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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十六 章. 재자(弟子), 억지로 얻은 제자
( 一 )
둥그런 인공 연못은 얼음이 녹으며 혼탁한 물을 드러냈다.
여름이 되면 연꽃이 피어날 곳에 차디찬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
다. 미독환사 전유는 전신이 굵은 밧줄에 묶인 채 정자 한가운
데 내동댕이 쳐졌다.
대문파의 장로들과 손속을 나눠도 지지 않을 실력이라고 자부
했는데, 독이라면 당문 십절과 비슷한 수준이 아닐까 하는 생
각도 해봤는데...너무 어이없이 당하고 말았다.
정체를 알수없는 가면인들은 항거할 수 없는 독으로 다가왔다.
천하절독일 것 같은 백랑독이 무너졌다. 그것도 너무나 간단하
게.
미독환사가 이들에게 잡히는 데는 채 일 각이 걸리지 않았다.
아미파를 떠나 단비하의 뒤를 추적하던 중 나타난 가면인 팔
인. 그들의 실력이야 무산에서 견식한 바가 있지만 그때와는
사정이 달랐다.
무산파가 지니게 된 천하절독 백랑독이 있기에 충분한 승산을
가졌다. 그런데...
"끄응!"
손의 자유를 잃은 미독환사는 전신을 욱씬 쑤셔 오는 통증을
참으며 두 발을 사용해 기다시피 일어났다.
갈색 장포를 입은 훤칠한 사람이 보였다.
그는 얼굴에 은색 가면을 쓰고 찬바람만 썰렁하게 불어오는 호
면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전유, 오랜만이다."
미독환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건넬 사람은 흔치 않았다.
"나를 몰라 보겠나?"
"누구시오?"
"허허허! 세월이 참 많이 지났지..."
은색 가면인은 세월을 이야기했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가 귀에
익은 듯도 했다. 정확히 기억되지는 않지만 한 번쯤은 만났던
것 같은 사람이었다.
기억을 되살려 자신에게 원한이 있을 만한 사람을 유추해 보려
했다. 그러나 쉽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산파파의 선덕(善德)이 오히려 악영향을 가져 와 무산에 칩
거하기 거의 평생. 그의 손에 죽어 간 무림인이래야 열 손가
락을 넘지 않았으니 원수진 사람을 찾아 낸다는 게 어렵지 않
았는데도 가면인은 떠오르지 않았다.
"자네는 그대로구먼. 나이를 먹어 주름이 는 것을 빼면."
"나를 아시오?"
"허허허...!"
은색 가면인은 등을 돌려 미독환사를 마주보았다.
"무산파파가 골치야. 내가 무산파를 멸문시키지 않은 이유를
아직도 모르고 있다니 무산파도 제법 세를 형성했고 그만하면
먹고 살기에 충분하지 않나?"
미독환사의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무산파를 멸문시켜? 미친놈 볍씨 까먹는 소리. 무산파가 그리
호락호락 당할 문파인가. 하지만 제갈문이 들어와 문파를 재건
하기 이전의 상태라면...
"자네가 나를 도와줘야겠어. 무산파파를 만나서 무산으로 돌아
가라고 해. 홍아도 죽이고 싶지 않고...허허허! 정태구는 아직
도 어린아이처럼 철이 없더군. 그 비린내 나는 뱀 떼에 질리지
도 않는지...미독환사 전유...하루 이틀 걸린 일이 아냐. 내
평생을 통해 이룩하고 싶었던 꿈이 결실을 맺으려 해. 만약 지
금 방해를 한다면...허허허! 방해라는 표현은 좀 유치하군. 누
구든 내 앞길을 막아 선다면 죽일 거야."
미독환사는 머리털이 곤두서는 공포를 실감했다. 은색 가면인
외 말한마디 한마디에 피와 죽음의 냄새가 풍겼다. 살기가 너
무 진했다. 미독환사의 전신은 두려움으로 팽팽히 긴장되었고
가슴은 세차게 방망이질 쳤다.
"다, 당신은 누구요?"
"허허허!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걱정 말게. 자네를 여기 데려
온 이상 모습을 보여 줄 테니까."
은색 복면인은 다시 인공 연못을 바라보았다.
그의 등은 굳건했다. 험한 풍파를 꿋꿋이 견뎌 온 듯 그의 등
에는 연륜과 인내가 농축되어 절절이 흘러나왔다.
