 보복(報復), 은혜를 갚음을 보은(報恩), 공훈에 보답함을 보훈(報勳), 남에게 진 빚이나 받은 것을 갚음을 보상(報償), 착한 일은 착한 대로 악한 일은 악한 대로 선악이 대갚음됨을 보응(報應), 사정이나 정황의 보고를 정보(情報), 널리 알리는 것 또는 그 소식이나 보도를 홍보(弘報), 통지하여 보고함을 통보(通報), 상대방의 정보나 형편을 몰래 탐지하여 보고함을 첩보(諜報), 신문 기사에서 일컫는 그 신문 자체를 본보(本報), 앞으로의 일을 예상해서 미리 알림을 예보(豫報), 반가운 소식을 낭보(朗報), 경계하라고 미리 알림을 경보(警報), 정보를 제공함을 제보(提報), 빨리 알리는 것 또는 그 보도를 속보(速報), 확실하게 알림 또는 그러한 보도나 소식을 확보(確報), 여러 가지 일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을 찍어 발행한 책자를 화보(畫報),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기사를 적어 벽이나 게시판에 붙이는 종이를 벽보(壁報), 그릇된 보도 또는 그릇 보도함을 오보(誤報), 근본에 보답하고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천지와 선조의 은혜에 보답함을 보본반시(報本反始), 남을 국사로 대우하면 자기도 또한 국사로서 대접을 받는다는 뜻으로 지기知己의 은혜에 감동함을 이르는 말을 보이국사(報以國士), 조상의 음덕을 추모함을 보본추원(報本追遠), 자신의 삶의 은인인 군사부君師父에 대해서 죽음으로써 보답함을 보생이사(報生以死), 원한 있는 자에게 은덕으로써 갚는다는 뜻으로 앙갚음하지 않는다는 말을 보원이덕(報怨以德), 서로 대갚음을 하는 자연의 이치를 보복지리(報復之理), 봉숭아에 대한 보답으로 오얏을 보낸다는 뜻으로 내가 은덕을 베풀면 남도 이를 본받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투도보리(投挑報李), 자식이 부모가 길러준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반포보은(反哺報恩), 원인과 결과는 서로 물고 물린다는 뜻으로 과거 또는 전생의 선악의 인연에 따라서 뒷날 길흉 화복의 갚음을 받게 됨을 이르는 말을 인과응보(因果應報), 풀을 묶어서 은혜를 갚는다는 뜻으로 죽어 혼이 되더라도 입은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음을 결초보은(結草報恩) 등에 쓰인다.
▶️ 怨(원망할 원, 쌓을 온)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마음심(心=忄;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夗(원)으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怨자는 ‘원망하다’나 ‘미워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怨자는 夗(누워 뒹굴 원)자와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夗자는 달이 뜬 어두운 밤에 뒹구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누워 뒹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怨자는 이렇게 누워 뒹군다는 뜻을 가진 夗자에 心자를 결합해 너무도 분하고 원통하여 바닥을 뒹굴 정도(夗)의 심정(心)이라 뜻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怨(원, 온)은 (1)원한(怨恨) (2)원망(怨望) 등의 뜻으로 ①원망(怨望)하다 ②고깝게 여기다 ③책망(責望)하다 ④나무라다 ⑤미워하다 ⑥슬퍼하다 ⑦위배(違背)되다 ⑧어긋나다 ⑨헤어지다 ⑩풍자(諷刺)하다 ⑪원수(怨讐) ⑫원한(怨恨) ⑬원망(怨望) 그리고 ⓐ쌓다(온) ⓑ축적(蓄積)하다(온)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원망할 앙(怏), 한 한(恨), 근심할 담(憾),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은혜 은(恩), 은혜 혜(惠)이다. 