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윗의 회개와 징계
삼하 12:13-23
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14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15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16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17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18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19 다윗이 그의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다윗이 깨닫고 그의 신하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하니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20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21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22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삼하 12:13-23 / [죄를 사면해 주시는 여호와] 그러자 다윗이 나단 앞에 엎드려 자신의 죄를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여호와 앞에 죄인입니다.' 나단이 대답하였다. `임금님께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셨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용서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임금님이 죽지 않을 것입니다. 14) 그러나 임금님께서 간음과 살인죄로 여호와를 모욕하였기 때문에, 이번에 밧세바가 낳은 임금님의 아들은 틀림없이 죽을 것입니다.' 15) 나단은 이 말을 마치고 왕에게서 떠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죄악의 씨는 죽는다] 여호와께서는 나단이 왕궁을 떠나자마자 밧세바가 다윗에게 낳아 준 아이를 쳐 몹시 앓게 하셨다. 16) 그러자 다윗은 성소로 하나님을 찾아가 계속 이 어린아이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는 이렇게 금식기도를 올린 후 왕궁으로 돌아와서도 베옷을 입고 밤을 새우며 맨 땅에 누워서 지냈다. 17) 왕궁의 노인들이 왕의 건강을 우려하여 그를 데려다가 침실에 눕히려 하였으나 그는 일어나지도 않았을뿐더러 음식도 먹지 않았다. 18) 이렇게 7일이 지났을 때에 아이가 죽었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이 사실을 다윗에게 알리지 못하였다. 그들의 생각에 `임금님께서는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도 우리 말을 듣지 않고 슬퍼하셨는데, 이제 결국 아이가 죽은 줄을 알게 되면 자살이라도 감행하실지 모른다'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19) 신하들이 이렇게 수군거리자 다윗도 아이가 죽은 것을 눈치 챘다. 마침내 `아이가 죽었느냐?' 하고 다윗이 묻자, 신하들도 이 사실을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예, 죽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0) 그러자 다윗은 당장 땅바닥에서 일어나 목욕을 하고 몸에 기름을 발라 단장하고 새 옷을 입은 다음 성소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경배를 드렸다. 그리고 다윗은 다시 왕궁으로 돌아와서 식탁을 차리게 하여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음식을 먹었다. 21) 신하들은 다윗의 이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는 임금님께서 그토록 울며 금식하시더니 이제 아이가 죽자 더 슬퍼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어나 식사를 하시니, 그 이유를 저희는 알 수가 없습니다.' 22) 다윗이 설명하였다. `아이가 살아 있을 때에는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보시고 아이를 살려 주실지 모른다고 희망을 걸었소. 23) 그러나 이제는 아이가 죽어서 아무 희망도 없는데, 왜 내가 계속 금식하겠소? 언젠가 나는 그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겠지만 그 아이를 살려 내어 내가 있는 곳으로 데려오지는 못할 것이오.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간 사람을 놓고서 왜 내가 계속 슬퍼해야 되겠소?' 다윗은 그토록 죽음에 대하여 현실적인 냉철한 사고를 하였다.
다윗은 나단의 이야기가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알아채고는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했다(13-15a) 다윗의 회개는 명백하고 솔직하여 아무런 변호도 섞여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죄를 사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도 간단명료합니다. 선지자 나단은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범죄하고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는다면 그가 믿는 하나님께 훼방이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벌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가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훼방이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죄는 간단히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죄는 반드시 구속을 받아야 합니다. 죄는 다윗 대신 아이에게 전가되었습니다. 다윗이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죽고 다윗 자신은 살아 남았습니다.
다윗의 아이가 죽다(15b-19)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라는 표현은 불륜사실을 지적하기 위함입니다. 아이가 밝혀지지 않은 질병을 앓고 있는 동안 다윗은 애도자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다윗은 7일 동안 금식하며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애통하며 자기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다윗이 아이의 회복을 위해서 여호와께 간구했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게 된 것을 생각할 때 자기는 여호와께 빌 만한 자격조차 없는 줄 알고 여호와의 긍휼만 의지하였습니다. 아이의 죽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것이니(14) 하나님의 처사였고, 그것은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아이가 죽은 후의 다윗의 모습(20-23)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하던 다윗은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어나 음식을 먹습니다. 다윗의 행동은 신하들에게 이해하기 힘든 것으로 보였습니다. 다윗은 애곡하는 대신 모든 슬픔의 외적인 모습을 거두었습니다.(20) 다윗은 탄원과 금식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이의 죽음을 하나님의 형벌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더 이상 애도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23절은 애도가 무의미한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아이가 되돌아 올 수 있는 장소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그의 집에도 새로운 삶을 선사하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신뢰합니다. 사죄의 확신과 누림은 회개하는 성도에게 제공되는 하나님의 복된 은총입니다.
적 용 :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구라도 용서하며 살고 있습니까? 주변의 특정한 한 사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단정짓는 사람은 혹 주변에 없습니까?
