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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7 년 경부터 약 5 년에 걸쳐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대재앙이었습니다.
이 질병으로 초기 2 년여 동안에만 유럽 인구의 1/3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당시도 그랬을 겁니다.
이거 사람 살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말세다. 말세에 뭐가 온다..
그런데 온 것은 흑사병이었고, 흑사병은 인간 살이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흑사병의 창궐과 이로 인한 인구의 격감은, 유럽에 가히 개벽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실망스러운 교회와 통치는 절대 권위가 무너지고, 이는 종교개혁의 단초가 되었으며..
농노가 죽거나 도망가니 봉건 제도가 무너지고,
개인주의가 싹트고 상업이 활발해져서 자본주의의 태동을 알렸습니다.
흑사병은 중세 유럽의 개벽이었습니다.
중세에 개벽을 가져오는 데에 필요한 것은 혜성같이 크고 대단한 것도 아니었고
아주 조그만 미생물 이었습니다.
이하 중세 유럽의 상태 참조.
14세기 유럽인들은 자기들을 죽음으로 내 모는 질병에 대해서는 아는바 없다고 했지만 고통의 주된 원인에 대해서는
분명한 해답을 갖고 있었다. 당대의 사람들은 이 페스트는 전능자가 내리는 시련이며,
그 시대의 사악성에 대한 보복이라고 믿었다.
14세기에는 연옥설이 유포되고 있었고, 단테의 <신곡>을 통해 연옥과 지옥의 생생한 모습을 연상하고 있었다.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죽음은 지옥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했고, 사후에도 누군가의 중재로 연옥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질병에 대해서 놀라울 정도로 체념했다.
누가 감히 신의 징계를 거역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종교적 태도는 병에 대한 저항 의지를 앗아갔다.
결과적으로 이 병이 널리 확산되도록 부채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필립 지글러(Philip Ziegler)는 그의 <흑사병>
(The Black Death)에서 “역병이 확산되는데 있어서 이 종교적 신념보다 더 적절한 환경을 조성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 썼다. 이와 함께 유럽인들은 거듭된 흉작과 인구 증가로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고, 영양부족으로 병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흑사병이 유럽에 도래했을 때 저항할 힘조차 없는 이들이 그 병을 맞았다는 점이다.
중세 유럽을 완전히 뒤집어놓은 흑사병
흑사병의 창궐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치료법을 알지 못했던 이들의 최선의 대책은 격리와 도피였다.
감염된 환자는 격리시키고, 그들로부터 가능한 멀리 도피하는 것이었다.
부유한 이들은 재산을 버리고 멀리 보다 안전한 곳으로 도망을 갔다.
가축들은 돌보는 이 없이 떠돌아 다녔다. 때로 부모는 자식을 버렸고, 자식은 병든 부모를 내다버렸다.
아내는 남편을 버리고, 남편은 병든 아내를 멀리했으나 누구도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죽음을 앞둔 이들은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다. 옛정이나 돈으로도 죽은 자를 묻을 자가 없었다.
감염의 위험 때문에 그 누구도 가까이 접근하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병자들과 신체적 접촉만이 아니라 옷에 닿는 것도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서로들 얼굴을 맞대고 쳐다보는 것조차도 무서워했다. 하지만 문제는 격리와 도피도 퍼져가는 역병을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피렌체 사람들은 개와 고양이가 병원균을 옮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와 고양이는 닥치는 대로 죽여 없앴다.
병에 대한 무지는 도리어 병의 전염을 가중시켰다. 죽은 가축들이 실제로 페스트의 확산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죽은 개들과 고양이들은 쥐가 활개 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고, 도리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사망자가 늘어나자 신의 도움을 구했다. 설사 죽더라도 천국의 보상을 갈망했다.
이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교회에 바침으로 보상과 위안을 얻고자 했다. 또 다른 치병의 노력은 고행(苦行)이었다.
이 질병이 신이 내린 형벌이라고 여긴 이들은 자기 몸에 채찍질함으로서 신의 진노를 가라앉히려고 했다.
일종의 보상 심리였다. 이들은 최소한 낮에 두 번, 밤에 한 번씩 벗은 자신의 몸에 채찍을 가했다.
스스로 고통을 느낌으로서 신의 노여움을 해소해고자 했던 것이다.
이들이 ‘채찍질 고행단’인데, 흑사병이 유행하는 기간 그 수행자가 가장 많았다. 이들의 수는 약 80만 명에 달했다.
헤르포르트는 이렇게 썼다.
채찍은 일종의 막대기였으며, 커다란 매듭이 있는 세 개의 줄이 달려 있었다.
매듭에는 바늘처럼 날카로운 쇠붙이 징이 박혀 있었는데, 그 길이가 밀의 낟알 정도였다.
그들은 이러한 채찍으로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때렸다. 그 결과 몸이 부어오르고 시퍼래졌으며 피가 땅에 흐르면서
이런 일이 행해지는 교회 벽에까지 튀었다. 그들이 너무 세게 채찍질하는 바람에 징이 살에 막혀서 렌치로 빼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영국의 레프(G. Leff)는 <후기 중세의 이단>(Heresy in the Middle Ages)에서 “채찍질 의식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 감정을 분출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방법 중의 하나였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채찍질 의식도 심리적 효과는 있었으나 이 질병으로부터 자유하지는 못했다.
이런 공포의 괴질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서 교황 클레멘트 6세(Clement, VI)는 1350년을 성년(聖年)으로 선포했다.
성년이란 가톨릭에서 특별히 기념할 일이 생겼을 때 교황이 선포하는 행사년을 의미하는데,
1300년에 제정된 가톨릭교회의 신앙 상 대사면년(大赦免年)에서 시작되었다.
이 때 교황은 로마를 순례하는 자는 연옥을 통과할 필요 없이 바로 낙원으로 가게 된다고 선언했다.
무모한 교황의 선언 또한 병의 확산에 기여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불안 속에서 약 100만의 인파가 로마로의 여행에 참여하였고 괴질은 더욱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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