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11일 아침(미동부시각), 미 주요 도심의 공습을 목격한 할리우드와 전세계 할리우드 영화팬들은 부시대통령을 따라 잠시 묵념을 해야만 했다. "미국은 테러를 용납하지 않는다". 긴급 성명의 마지막 문장은 기막히게도 해리슨 포드의 대사와 똑같았다.
이게 도대체 영화 장면이야 뉴스야? 전세계 사람들은 CNN을 잠시 HBO로 착각했을 일이다. 여객기가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차례로 충돌해 폭발하고 이를 보도하던 앵커는 갑자기 흥분을 더하며 워싱턴 펜타곤마저 항공기 추락으로 불타고 있다고 전한다. '다이 하드(Die Hard)'류의 빌딩 인질극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이내 8대의 항공기가 피랍됐다는 뉴스를 듣고 '에어포스 원(Air Force One)'을 상기한다. 이쯤이면 전쟁이 아닐까 의심하던 사람들은 CNN 생중계 화면에서 쌍둥이 빌딩이 순식간에 무너져내리자 '아마겟돈(Armageddon)'의 아수라장과 똑같은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3차대전 아니면 '화성 침공(Mars Attack)'일까?
마치 영화를 따라 저지른 것 같은 테러 현장을 지켜보며 그게 '불구경'할 일인가 반문한다.
테러리스트의 심리를 추적해보자. 도심 고층빌딩을 점거한 테러리스트가 수백명을 인질로 삼아 돈을 요구하려면 브루스 윌리스 형사를 조심해야 할 것이다. '다이 하드'에서 인질극을 벌이다 실패한 테러리스트들은 2편에서 공항 관제시스템을 장악하고 여객기와 승객을 인질 삼았다가 또 다시 브루스 윌리스에게 혼줄이 났다. 3편에선 뉴욕 도심 어딘가에 폭탄을 숨겨놓고 형사를 약올리다 결국 지하철 격투끝에 현금 강탈에 실패했다. 항공기를 납치해야한다면 혹시 기내에 웨슬리 스나입스 형사가 타고 있지 않나 잘 확인해보아야 한다. '패신저57(Passenger57)'의 여객기 납치범들은 돈을 노린 잡범이었지만 간 크게도 미대통령 전용기를 하이재킹하려면 정치적 명분이 중요하다.
'에어포스 원'을 납치한 게리 올드먼 일당은 러시아 극우파의 부활을 꿈꾸었으나 해리슨 포드 대통령에게 두들겨 맞고 하늘에서 떨어져 죽었다. 부패한 러시아군의 핵무기를 빼돌린 보스니아 지도자는 '피스메이커(The Peace Maker)'를 자처하며 UN빌딩 폭파를 위해 폭탄을 배낭에 매고 뉴욕에 나타났다. 그러나 걱정마시라! 할리우드엔 조지 클루니와 니콜 키드먼도 있다.
단순히 돈을 노린 테러나 사이코의 광기는 이제 싫증난다. 하여 할리우드는 최근 정치적 이유를 앞세운 테러를 영화의 소재로 삼기 시작했다. 모름지기 수십년째 할리우드 액션영화를 빛내온 유일하고 공통된 스타는 테러리스트였다.
테러의 플롯도 단순하기 그지없다. 여객기 납치 아니면 공공건물 폭파다. 테러의 진원지로는 주로 이슬람 과격파나 탈레반,구러시아 세력,발칸반도,북한 등을 내세웠다.
사실과 가까와야 영화의 긴장감이 높아지니 시나리오 작가들의 자료 조사와 아이디어 회의는 치열하지 않을 수 없다. 11일 미국을 공습한 테러리스트들은 아마도 많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확실한 테러의 공포감을 주기 위해 우선 뉴욕과 워싱턴을 1차 타깃으로 삼았을 것이요, 그 중 세계의 수도 뉴욕에서도 가장 큰 빌딩인 세계무역센터와 미국의 수도 워싱턴 한복판의 펜타곤이나 백악관을 노렸을 것이다. 실패를 대비해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건물들을 겨냥해 여러 지역에서 여객기를 납치해 한꺼번에 자살 테러를 감행하는 치밀한 작전을 펼쳤다. 할리우드 영화 시나리오 작가라도 무릎을 쳤을 충격적인 방법이다.
테러리스트들은 이 비극적인 테러의 시나리오는 영화같지만 결과는 영화같지 않다는 점에서 득의만만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타워링(The Towering Inferno)'의 빌딩이 불타는 동안 사람들을 구해낼 스티브 맥퀸이나 폴 뉴먼이 현실엔 없다. 브루스 윌리스 형사가 아내를 구출할 시간도 없이 쌍둥이 빌딩은 삽시간에 가라앉아버렸으며, 웨슬리 스나입스 형사나 해리슨 포드 대통령이 미국민과 전세계 관객들을 위해 선량한 시민들을 구원할 여유도 없다. '아마게돈'이나 '고질라'처럼 뉴욕의 도심은 어느 누가 어떻게 사망했는지 알 길 없는 혼돈에 빠지고 말았다. 할리우드라면 목숨 걸고 해피엔딩을 지켜냈겠지만 현실에선 아무도 목숨 걸고 희생자들을 구원하지 못했으며 희생자 가족들의 슬픔과 이웃들의 공포감만이 남았다. 누가 테러의 시나리오를 써주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