용서 구하는 방법
1. 자기의 잘못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하자. 잘못을 진정으로 뉘우친다면 상대방에게 잘못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말해야 합니다.
2. 대상이 주체가 되어야지 사과하는 사람이 주체가 되면 안 됩니다. 대상이 원하는 사과법이 무엇인지 고민한 후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사과하자.
3. 적절한 보상을 하자. 동료에게 험담하다 들켰다면 사과하는 뜻에서 선물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4. 용서해달라고 강요하지 말자. 가장 중요합니다. 용서는 당신이 아니라 상대방이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일입니다.
< 설 교 >
상한 감정을 치유하라 (IV): '죄책감'
삼하 12: 15-23
Heal Your Wounded Heart (IV): 'Guilt'
1988년 초겨울, 미국 대통령 선거 유세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주 동안 세계적인 관심을 끈 것은 대통령 후보들인 조지 부시와 마이클 듀카키스가 아니었습니다. 캘리포니아 앞 바다에 사는 두 마리의 고래였습니다. 해양 생물학자들이 '본네트'(Bonnett)와 '크로스비크'(Crossbeak)라고 이름을 붙인 고래 두 마리가 얼음덩이에 갇혀 죽게 된 것입니다. 에스키모인들이 이 사실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서는 동력 사슬톱과 쇠막대기로 얼음을 깨부수려고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언론이 즉각 이 사실을 온 세상에 알렸습니다.
아르키메데스식 나선 트랙터(Archimedean Screw Tractor)가 고래와 얼지 않은 바닷물 사이에 있는 얼음들을 깨려고 했지만 속도가 너무 늦었습니다. 즉시 주 방위군(National Guard)이 두 대의 헬리콥터를 동원해서 그 밑에다가 5톤 짜리 콘크리트 얼음 분쇄기를 매달아 고래가 갇혀있는 얼음덩이 위를 내려쳤습니다. 그러나 이 작업마저도 신통치 않게 되자 소련측에서 11층 건물 정도 크기의, 20톤 짜리 얼음 부수는 배를 파견해 주어서 고래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얼음이 얼지 않은 해역까지 약 60마일 정도 고래를 옮기는데 소요된 돈은 150만 불이나 되었습니다.
세상이 얼음에 갇힌 고래 두 마리를 구하기 위해서 엄청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에 갇혀 있는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보다 훨씬 더 큰 일을 하셨습니다.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심으로서 우리를 죄에서 구해내셨습니다.
<죄책감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다 두 가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첫째는 죄이고, 둘째는 죽음입니다. 바울은 롬 3: 23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뿐, 우리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또한 바로 이 죄 때문에 사람들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롬 6: 23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죄와 죽음을 해결하기 위해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죄와 죽음의 문제가 빠진 기독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시리즈 설교의 네 번째 주제로 '죄책감'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죄를 짓고서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래 전 한국에서 「지존파」라는 무리들이 죄 없는 사람들을 많이 죽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에 체포되어서 TV앞에 선 그들의 모습에 온 국민들이 경악했습니다. 사람들을 죽여 놓고서도 도무지 죄의식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양심이 부패하고 마비되어서 기능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지요.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양심이 지나치게 예민해서 보통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일들도 죄책감을 느낍니다. 물론, 죄를 짓고서도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보다는 낫겠지만, 이들 역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죄책감을 씻어내지 못하면 영혼에 깊은 병이 들기 때문입니다. 죄책감이 심한 사람들은 늘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건강한 자아상을 가지지 못하고 자기를 학대하기 쉽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소외되어 살게 됩니다. 분명히 지나친 죄책감은 치료받아야 할 마음의 병입니다.
우리는 죄책감을 어떻게 기독교 신앙으로 이길 수 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다윗처럼 죄를 많이 짓고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또한 다윗만큼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가슴 아파하며 통회자복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다윗이 죄를 지은 뒤 죄책감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봉독한 성경 말씀은 다윗이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다윗은 순간적인 정욕을 참지 못해서 자신의 오른팔과도 같은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했습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동침으로 인해서 밧세바가 임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이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아주 간교한 흉계를 꾸밉니다. 그래서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아를 불러 들여 밧세바와 동침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충성스럽고 우직하기만 한 우리아는 자신의 동료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고생하는데 자기만 편히 쉴 수 없다는 이유로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1차 작전에 실패하자 다윗은 더 무서운 음모를 꾸밉니다. 전쟁에 나가 있는 이스라엘 군대의 총사령관 격인 요압과 내통해서 우리아를 고의로 전사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아는 맹렬한 전투 맨 선봉에 섰다가 이스라엘 군대가 일제히 퇴각하는 바람에 고립무원(孤立無援)에 빠져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정말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자신을 위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충신의 아내를 빼앗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우리아 장군을 비열한 방법으로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큰 죄를 저지르고서도 다윗은 밧세바를 궁으로 데리고 들어와 아내로 삼았으며 아들까지 낳았습니다. 그래서 삼하 11: 27 후반부는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고 적고 있습니다.
