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서받지 못할 손자들!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 영전에 올립니다.
할아버지 기일은 동짓달 초사흘이고, 할머니 기일은 유월 수무닷새이며, 어버지 기일은 시월 열닷새, 진양정씨 어머니는 이월 수무아흐렛날이고, 해주정씨 어머님은 음력 정월 열사흘이신데, 아버지께서 별세하신 기일에 할아버지 할머니의 제사를 같이 모시고,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의 하늘같이 넓고, 크셨던 사랑과 은혜를 기리고자 이렇게 자손들이 많이 모여 정성껏 마련한 제물과 잔을 올리오니 흠향 하옵시기를 엎드려 바라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이 못난 불초 손자를 용서해 주십시오.
할아버지 할머니 기제사를 오늘 마지막으로 올리옵고, 새해부터는 소종중에서 윗대 조상님들과 함께 시제로 모시고자 하여 이렇게 오늘 저녁 제문에서 아뢰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를 모셔야 할 백부님께서 별세하시고, 장손자도 불의의 사고로 젊은 나이에 타계하여, 어린 증장손자가 장성하여 가정을 이루어 할머니 할아버지 내외분의 기제사를 받들 때 까지 만이라도, 이 못 난 불초 손자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할아버지 할머니 제향을 모시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께서 살아생전 자손들에게 베푸셨던 사랑과 은혜를 헤아리고 기리면서 모시고 받들고자 하였으나, 이 못 난 불초 손자가 일흔세 살의 나이에, 병이 들어 치료를 2년 동안이나 더 받아야하는데다, 칠순에 가까운 손자며느리마저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병을 앓아 어려운 지경에 이르고, 발과 손목 관절이 좋지 않아 부득불 이런 불효막심한 일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넓으신 마음으로 불효 손자를 용서해주십시오. 할아버지, 할머니의 장증손자인 백부님 장손인 수관이가 아직 미혼이라 할아버지 할머니의 제향을 받들어달라고 부탁을 할 수 없는 처지라,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하는 수 없이 제가 오늘 이 기제사를 마지막으로 제를 올리옵고, 새해부터는 시제를 올려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자 하오니, 부디 불초한 이 손자를 용서해 주시고, 저와 똑 같은 다른 수많은 못난 손자들도 같은 마음으로 오늘 저녁에 할아버지 할머니를 뵈옵게 되었으니, 넓으신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참으로 미안하고 죄송스럽습니다. 이 못난 불효 손자가 다시 한 번 엎드려 용서를 빕니다.
조부이신 하자 중자(夏中) 할아버지께서는 지금으로부터 126년 전인 1888년 음력 1월 23일 추운 한겨울 고성군 구만면 효락리 낙동 658번지에서 태어나셨다가, 84년 전인 1930년 음력 11월 4일에 할아버지께서 거처하시던 댁에서 홀로 되신 예순 여덟이 되셨던 어머니와 17살의 장남이셨던 큰아버지를 비롯한 5남 1녀의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이제 안 되겠다, 내 어머니와 어린 자식들을 잘 부탁한다”는 말씀을 아내이신 할머니에게 당부하시며 눈을 감으시니 향년 42세의 참으로 아까운 연세에 돌아가셨다.
서른한 살(31살)에 홀로되시어 예순 여덟(68)이 될 때 까지 마흔두 살의 장남이셨던 아드님을 하늘 같이 믿고 살아오신 할아버지의 어머니이셨던 증조할머니와 어린 손자손녀 육남매가 지켜보는 가운데 갑자기 온 복통으로 배를 움켜잡은 채 운명을 하시니, 그 때 막내 손녀로 태어나신 내 고모님께서는 돌을 지낸지가 얼마 안 된 생후 1년 9개월이 지날 무렵이었다. 다섯 아드님을 얻으시고, 여섯 번째에 따님을 보신 할아버지께선 늘 말씀 하시기를 “우리 성희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고 아주 귀여워하시며 크게 사랑하셨다고 전해 온다. 다섯 아드님을 얻으신 후라 어찌 막내 따님이 그렇게 소중하고 사랑스럽지 않으셨겠는가.