'강자(强者)다. 무림에 이런 인물이 있었다니, 백랑독을 소멸
시켜 버린 독...아아! 당문이 문제가 아니다. 자칫하면 사천
무림 전체가 몰살하고 만다. 백랑독을 소멸시킨 독이라면 충분
히 가능하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관통하는 전율.
복면인들이 사용하는 독은 무서웠다. 과거 무산에서 사망산검
과 무산파파를 중독시킨 독도 무서웠지만 지금 사용하는 독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었다.
독분과 독분이 부딪치는 순간 백랑독은 허무하게 소멸되었다.
복면인들이 사용하는 독에 의해 타버린 것이다. 적어도 백랑독
에 비해 다섯 배 이상의 독성을 지닌 절독이었다.
무공으로는 상대도 될 것 같지 않은 팔인이 펼친 독술.
만약 그런 독이 무림에 출현한다면...두말할 것도 없이 피바람
이 몰아칠 것이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당문이나 무산파가 제
일 첫 번째 멸문 대상이 될 것은 명확관화(明若觀火)한 일이었
다.
"삼점(三點) 부름받고 왔습니다."
흑색 가면을 쓴 사람이 정자로 올라섰다.
미독환사가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또 다른 강자의 등장이었다.
어디서 이런 고수들이 쏟아져 나오는지...쩍 벌어진 어깨, 창
검도 들어갈 것 같지 않은 단단한 근육, 날렵하면서도 부드러
운 몸돌림, 태양혈(太陽穴)은 툭 불거졌고 눈에서는 예리한 신
광이 쏟아져 나왔다.
"당철휘는 처리했느냐?"
"처리 중입니다. 지금 죽지도 살지도 못할 지옥을 경험하고 있
습니다. 오대고문(五大拷問)을 두루 견식시킨 다음 기해혈(氣
海穴)을 파괴하고 사지의 힘줄을 절단 할 생각입니다."
"너무 약하지 않나?"
"후후후! 아닙니다. 이미 거세(去勢)를 시켰습니다. 그것만으
로도 삶의 희망을 잃기에는 충분합니다."
"얼굴도 짓이겨라. 인간으로 돌려보내면 안 된다. 동물...돼지
처럼 주인이 주는 쓰레기 음식을 먹으며 연명하는 그런 동물로
만들어라. 절대 자결하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 죽고 싶어도 죽
지 못하도록...알겠느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미독환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자 구역질이 올라왔다.
당철휘라면 무산파와 원한이 있는 독사(毒蛇)였다. 그는 어차
피 죽여야 할 사람이고 죽어야 마땅한 놈이지만 방법이 너무
잔인했다.
인간의 심성을 지닌 사람들이 그렇게 독한 방법을 쓰다니.
"너를 여기 부른 것은...우선 미독환사와 회포나 풀어라."
은색 가면인의 말이 떨어지자 흑색 가면인은 걸음을 옮겨 미독
환사의 전면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이군요."
"당신도 나를 안단 말이오?"
흑색 가면인은 회한이 일렁이는 복잡한 시선으로 미독환사를
응시했다. 그러나 분명 살기(殺氣)는 아니었다. 그리움이기도
했고, 정다움이기도했다. 눈속에는 분명 정(情)이 흘렀다.
"도대체 당신들은 누구요?"
흑색 복면인은 손을 머리 뒤로 돌려 가면의 끈을 풀었다. 그리
고 드러나는 얼굴...아! 이 얼굴은!
미독환사는 입이 얼어 버렸다. 몸도 마음도 놀라움으로 꽁꽁
얼어버렸다.
"그, 그럼 저분은...?"
오십대 초반의 중년인. 검처럼 곧게 뻗은 눈썹과 칠흑 같이 검
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이...이런 일이...세상에 이런 일이..."
"허허허! 이제 알겠느냐? 무산파는 당분간 봉문(封門)해라. 나
의 꿈이 이루어지는 날 모든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을 거야.
휴우! 참 긴 세월이었지. 하지만 명심해라. 절대로 나의 신분
이 노출 되어서는 안 된다. 확실히 손에 쥐지 못한 것은 내 것
이 아니야. 꿈이 이루어지는 날, 세상 사람들은 나를 승배하게
될 것이다. 우하하하...!"
순간 미독환사의 머릿속은 텅 비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
고 무엇을 할 것인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더 이상 무산파는 무림에 관여할수 없다는 것...그것만은 분명
했다.
* * *
밤이 깊었다.
단비하는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가했다.
