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대대로 가난했어요.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저도요. 그 가난이 주위의 있는 모든 이들을 전염시키더군요. 그런데 제 자식들은 그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었어요."
- 은행 강도 형제 중 동생 토비(크리스 파인 분)의 말
* 오른쪽 형 태너, 왼쪽 동생 토비
형제는 왜 은행 강도가 됐을까요?
“참 어리석구먼요. 은행을 털면서 하루하루 사는 인생, 그런 시절은 진작 지났고. 지났어도 한참 지났는데 말이죠.”
2인조 복면 은행 강도를 쫓던 노땅 보안관 마커스(제프 브리지스 분)에게 식당에서 마주친 텍사스 촌로가 건넨 말입니다. 21세기에 은행 강도라니. 시계를 150년 정도 거꾸로 돌려 서부 개척 시대로 돌아가면 적당할 것 같은 일입니다. 2인조 강도단은 말 대신 자동차로 텍사스를 촌동네만 돌아다니며 우리나라 새마를 금고보다 작은 아주 조그만 은행들 지점만을 텁니다.
돈다발을 쓸어 담는 것도 아니고, 낱장의 소액권(1불, 5불, 10불짜리만)만 챙겨 줄행랑 치는 태너(벤 포스터 분)와 토비 형제입니다. 아마 돈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일 겁니다. 이래서 모두들 별것 아닌 것으로, 귀찮게 여기는 사건인데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마커스는 동물적 육감이 발동합니다.
사법 당국의 관심을 피할 정도로 적당히 은행을 터는 영리한 사건이라고...여기까지라면 그저 옛 서부극을 현대로 옮긴 추격전으로 그쳤을 텐데, 더 이상 낭만이 존재하지 않는, 황량한 텍사스의 현실이 녹아들며 이야기가 묵직해집니다.
* 왼쪽 마커스, 오른쪽 알베르토
이 형제가 스쳐 가는 텍사스 곳곳에는 신용 대출, 채무 상담의 간판이 넘쳐납니다. 토비가 맞닥뜨린 현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피땀으로 일궈 남겨 준 농장은 대출금 때문에 은행 차압 일보 직전입니다. 석유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차입금 상환액을 마련할 방도가 감감합니다. 곧 석유 회사가 꿀꺽할 형편에 놓여 있습니다.
농장에 있는 소 100여 마리는 스테이크 한 장 나오지 않을 정도로 비쩍 말랐습니다. 사랑하는 아들들에게 지긋지긋한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던 동생 토비는 은행을 털어 은행 빚을 갚으려 계획을 세우고, 감옥을 밥 먹듯이 드나드는 사고뭉치 형 태너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은행 강도 과정에서 사망자가 나오며 완전 범죄 계획은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좀 더 자세하게 이 형제의 강도 행각을 들여다 봅니다.
* 강도 행각 중 잠깐 집에 온 형제
어리숙한 은행 강도 행각 복면을 쓰고 은행에 잠입한 두 형제... 은행 직원이 내뱉은 “멍청하다”는 말 때문에 형이 은행 직원과 말싸움을 벌이면 동생은 말리느라 바쁘고, 창구의 손님에게 빼앗은 권총을 멀리 치우지 않아 나중에 총에 맞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쉽게 잡히지 않고 도주 행각을 벌입니다. 이들에겐 세 가지 영업비밀(?)이 있습니다.
하나, 인적 드문 텍사스 촌구석의 작은 은행지점만 노린다.
둘, 낱장의 지폐만 가져간다. 돈다발은 추적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절대로 손대지 않는다.
셋, 훔친 돈은 카지노에 가서 칩으로 바꾼 뒤 재환전해 돈세탁한다.
똑똑한 동생 토비가 세운 계획입니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형 태너는 그냥 강도행각만 무식하게 밀어붙입니다. 감옥에서 갓 출소한 형은 선량하게 살아온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은행 강도가 됐습니다. 그렇다면 동생은 대체 왜 이런 계획을 세운 걸까요. 영화는 단서를 하나씩 던지면서 관객의 호기심을 유발합니다.
한물간 보안관들의 추격전 은행에 침입해 푼돈만 훔쳐가는 독특한 강도단을 잡기 위해 보안관 마커스(제프 브리지스 분)와 파트너인 알베르토(길 버밍엄 분)가 나섭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분위기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커스는 은퇴를 앞둔 베테랑으로 마냥 낙천적인 성격에 조금만 걸어도 숨을 헐떡거릴 정도로 체력이 부실하고, 알베르토는 코만치족 출신으로 해밀턴과 시종일관 티격태격합니다.
