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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올렸던 글인데, 나무위키에 올린 서술에 또 이상한 분탕질이 있어
제가 부가서술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 와중에 저 또한 오염된 바 있는 전남 백제 아니다 썰에 대한
반박도 추가하여, 해당 부분을 올립니다.
<< 이건 전에 제가 예전 게시글에 올렸던 내용 >>
나무위키에서
신라 삼국통일로 지이이이잉~ 그 시로 백제와 고구려인은 다 국가정체성이 없어졌습니다
백제와 고구려는 현대한국과 아무 상관 없습니다, 고려, 후백제는 이름만 빌린 것입니다
따위의 서술들이 요즘에는 좀 많이 줄었어도 사실 어쩌다가 한 번씩 보입니다.
이 한심한 관념은 당연히 역사와는 별 관련 없고,
오히려 무식한 일본인들 및 중국인들이 주워섬기고 있는 소리기도 한데 저는 현대 한국에도
이런 바보들이 적지 않은 걸 보면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이 부분에 대해 중국, 일본한테
따질 수가 있을까, 그런 생각마저도 요즘 하는 형편입니다.
== 개요 ==
[[나당전쟁]]이 끝난 후 평화를 맞이하자 [[백제]] 유민들은 한동안 신라인으로 만족하며 살았으며 [[골품제]]의 모순이란 것도 지역 세력이 성장하지 못한 [[7세기]] ~ [[8세기]]에는 그렇게까지 차별로 다가오는 현상은 아니었다. 그래서 [[통일신라]] [[전성기]] 150여 년 동안은 다들 신라인으로서 별다른 무리 없이 적응하고 살았던 걸로 보이는데, 이 기간 동안 백제인 정체성을 내건 반란이나 큰 저항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단 옛 백제 영토에서 일어난 822년의 [[김헌창의 난]]은 이 대목에서 예사로이 넘길 수 없다. 백제 유민 정체성을 근거로 일어난 반란은 아니었고 주동자 김헌창부터가 무열왕계 [[강릉 김씨]]로서 웅천주에 지방관으로 부임했을 때 일으킨 반란이었지만, 옛 백제 영토를 한꺼번에 독립시키겠다는 의도가 생각보다는 파괴력이 있음을 입증한 사건이었고 해당 지역의 반신라 감정이 있음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신라가 융성하면서 지방 세력이 성장하지만 그에 따른 과실은 수도 일대로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나자 [[골품제]]로 인한 지방 세력의 불만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것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던 백제 유민 의식에 점점 불을 붙이게 된다. 신라에서 파견하는 지방관이 고려나 조선의 지방관들과는 달리 흡사 점령지를 관할하는 총독의 입장에서 꽤 긴장된 분위기의 통치[* 역사 지리학 강의 참조]를 행했던 것도 백제 지역의 진정한 통합에 큰 저해 요소였으며, 화랑들의 산천 탐방이 백제 지역 사회에 후기가 될수록 크게 부담을 주게 되었던 것도 이러한 현상에 점차 시너지를 일으킨다. 하필이면 신라의 군사 및 행정 역량이 옛 백제 지역을 꽤 효율적으로 통제해서 지방 세력의 자율성은 상대적으로 고구려 유민만도 못했던 모순도 있었고.[* 김헌창의 난 때도 구 백제 지역보다 구 고구려 지역이 더 신라 정부에 충성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때문에 백제 유민 의식에 기반한 부흥 운동은 결국, 200여 년 후 백제 유민도 아닌 조상 대대로 신라인이었을 개연성이 높은 신라 장수 [[견훤]]에 의해 [[후백제]]란 형태로 성공하게 된다.
[[후백제]]가 망한 후 [[고려시대]]에도 백제 유민 의식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아 [[무신정권]] 기의 [[이연년 형제의 난]] 때 백제 부흥을 주창하기도 했으나, 그걸 마지막으로 [[여몽전쟁]] 이후로는 삼국 유민 의식은 소멸되어 더 이상의 [[백제부흥운동]]은 일어나지 않게 된다.