칠순 가까운 연세의 어머니와 체구가 연약한 아내인 할머니와
자상하고 강인한 아버지의 보호와 양육이 필요했던 어린 육남매를 두고 아내이셨던 할머니에게 모든 걸 미루고 부탁하며 배를 움켜잡고 고통을 참으시며 마지막 말씀을 남기셨던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그 어려운 환경과 가난에 시달리며 육남매를 키워 오신 할머니를 생각하면, 이 못난 손자들의 이 불효가 용서 받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저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할머니께서는 달성 배씨 이셨고, 성함은 수자 혜자(秀兮)이셨다. 할머니께서는 경남 고성군 마암면 화산리(慶南 固城郡 馬岩面 禾山里) 수실 마을에서,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음력 1월 19일에 태어나셨다가 벽진 이씨 가문의 할아버지께 출가하시어 한 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30년 전인 1984년 음력 6월 25일 무더운 한 여름에 별세하셨으니 향년 90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 우리 벽진 가문에 시집오신지 일흔두 해가 되었던 해였고, 할아버지께서 별세하시고 안 계셨던 외롭고 쓸쓸한 세월을 혼자 보내시며 가문과 자손을 홀로 지키신지 쉰 네 해가 되셨던 해였다.
할머니께서는 고려 개국공신 무열공 배현경(武列公 裵玄慶)의 후손이셨고, 할머니의 어버님 성함은 진자 규자 이신 배진규(裵晉奎) 이셨으니, 우리 당대에 유명했던 영화 배우 김진규 씨와 이름이 꼭 같은 나아갈 진(晉)자에 별 이름 규(奎)자 이셨다. 서른한 살에 홀로되신 함안 이씨 증조모님과 36살에 홀로되신 달성 배씨 조모님 두 분 할머니께서는 우리 집안의 명맥을 지켜 오신 유일한 파수꾼이셨다. 두 분 할머니께서는 비록 가난하여 끼니를 걱정하여야 할 막다른 골목에 몰리셨어도, 자라나는 6남매와 여섯 손자 손녀의 장래를 위해 자존심과 자긍심을 잃지 않으시려고 안간 힘을 다 쓰신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 온다.
수실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시던 30대 후반의 어느 해, 음력 9월 14일, 수실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이시고 원(源)자 항렬 우리들에게는 고조할아버지가 되시는 응자 화자(應和) 할아버지의 제삿날이 다가왔다. 수실할머니는 남편 되시는 수실할아버지께 시조부 되시는 제삿날에 뫼를 지어 올릴 뫼 쌀이 없다고 말씀을 드렸다. 영오면 어느 부잣집 벼 타작을 해주시려고 길을 떠나려고 하셨던 할아버지께선 아내이셨던 수실할머니께 약속을 하셨다. 닷새 뒤, 고조할아버지의 기일 날, 늦지 않게 반드시 뫼 쌀을 작만 하여 올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시고 길을 떠나셨다.
그러나 제삿날 당일 밤이 깊어가는 데도 할아버지께서 당도하시지 않는 것이었다. 할머니께서는 솥을 깨끗이 씻어두고 뫼 쌀만 도착하면 뫼를 지을 만반의 준비를 다 해놓고, 어머니이셨던 연동할머니와 백부님과 아버지 되시는 어린 자녀 6남매가 할아버지께서 문 안으로 들어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온 식구가 초초하게 기다리던 밤이 깊은 해시(亥時: 오후 9시~11시 까지)가 되어 전신에 땀범벅이 되신 채, 숨을 헐떡이시며, 기다렸던 할아버지께서 쌀자루를 메고 당도하셨다. 닷새 동안 일을 다 마치시고, 영오면에서 뫼 밥 짓는데 늦지 않으시려고 재를 넘어, 뛰고, 걷고 내달려 밤길 50리 길을 달려 젯밥 지을 시각에 겨우 맞춰 댁에 당도하신 것이다.