* 동생 토비, 돈 세탁하러 온 카지노에서...
영리한 형제와 한물간 보안관과 인디언 파트너. 이들은 영화 내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입니다. 그런데 그 추격전이 참으로 텍사스 카우보이식입니다. 콧노래를 부르며 도망가는 태너는 쫓기면서도 여유로워 보이고, 소처럼 느릿느릿 걷던 마커스는 범인을 기다리겠다며 하루 종일 아주 조그마한 은행 앞 가게에서 폼 나게 죽치고 앉아 있습니다. 영화의 추격전은 이처럼 배짱 두둑한 사내들의 맷집 좋은 격투를 닮았습니다. 빠르게 전개되는 서스펜스가 익숙한 시대지만 마치 서부극의 시대로 돌아간 듯 느릿느릿한 템포는 이질적이어서 더 빨려듭니다.
두 형제가 은행을 턴 이유 영화가 중반으로 치달으면 쫓기는 자와 쫓는 자의 절박한 사연이 드러납니다. 영화는 그들의 절박함을 땀방울까지 묘사하면서 표현해냅니다. 보안관들의 느긋함과 은행 강도단의 절박함 사이에서 영화는 균형을 잃지 않고 달려갑니다. 토비가 은행 강도를 계획한 이유는 은행에 저당 잡힌 어머니의 유산인 농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농장은 은행에 저당 잡혀있는데 최근에 석유가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 농장, 멀리 석유시추시설이 보입니다
바로 이 농장을 지켜 자식들에게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강도 행각을 벌인 것입니다. 형제들이 은행을 터는 미국 뉴멕시코와 텍사스의 서부 지역은 1860년대 이전엔 코만치족이 지배하던 곳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코만치족인 알베르토는 백인인 마커스에게 이곳이 150년 전 자신들의 할아버지 세대가 살던 곳이라고 얘기합니다. 형 태너는 카지노에서 만난 코만치족에게 "나도 코만치족"이라고 말합니다. 영화는 인종에서 자본으로 주체만 바뀌었을 뿐 되풀이되는 수탈의 역사 속에서 무엇이 정의인지를 묻고 있는 셈입니다.
< 영화 제목 이야기 >
<Lost in Dust>로 해석된 영화의 원제는 <Hell or High Water>입니다. 이는 '지옥에 있더라도 또는 거친 파도가 몰아쳐도!'란 의미입니다. 영화 초고의 원제는 <Comancheria>, 즉 '코만치의 땅'이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애초에 <코만체로의 땅>에서 <로스트 인 더스트>로 둔갑되어, 가족을 위해 먼지 속으로 기꺼이 사라지는 두 형제 이야기로 탈바꿈했습니다.
잘 단련된 군대가 총칼을 앞세워 인디언을 몰아냈어도 보안관보인 알베르토는 지금의 텍사스 땅에 건재하고 있습니다. 또 토비가 설혹 자기 땅에서 유전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아이들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것입니다. 결국은 두 번째 제목인 지옥에 있던지 거대한 파도가 휘몰아쳐도 살아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갈 것입니다. 어쩌면 원래 제목인 ‘Hell or High Water'가 어울릴 것 같기도 합니다.
<간략한 줄거리 >
가본 적도 없는 낯선 곳에 순식간에 다녀온 듯한 경험은 영화를 보는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를 보는 관객은 103분 동안 황량하고 건조한 미국 텍사스를 헤매고 온 듯한 느낌을 가질 것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 입 안에서 버석버석한 흙먼지가 씹히는 느낌입니다.
빚더미에 앉은 동생 토비는 범죄 이력이 많은 형 태너와 함께 텍사스의 아주 작은 은행지점들을 돌며 강도 행각을 벌입니다. 어머니의 유산인 농장이 은행에 차압당할 위기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은퇴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보안관 마커스와 아메리카 원주민 혈통의 파트너 알베르토는 이들 형제 강도단의 뒤를 좇습니다.