용례로는 원통하고 한되는 생각을 원한(怨恨), 남이 한 일을 억울하게 또는 못마땅하게 여겨 탓함을 원망(怨望), 자기 또는 자기 나라에 해를 끼친 사람을 원수(怨讐), 원망하는 소리를 원성(怨聲), 자기에게 원한을 갖고 있는 사람을 원가(怨家), 남편이 없음을 원망하는 여자를 원녀(怨女), 원한을 품은 여자를 원부(怨婦), 원망하고 꾸짖음을 원구(怨咎), 무정한 것을 원망하면서도 오히려 사모함을 원모(怨慕), 원한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불화를 원구(怨溝), 원한을 품고 악한 짓을 저지름을 원특(怨慝), 원한을 품음을 구원(構怨), 남이 저에게 해를 주었을 때에 저도 그에게 해를 주는 일로 앙갚음을 보원(報怨), 노여움과 원한으로 노하여 원망함을 노원(怒怨), 원수를 맺거나 원한을 품음을 결원(結怨), 어떤 일로 말미암아 남의 원한을 삼을 매원(買怨), 털끝만큼 하찮은 원망이나 원한을 발원(髮怨), 깊이 원망함 또는 깊은 원망을 심원(深怨),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원망을 적원(積怨), 몹시 분하여 생기는 원망을 분원(忿怨),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자나 자기에게 사랑을 베푸는 자를 평등하게 대한다는 말을 원친평등(怨親平等),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다는 뜻으로 원한이 깊어 잊을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원철골수(怨徹骨髓),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한다는 말을 원천우인(怨天尤人), 원한 있는 자에게 은덕으로써 갚는다는 뜻으로 앙갚음하지 않는다는 말을 보원이덕(報怨以德),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도에 지나치면 도리어 원망을 사게 됨을 이르는 말을 은심원생(恩甚怨生), 잘못을 뉘우쳐 다시는 그런 잘못이 없도록 함을 이르는 말을 자원자애(自怨自艾), 누구를 원망하고 탓할 수가 없다는 말을 수원숙우(誰怨孰尤), 원망이 쌓이고 쌓여 노염이 깊어짐을 이르는 말을 적원심노(積怨深怒), 원망을 사면서도 꿋꿋하게 일을 진행함을 이르는 말을 임원감위(任怨敢爲), 서로 술잔을 나누고 있는 사이에 묵은 원한을 잊어 버린다는 말을 배주해원(杯酒解怨),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모하는 것 같기도 하다는 말을 여원여모(如怨如慕) 등에 쓰인다.
▶️ 以(써 이)는 ❶회의문자이나 상형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람이 연장을 사용하여 밭을 갈 수 있다는 데서 ~로써, 까닭을 뜻한다. 상형문자일 경우는 쟁기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❷회의문자로 以자는 ‘~로써’나 ‘~에 따라’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以자는 人(사람 인)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以자의 갑골문을 보면 마치 수저와 같은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을 두고 밭을 가는 도구이거나 또는 탯줄을 뜻하는 것으로 추측하고는 있지만, 아직 명확한 해석은 없다. 다만 무엇을 그렸던 것인지의 유래와는 관계없이 ‘~로써’나 ‘~에 따라’, ‘~부터’라는 뜻으로만 쓰이고 있다. 그래서 以(이)는 ①~써, ~로, ~를 가지고, ~를 근거(根據)로 ②~에 따라, ~에 의해서, ~대로 ③~때문에, ~까닭에, ~로 인하여 ④~부터 ⑤~하여, ~함으로써, ~하기 위하여 ⑥~을 ~로 하다 ⑦~에게 ~을 주다 ⑧~라 여기다 ⑨말다 ⑩거느리다 ⑪닮다 ⑫이유(理由), 까닭 ⑬시간, 장소, 방향, 수량의 한계(限界)를 나타냄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일정한 때로부터 그 뒤를 이후(以後), 위치나 차례로 보아 어느 기준보다 위를 이상(以上), 오래 전이나 그 전을 이전(以前), 일정한 한도의 아래를 이하(以下), 그 뒤로나 그러한 뒤로를 이래(以來), 어떤 범위 밖을 이외(以外), 일정한 범위의 안을 이내(以內), 어떤 한계로부터의 남쪽을 이남(以南), 어떤 한계로부터 동쪽을 이동(以東), ~이어야 또는 ~이야를 이사(以沙), 그 동안이나 이전을 이왕(以往), 까닭으로 일이 생기게 된 원인이나 조건을 소이(所以), ~으로 또는 ~으로써를 을이(乙以), 어떠한 목적으로나 어찌할 소용으로를 조이(條以), ~할 양으로나 ~모양으로를 양이(樣以), 편안한 군대로 지친 적군을 침을 이일적로(以逸敵勞), 있는 것으로 없는 것을 보충함을 이존보망(以存補亡), 이것이나 저것이나를 이차이피(以此以彼), 횡포한 사람으로 횡포한 사람을 바꾼다는 뜻으로 바꾸기 전의 사람과 바꾼 뒤의 사람이 꼭 같이 횡포함을 이포역포(以暴易暴), 속담 새우 미끼로 잉어를 낚는다로 적은 밑천으로 큰 이득을 얻는다는 뜻의 이하조리(以鰕釣鯉), 사슴을 말이라고 우겨댄다는 뜻으로 윗사람을 기만하고 권세를 휘두름을 이르는 이록위마(以鹿爲馬) 등에 쓰인다.