찬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스쳐 갔지만 중원의 끝까지라도 가겠
다는듯 힘차게 말을 몰았다.
그의 마음은 조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완전한 올가미였다. 삼절 진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청
성파의 존립은 위태롭기만 했다.
청(靑) 자 배 도인 일곱 명이 일 개조로 열여섯 조(組), 백십
이 명이 성도로 향했다. 무공이 완숙한 경지에 이르지 않은 하
(河) 자 배 제자들 백사십 명도 이십 개조로 나뉘어서 뒤를 따
랐다.
구파일방의 하나인 청성파의 본산은 텅 비었다.
비록 청 자배와 하 자 배 제자들 약간과 그 밑의 정(正) 자 배
또 그 밑의 태(泰) 자 배 제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무공
수준으로는 중소문파의 침공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성도를 향해 이동 중인 청성 도인들이 몰살한다면 청성은 무너
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또한 그것이 청성파 장문 삼절 진인의 복안이었다.
대상은 아미파였다.
아미파와 청성파의 공멸(共滅). 자신이 영도하는 문파를 공멸
시키겠다는 발상 자체가 기가 막혔다.
성소 법사는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증거도 마련했다.
청성파로 날아든 비합전서는 모든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냈
다.
< 일점(一點) 전(前).
대붕개안(大鵬開眼) 완료. 대붕전시(大鵬展翅)의 날 도래.
一. 대붕일성(大鵬一聲) 시작.
二. 아미 장문에 대한 최종 명령. 사(死).
三. 아미파에 대한 최종 명령. 멸(滅).
四. 성소 법사와 소림승에 대한 최종 명령. 사(死).
五. 단비하에 대한 최종 명령. 사(死).
차후, 어떠한 변동 사항도 없음.
은점(銀點) 서(書). >
하늘이 통탄할 일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모조리 장님이요 귀머거리였던 셈이다.
일점은 삼절 진인을 가리키는 말일 텐데. 그러면 은점은 누군
가. 삼절 진인이 겨우 다른 사람의 하수인이었단 말인가. 그가
일점이면 도대체 몇 점까지 있는 것인가.
단비하의 모든 생각은 거친 호흡속에 잠겨들었다. 따그닥거리
는 말발굽 소리만이 아무 생각없는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세상
에서 유일한 벗인 요범, 자신을 사랑하는 이경화, 갈홍아, 소
림의 명승 성소 법사, 사망산검, 독사우공, 사두열목...
모든 사람의 생명이 꺼져 가는 촛불처럼 희미했다.
전서의 내용이 사실실이라면 그들은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발버
둥치는 가엷은 벌레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늦으면 모두 죽어.'
마음만 급했다. 말은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하건만 갈 길은 까
마득히 멀고 추적자의 숨결은 바로 결에서 들리는 듯 가깝게
다가왔다.
비합전서를 낚아채는 순간, 삼절 진인을 보았다. 그도 단비하
를 쳐다보았다. 삼십 장의 거리를 격해 있어 얼굴표정을 살필
수는 없었지만 경악과 분노에 물든 얼굴이었다. 그의 몸에서
뻗어 나은 살기가 피부를 저며 오는 듯했다.
추적자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서는 관도(官道)를 버려야 한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는 산길을 타야 한다. 그러나 그런
길을 택한다면 청성파보다 먼저 도착하기 어려웠다.
부득불 택한 관도.
아직 추적자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바로 지척까지 다가왔
다는 것운 느낌으로 알수 있었다.
"끼럇! 끼럇!"
한 걸음이라도 더 멀리 더 빨리.
후욱! 후욱...!
말의 입에서 품어져 나온 뜨거운 김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순박한 눈을 크게 뜨고 입에 거품을 토해 내면서도 주인의 마
음을 아는 듯 질주하는 건마(楗馬).
히히힝!
말은 발에 무엇이 걸린 듯 갑자기 길게 울부짖으며 고꾸라졌
다.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투레질을 했다. 지쳐도 너무 지쳤다.
안락을 찾아떠날 시간이었다. 건마는 깊은 숨을 몇 번 몰아쉬
더니 움직일 줄 몰랐다.
깊은 밤이었기 때문에 칠흑 바닷속같이 어두우면서도 고요했기
에 표정을 다 읽을 수는 없어도 횃불처럼 긴장된 눈동자는 전
면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복면인 여덟 명을 응시했다.
