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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 )
독사우공은 소림의 성소 법사를 쉽게 찾아 냈다.
성소 법사와 호위차 따라온 무승(武僧) 십 명은 이미 장안의
화제거리였다. 그들은 성도에 온 지 사흘이나 되었음에도 몰려
드는 불자(佛者) 때문에 당문에도 들르지 못한 채 불법을 전하
고 있었다.
독사우공과 사두열목이 왔다는 소리를 들은 성소 법사는 그들
을 반갑게 맞이했다.
"흠,흠...!"
평소 거리낄 것 없던 독사우공도 성소 법아 앞에서는 농기(弄
氣)를 발휘하지 못했다. 불문의 성지요.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
림에서도 십대 장로 중 일인인 성소 법사의 풍채는 범상치 않
았다. 무공보다는 불도에 더욱 심독이 깊다는 성소법사.
"아미타불! 정 시주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흠!흠! 감사...하오이다."
독사우공은 허리가 아픈지 몸을 배배 꼬았다. 그가 가장 만나
기 싫은 사람이라면 바로 성소 법사 같은 고승들이었다. 도대
체 행동을 마음대로 할수가 없으니...
"허허허! 마 시주께서도 살아 계셨군요."
"히히히! 흠흠! 정 시주가 살아 있는데..."
사두열목 마대는 말을 하면서도 독사우공을 힐끔힐끔 쳐다보았
다. 그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빨리 용건을 말하고 돌아가자
는 무언의 재촉이었다.
'빌어먹을 놈! 누가 먼저 말하면 어때서...'
독사우공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말문을 열었다.
"저...이렇게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라..."
"아미타불! 계속 말씀하시지요."
"에잉! 이거 원 답답해서...법사 , 실례가 되더라도 용서하쇼.
사람이란 버릇대로 살아야지 체통이네 뭐네 하는 것들은 영 거
북해서."
독사우공은 말을 꺼내기가 바쁘게 한쪽 발을 들어 의자 위에
걸쳐 놓았다.
"허허허! 불가의 무상행(無上行)을 몸소 실천하시는데 어찌 체
통에 거슬린다 하겠습니까? 허허허!"
"무,무.... 다음이 뭐라고...?"
"아미타불!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이라 천수경(天手
經) 개경계(開經偈)에 나오는 말이지요."
"아니 그거 말고 아까 무슨 행이라고...?"
"무상행 말입니까?"
"아, 맞아! 무상행. 낄낄낄! 법사, 나는 무상행을 즐기는 사람
입니다, 답답한 것은 질색이지요."
"허허허! 과연 들은 대로입니다. 허허허...!"
"흠!그건 그렇고...이렇게 찾아온 것은 대사에게 부탁이 있어
서 입니다."
"부탁이요?"
"당문에서 사람에게 독을 실험한 사실은 알고 계실 겁니다."
"아미타불! 사실 그런 풍문이 돌아서 한번 들러 보려고 합니
다."
"사실은...그게 급하게 됐습니다. 당문에서 십삼 년인가? 좌우
지간 그 정도 실험 대상이었던 놈이 있는데 아, 그놈이 복수를
하겠답시고 당문으로 쳐들어 갔지 뭡니까?"
"혹시, 그 시주 이름이 단비하?"
"아니, 그놈 이름은 어떻게?"
"허허허!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일수천명을 누가 모르겠습니
까?"
독나우공과 사두열목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소림의 명성은 그냥 범인 것이 아니었다. 하남성에 위치한 소
림과 사천성의 성도는 무려 삼천여 리나 떨어진 먼 곳이었다.
구파일방 중 삼 개 문파가 사천에 있지만 왕래가 빈번한 것도
아니었다.
특히 단비하처럼 무명(武名)이 알려지지 않은 소졸들의 이름은
사천에 아는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한다디로 소
림의 이목은 천하에 깔려 있었다.
"아미타불...! 급하게 되었군요."
성소 법사는 봉창 너머 구름에 싸인 산곡대기를 올려다 봤다.
