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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41)‘검은 피부 하얀 가면’ 프란츠 파농
“나는 프랑스인입니다.” 파농이 학교에서 가장 먼저 배운 문장이다. 비록 프랑스 식민지 마르티니크 섬에서 흑인 노예의 후손이었던 아버지와 흑백 혼혈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완벽한 불어를 구사하는 중산층 집안에서 전형적인 프랑스식 교육을 받고 자란 파농이 스스로를 프랑스인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1939년 로베르 제독이 이끄는 함대와 1만명의 군대가 마르티니크 섬에 도착한다. 조국 프랑스가 독일의 침공으로 위기에 처해 있지만 위풍당당한 함대는 자랑스러웠다. 다른 친구들처럼 파농도 그 함대와 군인들을 열렬히 환호하고 환영했다. 그러나 군인은 “자랑스러운 우리 프랑스 군인들”이 아니었다. 섬에 상륙한 프랑스 군인들은 호텔에서 창녀촌까지 모든 건물을 몰수했고, 공공시설에 흑백의 인종을 철저히 구분하는 칸막이를 쳤고, 조금이라도 항의를 하는 흑인들을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팼다. 노골적인 점령군의 행태!! 대부분의 마르티니크 흑인 주민들은 모욕을 느끼고 동시에 공포를 느꼈다.
●지배층 교육받은 흑인… 나는 누구인가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프랑스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 진정한 프랑스인이라면 인종주의적인 ‘나치즘’에 대항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가출을 감행하여 도미니카로 건너가 군사훈련을 받고, 자유프랑스군에 자원한다. 그러나 1944년 출정식 당일, 자부심에 가득찼던 마르티니크의 자원병들은 어떤 환송의식도 없이 밀항자나 나병환자들처럼 한밤중에 전함에 태워진다.
예전의 흑인 노예가 그랬던 것처럼. 배에서 내린 후의 상황은 더 처절했다. ‘자유프랑스군’ 제5대대는 철저히 피부색에 따라 위계화되어 군수품의 배급부터 의복, 야영시설까지 차별을 분명히 했다. 이 피라미드의 맨 위는 유럽의 백인 병사, 맨 아래는 세네갈 원주민 병사였다. 그럼 흑인이면서 프랑스 국적이었던 파농은? 소위 앤틸리스 제도의 의용병은 ‘유럽인’으로 분류되었다. 아프리카 출신 의용병들은 원통형의 모자를 썼지만, 파농은 유럽의 백인 병사와 같은 등급의 베레모를 썼다. 만약 베레모를 쓰지 않고 유럽인 막사를 출입하면 “호되게 엉덩이를 걷어 차였다.” 유럽인이되 늘 ‘모자’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2등 유럽인, 하지만 아프리카의 흑인들과는 다른 우월한 흑인!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이 상황은 참전 내내 계속되었고 마침내 파농은 처절하게 깨닫는다. 자신은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것을. 당시 파농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다. “우리 아들은 대의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는 식의 말로 위안을 삼지는 말아주십시오. 어리석은 정치인들의 방패일 뿐인 그런 거짓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우리를 환히 비춰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에 저의 갑작스러운 결정을 정당화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쟁은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파농에게 남은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뿐이었다.
완벽한 불어를 구사하지만, 결코 백인이 될 수 없는 ‘검은’ 피부색을 온몸으로 경험했지만, 파농은 ‘검은색은 아름답다.’는 네그리튀드의 사상에도 동의하기 어려웠다. 도대체 온전한 흑인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아름다운 아프리카 전통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전쟁이 끝난 후 고향을 떠나 파리로 온 파농은 “파리에는 흑인이 너무 많아.”라며 파리를 떠나 리옹으로 향한다. 육체적 고향인 마르티니크를 떠나고 정신적 고향인 파리를 떠나면서 백인도 흑인도 될 수 없었던, 아니 되지 않기로 했던 파농의 최종 선택은 정신의학이었다.
●정신분석은 정치적이다
파농이 보기에 식민지배란 단순한 총칼의 지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유럽의 백인 식민주의자들은 흑인들을 ‘비코’(새끼염소), ‘부뉼’(깜둥이), ‘라통’(쥐새끼), ‘믈롱’(멜론)으로 부른다. 물론 백인들이 흑인들을 우호적으로 대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 때조차 그들은 “피부색에도 불구하고” 좋아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상적으로는 흑인은 “피부색 때문에” 경멸당한다. 검은 것은 모두 ‘후진’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피부색’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옴짝달싹도 못하는 처지!
흑인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타자는 백인이다. 그러나 백인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타자는 결코 흑인이 아니다. 백인의 타자는 백인이다. 흑인의 거울은 백인인데 백인의 거울은 흑인이 아닌 상황. 이런 완벽한 비대칭성에서 흑인은 사라진다. 그는 아무렇게나 던져진 물건에 불과하다. 파농은 마르크스의 ‘소외’와 ‘사물화’를 이런 상황으로 이해했다. 정신착란은 이런 사물화의 한 극한이다. 말을 빼앗기고 삶을 빼앗긴 자들의 유일한 쉼터.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자들의 유일한 자유의 공간!!