단비하는 깨달았다. 이들은 전에 무산에서 만났던 복면인들과
같은 부류라는 것을...물론 그때보다 훨씬 무서운 고수들이겠
지만.
여덟 명은 단비하를 중심에 놓고 팔방의 방위를 점했다.
전에는 일자로 늘어서서 한꺼번에 공격을 가해 왔다. 확실히
그들보다는 세련된 고수들이었다.
절음십이박를 떠올렸다.
얼마나 가능성이 있을까. 아직 중간에 끊기는 허점을 보완하지
못했는데 팔방을 에워싼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모든 방위를
쳐낼 수 있는 절음십이박이 가장 적절했다.
"참, 재미있는 인연이군. 나는 그대들에게 큰 은혜를 입었어.
무산에서부터 관현에 이르기까지 그대들이 공격해 오지 않았다
면 하독 방법을 절정으로 수련할 수 없었지. 그대들과 부딪치
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다고 확신해도 좋아. 너희들의
하나뿐인 목숨을 내던지며 무공을 전수해 준 사부들이지. 자
공격해 봐."
단비하는 천지봉에서 연구해 낸 절독여덟 봉지를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이런 상황에서는 분(粉)보다 단(丹)이 좋겠군. 하지만 단약이
비산하려면...그래. 꿀로 버무리지 말고 물기를 가미해서 응축
시키면 되지. 또 하나 배웠군.'
파앗!
복면인들의 신형이 허공을 날았다.
병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올 필요는 없
었다. 그들이 공격하면서 움직이는 이유는 바람 때문이었다.
원통형(圓筒形)에서 하독하면 누군가 독에 중독될 우려가 있
다. 즉 자신들이 터뜨린 독에 자신들이 중독되는 불상사를 방
지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파앗! 화아악...!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독가루가 허공 가득 뿌려졌다.
순간 단비하의 신형은 빙글 맴을 돌면서 절음십이박을 펼쳐 냈
다.
몸안에 가득한 정기는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을 따라 방사되
었고 절음십이박의 동작을 따라 독분을 허공에 실었다.
독분과 독분이 뒤엉키며 시간도 행동도 모두 정지된 듯한 진공
이 흘렀다.
'저럴 수가...안돼!'
복면인들이 살포한 독분은 단비하가 터뜨린 절독의 방어막을
무너뜨리며 달려들었다. 바람따라 유유히...
화아악!
단비하의 손은 번개보다 빠르게 놀려졌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번처럼 절체절명의 상황은 없었던 것 같았다. 당문주가 하독
한 무시독의 공세보다도 더욱 지독한 독이었다.
츠츠측! 츠츠측...!
단비하는 자신이 소유한 독 중 거의 절반을 소진한 다음에야
서로 상잔시킬 수 있었다.
'공격을 늦추면 당한다.'
단비하의 신형은 용수철처럼 튕겨져 복면인들의 포위망을 뚫었
다. 그와 동시에 다시 절음십이박이 펼쳐졌다.
"크윽!"
"아악악!"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복면인 여덟 명은 예상을 뒤엎은 상황에
당황했고 단비하가 터뜨린 독을 받아내지 못했다.
"이건...이건..."
가슴에 거대한 파도가 밀려왔다. 복면인들이 사용한 독은 그도
잘아는 독이었다.
혈반사접(血班死蝶)!
붉은 눈을 번뜩이며 수컷의 몸에 산란하고 무더기로 죽던 혈반
사접. 형산 무애곡의 무서운 광경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혈반사접의 독이야. 틀림없어. 이 현상은...'
바위가 누런색으로 변색되었다. 눈이 녹고 그 밑에 이제 막 모
습을 드러내던 새싹이 새까맣게 타 죽었다. 여독만으로도 거의
초죽음으로 몰아넣던 혈반사접.
'당문...당문이야! 당문이 혈반사접의 독을 실용화시켰어.'
급히 죽은 시체에서 복면을 벗겨 냈다.
틀림없었다. 자신의 독에 중독되어 내부가 썩어 들기 시작한
시신의 피부는 칠십 노인처럼 주름졌다. 그러나 피부에 생긴
붉은색 반점은 자신의 걸작품이 아니었다. 그들은 죽으면서 자
신들이 전개한 혈반사접의 독기를 흡입한 것이다.
그들 중 아는 얼굴은 한명도 없었다. 당문도라면 필경 아는 사
람들일 텐데. 하기는 안다해도 지금은 식별하기가 불가능했다.
