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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에 있어야 할 두충과 청백색 반석
조선왕조실록 검색어 해운대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동래현
지리지 / 경상도 / 경주부 / 동래현
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6001_008
동래현(東萊縣)
판현사(判縣事) 1인.
본디 거칠산군(居漆山郡)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 무오년에 울주(蔚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현령(縣令)을 두었는데, 본조 태조 6년 정축에 비로소 병마사 겸 판현사(兵馬使兼判縣事)를 두었다가, 금상(今上) 5년 계묘에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이름을 바꾸었다. 【4품이면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라 일컫는다. 】 속현(屬縣)이 1이니, 동평현(東平縣)이다. 본래 대증현(大甑縣)인데,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동래군(東萊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 무오년에 양주(梁州) 임내(任內)에 붙였는데, 본조 태종 5년 을유년에 〈본현에〉 내속(來屬)시켰다가, 기축년에 다시 양주(梁州)로 붙였고, 금상(今上) 10년 무신에 도로 본현(本縣)으로 붙였다. 부곡(部曲)이 2이니, 고지도(古智道)와 조정(調井)이며, 향(鄕)이 1이니, 생천(生川)이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기장(機張)에 이르기 15리, 서쪽으로 양산(梁山)에 이르기 32 리, 남쪽으로 대해(大海)에 이르기 19리, 북쪽으로 양산(梁山)에 이르기 22리이다.
본현(本縣)의 호수는 2백 90호, 인구가 1천 1백 51명, 동평(東平)의 호수는 1백 8호, 인구가 3백 42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1명, 진군(鎭軍)이 71명, 선군(船軍)이 1백 30명이다.
본현(本縣)의 토성(土姓)이 5이니, 정(鄭)·송(宋)·옥(玉)·정(丁)·조(曺)이요, 내성(來姓)이 3이니, 왕(王)·박(朴)·이(李)이며, 속성(續姓)이 1이니, 김(金)이다. 【김해에서 와서 지금 향리가 되었다. 】 동평(東平)의 성이 1이니, 이(李)이요, 인물은 학사(學士) 정서(鄭敍)이니, 자는 과정(過庭)이다. 【고려 의종(毅宗) 때 사람이다. 】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1천 7백 23결이다. 【논이 8분의 5가 못된다. 】 토의(土宜)는 벼·조·보리이며, 토공(土貢)은 가는 대[篠]·왕대[簜]·종이·지초(芝草)·표고버섯·귤·석류·비자(榧子)·오해조(吾海曹)·미역·우모(牛毛)·세모(細毛)·김[海衣)·조곽(早藿)·청각(靑角)·해삼·건합(乾哈)·생포(生鮑)·모래무지[沙魚]·대구어(大口魚)·청어(靑魚)·방어(舫魚)·어교(魚膠)·여우가죽·삵가죽·노루가죽·사슴가죽·점찰피(占察皮)·어피(魚皮)이요, 약재(藥材)는 방풍(防風)·천문동(天門冬)·맥문동(麥門冬)·녹용(鹿茸)·오징어뼈[烏魚骨]·후박(厚朴)이다. 염소(鹽所)가 3이니, 2는 현(縣) 동쪽에 있고, 1은 현(縣) 남쪽에 있다.
읍 석성(邑石城) 【둘레가 3백 97보이며, 안에 우물 다섯이 있다. 】 동평현(東平縣) 석성(石城) 【둘레가 2백 64보이며, 안에 샘이 하나, 못이 넷 있다. 】 온천(溫泉) 【현 북쪽 2리에 있는데, 욕실(浴室)·청(廳)·방(房)·부엌·마구(馬廐) 등이 있다. 】 해운대(海雲臺) 【현 동쪽 바닷가에 있으니, 최치원(崔致遠)이 놀던 곳이다. 장자 터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동백나무와 두충(杜沖)나무가 그 곁에 빽빽하게 우거져 있다. 】 역(驛)이 2이니, 성산(省山)과 신역(新驛)이요, 목장이 2이니, 1은 동평현 남쪽 22리 되는 오해야항(吾海也項)에 있고, 【둘레가 74리 30보인데, 안에 축장(築場)한 곳이 12리 90보이다. 나무가 성(盛)하고 풀이 적으나, 다만 물이 풍족하여 국마(國馬) 4백 80필을 놓아 먹인다. 】 1은 현 남쪽 석포(石浦)에 있다. 【국마 4백 19필을 놓아 먹인다. 】 좌도 수군 도안무처치사 본영(左道水軍都按撫處置使本營) 【동평현 남쪽 7리 되는 부산포(富山浦)에 있다. 】 해운포(海雲浦) 【현 동쪽 9리에 있다. 】 다대포(多大浦) 【동평현 남쪽 30리에 있다. 모든 수군 만호(水軍萬戶)가 있어, 수어(守禦)한다. 】 봉화가 3곳이니, 동평 석성(東平石城) 봉화는 현 남쪽에 있다. 【서쪽으로 김해(金海) 성화야(省火也) 봉화에 응하고, 동쪽으로 본현(本縣)의 황령산(黃嶺山)에 응한다. 】 황령산(黃嶺山)과 【동쪽으로 본현의 간비오(干飛烏)에 응한다. 】 간비오(干飛烏) 【동쪽으로 기장현(機張縣) 남산(南山)에 응한다. 】 이다.