메마르고 뜨겁고 누르스름한 대지 위의 범죄자들은 병맥주를 물처럼 들이마신 뒤 운전하고 은행을 털고 도주합니다. 보안관들도 과학수사 같은 것은 아예 하지 않습니다. 강도들이 들이닥칠 것 같은 은행 앞의 퇴색한 가게에 앉아 죽치고 기다릴 뿐입니다. 이곳엔 마을 주민들도 범상치 않습니다. 총기 소지의 자유를 사랑하는 텍사스 사내들은 강도들이 들이닥치자 숨기는커녕 저마다 바지춤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들고 저항합니다. 카메라는 거대한 땅덩이 위에 드문드문 점처럼 늘어선 건물들과 사람들, 그들의 행동을 무심하게 잡아냅니다.
* 강도단이 나타날때까지 은행 앞 가게 앞에서 죽치고 앉아있는 마커스와 알베르토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의 두 형제의 삶도 이렇게 황량한 텍사스의 벌판을 닮았습니다. 교도소에서 갓 출소한 형과 가스회사에서 해고당하고 이혼까지 당해서 자신의 아이들을 마음대로 만날 수조차 없는동생. 그리고, 다가오는 주택 담보 대출 상환 만기일. 어머니가 물려주신 유일한 재산인 땅, 그리고 이제는 석유가 나오는 이 땅이 넘어가지 않도록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은행털이 뿐입니다. 영화는은행털이를 화려한 액션으로 치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강도행각이 서투르기가 짝이 없습니다.
* 쫓기는 태너, 알베르토를 쏘아 죽입니다.
그리고 그둘을 쫓게 되는 보안관은 은퇴 직전 마지막으로 이 사건을 맡게 되는 베테랑입니다. 두 형제와베테랑 보안관과 파트너는 마치 텍사스의 황량한 평원과 같이 건조한 삶을 살아갑니다. 텍사스의 황량한 들판과 문을 닫고 인적 없는 거리와 퇴색한 상점들...돈을 벌 수 있는 길은 사라져버리고, 세금과 이자는 그대로 내야하는 두 형제...동생 토비는 자식들에게는 이런 지긋지긋한 가난은 물려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영화는 알베르토가 태너에게 총을 맞아 죽고, 형 역시 마커스의 총에 맞아 죽습니다. 그러니 형이 추격자들을 따돌리는 바람에 동생은 잡히지 않게 되고, 결국은 어머니의 집과 땅을 지킵니다. 그 땅에서 나오는 얼마 되지 않은 석유를 퍼내지만 모두 자식들에게 물려준 상태라 본인의 손에 들어오는 것은 한 푼도 없습니다. 마지막 장면에는 긴장감이 흐릅니다. 토비 역시 공범인 줄 확신하지만, 증거도 없고 은퇴까지 해버린 마커스는 토비의 농장으로 찾아갑니다. 친했던 파트너 알베르토의 복수를 생각했을 겁니다.
* 열이 받힌 마커스, 태너를 한 방에...
토비도 형을 죽인 마커스를 보고 자연스럽게 총을 손에 쥡니다. 두 사람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토비가 여기에서 나오는 석유는 자식들과 전처의 소유이고 본인은 한 푼도 관계없다는 말을 합니다. 마침 그때 전처와 자식들이 돌아와서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합니다. 마커스는 토비와 별 충돌이 없이 맥주 한 병을 나눠 마시고 돌아섭니다. 다음에 보자는 마커스의 말이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 알 듯 모르듯 표정을 지으며 돌아서는 마커스의 의중은?
* 농장으로 찾아온 마커스,멀리 토비가 총을 들고...
* 이 영화에서 마커스와 알베르토는 사실 텍사스 레인저입니다. 레인저라고 하면 모르실 것 같아 보안관이라고 했습니다. 텍사스 레인저는 텍사스 주에서 법 집행관 입니다. 미국에서는 법 집행 하는 기관이 여러 종류가 있는데 연방 수준으로는 FBI가 있고 경찰은 각 도시에서 인력을 뽑아서 활동합니다.
다음 단위가 보안관(셰리프)인데 경찰이 없는 조그만 도시나 읍에서는 쉐리프라고 해서 경찰 역할을 합니다. 경찰이 없는 곳은 보안관이 경찰 업무를 수행한다고 보면 됩니다. 레인저는 텍사스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인데 주 단위로 활동을 하는 주 경찰입니다. 텍사스 레인저는 주로 강력범죄를 다루고 있으며 원래 뜻은 민병대에서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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