속세를 떠나 신선들이 노니는 곳 바로 당문이 있는 곳이었다.
정확한 지명은 만현(萬縣). 고래로부터 전쟁의 피해를 한번도
당하지 않은 곳이며 철저하데 자급자족하며 생활하는 곳이었
다.
근래들어 무인이 많아지면서 성도로부터 생활 용품을 공급받기
는 했지만 식량이나 음료수는 물론 약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구비된 곳이었다,
약밭도 가지고 있어 거의 대부분의 약제가 자체 생산되었다.
그 대부분의 일은 만채실이 주관했다.
그곳에서 전대미문의 악겁(惡劫)이 행해진 것이다.
"단비하란 젊은이는 언제 갔습니까?"
"그게 오늘 새벽인지 한밤중인지..."
"음! 부지런히 간다 해도 도착하면 새벽녘일 텐데...어쨌든 바
로 출발합시다."
"아이쿠! 법사, 이렇게 고마울 데가..."
독사우공은 자신도 모르게 성소 법사의 두손을 꽉 움켜잡았다.
* * *
당문주의 거처는 내실에서도 한참을 올라갔다.
당문의 건축 양식은 독특했다. 급경사에 세워졌기 때문에 다른
전각으로 가기 위해서는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가는 것이 보통
이었다. 멀리서 보면 십여 층에 이르는 탑 같았지만 실은 단층
내지 이층이 고작이었다.
공격하기는 어렵고 수비하기는 쉬운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당문주의 거처 역시 같은 구조로 세워졌기 때문에 봉창을 열면
멀리 정문까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그렇다고 몸을 은신할 곳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토호(土豪)들은 산정에 집을 짓고, 집 주위를 삥하니
둘러 나무를 심는다. 양자강(陽子江)에서 올려다 보면 숲 사이
로 백석(白石)들이 보인다. 토호들의 집. 각종 약재가 나무에
널려져 있는 것이 백석으로 보인 것이다.
당문은 특히 나무가 많았다. 몸을 숨기며 이동하기에는 최적의
은폐물(隱蔽物)이었다. 하지만 올라가기는 쉬워도 내려오기는
어려웠다.
사망산검 일행에게 남긴 서신처럼 쉽게 몸을 뺄 수 있는 지형
이 아니었다. 당문주를 죽인다 할지라도 당문도들이 몰려든다
면 꼼짝없이 죽거나 아니면 수백 명의 당문도들 틈을 빠져 나
가야 살수 있는 그런 지형이었다.
'정면 승부는 불리하다. 최대한 은밀하게 기습해야 한다.'
전각 안을 살펴보았다.
안에는 희미한 불빛만 일렁일 뿐 사람의 그림자는 비치지 않았
다.
휘이익!
신법 섬(閃)을 펼치자 그의 신형은 한 마리 붕새와도 같이 지
붕위로 날아올랐다.
소리없이 기와를 들어 냈다.
기와로 지붕을 엮은 집은 흔치 않았다. 성도에 사는 대부호들
이나 기와를 사용할까 대부분의 토호들은 나무와 진흙을 섞어
지붕을 만들었다.
불빛이 새어나왔다.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탁자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나는 뜨거운
차와 읽고 있었던 듯 싶은 서책이 펼쳐져 있었다.
약내음이 코를 진동시켰다. 당문 사람들의 방처럼 육단(六段)
으로 된 약재함이 한쪽 귀퉁이를 장식했고, 빽빽한 서책들이
다른 벽면에 자리했다.
특별하게 화려한 구석은 없었다. 극히 평범한 보통 시골 의원
들의 방과 다를 바 없었다. 유독 진한 약 내음과 조금 많은 서
책이 눈길을 끌뿐.
'기다려야 한다.'
단비하는 사망산검이 가르쳐 준 귀식대법을 펼쳤다. 당시에는
섬백단을 복용했지만 지금은 암살하려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때
와는 사정이 달랐다.
"후우웁...!"
길게 들이 마신 마지막 숨.
단비하는 눈 덮인 지붕 위에서 전부터 있었던 경물처럼 흔들림
없는 풍경이 되었다.
