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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회장님의 카톡에서]
🪮 고수와 하수의 차이
예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소양강댐"을 건설하려고
국내 대표건설사 4곳을 불렀다.
각 건설사는 어떻게 하면 수주를 받을 건지 고민할 때,
한 건설사는 서울 지도를 펼쳐놓고 상습 침수구역 중
"소양강댐이 건설되면 침수되지 않을 지역"을 찾아
그곳의 땅을 싸게 샀다.
어느 누구도 "상습침수구역"이라 거들떠 보지도 않는
땅이었으니 건설사를 투기꾼이라 비난할 필요도 없다.
그 땅이 바로 지금의"강남구 압구정"입니다.
지금도 압구정에는 H건설사 땅이 많이 있고 백화점도 있다.
남들이 댐공사로 돈을 벌려고 치열하게 경쟁할 때
한 단계 더 멀리 본다는 것,
이것이 고수와 하수의 차이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얼음이 녹으면 뭐가 되는지 물었더니,
대부분 학생은 물이 된다고 했는데 한 학생이 대답하길
봄이 온다고 했다.
얼마나 멋지고 감탄스럽고 획기적인 아이디어 인가
우리는 남들보다 한 단계, 한 걸음 더 멀리 보아야 한다.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저도 물이라고 생각했다.
과학시간에 그렇게 배운 사고의 틀을 깨지 못한 것이다.
"임계점"이 뭔지 생소하신 분 들이 있을거다.
물이 끓는 온도가 100도인데 99도까지는
물의 성질이 변하지 않죠.
마지막 1도 이게 있어야 물이 끓고 성질이 변하죠.
고수와 하수의 차이는 1도,
마지막 남은 1도의 차이라고 한다.
많은 수치도 아닌 1도의 차이가
고수와 하수의 차이라는데
고수와 하수의 격차는 엄청나다.
금전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마지막 남은 3고지를
눈앞에 두고 포기하느냐 정복하느냐이다.
쉬운 예가 건강이고 다이어트죠.
조금만 더 운동하고 노력하면 될 거 같은데
1도가 늘 부족하다.
어제도 부족했고 내일도 부족할 거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수이니까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부터는 당신은
임계점을 극복한 고수다.
다이어트든 공부든 승진이든
모든 분야에서 마지막 남은 1도를 극복하시고
기존의 틀을 깨는 사고방식으로 고수가 되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생각의 기적,
생각의 방식에 따라 결과는 천양지차로 달라진다.
북극 에스키모인들에게 냉장고를,
아프리카원주민들에겐 신발을 팔겠다는 엉뚱한 생각,
종종 이런 바보들의 용기가 암담해 보이는
낯선 이 '세계'를 블루오션으로 바꾸죠.
황금알을 무수히 낳는...
옛날,,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 회장을 청와대로 급히 불렀습다.
"달러를 벌 좋은 기회가 왔는데, 못하겠다는 이들이 있다.
임자가 지금 당장 중동에 다녀 오세요.
만약 정회장도 안 된다고 하면 나도 포기하지요.”
정 회장이 물었다.
“무슨 얘깁니까?”
“1973년
석유파동 이후 중동국가들은 달러를 주체 못해
그 돈으로 여러 사회 인프라를 건설하고 싶은데,
너무 더운 나라라 선뜻 해보겠다는 나라가 없는 모양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의사를 타진해 왔습니다.
관리들을 보냈더니, 2주 만에 와서 하는 얘기가
너무 더워 일을 할 수 없고,
건설공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이 없어
공사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당장 떠나겠습니다.”
정 회장은 5일 만에 돌아와 대통령을 만났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하늘이 우리나라를 돕는 것 같습니다.”
“무슨 얘기요?”
“중동은 이 세상에서 건설공사 하기에 최적인 곳입니다."
“뭐요!”
"1년 12달, 거의 비가 오지 않으니
365일 내내 공사를 할 수 있고요.”
“또 뭐요?”
“모래, 자갈이 건설 현장 곳곳에 널려 있으니
자재 조달도 쉽고요.”
“물은?”
"그거야 기름을 우리나라로 싣고 와서 돌아갈 때
유조선에 물을 채워가면...''
“50도나 되는 무더위는?”