그런 아버지 어머니 밑에서 백부님을 비롯한 6남매 어린 자녀들이 자란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손자 중에는 할머니가 그렇게 할아버지를 기다릴 게 아니라, 남의 집에 가서 우선 쌀을 빌려 제삿밥을 지었어야 옳았다고 주장하며, 할머니의 융통성이 없었음을 지적하는 손자가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내 의견을 말하는 말참견이나 시시비비를 삼갔다. 할머니께서 기다리신 그 기다림의 참 뜻을 이해를 못하는 손자를 보고, 내가 무엇이라고 말을 했어야 옳았겠는가. 나이를 먹어 할머니의 기다림이 무슨 뜻이었는지, 깨닫게 될 때 까지 기다려줄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쌀을 빌릴 줄 몰라서 빌리지 않으셨겠는가? 할머니께서 할아버지가 도착하실 때 까지 그 초초한 시간을 보내셨던 기다림이셨지만, 하늘이 두 쪽이 나는 한이 있더라도, 내 남편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는다는 할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할머니 자신의 당신 자존심을 스스로 지키신 것은 물론이려니와, 남편 되시는 수실할아버지의 자존심도 살려드렸고, 조상님들에 대한 자존심과 자긍심도 살려 주신 예사스런 일이 아닌, 어쩌면 할머니 자신의 일생과 6남매의 장래가 걸렸던 신뢰와 믿음이 반석보다도 더 단단하게 자리 잡아야 했던 순간으로서 참으로 귀하고 값진 기다림이셨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더욱더 긴 세월, 세세손손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이어 갈 자손들을 위한 참으로 어려운 결단과 신의의 기다림이셨다고 나는 생각한다.
조상 제사에 젯밥을 지을 뫼 쌀이 없어서 남의 집에 가서 쌀을 빌려왔다고 가정해보자. 쌀을 빌려준 집이 일가친척 집이었던, 남의 집이였던지 간에 무엇이라고 뒷말이 나오겠는가? 집안이 저렇게 해서 망 하는 것이야, 제사에 쓸 멥쌀을 빌리려 다니다니, 저 많은 자식들이 참 안됐어. 아마도 이런 값싸고, 듣기 거북한 그런 동정과 비난의 말 이외에 받을 것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사람의 진가는 어려움을 당해보면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할머니께서는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키신 것이고, 당신의 운명과 자식들과 벽진 이 씨 가문의 참 사랑을 믿으시고, 그 시간까지 빈 솥을 깨끗이 씻어 놓고, 할아버지를 철석같이 믿으시며 기다린 것이 아니겠는가?
컴컴한 험한 50십리 먼 길을 쌀자루를 둘러메고, 땀에 흠뻑 젖어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달려오신 할아버지께도 훌륭하셨지만, 조용히 할아버지를 기다리신 할머니가 더 위대한 어머니 이셨고, 위대한 내 할머니이셨다는 생각이 든다.
증조모님께서는 여장부와 같은 활수의 어른이셨지만, 조모님께서는 아주 조용하고 조신하시는 어른이셨다. 여든이 넘으신 연세에도 불구하고, 저 멀리 의관을 갖추고 오는 낯선 할아버지가 보이시면, 큰댁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들어 서셨다가도, 다시 우리 집안으로 들어오셔서 그 어른이 지나가시고 난 다음에야, 가시던 길을 재촉하여 길을 가시는 그런 내 할머니이셨다.
나는 이런 가난한 할머니 할아버지 손자였던 것이 부끄럽기는커녕 한 평생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그런 두 할머니께서 오랜 세월 참고 견디신 인고의 세월을 지내시면서, 우리 자손들에게 바라셨던 것이 있었다면 무엇이겠는가? 후손들이 잘 차린 제사상이었겠는가? 아니다. 자손들이 열심히 일하여 가난에서 벗어나고, 사람의 도리를 배우고 익혀 적어도 가족에게나, 가까운 일가친척에게나,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걱정을 끼치지 않고 의롭고 슬기롭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자손들이 되기를 바라시면서 그 어려웠던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셨던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우리들이 이 만큼이라도 살아갈 수 있었던 것도, 이 두 분 할머니의 간절한 소망과 기원이 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두 할머니께서는 어린 손자이고, 증손자인 어미 잃은 나를 앞에 앉혀 놓으시고, “우리 원이는 릴리리 쿵쿵을 앞세울 것”이라고 늘 상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자랐다. 나는 “릴리리 쿵쿵”이 무엇인지 어릴 때는 잘 몰랐지만, 손자에게 좋은 일이 있기를 미리 빌어주시고, 간절히 희망하시고 계셨다는 것을 중학교에 들어가고서야 증조모님의 참 뜻과 참 마음을 희미하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뒤에 안 일이었지만, “릴리리 쿵쿵”이란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하여 고급 관직에 임명되어 고향 집으로 돌아올 때 어사 행차 앞에서 풍악을 잡히며 오는 소리와 광경을 “릴리리 쿵쿵”이란 말씀으로 나타내신 것이며, 그런 일이 당신 손자들에게도 일어나기를 간절히 희망하며 바라고 계셨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할머니께서는 모든 손자 손녀, 외손들에게 깊은 애정과 사랑을 갖고 계신 어른이셨다. 특히 할아버지를 일찍 여의시고 아버지 사랑과 훈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라나는 6남매가 혹시나 잘 못될까 봐, 증조모님과 조모님 두 분 할머니께서는 몹시 마음을 쓰고 애를 태우시며, 가정교육으로써 겸손과 정직과 형제간의 우애를 가르치시고, 훈육하시며, 자손들을 온갖 정성을 다하여 키우셨다고 하였다. 특히 증조모님께서는 아버지 없이 자라나는 육남매 손자손녀들이 기죽어 자랄까봐, 손자손녀들의 자랑이 늘 상 당신의 입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고 하였다. 특히 증조할머니께서는 잘 생기고, 소심한 셋째 손자인 어린 굴문숙부를 애지중지하시면서 어르시는 말씀이 전해져 온다.