꼬끼오! 꼬꼬꼬꼭...!
새벽이 다가온다는 수탉 울음 소리가 십 장 앞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를 뚫고 들려 왔다.
단비하는 가물거리는 의식의 전부를 전각 안에 집중시켰다.
당문주 당기룡은 안에 없는지 밤새 숨소리 하나 없었다. 처소
를 두고 어디서 밤을 맞았단 말인가.
정월 대보름이지만 사천에서 달 구경하기는 극히 힘들었다.
밤이면 언제나 음습하게 깔리는 안개 때문에 한 여름에도 긴
소매가 있는 겉옷을 걸치고 다닐 정도로 서늘했다.
하물며 한겨울의 추위는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귀식대법을
펼쳐 끊임없이 내공을 운기없고 있었지만 대부분이 모공과 칠
공을 막는 데 사용될 뿐 체온을 올려 주지는 못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 골수에 스며들었다. 몸의 상태는 당기
룡이 지금 나타난다 해도 효과적인 공세를 펼칠 수 없을 지경
까지 치달았다. 그것보다 급한 것은 날이 밝아 안개가 걷히기
전에 지붕 위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망루에 올
라간 사람처럼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으려면.
덜컹...!
드디어 문소리가 들렸다.
학수고대하던 당문주 당기룡의 모습이 비쳐졌다. 그의 모습은
혈뇌옥에서 구출되다시피 기어나와 면담했을 때의 모습과 하나
도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혈색이 좋아진 것 같았다.
'아차!'
당기룡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던 단비하는 등골이 서늘할 정
도로 놀랐다. 치명적인 실수...기와를 들어 낸 자리로 눈가루
가 흘러들어 책 위에 쌓였다. 이내 방안의 훈훈한 열기 탓으로
눈이 녹으며 만들어진 물은 서책의 글씨를 흐려 버렸다,
당문주는 의아한 듯 뚫어지게 책을 쳐다보았다.
'틀렸어!'
단비하는 급히 귀식대법을 풀었다. 사지를 움직이려 했지만 꽁
꽁언 몸이 쉽게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당문주의 고개가 들려졌다. 그의 눈은 기와를 들어 내 뻥 뚫린
공간을 쳐다보았다. 눈과 눈이 다주쳤다. 그리고 씩 웃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족히 삼십여 개는
넘을 약봉지와 십여 개의 단환이 만져졌다. 그 중에서 엄지손
가락만한 단환을 꺼내 입에 넣었다.
혀를 톡 쏘는 청량함과 함께 갈증을 한꺼번에 해소시키는 상쾌
한 기운이 목젖을 타고 뱃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러나 뱃속으로
흘러든 단환은 몸을 불태울 정도로 뜨거운 기운을 발산했다.
열양단(熱陽丹).
몸이 허하거나 수족이 찬 사람, 양기가 부족한 사람을 위해 만
든 열양단이었다. 단 한 알 만들었으며, 더 이상 만들 필요가
없어 만들지 않은 단환. 적절한 사람을 만나면 주려 했던 단환
이 뱃속에서 녹아들며 식었던 피를 빠르게 녹여 갔다.
파아앗!
당문주의 신형이 솟구쳤다.
'비(飛)!'
생각과 행동은 동시에 이루어졌다.
지붕을 떠난 단비하의 신형은 당문주의 신형과 반대로 기왓장
을 부수며 전각 안으로 뛰어들었다.
"엇!"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대체로 침입자는 자신의 종적
이 발견되면 힘이 있건 없건 도망치기에 급급하다. 만약 그런
사람을 막아선다면 범인(凡人)일지라도 괴력을 발휘하곤 한다.
도망쳐야 한다는 압박 심리가 내재된 잠재력을 끌어 내기 때문
에.