"천막을 치고 낮에는 잠자고 공사는 밤에 하면...“
대통령은 부저를 눌러 비서실장을 불렀다.
"이 회사가 중동에 나가는데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하시오!”
정 회장 말대로
한국인은 낮엔 자고 밤에는 횃불을 들고 열심히 일했다.
세계가 놀랐다.
달러가 부족했던 그 시절,
30만 명의 일꾼들이 중동으로 몰려 나갔고,
보잉 747 특별기편으로 달러를 싣고 들어왔다.
그렇게 우리는 제2차 오일 파동을 이기고
중화학공업 육성에 매진할 수 있었다.
돌아보면 이런 사례는 주위에 널려 있다.
한 회사가 신입사원들에게
''나무빗을 스님에게 팔아라.''는 과제를 내줬다.
대부분이 "머리 한 줌 없는 스님에게 어찌?" 라며
낙심한데 반해,
그 중 한 사람이 머리 긁는 용도로 1개를 팔았다.
또 다른 사람은 방문하는 신도들이 머리 단정에 쓰도록
식당이나 휴게실, 화장실 등에 비치용으로 10개를 팔았다.
그런데 한 사람은 무려 1천 개를 팔았는데,
머리를 긁거나 빗는 게 아닌, 전혀 판이한 용도로 팔았다.
그가 찾은 곳은 깊은 골짜기의 한 유명 사찰이었는데,
주지 스님에게 찾아 오는 신도님들께 의미 있는 선물
아이템을 말씀드리겠다며
"빗에 스님의 정성어린 필체로
'적선소'(積善梳:선을 쌓는 빗)라 새겨 드리면
감동어린 선물이 될 것"이라 말했다.
그러자 주지스님은 나무빗 1천 개를 구입했고, 신도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기에,
얼마 후 수 만개의 추가 주문을 받았다고 하지요.
'세상사 다 생각하는 대로..'란 말이 있지요.
생각을 바꾸면 달라진다.
기적이 일어난다.
오늘도 긍정으로, 기쁨과 용기 백배로!
힘차게 앞으로 전진하십시다.
하수가 고수로 ᆢ
임계점을 극복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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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최초 한국인 시장 정흥원.
우리는 이런 지도자가 필요하다.
정흥원(페루이름 마리오정)은 한국에서 봉제공장을 하였고,
가족은 아내와 딸둘,
아들 하나가 있었다.
어느날 딸이 혈관에 구리가 쌓이는 윌쓴씨 병이라는 불치병으로 사망한다.
고통을 잊기위해 지구 정반대의 남미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난다.
그곳에서 터를 잡는가 했는데,
이번에는
아들이 딸과 동일한 병으로 사망한다.
아들과의 추억이 서린 그곳에서 역시 살 수 없어 다음으로 선택한 나라가 페루이다.
그는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안데스 산맥 해발 4818미터를 넘어 차로 10시간 가면
나타나는 작고 소박한 도시 찬차마요시에 정착하였다.
아마존 밀립 초입에 위치하고,
커피, 오렌지, 파인에플 등 열대 작물 경작이 주요 산업이며,
인구가 20만명인 작은 도시였다.
풍경에 반해 이곳으로 이주했지만,
막상 살면서 보니 눈에 걸리는 것이 빈민들의 비참한 생활이었다.
병이 들었는데 돈이 없어 치료 한 번 못 받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그는 이들의 아픔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일찍 죽은 자식들을 생각하며 한 명에게 도움을(수술비) 주니,
소식을 들은 다른 사람도 나도 좀 도와달라고 찾아왔다.
하지만 당장 돈이 없어
빈 손으로 돌려보내야
할 때가 많아 마음이 너무 아팠다.
부지런히 사람들을 위한 일을 하다보니,
찬차마요에서는 그를 '빈민의 대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페루에는 100개 이상의 정당이 있다.
그중 하나인 K정당이 그를
시장후보로 추천한다는 연락을 하였다.
자신은 에스파뇰도 모르고 정치경험도 없고 대기업을 경영한 경험도 없어 거절하였다.
그러나
라디오뉴스에 그 정당에서 자신을 추천했으나 거절했다고 방송하여 그의 시장출마가 대중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길을 나서면 주민들은 그를
시장님,
시장님
그렇게 부르기 시작하여 결국 시장후보로 출마하였다.