금정산 석정(金井山石井) 【현 서북쪽 산정(山頂)에 있다. 높이가 세 길 가량 되는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여 척, 깊이가 7촌 가량인데, 물이 항상 가득히 차 있어서, 비록 가물지라도, 마르지 아니하고 빛이 황금과 같다. 그 밑에 범어사(梵魚寺)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예전에 금빛 고기[金色魚]가 오색 구름을 타고, 범천(梵天)으로부터 내려와서, 그 가운데서 헤엄쳐 놀았으므로, 이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 고지도거(古智島阹) 【현 동쪽에 있다. 】 절영도(絶影島)·모등변도(毛等邊島) 【모두 동평현 남쪽에 있다. 모두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 】
태백산사고본】 54책 150권 9장 B면【국편영인본】 5책 640면
세조실록 6권, 세조 3년 1월 16일 신사 4번째기사 1457년 명 천순(天順) 1년
하삼도 도순찰사 박강 등에게 행해야 할 일들의 조목을 아뢰게 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301016_004
1. 동래(東萊)·웅천(熊川) 등의 진(鎭)은 왜인(倭人)이 항시 거처하는 곳이니, 이런 까닭으로 수령(守令)을 모두 무인(武人)으로써 임명하여 내려 보냈으므로, 접대하는 사의(事宜)를 많이 잃어서 분원(忿怨)을 초래하였으니, 대체(大體)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또 수령이 사고가 있으면 객인(客人)을 낱낱이 계산하고 선척(船隻)을 자로 재는 등류의 일은 오로지 만호(萬戶) 및 감고(監考)·통사(通事) 등에게 위임하고 있으니, 더욱 미편(未便)합니다. 지금 기장현(機張縣)을 혁파하여 동래에 합속(合屬)시키고, 창원(昌原)의 사현 북면(私峴北面)과 안민역(安民驛) 등의 지역으로써 분할하여 웅천현(熊川縣)에 소속시키고, 청컨대 동래와 웅천에는 모두 판관(判官)을 더 설치하여 사무를 알고 숙달(熟達)한 인원(人員)으로써 임명하여 내려보내게 하소서.
1. 해운포(海雲浦)는 동래진(東萊鎭)과의 상거가 9리(里)이고, 부산포(富山浦)와의 상거는 15리(里)이므로 수륙(水陸)의 방수(防戍)하는 곳이 멀지 않으니, 지금 해운포를 혁파시키고, 본포(本浦)100) 해운대(海雲臺)의 북쪽 부근 산기슭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동래진의 군사 50명으로써 수호하게 하소서.
선조실록 121권, 선조 33년 1월 28일 계유 3번째기사 1600년 명 만력(萬曆) 28년
좌의정 이항복이 왜적의 침입에 대한 방비책을 논하는 차자를 올리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301028_003
그러나 대마도서 부산에 닿을 경우 정동풍을 만나기만 하면 한번 돛을 올려서 금방 도착하게 됩니다. 부산에서 대세(大勢)로 여겨 의지하고 있는 것은 우수영뿐인데 수영과 대마도는 향배(向背)의 형세가 다르기 때문에 바람의 역순(逆順)도 이에 따라 구별됩니다. 왜적이 순풍을 타고 부산을 향하게 되면 수영 쪽에서는 역풍이 되는데 더구나 몰운대(沒雲臺)·해운대(海雲臺) 아래에는 파도가 높고 물결이 사나와 배를 운행하기가 불편하여 갑자기 급한 일을 당하게 될 경우 서로 구제하기가 어렵습니다. 형세가 이러하기 때문에 지금 적의 계책을 헤아려 보건대, 그들이 작은 숫자로 산만하게 흩어져 있을 경우는 그 의도가 사세를 엿보아 출몰하면서 노략질하는 데 있으니, 호남(湖南)이 우려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대군(大軍)을 이끌고 평탄한 길을 따라 올 경우에는 그 의도가 공격 함몰시키는 데 있는 것이니, 영남(嶺南)이야말로 적을 맞는 문호(門戶)가 되는 것입니다.