“중호야 중호야, 내 손자 중호야! 이 세상 넓은 천지 어딜 가 봐도, 내 손자 중호만큼 잘 생긴 장부를 찾아 볼 수 없다” 고 어르시고, 예뻐하시며, 아비 없이 자라는 손자들에게 기를 살려주시려고 애를 쓰시며 살아오셨다고 전해온다. 증조할머니의 그 장엄하고, 안타깝고, 눈물겨운 모습이 지금도 눈에 보이는 양, 상상이 되면서 증조모님의 그런 사랑에 나는 내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잡으며 옷깃을 여민다.
우리 할머니 두 분께서는 한 평생 이렇게 노심초사 하시면서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조심조심 애를 태우시며 긴 세월을 살아오셨다. 내 동생 곰실 김실이도 할머니보다 다섯 살이나 젊은 31살 젊은 나이에 남편 김서방을 여의고, 어린 남매를 눈물로 키우며 혹시나 잘 못될까 봐, 한 평생 노심초사하면서 살아왔는데, 왜 이런 참담한 인연이 우리 집안에서 대를 이어 연이어 일어났는지. 우리 모두의 인생사에는 참으로 예측도 할 수 없고, 짐작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기에, 늘 행복한 삶을 위한 치열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조심조심하고,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가는 두 할머니의 지혜로운 생활철학을 본 받아야할 것 같다. 그리고 한 순간 한 순간을 최선을 다하여 성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살이가 아닌가 한다.
할머니의 가슴을 가장 기쁘시게 하신 분도, 가장 아프게 하신분도 내 막내 삼촌 송산숙부님 이셨다. 막내 아드님으로 태어나 총기 있고, 공부를 잘하시어 우리 집안에 큰 희망을 갖게 하셨다. 다시는 남의 집에 가서 글을 빌려오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그 여망을 송산 숙부님께서는 두 할머니 생전에 이루어 내셨고, 당신께서는 두 분 할머님으로부터 훈육 받은 겸손과 정직과 성실과 신의를 쌓아 미곡상을 크게 성공하시어 부도 쌓고 할머니께 더운 진지와 고기와 생선 반찬으로 어머님을 봉양하실 수 있는 효를 행하시어 돌아가시기 전까지 할머니께 큰 기쁨을 드렸다.