바닥에 착지한 단비하는 급히 허리춤에 꼽아 두었던 독분을 끄
집어냈다. 오늘 이 순간을 위해 아미산 천지봉에서 심혈을 기
울여 만든 독분이었다.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독에 중독된 독사는 내장은 물론 뼈와
살점까지도 흐물흐물 녹아 버렸다. 독의 종류를 분류하는 다섯
가지의 주제...혈액독, 부시독, 신경독, 장기독, 효소독의 총
체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중독시킬 수 있고 아무리 무공이 지고한 사람
이라도 중독되며 , 아무리 내공이 깊은 사람일지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파아앗!
당절삼해를 고려하여 방사 기법을 연구했다. 결론은 독을 복용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치명적인 실수였다. 아무리 미약한 독일
지라도 일단 체내에 들어오면 합당한 작용을 했다. 그런 독을
끌어 모아 외부로 유출시켰다고 해서 신체에 손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워낙 내성이 강한 체질이라 감지하지 못했을 뿐이었
다. 내공은 그래서 사라졌다.
독을 운반한 내력은 기(氣)의 결정체였다. 독은 기를 상하게
했고 손상된 기는 내부로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당연히 기해
혈은 텅 비게 되고 흩어진 기는 새로 만들어지는 기를 속성시
키는 역할을 했다.
그것을 없어진 내공이 부활했다고 믿었다니 한심한 노릇이었
다.
단비하의 손에서 터쳐 나간 독은 내부에서 방사된 기를 따라
당기룡에게 짓쳐 들었다.
파앗!
당기룡의 손에서도 독이 터져 나왔다.
'응? 무시독!'
무영지독이 아니었다. 당문주의 방심인가 아니면 늙지도 않고
노망난 것인가. 단비하의 독술을 전해 들었을 텐데. 무시독을
전개하다니.
"크윽!"
짧은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당문주가 무시독을 전개한 이상 당연한 결과였다.
당문의 모든 독을 고려하여 만든 독이기에 천하절독이라는 부
시독일지라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문주는 처음부터 무영지독
을 하독했어야 옳았다.
쿵!
중독당한 당문주는 거칠게 떨어졌다. 그의 몸은 한꺼번에 몇
십 년을 산 사람처럼 쭈글쭈글해졌다. 인체의 수분이 증발하며
피와 내장이 타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이제 세상 그 누가 온다
해도 당문주를 살릴 방도는 없었다.
단비하의 전신에서 기력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너무 허탈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복수치고는 너무 싱거웠다.
'이제는 빠져 나가는 일이 급하다.'
시간은 아주 적절했다. 여명이 트기 시작했지만 기침(起寢)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은폐물을 찾아 몸을 숨겨 가면서도 전력
으로 질주할수 있었다.
휘이익...!
단비하의 신형은 비조처럼 허공을 날아갔다.
그가 사라지고 일 다경쯤 흐른후.
서가가 한쪽으로 움직였다. 비밀 기관이었다.
안에서 초로에 접어든 그러나 기도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는 단비하가 날아간 쪽은 보지도 않고 죽은 당문주
의 시신 결으로 다가갔다. 아 또 하나의 당문주, 당기룡이었
다.
"이건..."
죽은 당문주의 시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던 당기룡은 놀란 탄성
과 함께 등골이 오싹해지는 한기를 느꼈다.
'혈반사접에 버금가는 독이다. 절대...절대 약하지 않은 독이
야. 어떻게 이런 풋내기가 이런 독을 만들었을까?'
취옥으로 만든 지팡이로 죽은 시신 이곳저곳을 뒤적여 봤다.
시신은 뼈가없는 문어처럼 흔들거렸다. 뼈가 녹고 있는 현상.
얼굴에서 얇디얇은 면구가 떨어졌다.
그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칠십 노인처럼 쭈글쭈글해 도저히 윤
곽이나 나이를 식별할수 없었다.
피부의 수축 현상으로 골교(骨膠)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현 무림에서 인피면구를 만드는 방법은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
기는 방법뿐었다. 하지만 파사국(波斯國)에서 들여온 수교(樹
膠)와 밀랍(蜜蠟)을 섞으면 사람 가죽 못지않은 훌륭한 인피가
만들어졌다.