다만 아무래도 한반도에선 유럽과 달리 고려 이래로 천 년 이상 통일 국가가 유지되었기에, 한반도에 본디는 기원이 각기 다른 여러 대등한 국가들이 동시에 존재했고 서로 국가정체성을 놓고 경쟁했으며, [[여몽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이런 여러 국가정체성이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음을 한국인들 대부분이 실감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때문에 이런 과거에 망한 나라들의 부흥운동을 그저 이름만 빌렸을 뿐이라고 근거 없이 치부해버리는 틀린 견해들이 만연해 있는 상황[* 이것이 중국의 동북공정이 취하고 있는 궤변 중 일부와 일맥상통함은 대단히 중요하고 심각한 부분이다.]인데, 그러한 생각들의 대표적인 잘못된 부분 몇 개를 논한다.
=== 200년의 시간 간격 ===
백제 멸망(660년)과 후백제 건국(900년) 사이에 200년 이상 길게 차이나기에 그 사이에 유민 의식이 남아있을까 의문스럽다는 주장이 있으나, 유민의식을 계속 이어가는 한 부흥운동에 있어 단순한 시간 간격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
망한 나라의 옛 구성원들이 망한 나라에 대해 가지는 국가 정체성이나 귀속감은 망한 시기와 반비례하는 게 사실이지만 사람들에게 있는 관념은 시대적인 상황이나 문화 및 종교에 따라 대단히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에 섣불리 속단할 수 없고, 또한 그 '긴 시간이 대체 어느 정도'인지는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맘대로 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당장 [[신라부흥운동]]이라는 강력한 반례가 있고, 태봉-고려의 예도 있다. 이 나라도 고구려 멸망 시기(668년)와 2세기 넘게 차이나지만 이들의 고구려 계승 의식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밖에 범위를 더 넓혀 보면 거의 500년 단위로 계속 이란 부활을 외쳤던 페르시아사의 사례나 몇 백 년 지나도 본국의 차별 대우 탓에 분리 독립을 주장했던 크레타 등의 상황이 있는데, 이런 견지에서 보면 이백 년 가지고 유민의식 없다는 얘기가 얼마나 허망하게 보이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꾸준한 무력저항의 여부 ===
백제가 망한 시기와 후백제가 건국된 시기 사이에 꾸준히 저항이 있지 않았고 신라의 통치에 내내 순응하다 신라가 쇠약해지자 갑자기 등장했기 때문에 옛 백제 부흥세대와 후백제 주체 세력은 단지 이름만 빌렸을 뿐 서로 연속성 없이 단절된 의식이며 활동이란 주장도 있다. 그러나, 유민 의식이 있다면 목숨을 내걸고 내내 저항 상태에 있어야만 한다는 전제 자체가 대단히 비현실적임을 알아야 한다. 역시 가까운 시기의 예를 들어보자. 어디 일제 시대 때는 늘상 심각한 소요 상태에 있었는가? 저 페르시아의 사례만 봐도 [[아랍]]계인 [[이슬람 제국]]이나 [[몽골 제국]] 치하에서 순순히 산 세월도 짧진 않았고 [[로마 제국]]에 대한 반감이 크기로 유명한 [[유대인]]들도 잠자코 있던 기간이 길었던 것 또한 생각해봐야 한다. 애초에 저항 세력이 눈에 띄게 등장하는 시기는 지배력이 약한 시기가 될 수밖에 없는데 모름지기 부흥운동이라면 강한 시기에도 계속 저항해야 한다는 전제는 말이 되지 않는다.
=== 영토상 문제 ===
영토로 보자면 [[한성백제]]와 웅진/사비 백제도 매우 다르다. 한성백제는 경기도에서 발전했다고 하지만 황해도도 상당 부분 영유했었고, 강원도 내륙지역인 영서 지방도 어느 정도 가진데다가, 전라도와 충청도 동부 및 남부를 직할 통치하진 못했음이 유물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충청도 전체라도 일단 직접 지배하기 시작한 건 4세기 중후반 근초고왕 때 와서였으나 5세기 초중반부터는 광개토대왕이 충북 일대에 군사 거점을 마련하면서 침투하기 시작했으니, 우리가 아는 충청도 전체가 백제 아래에 확고히 있던 시절은 결국 백 년도 되지 않는다.