정신분석은 미친 자를 정상인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다. 혁명은 단순한 주권의 회복이 아니다. 무의식조차 식민지배자들에게 저당 잡힌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이 갇힌 덫에서 빠져나오는 것. 타자들이 서로에게 말을 거는 타자들의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 파농에게 이것은 정신의학의 과제임과 동시에 정치적 과제였다.
1953년 정신의학자가 된 파농은 또 다른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두 가지 정신분석 담론과 대결한다. 하나는 “무의식은 역사가 없다.”는 프로이트의 보편주의 정신분석학이다. 그러나 파농이 몸으로 체득한 바, 프로이트는 틀렸다. “무의식은 역사가 있다.” 흑인들의 무의식은 식민 지배라는 역사와 식민 통치라는 구조 속에서 형성된다. 또 하나는 “정상적인 아프리카인은 전두엽 절제수술을 받은 백인과 같다.”라고 주장하는 인종주의적 정신분석.
그는 새로운 담론을 만들었고 정력적으로 일했다. 그리고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앤틸리스의 아프리카인’ 등 쓰는 글마다 엄청난 논란을 야기했다. 또한 그를 백안시하는 동료 의사, 그를 미심쩍어하는 알제리 간호사들을 설득하여 정신병원-수용소라는 제도 자체를 변혁하는 활동을 전개한다. 다른 좌파 정신분석학자들과 함께 그가 사용한 ‘제도 요법’은 환자들을 좀 더 인간적으로 대우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광기’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광기’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도록 하는 것, 의사와 간호사, 환자가 함께 협력하여 환자가 광기의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 스스로 삶의 준거를 다시 찾게 하는 일. 자기가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 영화 ‘알제리전투’는 1954~1962년 프랑스 식민통치에 저항한 알제리민족해방전선(FNL)의 무장독립투쟁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음악을 맡았던 이 영화는 1969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유럽과 결별하라!
당시 알제리는 민족해방운동이 활활 타오르던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의 메카였다.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투사들이 식민 통치자들의 악랄한 탄압에 맞서 몸을 숨기기에 정신병원만큼 안성맞춤인 곳이 또 있었을까? 그들의 대의에 동의했을 뿐 아니라 이미 몇몇과는 개인적 친분이 있었던 파농은 자신이 일하는 병원에 그들을 숨겨주기도 하고, 다친 투사들을 치료해주기도 했다. 파농의 병원이 프랑스 당국에 의해 ‘빨치산의 소굴’로 지목받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시각각 파농에게도 탄압의 손길이 뻗쳐왔다. 그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알제리의 정신병원을 떠난 것은 단순한 탄압 때문은 아니었다. 파농이 보기에 그의 동료이기도 했던 프랑스의 좌파 정신의학자들에게는 식민지 문제가 부차적이었다. 그들은 식민지 상황과 개인의 광기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진정으로 무지했다. 아니 무의식적으로 무시했다. 그 점은 사르트르도 마찬가지였다. 파농은 사르트르가 알제리 혁명과 관련하여 단호한 정치적 결단을 내리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프랑스인들과 파농은 결코 같은 길을 갈 수가 없었다. “유럽과 결별하라!” “프랑스인으로서의 ‘나’와 영원히 결별하라!”
파농은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유럽을 흉내 내고, 유럽을 따라잡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겠다는 조건이 그것이다.”라고 선언하면서 알제리를 떠나 튀니지로 가고 그곳에서 알제리 혁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그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기관지에서 기사를 쓰기도 하고, 알제리 임시정부의 외교관 자격으로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과의 연대투쟁을 조직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러나 투쟁의 과정은 동시에 시련과 갈등의 과정이었다. 그 자신이 프랑스 제국주의자에 의해 테러를 당하는 일은 오히려 부차적이었다. 그는 알제리 민족해방운동 안의 수많은 분파투쟁을 목도했고, 자신이 사랑하던 동지들이 적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또 다른 동지들에 의해 처형되는 모습을 봐야 했다. 그 투쟁의 한가운데에서, 시련의 한복판에서 파농은 ‘백혈병’ 으로 서른 여덟 해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브리태니카 인명사전에 그는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사회학자”라고 소개되어 있다. 파농이 평생 프랑스인이라는 그 호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죽어서 다시 프랑스인이 되어 버렸다는 그 사실은 역사의 어떤 아이러니, 어떤 ‘비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의 투쟁은 실패했는가? 그러나 그가 원한 것은 프랑스인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어떤 것이든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는 것.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내가 아니다.”라는 방식으로 살아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렇게 사는 한 파농의 투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 아닐까?