그러나 송산숙부님은 그 어려운 세월을 보내신 할머니 앞에서 생각지도 못한 교통사고를 당하시어 할머니 보다 먼저 별세하시니 할머니께서는 세른 여섯(36세)의 한창 젊은 나이에 마흔 두 살의 남편 되시는 할아버지를 여의시는 아픔을 겪으셨는데 다 이미 할머니 춘추 일흔 두 살(72세)의 고령의 연세로 당신의 몸도 지탱하기 어려운 그런 형편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똑 같은 마흔 두 살의 사랑하는 막내 아드님을 또 당신의 가슴에 묻게 되셨으니, 이 세상 어느 어머니가 마흔 두 살이라는 부자간의 같은 나이의 죽음이란 그 악연의 연속에 피눈물을 흘리지 않으실 수 가 있었겠는가? 그 때 송산숙부님의 장남이었던 종원 종제 나이가 열여섯, 만으로 15살 이었으니, 할머니께서는 장남이셨던 백부님께서 할아버지를 여의시던 나이 때보다도 더 어린 3남 2녀의 아버지 없는 손자 손녀를 보시게 되었으니, 어찌 할머니 가슴에 피멍이 들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할머니께서는 꾸부정하신 불편하신 몸으로 지팡이를 짚고 매일 아들이 먼저 떠난 송산숙부님 댁으로 내려오셔서 손자손녀들을 보살펴 주시고는 큰댁으로 올라가시곤 하셨다. 할머니께서는 당신의 기구한 운명에 도전이라도 하시듯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매일 내려오셔서 어린 손녀 경난이와 숙난이를 쳐다보시고 가슴 아파하시면서 눈물을 훔치셨다.
백부님께서 일본에 가셔서 온갖 수모를 겪으시면서도 종내는 성공을 하셔서 집안을 일으켰듯이, 종원 종제는 수만리 떨어진 열사의 나라 사우디아라비아까지 가서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에 눈 뜨기도 어려운 고통을 참아내면서 어렵사리 벌어온 돈으로 동생들 뒷바라지를 다 하지 않았던가! 백부님과 종원 종제의 그 인내와 그 뚝심과 그 용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겠는가?
두 할머니의 자상하고 연속적인 가정교육의 덕분 이었다. 두 할머니의 가정교육은 성공적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해, 큰아버지께서 열여덟 살이 되셨다. 농사지을 농토도 없고, 일손도 없는 가난한 집안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장손이고 장남이셨던 열여덟 살 큰아버지께서 일본으로 가시겠다고 하시자, 두 할머니께서 쾌히 허락을 하셨다는 것은 당시 집안 형편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열여덟 살 백부님께서 집을 떠나시면 일곱 식구를 먹여 살릴 노동력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두 할머니께서는 당신들의 고생과 어려움이 더 크게 다가올 것을 마다않고, 자손만대를 위해 결단을 내려서 백부님의 장한 뜻을 받아들이고, 허락하여 주신 것이다.
두 할머니의 가정교육은 정말로 성공적이었다. 어려운 환경가운데 두 분 할머니 슬하에서 장성한 육남매의 형제남매간 우의가 참으로 돈독했다. 여섯 형제남매간에 한 평생 가까이 사시면서도 서로 간에 얼굴을 붉히거나 언성을 높이시거나 다투시는 일이 한 번도 없으셨으며, 형제남매간에 절대로 서로 간의 허물을 입 밖에 내는 일이 없으셨다. 의좋게 지내는 형제남매들을 보고 일가친척들은 물론, 인근 타성 사람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 없이 자란 어린 자녀들이 어쩌면 저렇게 착하게 잘 자랄 수 있느냐고 하면서, 두 할머니 슬하에서 착하고 예절바르게 자라는 6남매를 보고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가문에 시집 온 백모님과 숙모님들과 어머님들은 그렇지 않고 많이 달라서, 어린 우리들 마음에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도록 하였던 기억이 남아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큰 실수는 포기해버리는 것이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어리석은 일은 남의 결점만 찾아내어 비난하는 것이고, 가장 나쁜 감정은 질투이고, 그리고 가장 좋은 선물은 용서라고 하지 않았던가. 두 할머니는 비록 많이 배운 바는 없으셨지만, 자손들이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엄격한 가정교육으로 훈육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철이 들어 겨우 깨닫게 되었으니, 불초한 이 손자가 왜 이렇게 늘철이 늦게 나는지 모르겠다.