이후 장수왕에게 475년에 한성을 빼앗기면서 중심지를 충청도로 옮겼고, 그후엔 충청도의 기존 토착 호족들을 제어하기 위해 전북 익산 일대를 일종의 제2수도로 조영하면서 직할지화하면서 금강 유역권과 영산강 유역권까지 직접 지배력을 투사하여 예전 [[한성백제]]가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 하던 것보다, 아니 오히려 더욱 면밀한 중앙집권을 관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기도 + 충청도만 백제고 전라도는 백제가 아니라고 보는 관점은 애초에 그것이 그 당시엔 있지도 않았던 조선 시대 행정구역 관념을 투영한 것이어서 틀린 건 둘째치고, 아예 사실관계부터가 다른 편견에 찬 주장이다.
후백제의 영토를 들어 백제와 무관함을 주장하는 다른 논리로는 후백제의 영토가 전라도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건 그냥 잘 알지도 못하고 하는 틀린 소리다. 후백제의 영토는 전라도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경상도 서부 일대는 망하기 몇 년 전까진 후백제가 차지한 영역이 고려보다도 그 차지한 비중이 압도적이었으며, 충청도 영역도 백제의 옛 중심지이던 공주 - 부여 일대는 고려에 맞서 오랫동안 점유하고 있었고 대전-계룡 축선은 거의 늘 붙들고 있었으며 충청북도는 백제를 무던히도 애먹였던 [[삼년산성]] 일대를 포함해 2/3 정도가 후백제의 강역이었다. 특히 백제가 다른 전라도 지역보다도 거의 오십 년 먼저 아예 왕실 직할령으로 편제해서 제2수도권으로 편재했던 익산 일대가 내내 견훤을 든든히 지배한 건 의미가 크며, 이는 역시 고구려 왕실이 집중적으로 육성한 제2수도권이었던 패서 일대가 궁예와 왕건을 통해 고구려를 부활시켰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현상이다. 게다가 후백제의 강역 대부분은 경상도 및 충청북도 상당 부분과 대전 일부, 충청남도 서북부 외엔 전부 백제가 망하기 전까지 보유하던 영역들이었다.
구백제의 중심지였던 충남 지역 호족들은 태봉/고려와 후백제 사이를 오가며 줄타기를 했다지만 이걸 갖고 백제성을 따지는 것도 웃기는 게, 견훤 자체가 신라 방면에 전력을 집중한 게 주된 이유였고 애초에 신라가 옛 백제 수도권역을 집중 관리했으며, 태봉의 궁예 정권이 고구려 일변도식의 정체성을 버리고 백제 유민도 적극적으로 포섭하려 했던 것[* 패서 호족과 왕건이 궁예에게 반기를 든 것, 그리고 청주, 공주 일대 태봉이 왕건에게서 돌아선 것도 이것이 이유였다.]도 생각해봐야 한다. 백제 멸망(660년) 후 백제 부흥 운동은 백제 중심지인 충청남도 지역(주류성, 임존성, 사비성 등)에서 일어났으며 전라도 지역에서는 백제 부흥 운동이 사실상 없었다고 하지만, 이는 신라 지배하에서도 백제 지역 유민들의 적극적이지 않은 저항은 간간이 있었고 그건 신라의 집중적인 관리를 어쩌다가 피한 전북 일대에서 주로 일어났음을 간과한 것이다.[* 백제 양식의 석탑이 백제 멸망 후에 갑자기 명맥이 끊기다가, 신라의 통제가 약화된 말기부터 갑자기 백제의 옛 땅에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며 주로 현재의 충남, 전북 지역이다. 충청남도 문화 연구원의 백제사 전집의, 백제 유민 동향편 참조.][* 나말여초 정치 제도사 연구, 충청남도문화 연구원 편찬 백제 유민 동향 부분 참조.]