뚫어지게 쳐다본다 해도 도저히 식별할수 없는 인피(人皮).
단비하가 속아 넘어같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오점(五點)이 너무 간단하게 당했다. 그래도 일 각은 버틸 줄
알았는데 단비하...진정 용이 됐구나. 사로 잡아서 혈반사접을
완성시키는 데 써먹으려고 했다만...이제는 죽어 줘야겠다. 살
려 두기에는 너무 컸어.'
당기룡은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리고 오점이라 불린 사람의
시신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시간별로 변화하는 모든 증세는 빠
짐없이 기록되었다.
* * *
그윽한 냄새가 풍기는 차 한잔.
한연지가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즐기는 일과였다. 그것은
아침을 먹지 않는 그녀의 식사대용이기도 했다.
"호호호! 영락없이 독제실장이군요."
부친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고 걸어나오던 당철휘는 어색한
몸짓을 했다.
"연지 놀리지 마. 사실 나는 겁이 나. 아버지의 영혼이 당장이
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
한연지는 입가에 고운 미소를 지었다. 비웃음이었다. 그런 인
간이 제 아비의 탈을 뒤집어쓴단 말인가. 비록 모르고 썼다고
는 하지만 죄가 안 될 수는 없었다. 당철휘 말마따나 구천에
있는 당운담은 통곡을 하고 있으리라.
"호호호! 농담은 그만 할게요. 정말 저는 독제실장이 살아 돌
아온 줄 알았어요. 너무 똑같아요."
"그런가?"
당철휘는 한연지의 말투에서 아버님이라는 호칭이 독제실장으
로 바뀐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오늘 할 일을 말씀드리죠. 먼저 천독전에 독과 암기가 없어진
사실을 은폐해야 해요. 당분간 천독전을 봉쇄하고 오늘 아침
그 일을 보고하는 수하들은 무조건 죽이세요."
"연지, 인피를 쓰는 건 오늘 하루뿐이라고 했잖아?"
"오늘 문주를 죽일 수 있다면 물론 그렇죠. 하지만 변수가 있
어요. 제육실...암기실, 수독실, 형옥실을 제외한 나머지 일
실이 어디 있죠?"
당철휘는 얼굴색이 파랗게 질렸다.
한연지는 귀계의 달인이자 추적과 정보 수집에 뛰어나다는 후
위대의 부대주였지 않은가. 이만한 일을 벌일 때는 그만한 점
은 생각하고 있을줄 알았는데.
겉으로 드러난 오 실, 만채실, 독제실, 암기실, 수독실, 형옥
실 그리고 나머지 일 실. 그 일 실의 명칭 및 임무는 비밀이었
다. 당문주와 당문 십절만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도 뻥
긋하지 않았다.
당문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긍해 하는 비밀부처(秘密部處).
유명원과 더불어 이대 비처에 속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비밀스
런 점에서는 유명원보다 더했다. 최소한 유명원주는 명호나 이
름은 알려졌으니까.
"여, 연지! 육실을 모른단 말야?"
"몰라요. 전에 후위대주에게 물어 봤지만 야단만 호되게 맞았
죠. 살고 싶으면 입 다물라고 말이에요."
당철휘도 같은 경험을 가졌다. 아마 당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은 같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을 게다. 육실이 무엇 하는 곳이
냐? 혹은 당문 십절 중 나머지 한 분의 무명이나 성함은 무엇
이냐? 돌아온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질책뿐이었다.
"어쩌면 좋지? 나도 몰라."
"그러니까 지금 문주를 죽여서는 안돼요. 우선 육실의 정체를
파악해야죠. 그러려면 당문 십절 중 한 사람을 잡아야 해요.
목표는 독비독심 당철목. 그를 잡아주세요. 고문은 제가 하
죠."
"어, 어떻게 사로잡아. 죽이는 것이라면 몰라도..."
"호호호! 자신을 가지세요. 상공의 독술은 당문 십절에 버금
가요. 명심할 일은, 절대 무공으로 겨루려 하지 마세요. 독제
실장과 일장을 부딪쳐 봤으니 잘 알겠지만..."