간음죄에다가 살인 교사죄까지 저지르고서도 도무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던 다윗에게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비유를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범했는가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제서야 다윗은 자기 죄의 중대성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삼하 12: 13절을 보면 다윗이 나단에게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면서 자신의 죄를 시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지으면 반드시 댓가를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지은 죄에 대한 벌로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난 첫아들을 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예언대로 본문 15절에 보면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낳은 첫아들이 심한 병을 앓게 됩니다. 본문은 바로 이런 배경 속에서 다윗이 죄책감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으로 죄책감 해결하기
1. 죄를 지으면 당연히 죄책감을 느껴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죄를 짓고서도 양심에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도덕 불감증에 걸린 사람입니다. 다윗을 보세요. 순간적인 정욕에 눈이 멀어서 밧세바와 동침한 뒤 처음에 다윗은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륜의 씨앗이 잉태되었다는 말을 듣고서는 이것을 어떻게 감출까만 머리를 굴렸습니다. 그 결과 간음죄로 끝날 것이 살인죄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다윗이야말로 특정범죄 가중처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죄를 짓고서도 전혀 죄의식이 들지 않는다면 이것은 정말 큰 문제입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기 전까지 양심이 일시적으로 마비되었습니다. 양심의 일식(eclipse) 현상이 나타났던 거지요. 그러나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통렬한 꾸지람을 듣고서 자신의 죄악이 얼마나 중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회개합니다. 본문 16-17절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악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밧세바가 낳은 아들을 쳐서 심히 앓게 되자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회개 기도를 했는데 금식하면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습니다. 심지어 늙은 신하들이 다윗을 땅바닥에서 일으키려 해도 듣지 않고 일체의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죄를 지은 것을 깨달은 뒤 철저하게 죄의식을 느끼며 통회했던 것입니다.
시 51편은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죄악을 일깨워 준 뒤 다윗이 쓴 시입니다. 1-3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얼마나 가슴 아프게 자각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양심이 둔해지고 마비되지 않도록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죄를 짓고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날씨가 추우면 추위를 체감하고 더우면 더위를 바로 느끼는 것이 정상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사람들 보기에 옳지 않은 일을 했을 경우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이 건강한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다.
2. 죄를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은 순전히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오지 않으셨더라면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양이나 비둘기를 날마다 제단에 바쳐서 자신의 죄를 씻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짐승의 희생제는 우리의 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할 뿐 아니라 번거롭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영원한 번제가 되게 하심으로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단번에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히 10: 10은 말씀합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제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조차 아니하시게 된 것입니다(히 10: 17).
그러므로 우리가 지은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용서하여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때문에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어질 줄로 믿습니다(사 1: 18).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책감을 느끼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되고, 죄책감이 반드시 뜨거운 회개와 행동의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 란 리 데이비스(Ron Lee Davis)라는 사람이 쓴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 용서하시는 하나님」(A Forgiving God in an Unforgiving World)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교인들에게 사랑과 존경은 받고 있었지만 신학교 시절에 큰 죄를 저질러서 그 비밀스러운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필리핀의 한 신부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신부님은 자신의 죄를 다 고백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지만 마음에 영 평안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비밀스러운 죄를 용서해주셨다는 확신이 없이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부님이 목회하는 교구에 한 여신도가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신비한 환상을 많이 보여준다는 사람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이 소문을 듣고 조금은 의심스러웠지만 이것이 사실인가를 시험하기 위하여 부탁을 했습니다. "다음 번에 당신이 예수님과 대화할 때 이 질문을 꼭 물어 봐주세요. '우리 신부님이 신학교 다닐 때 무슨 죄를 지었는지 예수님 알고 계세요?'" 이 여자 성도는 그렇게 하마하고 약속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신부님은 그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환상 속에서 만났습니까?" "물론이지요." "그래, 내가 신학교 때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주님이 알고 계십디까?" "신부님, 제가 여쭈어 보았더니 예수님께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하셨어요."
이 이야기는 진짜로 일어난 실화입니다. 예수님도 다 잊어버리신 죄들을 우리는 아직까지 기억하고 죄책감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사 43: 25은 말씀합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또한 시 103: 12절은 하나님께서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그러므로 지나친 죄책감은 금물입니다. 회개함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서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린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이것은 마치 많은 돈의 빚을 졌다가 엄청난 부자가 딱한 사정을 알고 모조리 탕감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빚 갚을 걱정만 하고 앉아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죄책감에는 건설적인 것과 파괴적인 것이 있습니다. 바울 선생이 고후 7: 8-10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건설적인 죄책감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는 근심'이며 파괴적인 죄책감은 '세상 근심'과 똑같습니다. 건설적인 죄책감, 즉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우리를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게 하지만, 파괴적인 죄책감, 즉 '세상 근심'은 우리를 결국 사망에 이르게 만듭니다(고전 7: 10).