또한, 김헌창의 장안국 반란 때 옛 백제 영역의 전체가 김헌창 반란에 동참해서 중앙에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은 백제사와 통일 신라사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영역이다. 김헌창은 백제란 이름 자체를 내세우진 않고 그저 서라벌을 중심으로 한 국가에서 떨어져나가겠다는 분리주의만 표명했는데도 일순간의 파급력은 강했던 것이다. 김헌창의 난은 이념을 앞세운 지역 주민의 본격적인 민심 싸안기란 과제까진 나가지 않았기에 추진력이 약하여 쉽게 실패했지만, 이는 견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 견훤은 김헌창보다 한술 더 뜨는 자세로 나가게 된다.[* 김헌창의 난 때도 구백제 지역보다 패서 구 고구려계 지역이 더 신라 정부에 충성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물론 [[전라도]], [[경상도]]하는 [[조선시대]]에 생겨난 관념을 그 전 시대에 투영하여, 경상도는 신라고 전라도는 백제라고 말하는 건 사실 관계와 다른 인식이지만, 그렇다고 [[충청도]]만 백제며 전라도는 전라남도 중에서도 일부인 나주만 예로 들어 백제 아닌 마한이라고 생각하는 인식 또한 이에 못지 않게 틀린 생각임은 명심해야 한다. 게다가 전라남도 전체를 마한으로 얘기하면서 마치 마한이 백제와 독립된 국가처럼 항쟁했다는, 과거의 통설보다도 더욱 엉터리인 이상한 썰이 2010년대부터 국내 인터넷상에 만연해 있는데, 이는 완전히 틀린 헛소리다. 오히려 백제에게 여력이 남아 있는한 격렬하게 저항한 흔적이 있는 건 충청남도 천안에 소재한 [[목지국]]이며, 백제의 진격이 4세기 초반~중반 시기에 충청도 북부에서 잠깐 정체되는 건 목지국 및 목지국의 영향 아래 직접적으로 있었던 소국들의 조직적인 저항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목지국이 위치했던 충남 천안 같은 경우 목지국이었을 때의 중심지가 인위적으로 완전 해체되어 퇴락해버리고, 그 바로 인근 지역에 백제의 입김이 강력하게 드러나는 재지 세력이 새로 자리잡은 현상까지 관찰될 정도. 백제가 현지 세력을 완전 해체하는 이런 부담스런 조치는 상대하기 만만하거나 본디 인구가 드문 지역을 개척할 때나 보였던 걸로 전반적으로는 해석되는데, 다름아닌 목지국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건 의미가 크다. 목지국의 저항 강도가 만만찮았거나 백제가 그 존재를 지나치게 오래 용인하기엔 존재감이 너무 컸다는 반증. 반면 침미다례 같은 경우 근초고왕 당시 그 중심 소국이 궤멸적인 타격을 받아 소멸해버린 이후론 그러한 적극적 저항이 관찰되지 않는다.
역시 언젠가부터 아예 마한 자체로 잘못 언급되는 [[침미다례]]란 세력 자체는 애초에 전남 전체도 아닌 전남 1/3만 장악한 군소 세력에 불과했고, 전남 남해안, 광주를 중심으로 하는 전남 내륙은 이들과 또 다시 정치, 경제, 정치적 문화적 입지가 달라서 개별적으로 백제와 복속된 별도의 세력임을 모르는 나머지 생기는 편견이기도 하다. 물론 백제 왕가 직속 군대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일종의 제2수도로 경영된 익산 부근 전북은 백제 왕가와 관련이 보다 깊었던 게 사실이지만 '''왕가와 직접 관련 있고 직접지배하는 곳만 그 나라 영토면, 신라는 그 존속 시기 내내 경상북도 동부만 신라 영토였나? 패서 일대는 신라와 아예 무관했고?''' 그렇지 않다.