현종실록 21권, 현종 14년 5월 14일 계미 1번째기사 1673년 청 강희(康熙) 12년
해운대 동변에서 반석이 바다에서 굴러나오다
http://sillok.history.go.kr/id/kra_11405014_001
동래부 동면 해운대 동변에 큰 반석 하나가 있는데, 바다 가운데서 굴러나와 바닷가 기울어진 돌 위에 걸쳐져 있었다. 돌의 너비가 4척, 길이가 5척, 높이가 2척 반이었고, 사방의 둘레가 12척으로, 빛깔은 청백색이었다. 그런데 그 반은 흙에 묻혀 있던 흔적이 있고 그 반은 물에 닳은 형상이 있었다. 일이 변이에 관계되므로 도신이 보고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38면【분류】 과학-지학(地學)
현종실록 21권, 현종 14년 7월 14일 신사 2번째기사 1673년 청 강희(康熙) 12년
경상도에 가뭄이 심하게 들다
http://sillok.history.go.kr/id/kra_11407014_002
경상도(慶尙道)에 가뭄이 너무 혹심하였다. 동래(東萊)의 해운대(海雲臺)에 해석(海石)이 굴러 나왔던 곳에서 또 작은 돌 하나가 나와서 여러 돌 속에 기대어져 있다고 도신(道臣)이 보고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43면【분류】 과학-지학(地學)
현종개수실록 27권, 현종 14년 5월 13일 임오 2번째 기사 1673년 청 강희(康熙) 12년
동래 해운대 동쪽에 큰 바위가 바다에 떨어지다
http://sillok.history.go.kr/id/krb_11405013_002
동래(東萊) 해운대(海雲臺) 동쪽에 큰 바위가 바다에서부터 굴러 나와 바닷가 높은 바위 위에 놓여 졌는데, 넓이 4척(尺) 길이 5척 높이 2척 5촌(寸)이었으며 청백색이었다. 절반은 흙에 묻힌 흔적이 있고 절반은 물에 닳은 형상이었는데 도신(道臣)이 보고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3장 B면 【국편영인본】 38책 146면 【분류】과학-지학(地學)
현종개수실록 27권, 현종 14년 7월 14일 신사 2번째기사 1673년 청 강희(康熙) 12년
경상도에 큰 가뭄이 들다
http://sillok.history.go.kr/id/krb_11407014_002
경상도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동래(東萊) 해운대(海雲臺)에 전일 바다 암석이 굴러 나온 곳에서 또 작은 돌이 나와 여러 바위 가운데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다고 도신(道臣)이 보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153면 【분류】 과학-천기(天氣)
두충(杜沖)은 언제 재배 되었나?