이 두 가지 종류의 죄책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한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두 사람이 커피를 마시고 있다가 한 사람이 실수해서 다른 사람의 무릎 위에 커피를 엎질렀습니다. 파괴적인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런 바보 같으니, 내가 한 짓 좀 봐. 정말 죄송합니다." 이 경우, 실수한 사람은 과거의 일에만 집착하여 자신을 비판하는 일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건설적인 근심을 하는 사람은 이렇게 할 것입니다. "참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냅킨이 있으니 닦으세요." 라고 말한 뒤 세탁비를 지불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파괴적인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은 과거에 일어난 일을 잊지 못하고 모든 잘못을 자기에게 돌리면서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건설적인 죄책감을 가진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되 문제를 슬기롭고 긍정적으로 해결하려는데 관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일단 문제가 건설적으로 해결되면 더 이상 과거의 잘못에 연연해하지 않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딴 일로 넘어가게 됩니다.
본문에 나타난 다윗의 모습을 보면 그가 꼭 건설적인 죄책감을 가진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치실 때 이 아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식음을 전폐하며 오직 회개 기도에만 매달립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다윗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18절 말씀에 보면 다윗의 신하들이 걱정을 합니다. 아이가 죽은 것을 과연 다윗왕에게 고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살았을 때에도 우리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고 저렇게 금식기도만 하셨는데, 이제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마 더 놀라고 실망하셔서 자기 몸을 스스로 상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신하들이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고 아이가 죽은 것을 눈치챘습니다. 아이가 죽은 것을 알았을 때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20절을 보세요.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 아들이 죽은 뒤 오히려 다윗이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왕을 보고 신하들이 깜짝 놀라 묻습니다.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오히려 일어나서 잡수시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다윗의 대답이야말로 건설적인 근심을 하는 사람의 의연한 태도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22-23절을 보세요.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다윗은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지은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죄책감을 느끼며 회개했지만, 일단 문제가 끝난 다음에는 더 이상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가진 모든 죄책감, 죄의식이 이와 같이 건설적인 것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죄를 철저하게 자복하고 회개했으면 하나님께서 깨끗이 용서하여 주셨음을 믿고 더 이상 과거에 지은 죄로 인해 괴로워하거나 집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 보기에 아무리 중한 죄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다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시 103:3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우리의 모든 병을 고쳐주십니다. 여러분들 중에 아직도 과거에 지은 무거운 죄 때문에 괴로워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 무거운 짐을 다 주님께 맡기십시오! 여러분들이 무슨 죄를 어떻게 지었든 간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맡아주심을 믿으십시오! 왜 여러분 스스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시고 어두운 인생을 살아가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다 용서해주는데도 말입니다! 이제 용서받았으면 더 이상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 매달려서는 안됩니다! 잊으세요!
결론 :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것이 우리 인생
중세에 어떤 수도사들이 산꼭대기에다 수도원을 지어놓고 성결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산 밑에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어느 날 수도사 한 사람이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에 내려왔습니다. 이 때 농부 한 사람이 그 수도사 앞에 달려가서 넙죽 절하며 물었습니다. "신부님, 산꼭대기에 수도원을 지어 놓고 매일 경건 생활을 하시니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우시겠어요. 도대체 신부님은 무얼 하고 지내시나요?" 신부님은 농부를 일으켜 세우고 그의 손을 잡은채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고 … 넘어졌다가 또 다시 일어나고 … 넘어졌다가 또 다시 일어난답니다."--"We fall down and we get up … We fall down and we get up … We fall down and we get up."
그렇습니다.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매일 우리는 죄로 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또 다시 일어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마 하나님의 가장 많은 사랑과 은혜를 받은 사람을 들라하면 다윗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다윗은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보다도 더 흉악한 죄를 저질렀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죄를 즉시 깨닫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지은 죄 때문에 침상이 떠내려 갈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를 애통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다윗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죄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죄를 지어서 넘어져 있습니까? 이제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서야 할 때입니다. 용서받은 확신을 가지고 다시 일어서지 않으시겠습니까?
아이의 죽음
사무엘하 12:13-23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도 움직인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기도에 대한 열의를 일으키기 위한 말이겠지만 이러한 말들이 성경과 얼마나 맞지 않는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간절한 기도가 신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상식이고 소망일뿐이지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계시되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의 어떤 행위와 간절함에 의해 마음이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변함도 없이 일하시는 분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간절한 기도로 자신의 정성을 보이면 하나님도 자신을 위해 일하실 것이라는 아주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인간의 간절함과 정성에 의해 그 마음이 변하시고 일하시는 분인가를 본문의 말씀을 통해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은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여 낳은 아이가 죽는 내용입니다. 15절에 보면 이 아이는 하나님이 치심으로 병이 들었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아이를 치신 것은 14절에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고, 또한 다윗의 범죄의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은 죄를 범한 자에게는 징계를 내리신다 그러니 죄를 범하지 말자’라는 교훈을 주기 위한 것입니까? 그러나 이 말이 여러분께 전혀 설득력이 없음을 여러분 스스로 알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한 것은 ‘아무리 범죄 해도 하나님이 치시는 것이 없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 죄를 범한 자를 다윗처럼 징계하시는 일이 지금의 현실에서도 계속되어진다면 살아남을 자식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본문은 다른 의미에서 생각을 해봐야 할 것입니다.