이 대목에서 전라도에서도 전라남도 일부인 나주 일대가 백제 부흥 운동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전라도 전체가 백제에 관심이 없었다는 이상한 생각 또한 떠오르는데, 전라도를 그런 식으로 묶어서 보는 것은 여전히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에 얽매인 틀린 생각인건 차치하더라도, 나주가 후백제의 견훤에게 합류하지 않았던 것엔 다른 이유가 있는 걸 모르는 짧은 견해에 불과하다. 이 부분은 [[나주 공방전]]문서 참조. 이런 괴상한 논리라면 [[고구려]] 역시 수도가 국내성/평양 일대였으나 막상 [[고구려부흥운동]]은 비교적 변방이었던 [[개성시|개성]]과 [[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했기에 별 상관 없다고 봐야 한다. 일단 당장 전주가 전라도고 뭐시고 따지기 이전엔 부여-전주 직선거리보다 평양-개성 직선거리가 훨씬 멀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전주가 공주, 부여 등과 거리가 좀 있으니 백제성이 없다면 개성에 정도한 고려의 고구려성은 더더욱 없다. 게다가 백제의 제2수도였던 익산은 그냥 전주 바로 윗동네다. 반면 고구려 제3수도였던 재령은 개성과 거리가 여전히 멀다.
또한 이런 어처구니 없는 논리, 즉 '''일부가 이탈했다고 그 일부가 속한 조선 시대 행정 구역이 죄다 아니라는 궤변이라면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당연히 백제 영역이라고 보는 충청도도 백제가 아니게''' 된다. 충청북도 중북부는 이미 광개토왕 혹은 장수왕 때부터 고구려가 제패했고, 진흥왕 이래로는 서쪽 일부 영역만 제외하면 줄곧 신라 영토였으며 이후 백제는 말기에 의자왕이 잠깐 신라를 밀어붙였을 때 외에는 이 지역을 수복해내지 못했다. 오히려 충청북도가 백제의 손으로 다시 들어오게 되는 건, 훗날 등장하는 후백제의 성과였다.
이 대목에서 세월에 따라 변화가 심한 백제영역의 변천양상은 여전히 염두에 두지 않고 백제가 초기에 정복왕조로 시작한 것만 억지로 부각하면서 정복왕조 백제가 지배하는 영역 중 부여인 의식이 있어야 진짜 백제유민이고 백제인이라는 주장이 나오지만, 이는 실제 역사와 무관한 억지다. 건국 당시의 부여계가 해당 지역과 해당 인적집단에게 딱 고정되어 영원불멸 늘 고정된다는 관념이야말로 일부 현대 한국인의 강력한 착각이다. 부여계들이 직할통치할 수있는 지역은 당연히 초반엔 얼마 안 되며 상당 부분은 당연히 현지 세력에 맡기던지 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으니, 결국 동화와 타협은 필수였던 것이다. 게다가, 초기 백제를 구성한 고고학적 세력은 크게 보아 두 계통인데, 그 중 하나는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고구려계 세력이지만 다른 하나는 위에서 자주 언급되는 [[침미다례]]와 그 고고학적 계통이 오히려 똑같은 서해안 토돈 분구묘 세력이다.[* 이 계통이 오히려 충청도 및 전라도 내륙 지역 마한 목지국 토광묘-석곽묘 계통과는 어느 정도 구분되는 유형이다.]
"호남인들의 조상들 운운"하면서 이들 전체가 최후까지 백제의 침공에 저항하던, 정복자 백제라면 아주 이를 갈고 증오하던 마한인들이란 주장이 어느 샌가 퍼져 있지만, 이는 조선 시대 행정구역의 관념을 그보다 천년 전 상황으로 소급한 지어낸 말에 불과한데다,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와 완전히 역행하는 관념이다. 백제와 마한이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투쟁한 관계가 아닌 걸 모르니까 이런 소리가 나오는데, 백제는 애초에 마한의 구성국으로 시작해서 마한의 맹주국이 되어 마한 소국들을 통합했고, 그 과정에서 크게 보아 네 개 권역으로 구분되는 마한은 수백 년이 지나 서서히 망해 흡수된 관계인데, 그 과정에서 애초에 하나로 통짜로 엮는 게 불가능한 마한의 원한과 유민의식이 유독 조선시대 행정구역인 호남에만 강렬하게 남았다고 망상하는 건 틀린 역사 읽기다.