열여덟 살의 백부님께서 일본 동경에 가셔서 처음에는 일본 사람들의 똥도 퍼고, 새벽에는 동경의 도시 쓰레기도 치우시는 등 온갖 고생과 궂은일 다하셨지만, 어릴 때에 두 할머니로부터 귀가 닳도록 듣고, 배우고, 익힌, 겸손과 정직과 형제간의 우애와 같은 신의를 바탕으로, 당시 일본사람들도 허가가 잘 나지 않았던 비행기 부속품인 볼트와 낫트를 생산하는 큰 공장을 동경 근교에 짓고, 큰돈을 벌어 당신의 가족이 사실 2층 양옥집을 마련하신 후, 동생들을 일본으로 불러들여 낮에는 공장에서 함께 일을 하게하고, 밤에는 야간 학교를 다니게 하였다. 추간 숙부님께서 한 평생 경찰에서 정년을 맞을 수 있었던 것은 일본에서 야학으로 공부를 하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향에 큰돈을 내 보내 농사지을 농토를 구입하시는 등 가난했던 집안을 일으키시니 할머니 두 분의 기쁨이 얼마나 크셨겠는가! 가난에 쪼들려 기 한번, 허리 한번 펴보지 못하셨던 아버지 형제분들, 그 육남매의 즐거움과 기쁨과 희망은 얼마나 크게 부풀어 있었겠는가! 지금 잘 살고 있는 우리 자손들은 가깝게는 큰아버지의 사생결단의 덕택으로, 좀 더 멀게는 두 분 할머니의 올바른 가정교육과 자손들이 잘 되기를 바라셨던 두 분 할머니의 간절한 기원과 바램으로, 오늘의 우리가 여기 있게 되었다는 우리들의 가족사와 두 분 할머니의 은혜를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믿는다. 이런 할아버지의 훌륭한 피를 이어받은 우리 집안 종손 수관이가 천하의 영재가 다 모이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를 졸업했지 않았는가. 몸담은 건축업계에서 자랑스러운 건축인이 되어, 다 쓸어져가는 고향 할아버지 댁도 다시 일으켜 세우기를 간절히 바란다. 바로 그 날이 수관이 할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들의 큰아버지가 되시는 윗대 어른들과 삶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생을 마친 아버지, 낙원 종제가 환한 얼굴로 다시 부활하여 살아오시는 날이 된다고 믿는다. 바로 그 날이 또 우리 집안 모두가 다시 살아나고 다시 일어나는 날이 될 것이라고 믿고, 그날이 하루 빨리, 내가 죽기 전에 오기를 학수고대하며 지내려고 한다.
수관아! 용기를 내라. 그리고 헌헌대장부가 되어 이 집안을 넓은 도량으로 사랑하고, 겸손하고, 정직하고, 사교적이셨던 할아버지를 잘 기억하고 배워서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종손이 되기를 기원한다. 우리 집안사람들 모두가 마음속으로 너를 사랑하고 크게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평생 잊어서는 안 된다.
일본에 건너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 큰아버지께서 일본에서 돈을 벌어 고향 집으로 보내 주셔서 할머니의 평생 소원이셨던 큰 밭을 동네 안 석질에 마련하게 되었다. 할머니께서 얼마나 좋으셨던지, 그 밭을 둘러보시고, 또 둘러보시고, 그 장한 아드님이 사주신 그 밭두렁에 앉아 하도 좋아서 집에 들어가기가 싫다고 하셨다고 했다. 얼마나 좋으셨으면 언제까지고 그 밭두렁에 앉아 계시고 싶으셨겠는가.
나중에는 그 밭을 농사짓는 네 형제분이 나누어 밭농사를 지었다. 나란히 밭고랑을 나누어 밭농사를 짓는 것을 보고, 분배한 각각의 밭 면적이 작다는 생각보다는, 형제분들이 저렇게 의좋게 밭농사를 짓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너무나 자랑스럽게 생각되었다. 내 아버지는 밭갈이를 하실 때, 당신의 밭갈이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백부님 밭도 늘 갈아드리는 것을 보았다. 백부님께서 돌아가신 후 백모님께서 불을 지피는 불쏘시개감이 부족할 것을 염려하여 아버지가 직접 산에 가셔서 갈비짐을 만들어 큰 댁 부엌에 넣어드리는 것을 보고, 아버지의 형제애가 이미 하늘에 닿아 있었음을 알았다. 나는 이런 아버지가 존경스러웠고, 이런 자랑스러운 형제애가 싹튼 것은 어릴 때부터 두 분 할머니의 끊임없는 타이름과 자상하셨던 훈육의 덕택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께서는 자손들 중에 어머니나 아버지를 잃은 손자 손녀들에게는 당신의 온갖 정성을 다하시어 사랑을 베풀어 부족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에미 애비 사랑을 메꾸어 보상해 보시려고 애를 쓰시면서 살아오신 철인의 여인이셨고,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할머니이셨다.