먼저 13절의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라는 구절을 보면 다윗은 이미 그의 죄에 대해 사하심을 받았으며 또한 죄로 인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은총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다윗의 죄 문제는 모두 해결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고, 또한 다윗을 죽이지도 않겠다고 하셨으면 그냥 넘어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14절을 보면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여 낳은 아이는 정녕 죽는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죽이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다윗의 죄와 전혀 상관없는 아이는 죽을 것이라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죽어야 한다면 그것은 다윗이지 다윗의 아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또한 기왕 다윗의 죄를 사하셨다고 하시면서 아이를 죽이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과연 용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14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이를 죽이시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이것이 아이를 죽이시는 이유입니다. 즉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하여금 여호와를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과 아이의 죽음이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여기서 말한 여호와의 원수는 사단의 세력임에는 분명하나 굳이 ‘이방인’으로 못 박아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훼방하고자 하는 의도도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예 멸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이란 존재 자체에 대해 관심이 없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하나님의 원수는 소위 하나님을 안다고 자처하는 무리들 속에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스스로 믿는 자로 자처하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교회 속에 하나님을 훼방하는 원수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훼방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은총을 훼방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과 은총을 인간의 생각으로 제멋대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원수가 다윗의 죄를 사하시고 죽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훼방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가 되겠습니까?
이것을 우리들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질 때 그것이 하나님을 훼방하는 원수로 등장하게 되는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자, 하나님께서 밧세바와 동침하고 우리아를 죽인 다윗의 죄를 사하셨다고 하면서 다윗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으로 다윗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일이 끝났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마음 놓고 죄짓고 용서만 구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그리고 ‘하나님이 다윗의 죄를 용서하신 것은 다윗이 사울을 살려주고 착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야’라는 생각도 들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서 다윗의 죄가 용서된 이유를 다윗의 행동에 찾으려고 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윗을 용서하셨다는 것은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생각으로 죄에 대해 가벼운 마음을 가질 수 있고, 또한 항상 죄에 대한 용서를 확보해 놓기 위해 착한 일을 행하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은총을 훼방하는 여호와의 원수인 것입니다.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라는 사람은 ‘동남아에서 발생한 지진 해일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교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말을 하고 ‘십일조 등,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동남아에 지진과 해일이 덮친 것과 같은 재앙을 받을 것이다’라는 설교를 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은총을 훼방하는 원수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원수들의 입을 막기 위해 다윗의 아이를 죽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아이를 죽이심으로써 하나님은 죄에 대해 반드시 죽음으로 갚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죄지어도 용서만 구하면 다 된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고, 다윗이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용서 받았다는 말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자식의 죽음은 곧 부모 자신의 죽음과 같지 않습니까? 부모의 마음은 내가 죽을지언정 자식은 살리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 마음에서 바라볼 때 자식의 죽음 앞에서 ‘마음 놓고 죄지어도 되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이 나의 착한 행동을 보시고 용서하셨다’는 말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비록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사하셨다고 하시고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자식을 죽음을 보면서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고 자신의 죽음을 맛보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자식을 죽이시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아이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태도입니다. 다윗은 아이가 심히 앓게 되자 아이를 위해 금식을 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간구합니다(16절). 심지어 그 집의 늙은 자들이 다윗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듣지 않고 먹지도 않으면서 계속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이는 이레 만에 죽고 맙니다.
이런 경우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심히 상심하고 간구할 때보다 더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의 신하들도 그것이 두려워서 다윗에게 아이가 죽었다는 말을 차마 하지를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신하들의 그러한 태도를 보고 아이가 죽은 것을 짐작하고 확인한 후에 보인 행동이 참으로 의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20절에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라는 구절에서 보여주고 있는 다윗의 이러한 태도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신하들도 의아해서 왕에게 묻자 다윗이 답하기를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22-23절)고 말합니다. 다윗의 이 말이 과연 무슨 뜻일까요?