이희경(문탁네트워크)
http://m.wooriy.com/news/articleView.html?idxno=7333
프란츠 파농, “유럽 이데올로기 버리고 전통에서 해결책 찾아야”
▲ 소설가 / 시사평론가
김 갑 수
“동지들이여,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유럽을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은가? 유럽이 다른 세계를 침략한 것도,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고 인류의 5분의 4를 대상으로 노예제를 합법화한 것도 바로 그 정신, 즉 ‘유럽의 정신’이라는 명분에서였다... 그러므로 동지들이여, 유럽에 경의를 표하지 말자. 유럽에서 영향을 받은 국가, 제도, 사회는 창설하지 말자.”(프란츠 파농,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중에서)
한국의 자주세력은 고매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왜 약할까? 이것은 우리는 왜 자주통일을 이루지 못하는지의 고민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이런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론의 일단을 프란츠 파농에게서 읽을 수 있다.
프란츠 파농(1925-1961)은 프랑스 국적의 흑인 정신의학자 겸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투사였다. 파농은 이미 탈식민주의적 문화 연구의 세계적인 이론가로 부상되어 있다. 여기서 ‘탈식민’이란 무엇인가? 탈식민은 자주의 전제조건이다. 요컨대 탈식민을 이루지 못하면 자주도 있을 수 없다.
서구인들이 발명한 식민주의는 갈수록 교묘하고 주도면밀해지고 있다. 2차대전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군이 자행한 침공과 폭격은 모두 비서구 국가를 대상으로 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백인 정권이 들어서 있는 나라는 건드리지 않은 것이다. 덤으로 백인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비백인 정권이 들어서 있는 나라도 눈감아 준다.
파농에 의하면, 지배적 관점에서 지속되고 있는 서구문명의 원천은 ‘노예와 피, 비서구의 흙과 땅’이며, ‘유럽의 복지와 진보는 흑인, 아랍인, 인도인, 황인종의 땀과 죽음을 토대로 건설된 것’이다.
파농은 제국주의자들이 가장 선호하고 필요로 하는 식민지인은 ‘유럽을 배우고 닮음으로써 자신을 백인과 동일시하려는 비백인’이다. 요컨대 백인에 보다 가까이 문명화된 사람, 즉 서구중심주의에 감염되어 있는 유색인이다. 파농은 이런 유색인을 자기 부정 또는 자기 소외에 빠져 있는 비자주인으로 규정했다.
내가 조선시대 역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니까, 나에게 “조선시대로 돌아가겠다는 거냐?”고 반박을 해온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파농은 “‘독립을 원한다면 독립하여 암흑시대로 되돌아가라’고 위협하는 사람들에 맞서야 하며 ‘고유한 방식과 처절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또다시 식민보호를 요청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경고한다.
파농이 추구한 공동체는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니었다. 그가 사회주의보다 더 중시한 것은 자기의 옛것 즉 전통이었다. 그는 “진정한 탈식민화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중 양자택일이 아니라 스스로의 가치관,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과 양식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거침없이 “유럽 푸닥거리는 끝났으니 유럽을 떠나라(버려라)”고 하면서 “유럽이 아닌 다른 곳에서 모색하라”고 외친 파농은, 파멸로 치닫는 민족국가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단지 이전의 식민지 모국’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여기서 파농이 말하는 ‘이전의 식민지 모국’은 우리에게 어디인가? 조선이 아닌가?
2차대전 이후 서구 식민지로부터 신생 독립한 나라는 50여 개국이나 된다. 이로써 제국주의 시대는 막을 내린 것 같았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부활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 알제리 혁명이었다.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견디지 못한 알제리 인민은 1954년부터 민족해방전선(FLN)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프랑스는 알제리 민족해방 세력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이미 인도차이나에서 패전의 쓴잔을 맛본 프랑스 일반 국민과 지식인들은 알제리를 탄압하는 프랑스 정부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심지어 프랑스의 최고 지성이라는 알베르 카뮈까지도 알제리의 독립에 반대하는 이율배반을 노출했다.
프랑스는 50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30만 명의 알제리 인민을 강제 이주시켰고 100만 명을 투옥했으며 100만 명을 살상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그러나 알제리 인민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영용한 투쟁을 계속했다. 이에 따라 불안해진 나머지 종전을 요구하는 세계 여론이 비등해졌다.
알제리 인민의 자주적인 무장혁명투쟁은 제3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환기했고 그들의 해방투쟁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파농은 수 세기 동안 ‘무지와 야만’의 먹칠을 당해오던 비유럽 유색인민들에게 새로운 자주의식을 각성시켰다.
파농은 무의식중에 식민화된 비유럽 지식인들의 비굴성과 이중심리를 꼬집었다. 나는 서구를 추종하는 한국인들에게 ‘모양주의자’라고 명명한 바가 있다. 파농에 의하면 모양주의자는 정신병리학적으로 분석해야 치료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