"으음...!"
이미 인피면구에 대한 반발은 쏙 들어갔다. 살기 위해서는 몇
날 며칠이고 뒤집어쓰고 있어야 한다. 죄책감은 사라졌다.
한연지의 말은 현실감있게 들렸고 죄책감을 몰아내는 변명 거
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연지의 절묘한 화술이라기보
다는 당철휘의 마음에 깃들인 악심(惡心) 때문이었다. 악심이
있는 한 변명 거리는 계속 생길테니까.
아버지는 늘 한 손으로 뒷짐을 지고 걸었다. 걷는 속도는 보통
이었지만 걸음걸이가 독특했다. 다른 사람은 흉내내기 어려운
걸음걸이였다. 그러나 부자간에 빼다 박은 듯 걸음걸이마저 부
친을 닮았다.
'독비독심 당철목이라...'
숙부라 부르며 따르던 사람이었다.
한연지는 하필 가까운 사람부터 제거한단 말인가.
좋게 생각했다. 죽이기가 그만큼 쉽기 때문일 거라고.
부친의 집무실로 들어서면서 잠시 흠칫하던 당철휘는 곧 탁자
에 가서 앉았다. 부친이 지금이라도 불쑥 들어올 것만 같았다.
아직도 자신이 존속살인을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시, 실장님!"
시비가 가져다 준 찻잔에 입을대기도 전에 천마전을 지키던 수
하가 헐레벌떡 뛰어들었다.
'당건해(唐建海)...정말 재수없는 놈이군.'
당건해의 연배는 자신과 비슷했다. 먼 사촌뻘이지만 정작 같은
피가 섞였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용모나 기골이 판이하게 달
랐다. 하지만 독에 대한 열정이 깊어 늘 독과 씨름하는 자였
다. 그의 탐구심은 당문도 인정하는 터였다. 그러나 그는 오늘
죽어 줘야 한다.
"험! 왜 그리 호들갑이냐?"
부친의 억양을 흉내내어 점잖은 음성을 발했다. 부친은 언제나
그랬다. 겉으로는 군자(君子)의 풍모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밉게 본 사람은 절대 용서하는 법이 없었다. 오죽하면 무
명이 무독천살(無毒千殺)이었을까.
"처. 천독전이..."
"어허! 천천히 좀 말해 봐라. 천독전이 어쨌단 말이냐?"
"처, 천독전에 있던 독과 암기들이 모조리 없어졌습니다."
"뭐이라고!"
당철휘는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일부러 마시던 찻잔을 바
닥에 떨궜다.
쨍그랑!
찻잔 깨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리고 사방으로 튄 갈색 찻물이
앞으로 벌어질 사단을 예고하는 듯했다.
"그 말이 사실이냐?"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이런..."
당철휘는 소매를 떨치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이럴 때 뛰어가면 의심을 받는다. 부친은 아무리 급해도 걸었
다. 걷기는 걷되 마음이 급해 빨리 걷느라고 뒤뚱거리는 모습
이 꼭 오리 같아 뒤에서 낄낄거린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
실...똑같이 오리가 뒤뚱거리며 걷는 흉내를 내야 한다.
천독전은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연출
했다. 누가 보더라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기만하던 독제실
이 아니었다.
'당소가(唐蘇加)...당유성(唐流星)...당심홍(唐沈洪), 당중형
(唐仲炯)...당마완(唐瑪玩)...'
당철휘는 오늘 죽일 자들의 이름을 부지런히 외웠다. 한연지의
말을 빌리자면 이들 중 한명이라도 살아난다면 모든 계획이 수
포로 돌아간다고 했다.
덜컹!
천독전 문을 두손으로 확 밀어젖혔다. 그것도 아버지가 하던
습관. 독단제조에 실패하거나 문주로부터 질책을 받으면 언제
나 천독전 문을 두손으로 활짝열었다.
천독전은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황량했다.
'내가 너무 쓸어 갔나?'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했다. 어젯밤에는 경황이 없어 무
조건 퍼 담았지만 다시 와 보니 텅 빈 듯 허전했다.