수많은 손자 손녀들의 생일을 기억하시고, 생일 날 아침이 되면 머리를 감아 빗으시고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으신 후, 집집으로 가시어 쌀과 정화수를 상 위에 차려놓고 조손들의 무병장수와 행복한 삶을 위해 손이 닳도록 오래 동안 오래 동안 빌어주시는 것이었다. 삼천갑자 동방삭이 처럼,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조상님께 빌어주시는 말씀을 할머니로부터 어릴 때부터 생일날 마다 들으면서 자랐다. 60년 씩 살기를 3000번을 거듭하여 총 18만년이나 오래오래 무병장수하라는 말씀으로 자손들의 앞날을 빌어주시던 할머니께서 우리 곁에 계셨던 것이 아니던가! 이 할머니의 빌어주시는 말씀을 듣고 자라나는 자손들이 모두 다 장수하며 잘 되기를 얼마나 기대 하시면서 살아 오셨겠는가.
두 할머니께서는 일찍 할아버지를 여의시고 하도 고생을 하셨기 때문에, 자손들이 오래오래 살 수 있는 장수야말로 가장 확실한 삶의 축복이고, 행복한 삶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시면서 살아오시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자손들이 삼천갑자 동방삭이가 되기를 간절히 빌어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한 평생 부평초처럼 고향을 떠나 객지를 떠돌아다니면서 외롭거나 슬프거나 우울한 날을 맞으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고향의 할머니가 생일 날 쌀과 정화수를 상 위에 차려놓고 빌어주시던 모습과 말씀을 머리에 떠올리며 어려움과 위기를 벗어나려고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어릴 때부터 조부모님으로부터 간절한 기도나 기원을 음성으로 직접 듣고 자라는 것이 성년이 되어서도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 자손들이 그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렇게 순하고 착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생일 날 빌어주신 할머니의 간절한 소원과 기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나를 길러주신 고모님과 할머니를 서울에 모시고 옛 신신백화점 옆 한일관에서 제일 좋은 한정식을 대접한 후, 남산 꼭대기 팔각정에 올라 긴 걸상에 앉아 서쪽으로 지는 저녁 해와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인 저녁노을을 보고 있을 때 “야아야, 지는 해를 왜 그리 오래 쳐다보고 있노? 지는 해를 오래 쳐다보는 것이 아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이 못난 손자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시던 일이 엊그제 같이 생각되는데, 어언 50년 세월이 벌써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우리 모두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과 조상의 음덕으로 이 세상에 귀한 생명을 얻어 태어났지만, 이해인 수녀가 말했듯 “삶이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고, 죽음이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세상은 참으로 허무한 것이라고 하였어도, 우리들의 두 할머니가 자손들에게 가르치고, 훈육하시려고 하셨던 겸손과 정직과 형제간의 우애를 인생에서 깨우쳐야 할 좋은 덕목으로 삼고 살아가면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를 깊게 생각하고, 뜻있는 인생이 되도록 사는 것이 나와 후손과 조상을 위한 최선의 삶의 길이 아닌가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오늘 이 기제사를 드리는 마지막 날에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 뿐만 아니라 우리 친외가 자손들 모두가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부러워하는 서울대학교 교수인 외손자 최홍림 교수가 잔을 올리게 되어 너무나 기쁩니다. 자랑스런 외손자가 올리는 잔을 받으셔서 다 비우시고 오래 오래도록 즐거워하시고 기뻐해 주시기를 비옵니다. 그리고 외손자 최교수가 할아버지 할머니의 혈손이 된 것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하시고, 이 세상사는 동안 무병장수할 수 있도록 음덕으로 살펴주시고, 늘 행운이 따르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장증손자인 수관이가 그 지독한 질병과 어려운 환경과 경제적 여건에서도 굴하지 않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여 어엿한 사회인이 된 것은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할아바지와 할머니와 조상의 음덕으로 우리 가문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외손자 최교수가 옆에서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최교수가 이 시기에 수관이 옆에 있었던 인연이 조상의 음덕이라고 생각하여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하늘나라 생활이 오래도록 오래도록 행복하시기를 우리 자손들 모두가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 못난 손자 불초 학원이를 용서해주십시오,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2014년 10월 11일, 불초 손자 학원 재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