일단 우리는 다윗의 간절한 기도와 그의 기도에 응답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람들은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무참히 무너지는 것이 본문에서 보여주는 다윗의 기도입니다. 다윗은 금식을 하면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간구하였습니다. 아이가 이레 만에 죽었다는 것을 보면 다윗의 금식과 기도가 이레 동안 계속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다윗의 간절함을 외면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가 정녕히 죽으리라는 말씀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마음을 바꾸셔서 아이를 살리셨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아마 다윗의 간절한 기도가 기도의 표본이 될 것이고,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바꾼다는 것이 진리가 돼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원수로 하여금 하나님을 훼방할 거리를 더 크게 얻게 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로움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간절함, 정성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도 아이의 죽음으로 이것을 깨닫고 음식을 먹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정성으로 아이를 살릴 것에 기대를 두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정성을 돌아보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대가 무참히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기도에서 이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된다는 말이 하나님의 뜻과 은총을 가리는 것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의 간절한 기도로 말미암아 죽을 아이가 살았다는 말을 할 수 없도록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아이를 죽이신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죄인의 소원을 따라 마음을 바꾸시고 행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실 만큼 우리는 선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곧 다윗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다윗의 범죄가 우리에게 고스란히 있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가 다윗보다 더한 간절함을 보인다고 해서 하나님이 감동하실 것 같습니까? 그것은 큰 착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시고 행하실 뿐, 우리의 기도에 따라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할까요? ‘기도를 해도 듣지 않으신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어떤 속셈을 드러내는 것입니까? 지금껏 기도를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해왔다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기도의 의미, 목적을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것에만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말했을 때 기도의 의미와, 목적 자체가 사라지게 됩니다. 때문에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기도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자로 살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죽는 것을 통해 그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이 간절히 기도하면 혹시 하나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서 아이를 살려주실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다윗의 이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이 아닐까요? 우리도 기도할 때 ‘혹시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보시고 기도를 들어줄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그러한 기도에 대해 외면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이제 기도하지 말자’라는 마음이 드십니까? ‘기도해도 필요 없다’는 마음이 드십니까? 신자는 자신의 기도를 외면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 ‘역시 하나님은 나의 뜻에 따라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신다’는 사실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죄로 인한 예수님의 죽으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죽이시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셨으나 예수님을 죽이심으로써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를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우리의 죄로 인해 발생된 십자가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언제나 내 소원에만 관심을 둔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들어야 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기에 십자가를 이용하려고만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서 자신의 죽음을 보고, 죄에 대해 철저히 갚으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용서만을 보면서 안심하고 있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마음 놓고 기도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면 들어 주신다’는 말만 난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죽인 죄인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죽이지 아니하신다는 말씀 앞에서 우리가 취할 것은 감사함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세상에 대한 나의 욕구를 내어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추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제발 여러분의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저의 간곡한 소망입니다. 기도하려면 이것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정당합니다.
마음대로 행하시는 하나님
삼하 12:15~25 / 정재왕 목사(대구 성서중부교회)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아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삼하 12:25)
‘반지의 제왕’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원작가 J. R. R. 톨킨은 작품을 통해서 중요한 성경적 메시지를 전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에서 반지는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신비의 물체입니다. 대부분의 모험 영화들은 어떤 신비의 물체를 찾아내는 과정을 긴장감 있게 묘사하는데, ‘반지의 제왕’은 오히려 신비의 물체인 반지를 파괴하는 것으로 내용이 전개됩니다. 부패한 인간이 절대 권력의 반지를 마음대로 사용하면 세상이 오히려 불행해질 것이니 권력을 경계하라는 교훈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경도 인간이 절대 권력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메시지에 공감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는 절대 권력의 반지를 끼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마음대로’ 하시는 분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그분을 어떻게 믿고 섬겨야 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내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하나님에게 순순히 인생을 내맡기고 살아가는 한 사람, 다윗을 봅니다. 다윗이 남의 여자 밧세바와 불법으로 동침한 후 한 아기가 태어납니다. 그런데 그 아기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중한 병에 걸리고 맙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다윗은 아기 살려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기는 7일째 되는 날 애석하게도 죽고 맙니다. 다윗의 기도에 문제가 있거나, 믿음이 부족했다고 의아해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본문 16~17절에서, 비록 다윗이 죄를 범하긴 했지만 회개만큼은 철저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철야기도에 금식기도, 그것도 7일 동안 말입니다. 다윗의 기도에서 크게 문제 삼을 만한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기를 살려주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다윗을 대신해 하나님께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아무리 그래도 아기는 살려주셔야지요. 아기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자기의 뜻대로 행하시는 절대 주권자라고 하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이렇게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범죄의 결과로 내려진 형벌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 모든 것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지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다윗은 자신의 죄를 솔직히 시인하는 것으로 이 힘든 과정을 직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엘하 12장 13절에서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며 죄를 솔직하게 시인했습니다. 이 고백은 아주 짧아서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시인했을 때 어떤 형벌이 따른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다윗은 솔직하게 죄를 시인했습니다. 자신의 죄에 따르는 모든 형벌과 고통을 감당하겠다는 마음의 준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다윗이 범한 간음죄와 살인죄는 사형에 해당됩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처럼 자기 죄를 합리화시키거나 변명하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징계를 달게 받아야 하나님의 공의가 이뤄진다는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한테 매 맞을 때 엄마 품에 달려들어 맞는 것처럼 하나님 품에 안겨서 매 맞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자신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서도 새로운 사랑과 은혜를 경험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징계는 사생자나 버린 자식에게는 없고 오직 참 아들에게만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오히려 징계를 통해서 자기를 살피고 더욱 굳게 세워지는 새로운 은혜를 받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뒤 드린 참회기도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내가 또다시 같은 죄 안 짓도록 나를 근본적으로 치료해 달라는 말입니다. 또 다윗은 이렇게 회개의 기도를 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시 41:4)
