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간이 무거운 돌을 산위로 굴린다. 하지만 산 정상에 이르면 돌은 바로 굴러 떨어진다. 그러면 다시 그 무거운 돌을 산 정상으로 굴려 올린다. 그 돌은 다시 굴러 아래로 떨어진다. 이런 작업을 영원히 해야 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이런 저런 신들을 속였다는 것에 대한 죄값을 치르는 것이라고 한다. 시지프스 신화는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가 저술한 시지프 신화로 인해 유명해지게 됐다.
인간은 누구나 시지프스의 신화의 시지프스처럼 매일 매일 계속되는 형벌을 받고 있다. 유한한 삶속에서 매일 매일 다람쥐 쳇바퀴돌 듯 일을 처리해야 한다. 그것을 일상사라고 부른다. 생명이 붙어있는 인간들은 깨어나면 약육강식의 정글속에서 움직여 먹을 것을 구하고 그것을 요리하고 식솔들을 부양하고 자식들을 교육시키며 살아간다. 어느 하루 예외란 없다.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지만 유독 인간이 더욱 그런 일상사를 참으로 피곤하게 처리하며 살아간다.
들판에 살아가는 동물들은 인간처럼 그렇게 살지 않는다. 본능에 충실하게 살다 가면 그만이다. 자식을 낳아 종족을 보존하는 것은 인간이나 다른 동물이나 다를 것이 없다. 일정기간 새끼를 보호하고 양육하다 어느 시간이 되면 이별하고 스스로 생을 찾아 나선다. 인간만이 자식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평생을 살아간다. 동물들은 자식 교육으로 고민하지 않는다. 인간이 고등동물이라는 그 이름때문에 자초한 일이기도 하다. 동물들은 뭔가를 저장하지를 않는다. 그때 그때 배가 고프면 사냥하고 배가 어느정도 채워지면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는다. 유독 인간만이 저장하고 다른 인간보다 더 많이 비축해 놓으려 안간힘을 쓰는 종자이다.
동물들은 사는 곳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냥 바람과 비를 피하면 모든 것이 오케이였다. 초기 인간들도 그렇게 살았다. 동굴속에서 비바람을 피하고 배가 고프면 밖에 나가 다른 동물들을 잡아 식솔들을 먹이면서 존재했다. 바람이 많이 불면 동굴앞을 큰 돌로 막아 비바람을 피했다. 그래도 그렇게 큰 불편없이 생활을 이루었다. 하지만 이른바 농경사회가 되면서 인간은 욕심이라는 것이 생겼다. 그 욕심이 더 많을 것을 생산하게 만들고 더 많이 저장하게 만들면서 인간의 삶은 치열해져 갔다. 이웃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서로 살상하는 경우도 생겼다. 힘이 강하고 무기를 장착한 인간들이 이웃들을 지배해가기 시작했다. 싸움에 진 부류들은 노예로 살거나 죽임을 당했다. 힘이 약하고 욕심이 덜한 종족들은 유전적으로 도태하게 된다. 그래서 강하고 독한 종자들만 살아남아 지금의 현대인이 된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독하고 잔인하고 욕심이 가득하겠는가.
이제 인간은 신이 제발 그만 돌을 굴리라고 해도 계속 굴린다. 아니 더 무거운 돌로, 더 높은 산으로 그 돌들을 굴리며 올라간다. 바로 욕심때문이다. 인간을 벌 주었다는 신들이 이제는 제발 그만하고 이웃과 싸우지 말고 사랑을 베풀면서 살라고 설파하지만 인간은 절대 그럴 마음이 없다. 신을 믿는다는 부류들도 특정 장소에서만 그렇게 생각하지 대부분의 장소에서는 인간 본연의 포악하고 잔인하게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그런 부모들의 모습을 보고 자란 자식들은 한술 더 떠서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래야 존재한다는 바로 그 유전적 믿음때문이다.
시지프스처럼 고달프게 매일 무거운 돌을 굴리는 행위는 신이 내린 형벌이 아니고 바로 인간 스스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남겨진 처절한 유산인 셈이다. 그런 인간들의 행위를 단지 신이 내린 형벌이라는 것으로 위장을 하고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인간 스스로 만들었고 인간 스스로 행하는 짓거리에 불과하다. 아마도 시지프스의 행위는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다른 별들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지구위에 생존하는 호모사피언스같은 이런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그야말로 욕심이 없는 속에서 평화와 평등을 노래하며 살고 있는지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2023년 5월 14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