그 때 부터 수많은 지지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그를 지지하였고,
결국 34.8%로, 3선의 기존 시장 후보를 2배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는 온힘을 다해 시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정수처리장을 한국 서울시의 후원으로 건설하여 깨끗한 물을 공급하고,
한국 코이카의 도움으로 병원을 건설하게 하였다.
그리고
250만불을 페루 정부로부터 확보하여 수십년간의 숙원사업이던 도시 첫 번째 실내체육관을 건축해주었다.
학교에는 운동장과 놀이터 그리고 최신 칠판등을 사비를 털어 지원하였다.
주변에 아마존살림지대라 마약이 많은데 아이들이 할 일이 없으면
마약에 물들 것을 염려하여 건전한 놀이 시설을 확충해 준 것이다.
시장인
그에게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병원비가 없어서 온 사람, 농사를 하려고 기계를 돌려야 하는데 기름값이 없어서 온 사람,
배가 고파 온 사람등등이다.
그는
최대한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지도자가 제대로 서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풍요로워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그가
학교로 들어서면 아이들이 태극기를 들고 몰려와 안기며 반가워한다.
도시마다 벽에는 그의 페루 이름 마리오정을 적고 그를 응원한다.
고지대의 농민들이 늦은 도로공사와 질병문제로 커피농사를 망치고
시청으로 몰려와 시위를 하면 수많은 농민들에게 먼저 사과를 하고,
그는
그들에게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하고 반드시 지킨다.
그는 문제를 해결할 약속을 하고 다음날 바로 커피재배지로 가서 모든 문제를 파악한다.
피해액수를 보충한 정부 예산을 가져오고, 농민들의 수익을 증대하려고
한국의 기업과 직거래로 커피수출을 이룩하여 농가에 커다란 이익을 남겨주기도 하였다.
시민들은 어디를 가거나 한국인 시장 마리오정을 칭송한다.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 같은 존재이다.
정직하고 겸손한 우리들의 듬직한 친구이다.”
“그는 함께 여행할 때,
먹을 것을 우리에게 먼저 주었다.
부족하면 자신은 안먹고 남들을 먼저 챙겨주었다.”
“시장님은 늘 가난한 자,
아동, 교육복지에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시장님은
단점이 없습니다.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임기를 마치고 시민으로 돌아가면 생(生)을 다할 때까지 여기서 우리와 사실 것입니다.”
부산MBC가 찬찬마요시를 방문하여 인터뷰할 때 정흥원 시장은 신장암에 걸려있었다.
주변에선
그 누구도 모르는 사실이다.
한국으로 돌아가 좋은 의료시설에서 치료받으면 좋으련만
모든 급여를 빈민들에게 기부하고 있는 그에게 치료비는 커다란 부담이다.
또한
매일같이 밀려드는 찬차마요시의 민원을 위해 헌신하느라 그에게는 치료받을 짬도 없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의 끝에서 만난 찬찬마요
이곳에서
그는
수많은 가족을 얻었다.
새로운 가족인 그들은 암에 걸린 자신의 아픔조차 잊게 만든다.
독립기념일 다음날
드디어
최초의 실내체육관 개관식이 있었다.
페루국기와 더불어 태극기 물결을 이루고 여기저기 ‘안녕하세요’라는 한국인사가 들렸다.
한국의 전통 부채춤이 식전 공연에 체육관 한가운데서 펼쳐진다.
어쩌면 머지않아
다가올 자신의 삶의 작별행사처럼도 보였다.
그의 이름은 페루 최초의 한국인 정흥원 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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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다방이야기
나이 육칠십대 사람 치고 옛날 다방에 잊지 못할 추억이 한 자리 없는 사람 있을까?
당시의 다방에는 낭만도 있었고, 남자의 자존심도 있었고
, 사랑도 있었고, 눈물 쏟아내는 이별의 장이기도 했었다.
가끔 열리는 국가대표 축구경기의 단체 관람장이기도 했으니, 그 당시 다방은 ‘한국적 명물’로 어른들의 사랑방, 대학생의 만남방, 직장인의 휴식 공간, 동네 한량들의 아지트였으며 데이트와 맞선 공간, 가짜 시계 등이 거래되는 상거래 공간, 음악감상 공간 등 '거리의 휴게실’이자 만남의 장소 역할을 톡톡히 했다.