죄를 용서받는 일보다도 더 중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죄에 다시는 빠지지 않도록 영적으로 수술을 받는 것입니다. 단순히 벌을 면제받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치료를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용서보다도 영성과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한 줄 깨닫고, 다시는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나를 때려 쳐서라도 고쳐 주시고, 나를 다시 빚어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본문 19~20절에서 다윗이 취한 행동을 보면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절대 순복하면서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아기를 살려달라고 기도했음에도 결국 아기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다윗은 신복들의 염려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먹고 기운을 차렸습니다. 지금까지는 금식하고 기도했지만 이제는 하나님 뜻이 분명히 드러났으니 죽은 아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하나님 뜻을 받아들이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루어나가야 할 일들을 위해서 준비하는 모습입니다. 회개하고는 지난날 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지 않습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계획을 기대하는 모습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은 다윗에게 새 아기를 주십니다. 다윗은 새 아기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지었습니다. ‘평화, 화목’이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이 아기를 통해서 자기와 하나님 사이에 다시 화목해졌다는 것을 스스로 되새기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아기 이름을 ‘여디디아(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로 다시 지어주십니다.(25절) 이제 하나님도 다윗과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회복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부터 다윗과 그의 아들과 가문을 통해서 큰일을 전개하시겠다는 예고와 선포를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의 가문에서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며, 인류를 구원하는 일에 다윗과 그 가문을 사용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모두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시는 것에 불만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나보다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1974년에 서울에서 ‘엑스폴로 74’대회가 열렸습니다. 그때 100만 기독교인이 여의도 광장에서 닷새 동안 집회로 모였습니다. 당시 중학생인 저도 집회에 참석했었는데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때 기억에 남는 한 가지는 집회 기간 비가 엄청나게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회에 참석한 성도들과 전국의 교회가 비를 멈추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비는 더 많이 왔습니다. 그러나 폭우 중에도 집회는 계속되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무섭게 내려친 폭우를 아랑곳하지 않고 집회장에 사람들은 모여 들었습니다. 더 간절히, 더 뜨겁게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구름 때같이 집회장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은혜를 다 받아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증거하고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비를 멈추게도 하시지만, 비를 보내시면서 그의 은혜를 체험케 하십니다.
김정준 목사님의 기도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주여, 이전에는 은혜가 시련보다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간구했고 제게 있는 시련은 없어지기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주여, 지금 생각하니 은혜만이 은혜가 아니라 시련도 은혜입니다. 은혜만이 아니라 시련도 간구할 것입니다. 은혜만 욕심낼 것이 아니라 시련도 원할 것입니다. 시련에서 받는 은혜처럼 고귀한 것이 없고 은혜로 받는 시련처럼 보배로운 것이 없습니다. 주여, 주께서 주시는 은혜이고 주께서 주시는 시련이므로 어느 것을 더 사랑하고 원하겠습니까? 모두가 축복이오니 은혜와 시련에서 주님만 찬송하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의 징계와 용서
삼하 12장 15하반절 ~ 25절 / 고한율 목사 찬송가 : 391 장, 261 장
우리는 다윗의 범죄와 나단 선지자로 말미암아 다윗이 죄를 깨닫고 회개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즉시 그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다윗이 죄를 범하였다고 고백할 때,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죄를 사하셨다고 바로 선언하였습니다. 이처럼 즉각적으로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여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회개를 얼마나 기쁘게 여겼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인이 멸망당하기를 기뻐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저 하늘에서 우리가 잘하나 못하나를 지켜보다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심판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에스겔서 33:11절에 보시면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즐겨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악인이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다윗이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때 지체 없이 죄 용서를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 사실을 기억하고, 항상 회개하는 일에 지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작은 죄라고 해서 그냥 내버려 두면 그것이 반드시 나중에는 더 큰 죄를 일으키게 되고, 또한 우리의 마음을 돌처럼 단단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죄를 깨달은 즉시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잘못을 고백하고, 잘못된 행동을 버려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할 때 곧바로 용서하여 주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를 지은 책임이 그냥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물론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그 죄의 책임, 형벌까지도 이미 용서하시고 대신 받으셨음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때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죄에 물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을 위해서입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지어도 징계를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죄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점점 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녀를 양육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자녀이지만, 잘못을 했을 때는 벌을 주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벌을 주는 것은 처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에 어느 부모이고 자녀를 처벌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가능하다면 벌을 주지 않고 넘어가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을 주는 이유는 잘못을 해도 그냥 넘어가면 다음에 더 큰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은 잘못을 했을 때 벌을 줌으로써 더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막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징계를 하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더 큰 죄에 빠지지 않도록 막으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두려워하게 하고, 멀리하도록 만드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죄를 징계하시는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를 보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두려워하도록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우리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죄에 대한 징계를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고, 징계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더욱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려고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진심으로 회개할 때, 그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하지만 다윗으로 하여금 죄를 두려워하고, 멀리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를 징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다윗과 다윗의 집에 재앙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재앙 중 하나가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나오는 대로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죽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15절 하반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하나님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 낳은 아이를 직접 치셨습니다. 