잔뜩 주름진 얼굴은 본래의 모습을 바꿔 버렸으니까.
단비하는품에서 제법 두툼한 약봉지를 꺼내 주위에 살포했다.
혈반사접의 독은 추측을 불허했다. 비록 자신의 독에 중화되었
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여독이 남아 있었다. 내성이 없는 평범
한 사람들이라면 틀림없이 죽을 치사량이었다.
수질(水蛭)에서 채취한 독은 엄밀히 말하면 독이 아니었다.
독을 잡아먹는 독이었다. 가만히 놔두면 족히 일 년은 가야 해
독될 사지(死地)지만 수질의 독을 뿌리면 하루로 족했다.
단비하는 개울을 찾아 얼음을 깨고 들어갔다.
피부에는 벌써 홍반(紅斑)과 함께 수포(水泡)가 잡혔다. 그곳
은 심하게 가려웠고 머리에서는 열이 펄펄 끓었다. 바로 혈반
아접의 독기였다.
내성이 강하고 그리 깊게 중독되지 않아 보름만 요양하면 자연
히 없어질 증세였다. 하기만 단비하는 보름 동안 요양이나 하
고 있을 틈이 없었다. 그 기간이면 벌써 상황이 종료될 테니
까.
홍반이 있는 부분을 깨끗히 닦았다. 수포가 터지지 않도록 신
경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런 수포는 안에 독을 함유하고
있어 터지는 즉시 다른 부분도 감염시킬 것이 뻔했다.
목욕을 마친 단비하는 옷 속에서 해독제를 꺼내 물에 섞은 다
음 상처 부위에 발랐다.
별빛 한 점 없던 하늘은 동녘이 터오는지 점점 색조를 바꿔다.
역시 손방(巽方)과 건방(乾方)이 문제였어.'
단비하는 복면인들과 겨루던 광경을 되새김했다.
절음십이박은 아주 훌륭했다. 하지만 내력이 받쳐 주지를 못해
손방과 건방에 틈이 생겼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여독에 중
독되지 않았으리라.
졸음이 쏟아졌다.
이틀동안 한잠도 자지 못했다. 내처 말을 달렸고 복면인들과
싸우느라 전신이 파김치처럼 축 늘어졌다.
'손방...건방....'
단비하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잠에 곯아 떨어졌다.
잠든 얼굴이 무척 평화롭게 비쳐졌다. 그는 알고 있을까? 자신
이 성도에 무사히 갈수 있는 확률이 극히 낮다는 것을.
* * *
한연지는 짜증이 치밀었다.
독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
려 광범위한 면에서는 무공보다 더 넓으면 넓었지 좁지 않았
다. 당문도들이 독술에 자부심을 가질 만했다.
같이 생활하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일이지만 익히려고 하다 보
니 난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가 익힐 수 있는 한계는 이미 만들어 놓은 독을 어떻게 살
포하느냐하는 방법뿐이었다.
그 마저도 수월하지는 않았다.
당철휘 그 멍청한 인간이 마구잡이로 쓸어 넣은 독들은 도대체
무슨 독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문도들이 사용하는 평범한 독도 있고 당문 십절이 사용하는 절
대독도 있지만 어느게 어느것인지...독을 구별해 내지 못한다
면 마대가 아니라 온천지에 독이 깔려 있다해도 무용지물이었
다.
'단비하라면 방법이 있을 거야. 일수천명이라 불릴 만큼 의독
에 뛰어나니까.'
한연지는 지기 시작한 황금색 노을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풍경에 넋이 빠진 듯 아미를 살짝 찡그리고 응시하는
모습은 한폭의 선녀도(仙女圖)였다.
'오늘만 지나면 그의 소식을 알수 있겠지.'
기은촌 여인들이 화궁에서 지르는 비음 소리가 거실까지 들려
오는 듯 몸이 스멀거렸다. 무수한 사내들과 마구잡이로 교접을
벌이는 창녀. 그녀들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
지만 그런 점보다는 한남자에게 구속되지 않고 인생을 즐기려
는 목적이 컸다.
한연지는 기은촌 여인들을 경멸했다.
여인의 몸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렇게 아름다운 몸을 시궁창
에 스스로 던져 버리다니. 여자는 밭일을 해서는 안 된다. 손
에 물기를 묻히지 않을 만큼 고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 여자는
그런 특권을 누릴만한 권리가 있다.