젊은 청춘을 위한 시내 중심가를 벗어난 다방은 카운터에 중년 여성인 ‘마담’이 앉아 있고 ‘레지’(영어로 lady)라고 불리는 젊고 예쁜 아가씨들이 커피를 날라주는 동안에 구슬픈 뽕짝가락이 손님들의 가슴을 저윽히 적셔주는 그런 형태였다.
그 당시 사람치고 시골 읍내는 말할 것도 없고, 시내 중앙통에 있는 다방의 마담이나 레지와의 사연 하나 없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려고 주막에서 세련된 다방으로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방에 들어서면 낮 익은 마담과 레지가 경쟁하듯 환하게 맞아줬고, 손님이 자리에 앉으면 어김없이 옆자리에 살포시 앉으면서 속보이는 아양을 떨었다.
손님들은 오랜만에 만난 친정 오빠보다 더 정겹게 팔짱을 끼며 애교까지 부리는 그 분위기를 우쭐하며 즐겼으니.
"커피 한잔 가져와" 하는 손님의 주문이 떨어지자 마자 "저도 한잔하면 안될까요?"가 곧바로 이어졌고, 그 상황에서 "NO!"는 존재하지 않았다.
70년대 후반들어 야쿠르트로 바뀌기도 했지만, 요즘이야 맹숭커피 한잔에도 돼지 국밥 한 그릇 값을 지불하지만, 그 당시 커피 한잔은 실없는 농담에 가벼운 신체접촉 권한(?)까지 주었으니 참으로 옹골진 값어치였던 셈이다.
분위기가 넘어왔다 싶으면 마담이나 레지의 "우리 쌍화차 한잔 더하면 안될까요?"라는 비싼 차 주문이 발사되고 여기에도 "NO!"는 거의 없었다.
그 시절 그렇게 분위기가 익어가는 것이 뭇 사내들의 멋이었고 낭만이기도 했지만, 마담이나 레지에게는 매출을 올려 주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인사고과였으니, 그런 손님과 레지의 의기투합(?)은 나중에 티켓다방으로 발전하기도 했지만, 그 당시 인기 레지는 거의 연예인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어느 다방에 멋진 레지가 새로 왔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 다방에는 한동안 문전 성시를 이루곤 했는데, 레지가 인기를 누렸던 현상은 그 시대를 대변하는 특이한 풍경이기도 했다.
6~70년대의 다방에서는 커피라고는 한 종류만 있었기에 손님들은 그냥 ‘커피’를 주문하면 되었다.
다방이 아닌 요즘의 커피전문점 ‘카페’에서 커피 메뉴판을 보면 커피 종류가 다양하고 하나같이 그 이름이 복잡하고 어렵다.
다방에서 Café로 세월따라 이름도 변해감에, 한때 옛날 다방을 주름잡던 청춘에게 나이만큼 서글픔이 몰려온다.
한잔의 커피에는 반드시 꽃향기가 있으므로 꽃향기가 풍성한 커피가 좋은 커피라고들 한다.
그러나 요즘의 다양해진 커피 맛과 향이 옛날 다방의 낭만적인 커피 맛보다 더 낫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모닝 커피라며 족보에도 없는 계란 노른자까지 곁들였으니, 커피를 한잔하고 마담과 레지의 환송을 받으며 다방문 나설 때의 우쭐해지던 커피 맛 외의 또 다른 그 맛을 요즘 사람들이 알 수 있을까?
영화도 흘러간 영화가 정겹고 가슴에 와 닿듯이 커피도 옛날 다방의 커피 맛이 한결 감미롭게 느껴진다.
나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요즘 아이돌 노래들을, 요즘 젊은이들이 내 나이 되었을 때 청춘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는 방탄소년단 노래가 참 좋았는데” 라고 할까 하는 의문도 가져본다.
허긴 우리 부모님도 남인수 고복수 노래만이 노래였고 김추자, 송창식 노래는 소음일 뿐이었겠지만. 양장을 걸치고 카운터에서 무게 잡던 김 마담과 미니스커트 입고 아양 떨던 미스 박이라는 레지는 지금쯤 뭘하고 있을까 ?
그들도 그 시절을 그리고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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