똑같이 조선시대의 무리한 행정개념을 이런 편견에 맞대응하기 위해 어거지로 끌어와보면, 경기도와 충청도에서는 어디 그런 저항이 없었겠는가? 사실 충청도 권역만 해도 목지국이 백제에게 망하지 않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해 저항했고, 백제는 이걸 완전히 억누르는 데 거의 50년이란 세월을 보내야 했으며 당연히 그 기간 동안 백제국의 직할 영역은 충청도 북부에서 그 전진을 멈추었으며, 오히려 그 동안 백제의 영향력은 전라도 서해안에 더욱 깊이 뻗어나가는 양상을 보인다. 공주 또한 웅진 천도 수십 년 이전부터 백제가 꾸준히 왕실이 직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상황에서도 천도한 시점에서 기득권을 침해받은 토착 호족들의 저항을 무마하느라 많은 애를 먹어야만 했다. 그리고 백제 전성기 때 직할통치한 황해도는 처음부터 백제 영역이 아닌, 아예 한제국의 낙랑-대방이었다.
그런 관념에서 보면 백제는 영원불멸 초기 부여계가 처음 시작한 위례성 그리고 이후 현대 한국인에게 이미지상으로 잘 알려진 공주, 부여에만 고정된 존재지만, 당연히 이런 가상현실 백제는 있어본 적 없는 허상이다.
국가는 변화하는 현실에 따라 적응과 변천, 통합과 흡수를 반복하는 실체지, 누군가의 관념에서 건국 당시로 고정되어 늘 그 환경 그 조건에 맞춰 상연되는 테마파크가 아니다.
물론 신라 귀족의 직계 후예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신라부흥운동]]과 후삼국시대 백제부흥운동의 양상이 다소 다른 건 맞지만, 부흥운동을 옛날 귀족 직계 후예가 일으켜야 인정할 수 있다는 것도 역사학계에선 통용되지 않는 일개인의 편견이다. 설령 이를 인정하더라도, 똑같은 신라 귀족의 후예였으나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우선하여 근왕군을 일으켜, 조상이 같은 신라 귀족 후예들을 단순 반란역적으로 취급하여 토벌해 살해했던 참상이 이 부분에선 벌어지지 않았던 것은 신라와 고려의 옛 나라 백성 흡수가 역시 차이가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첫댓글 애시당초 진표스님같은 고승도 왕에게 존경받았지만 백제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은 걸 보면은... 답이 나오죠.
신라 왕실은 개혁과 포용의 의사가 있었으나, 진골과 왕경인들은 전혀 그럴 의사가 없긴 했죠. 신라 왕실만 안쓰러울뿐
옳은 말씀입니다! 말씀하신대로 나라없이 이백년간 살았다고 유민의식 없어지는 거라면 현재의 폴란드인은 폴-리투랑 아무 상관이 없고 누르하치가 옛금나라의 이름을 따 후금을 칭한것도 아무상관없는 명나라의 지방부족이 나라이름만 딴것에 불과한거겠죠.
그렇게 유민의식 있으면 왜 이백년 동안 가만히 있었냐고 개드립이나 하고들 있죠. ㅋㅋ 생각 자체를 안하고 사는 놈들입니다.
프로야구에서 역대 인천연고 구단과 현 ssg가 별 관련이 없다 해도 같은 인천야구의 계보를 이은걸로 치듯이요. 근데 키움은 뭐..ㅎㅎ
700년동안 싸웠고 존재했던 나라인데 정체성이 사라질니가 없습니다 신라가 백제 사람들은 신라 내륙이 이주시키고 왕족이나 귀족은 신라 왕경이나 백제권이 아닌 소경일대에 이주시키고 구 백제 지역에 고구려유민이나 신라 인들을 이주시켜도 없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정체성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나 봅니다
백제 영역이 워낙 넓고 인구도 많아서, 그 영역 전체를 섞어찌개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습니다. 몇몇 떨추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중상류층이 다 일본으로 도망가거나 당으로 끌려가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