http://m.cafe.daum.net/coreahistech/L00c/144
“두충(杜沖)에 대한 역대의 문헌 기록을 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8권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토산조에서 두충(杜沖)이 제주 지역에서 산출된다고 기록되어 있고,
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경주부 양산군편에 두충(杜沖)이 산출 된다고 기록되어 있고,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산천의 형승(形勝)편을 보면,
○ 동래의 해운대(海雲臺) : 현(縣)의 동쪽 18리에 있다. 산기슭이 바다에 들어가서 누에고치의 머리와 같다. 그 위는 모두 동백(冬柏)과 두충(杜沖)으로 덮여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경희 한의대 교수 안덕균씨는 "두충(杜沖)이라는 것은 원산지가 중국이고 우리나라에 심기 시작한 것은 100년정도 되고
본격적으로 재배된 것은 한 삼십년 정도 된다."라고 말 합니다. (주)계림조경자재 라는 사이트에서 조경관련 뉴스에서 "환경조경신문"의 기사를 싣고 있는데
이 기사에서 국내에 식재된 모든 두충(杜沖)나무의 모수 2본이 1920년대 중국에서 도입된 이래로 홍릉수목원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황당한 사실 입니다. 역사의 기록에서는 조선에서 두충(杜沖)나무가 산출 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경희 한의대 교수 안덕균씨는 두충(杜沖)의 전래가 100년 정도라 말하고
있고,"환경조경신문"에서는 1920년대 중국에서 도입된 두충(杜沖)나무의 모수 2본이 홍릉수목원에 있다고 말하고 있고, 이 모수 2본이 전국에 식재된 두충 나무의 근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백과사전적 지식으로 볼때 두충의 원산지는 중국이라 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에서는 조선에서 두충(杜沖)나무가 산출되므로 조선이 중국임을 알 수 있는 기록이며 두충이 한반도에 식재된 그 시원을 볼때 이는 한반도 조선의 그 허구성을 극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해운대에 있어야 할 반석!
바다 가운데서 굴러 나와 바닷가 기울어진 돌 위에 걸쳐져 있는 넓이 4척(尺) 길이 5척 높이 2척 5촌(寸) 청백색 반석은 어디에 있는가?
현종실록 21권, 현종 14년 5월 14일 계미 1번째기사 1673년 청 강희(康熙) 12년
동래부 동면 해운대 동변에 큰 반석 하나가 있는데, 바다 가운데서 굴러 나와 바닷가 기울어진 돌 위에 걸쳐져 있었다. 돌의 너비가 4척, 길이가 5척, 높이가 2척 반이었고, 사방의 둘레가 12척으로, 빛깔은 청백색이었다. 그런데 그 반은 흙에 묻혀 있던 흔적이 있고 그 반은 물에 닳은 형상이 있었다.
현종실록 21권, 현종 14년 7월 14일 신사 2번째기사 1673년 청 강희(康熙) 12년
동래(東萊)의 해운대(海雲臺)에 해석(海石)이 굴러 나왔던 곳에서 또 작은 돌 하나가 나와서 여러 돌 속에 기대어져 있다고 도신(道臣)이 보고하였다.
현종개수실록 27권, 현종 14년 5월 13일 임오 2번째 기사 1673년 청 강희(康熙) 12년
동래(東萊) 해운대(海雲臺) 동쪽에 큰 바위가 바다에서부터 굴러 나와 바닷가 높은 바위 위에 놓여 졌는데, 넓이 4척(尺) 길이 5척 높이 2척 5촌(寸)이었으며 청백색이었다. 절반은 흙에 묻힌 흔적이 있고 절반은 물에 닳은 형상이었는데 도신(道臣)이 보고하였다.
현종개수실록 27권, 현종 14년 7월 14일 신사 2번째기사 1673년 청 강희(康熙) 12년
경상도에 큰 가뭄이 들다
경상도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동래(東萊) 해운대(海雲臺)에 전일 바다 암석이 굴러 나온 곳에서 또 작은 돌이 나와 여러 바위 가운데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다고 도신(道臣)이 보고 하였다.
현재의 동평호, 동평현의 위치
대청여지도 大清舆地图에 나오는 동평주(東平州)
김진경 선생의 신라강역 변화
http://cafe.daum.net/asiahistoryreserch/DHst/231
[그림 2] 신라 건국초기(서기전 252년경)
[그림 3] 신라·백제 쟁투기(1~5세기)
[그림 4] 신라 중흥기(532년경)
[그림 5] 신라 나당연합기(7세기 전반)
[그림 6] 신라 후기(7세기 후반 이후)
신라는 김진경 선생의 연구에 의하면 대륙 동해안에 위치한 나라였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동평현-동평호가 있는 지역으로 최치원 선생이 한반도가 아닌 이곳에 있던 해운대에서 노셨던 곳이라고 해야 합리적인 해석이 된다!
해운대 동변에는 바다 가운데서 굴러 나와 바닷가 기울어진 돌 위에 걸쳐져 있는 너비가 4척, 길이가 5척, 높이가 2척 반이었고, 사방의 둘레가 12척인 큰 청백색 반석이 있는 곳이다.
지금 해운대에 청백색 반석이 있는가?
그리고 두충으로 덮혀 있는가?
첫댓글 좋은정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