▶️ 德(큰 덕/덕 덕)은 ❶형성문자로 悳(덕)의 본자(本字), 徳(덕), 惪(덕)은 통자(通字), 㥀(덕), 恴(덕)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두인변(彳; 걷다, 자축거리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悳(덕)으로 이루어졌다. 悳(덕)은 바로 보다, 옳게 보는 일이고, 두인변(彳)部는 행동을 나타내고, 心(심)은 정신적인 사항임을 나타낸다. 그래서 德(덕)은 행실이 바른 일, 남이 보나 스스로 생각하나 바람직한 상태에 잘 부합하고 있는 일을 뜻한다. 본디 글자는 悳(덕)이었는데 나중에 德(덕)이 대신 쓰여졌다. ❷회의문자로 德자는 '은덕'이나 '선행'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德자는 彳(조금 걸을 척)자와 直(곧을 직)자,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금문에 나온 德자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德자는 사람의 '행실이 바르다'라는 뜻을 위해 만든 글자이다. 그래서 直자는 곧게 바라보는 눈빛을 그린 것이고 心자는 '곧은 마음가짐'이라는 뜻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길을 뜻하는 彳자가 있으니 德자는 '곧은 마음으로 길을 걷는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길'이란 우리의 '삶'이나 '인생'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니 德자는 곧은 마음가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德(덕)은 (1)공정하고 포용성 있는 마음이나 품성(品性) (2)도덕적(道德的) 이상(理想) 또는 법칙(法則)에 좇아 확실히 의지(意志)를 결정할 수 있는 인격적(人格的) 능력(能力). 의무적(義務的) 선(善) 행위를 선택(選擇), 실행(實行)하는 습관(習慣). 윤리학(倫理學) 상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임 (3)덕분 (4)어떤 유리한 결과를 낳게 하는 원인(原因) (5)공덕(功德) 등의 뜻으로 ①크다 ②(덕으로)여기다 ③(덕을)베풀다(일을 차리어 벌이다, 도와주어서 혜택을 받게 하다) ④고맙게 생각하다 ⑤오르다, 타다 ⑥덕(德), 도덕(道德) ⑦은덕(恩德) ⑧복(福), 행복(幸福) ⑨은혜(恩惠) ⑩선행(善行) ⑪행위(行爲), 절조(節操: 절개와 지조를 아울러 이르는 말) ⑫능력(能力), 작용(作用) ⑬가르침 ⑭어진 이, 현자(賢者) ⑮정의(正義) ⑯목성(木星: 별의 이름) ⑰주역(周易) 건괘(乾卦)의 상,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클 태(太)이다. 용례로는 덕이 높고 인망이 있음을 덕망(德望), 어질고 너그러운 행실을 덕행(德行), 덕행과 선행을 덕선(德善), 좋은 평판을 덕용(德容), 착하고 어진 마음으로 사귀는 벗을 덕우(德友), 덕행으로써 교화함을 덕화(德化), 덕이 두터움을 덕후(德厚), 덕의를 갖춘 본성을 덕성(德性), 덕으로 다스림을 덕치(德治), 잘 되라고 비는 말을 덕담(德談), 남에게 미치는 은덕의 혜택을 덕택(德澤), 어질고 너그러운 마음씨를 덕량(德量), 도리에 닿은 착한 말을 덕음(德音),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도덕(道德), 아름다운 덕성을 미덕(美德), 여러 사람을 위하여 착한 일을 많이 한 힘을 공덕(功德), 집안을 망치는 못된 언동을 망덕(忘德), 사람이 갖춘 덕 또는 사귀어 서로 도움을 받는 복을 인덕(人德), 아름다운 덕행을 휴덕(休德), 이랬다저랬다 변하기를 잘하는 성질이나 태도를 변덕(變德), 착하고 바른 덕행을 선덕(善德), 항상 덕을 가지고 세상일을 행하면 자연스럽게 이름도 서게 됨을 이르는 말을 덕건명립(德建名立), 덕행이 높고 인망이 두터움을 일컫는 말을 덕륭망존(德隆望尊), 덕을 닦는 데는 일정한 스승이 없다는 뜻으로 마주치는 환경이나 마주치는 사람 모두가 수행에 도움이 됨을 이르는 말을 덕무상사(德無常師), 사람이 살아가는 데 덕이 뿌리가 되고 재물은 사소한 부분이라는 말을 덕본재말(德本財末), 덕이 있는 사람은 덕으로 다른 사람을 감화시켜 따르게 하므로 결코 외롭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덕불고(德不孤), 덕이 있으면 따르는 사람이 있으므로 외롭지 않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 좋은 행실은 서로 권장하라는 말을 덕업상권(德業相勸), 덕망이 높아 세상 사람의 사표가 된다는 말을 덕위인표(德爲人表), 덕이 있으면 따르는 사람이 있어 외롭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덕필유린(德必有隣)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