'저것...저것을 가져 가지 않았군.'
당문의 금기 암기들. 왜 저것들에 손을 대지 않았을까? 가장
의력이 강한 암기들인데. 무림에 나가 사용한다면 무림공적으
로 몰린다지만 당문 십절을 죽이는 데는 더없이 효과적인 병기
들인데.
그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금기 암기들은 먼지 하나 없었
다.
"모두 들어와! 천독전이 털렸는데 바깥 경계는 뭐 하러 해! 한
놈도 빠짐없이 모두 들어와!"
당철휘는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 금기 암기 쪽으로 다가섰다.
낯익은 병기가 눈에 띄었다. 폭우빙혼통...강호로 나갈 적에
문주의 밀명을 받고 가지고 나갔던 암기의 총화. 하지만 써먹
지도 못하고 단비하 놈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두 번 다시 생각
하기 싫은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폭우빙혼통...오늘 좀 써볼까?'
문밖을 지키는 놈들 수준은 누구보다 자신이 잘안다. 소매 속
에 숨겨 둔 조독기 다섯 개면 충분하다. 하지만 폭우빙혼통을
써보고 싶은 충동은...
한 명, 한 명 들어왔다.
당소가, 당유성, 당심홍...그런데 맨 나중에 들어온 놈은?
처음보는 놈이었다.
널찍한 이마에 굵직한 눈섭, 쪽뻗은 코는 강인한 의지를 나타
내고, 계집처럼 희뿌연 얼굴에 마른 몸매는 어쩐지 유약해 보
였다. 나이는 오십 줄에 들어섰을까? 제법 굵은 주름살이 이마
를 덮었다. 아! 눈꼬리에 나 있는 잔주름도...
'처음 보는놈...하지만 어디선가 꼭 본 듯한 놈이었다.'
"네놈은 누구냐?"
"네놈? 허허허! 친구, 나를 잊었나?"
순간 당철휘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문내
에서 부친 당운담에게 스스럼없이 친구라 부를 수 있는인물이
있다면 당문 십절뿐 그런데 왜 한번도 보지 못했을까? 그럼 혹
시 마지막 비밀의 육실장?
등골이 서늘해졌다.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며 전신이 물먹은 솜
처럼 노곤해졌다.
"허허허! 자네군 그래. 지금 천독전에 변괴가 발생해서 내 정
신이 아니라네. 이해하게."
제법 능청스럽게 둘러댔다.
"공적인 일로 찾아왔네. 아이들을 잠시 물리는게 어떨까?"
'제길! 확실히 육실장이야.'
일이 묘하게 틀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이면 이때 신비에
가려졌던 육실장이 등장할 게 뭐람. 더욱이 초면인 관계로 부
친과 어떤 사이인지도 모른다는 게 불안했다.
"그러지,너희들은 물러가 있거라. 천독전에서 한걸음도 떨어지
지 말고...일이 끝나면 곧바로 들어와야 한다."
"네!"
손에 잡혔던 먹이들은 구사일생으로 잠시간 목숨을 연장시켰
다. 당철휘는 두 가지 심계를 한꺼번에 펼쳤다. 먹이들이 도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감에 일침을 박았고, 육실장에게는 바쁘
니 용건만 빨리 끝내라는 의사를 밝혔다. 육실장의 처리 문제
는 한연지와 상의할 작정이었다. 설혹 이 자리에서 정체가 발
각된다 할지라도 폭우빙혼통이 손에 들려 있는 이상 무서울 게
없었다.
독제실 수하들이 물러가자. 이 낯선 놈은 뒷짐을 지고 어슬렁
거렸다.
"이보게, 내가 좀 급해서..."
일순 낯선 놈의 안색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의 눈가에 진득한
살기가 묻어 나왔다.
"이보게? 허허허! 당운담, 잠시 전에는 네 수하들이 있어서 참
았다. 언제부터 말을 놓기로 작정했지?"