다윗이 범한 죄에 대한 징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여기에서 하나님이 내리신 징계를 다윗이 어떻게 받았는지를 잘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치셔서 아플 때, 다윗은 아이를 위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금식하면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간구하였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였는지 신하들이 다윗을 일으키려 하였지만, 전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땅에 엎드려 7일 동안 기도하였습니다. 다윗의 슬픔과 괴로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아이는 7일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이 때 신하들은 다윗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가 병들어 누워 있을 때도 이처럼 슬퍼하고 괴로워하는데,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 정말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8절을 보세요.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신하들은 아이가 죽은 것을 다윗에게 말할 수가 없어서 서로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신하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는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눈치 채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하를 불러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신하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아이가 죽은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고, 슬퍼할까, 왕이 혹시 미치는 것은 아닌가? 아마도 신하들은 별 생각을 다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죽지 않았을 때에도 반 미친 사람처럼 금식하며 땅에 엎드려 기도만 한 다윗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죽은 사실을 안 다윗은 신하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20절입니다.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다윗은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 슬퍼하거나 더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한 후에 왕궁으로 돌아와 음식을 차리게 하여 먹었습니다. 언제 그토록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금식기도한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곧바로 평상시의 다윗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보고 신하들이 놀랐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다윗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이렇게 신하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22~23절입니다.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23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이 다윗의 말 속에는 다윗이 어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이가 아플 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땅에 엎드려 금식하며 7일 동안이나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땅에 엎드려 금식기도한 것은 자신의 뜻을 반드시 이뤄주기를 바래서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한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실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미 아이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죄를 지적하러 온 나단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아이가 죽게 될 것을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죽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뜻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땅에 엎드려 금식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내 뜻대로 해 달라고 우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말 그대로 하나님이 혹시 자신을 불쌍히 여기실 것을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바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가 죽은 것을 알고도 더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오히려 즉시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금식기도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건 간에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 떼를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금식은 내 모든 것, 즉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아이가 죽었을 때도 더 이상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음을 인정하고 정상적인 삶으로 바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기 때문에 다윗은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경우 하나님의 뜻보다 우리의 뜻을 더 고집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우선은 내 뜻대로 되기를 위해 기도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는 언제 금식기도를 합니까? 언제 특별한 시간을 정해서 기도합니까? 대부분은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을 때입니다. 반드시 이뤄지기를 바라는 일이 있을 때, 우리들은 금식기도를 하거나 혹은 특별한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의 뜻과 소원만을 아뢰기가 쉽습니다.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묻기보다는 우선은 내 뜻대로 되기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기 때문에, 혹 우리의 소원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대해서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다윗은 7일 동안 땅에 엎드려 금식기도하였습니다. 오직 아이가 살아나기만을 위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는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이 때 다윗이 어떤 태도를 취하였습니까? 화를 내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게 섭섭해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일상생활로 즉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다윗이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나의 뜻대로 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 더 복되다는 것을 잘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소원대로 일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일상의 삶으로 바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윗처럼 자기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앞세웠던 또 다른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그것을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십자가를 피할 수 있으면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기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바로 덧붙여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기도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 가장 복되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이 가장 복되다는 것을 아셨다면 우리들은 어떠하겠습니까? 우리 또한 하나님의 뜻을 제일 먼저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복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아이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순간에는 너무나 고통스럽고 아프더라도, 분명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 가장 복되다는 것을 믿었기에 견디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가장 복된 결과를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24~25절입니다.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하나님은 죽은 아이를 대신하여 다윗에게 한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의 3대 왕이 된 솔로몬이었습니다. 솔로몬이 태어났을 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솔로몬에게 별명을 붙여주셨는데, 바로 여디디야라는 별명을 주셨습니다. 여디디야는 ‘여호와께 사랑을 입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아들을 주셨던 것입니다. 비록 다윗은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징계로 아이를 잃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하나님께 사랑받는 귀한 아들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결국 하나님은 가장 복된 결과를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를 두려워하고 더 멀리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징계하신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원이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긴 다윗을 하나님께서 결국 복 주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잘 새겨서 항상 죄를 멀리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당장은 내 소원과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서운하고 답답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다면 반드시 복된 날이 올 것임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항상 순종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은혜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