당철휘의 마음은 몹시 조급해졌다. 도대체 부친과 이놈은 어떤
관계란 말인가.
"저, 그게..."
"당운담! 건방지구나!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할까?"
괴인의 음성이 천독전을 쩌렁 울렸다. 보통 심후한 내공이 아
니었다. 목소리만으로 판단했을 때는 적어도 부친보다 강했다.
'제길 정말 잘못 걸렸네.'
당철휘는 황급히 무릎을 끊었다. 그러나 폭우빙혼통을 들고 있
는 것은 잊지 않았다.
"무슨 하명이 있으신지요?"
부친의 억양으로 그러나 사뭇 존경이 묻어나는 투로 말했다.
괴인은 잠시 싸늘한 눈길을 보내 왔다. 그런 눈길이 익숙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어디서 봤더라. 보긴 봤는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네가 정말 죽으려고 작정했구나."
괴인의 말은 갈수록 황당했다.
"네엣! 무슨 말씀이신지?"
"허허허! 잠시 못 본 사이에 배포만 늘었군. 좋아, 독제실의
실장이라면 그정도 배포는 돼야지. 자 받아라."
괴인은 조그만 단환을 던져 주었다.
당철휘는 엉겁결에 받아 들었지만 단환의 용도를 몰라 어리둥
절했다. 그러나 그런 내색을 한다면 영락없이 꼬리가 잡힐 판
이었다. 그래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망설이는 듯 단환을 만지
작거렸다.
"응? 허허허! 이제는 해약도 필요없단 말이냐?"
괴인의 말에 복잡하던 머리가 실타래 엉키듯 마구 헝클어졌다.
해약? 그럼 부친이 독에 중독되었었단 말인데...누가, 왜 부친
을 중독시켰을까.
"아닙니다. 문주님의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당철휘는 손에 든 단환을 꿀꺽 삼켰다. 순간, 매캐한 맛을 남
기고 넘어간 단환은 속이 얼얼할 정도로 뜨거운 기운을 내뿜었
다.
'제길 팔자에 없는 해약이라니.'
"크으윽!"
당철휘는 느닷없이 복부에서 전해지는,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
에 배를 움켜잡았다. 덕분에 손에서 굴러 떨어진 폭우빙혼통은
괴인의 발앞으로 떼구르 굴러갔다.
"당철휘 고통이 참을 만하냐?"
이건 또 무슨 소리? 당철휘라니? 그럼 이자는...?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다. 그러나 놀라움을 표시할 기력도 없었
다. 배를 쥐어뜯는 고통은 이미 육신이 참을수 있는 한계를 벗
어났다.
"갈홍아라고 기억하나?"
당철휘는 아예 괴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할수만 있다면 두
귀를 막아 버리고 싶었다. 괴인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데 일가
견이 있는지 하는 말마다 귀신이 곡할 소리만 골라 했다.
이 마당에 그 계집 이야기는 왜 나오는가? 부친으로 위장한 것
만해도 백 번 죽어 마땅한 일인데.
"그녀를 사랑하나?"
"사랑...크으윽...개떡이나...크윽!..."
당철휘는 마혈에 묵직한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뒷덜미를 낚아
채는 손길도...
"너는 쉽게 죽을 수 없어. 감히 부친을 살해한 놈. 갈홍아가
당했던 그대로...아니 그정도로는 직성이 안풀려. 너는 가장
처참한 인생을 살아야 돼."
내장을 쥐어 뜯는 고통만 아니라면 물어 보고 싶었다. 갈홍아
와 어떤 관계인지, 아버지를 죽인 사실은 어떻게 알았는지.
천독전을 나서는 순간 수하들의 모습이 보였다. 너무 심한 고
통에 의식이 가물거리는 가운데도 눈만은 뜨고 있었기에 자연
스레 보인 광경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장이 잡혀 가는 데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아마 문주로부터 밀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들의 눈
빛이 그런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연지도...어헉! 미치겠네. 허억! 연지...위험해...'
오지람 넓은 생각이었다. 당장 그 자신의 생명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거늘...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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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하고 감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즐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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