사내들과 떨어져 살면서도 한 달에 닷새 동안 갖는 교접에는
열을 올리는 미친 여인들. 그 무슨 추태란 말인가. 세상 남자
들이 무어라 욕하는지도 모르고 제 잘난맛에 사는 꼴들이라니.
정조 관념이 문제될 것은 없었다.
당동한, 당철휘. 당건해.
그녀와 관계를 가진 놈들은 한결같이 입에 발린 칭찬을 일삼았
다. 또한 이미 무너져 버린 몸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았
다. 그것이 뛰어난 여자가 누리는 특권이었다.
'이 여자들은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어. 그런 힘을 그냥 버릴
수는 없지.'
한연지는 그들 속으로 들어가기로 작정했다.
힘이라는 것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았다. 싸움판에서 힘
없는 사람이 물러서면 비겁자라 욕을 얻어먹었지만 힘있는 사
람이 물러서면 마음이 관대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기은촌 여인들을 가질 심산이었다. 그들의 힘을 써 먹을 곳이
생각났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할 일이 있었다. 기은촌의 촌
장(村長). 당문주를 노리던 사람이 이까짓 마을 하나 장악하는
것쯤이야.
한연지는 검을 들고 일어섰다.
귀속칠가의 모든 독술을 완성했다면 수하가 되겠다고 무릎을
꿇고 빌어도 받아들이지 않을 여인들이지만 지금은 그런 미약
한 힘마저도 아쉬웠다.
생각이 떠오르면 즉시 행동에 옮기는 게 한연지의 성격.
기은촌을 장악하기 위한 그녀의 행동은 시작되었다.
화궁은 삼십여 개의 작은 방으로 이루어졌다.
방들사이를 막아놓은 벽돌은 진흙을 구워 만들었기에 무척 단
단했다. 또한 그 위에 송진을 얹고 진흙으로 겉을 발라서 옆방
에서 나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낫 모양으로 꺾여진 구조였으며 긴 회랑(回廊)을 중심으로 좌
우에 열다섯 개씩의 방이 있었다.
출입구는 회랑의 양쪽 끝에 한 개씩 있었고 문가에는 기은촌
여인들 중에서도 가장 활을 잘쏘는 십여 명의 여인들이 경계를
섰다.
사내들은 일단 화궁에 들어가면 오 일 동안은 문밖 출입이 불
허되었으며 만일 어기는 사내가 있다면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
아래 고슴도치가 되었다.
기은촌에 들어올 수 있는 사내는 삼십 명으로 제한되었고 각
방을 배정받았다. 즉 사내들은 오 일 동안 방안에만 있어야 했
고 기은촌 여인들이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사내를 골랐다.
한연지는 화궁의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들어내고 각 방을 일
일이 점검했다. 어느 방 할 것 없이 낯뜨거운 장면이 연출되었
다. 하지만 한연지의 눈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녀가 찾고자
하는 것은 남녀의 나신이 아니라 기은촌장이 들어간 방이었다.
대여섯 번 허탕을 치고 또 다른 기와를 들어올린 한연지의 눈
에 반짝 이채가 일었다.
기은촌장 소정(蘇貞).
그녀는 작지만 단단한 체구를 지닌 사내의 가슴을 쓸어 내렸
다.
"너는 전에도 한 번 왔던 것 같은데?"
"흐흐흐! 이곳에 오는 일이야말로 극락 중에 극락인데. 왜 안
오겠소. 다양한 여자를 접할 수 있고 뼛골이 녹아나도록 후한
대접을 받는데."
"전에 나를 만났었나?"
"흐흐흐! 벌써 세 번째인데 기억을 못 하다니 섭섭하군. 내 기
술이 그렇게 형편없었나?"
"사실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너의 기술은 형편없어. 그렇지만
무지막지한 힘이 좋아."
"끙! 하나라도 좋다니 다행이군."
아래서는 쉴새없이 음담괘설(淫談悖說)이 쏟아져 나왔다.
한연지는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사내의 손길이 닿은 몸. 어느
새 남녀간의 관계를 즐기게 되었지만 기은촌 여인들과는 차원
이 다르다고 애써 부인했다.
지금 방망이질치는 가슴도 추잡한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단정 내렸다.
소정은 한연지보다 열 살이 더 많았다. 이미 삼십대 중반의 무
르익은 동체였다. 만약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이런 기회마저
없었다면 결코 기은촌에서 살 수 없는 뜨거운 여자였다.
"그 동안 고마웠다. 푸훗! 나를 위해 주는 사람들은 왜 한결같
이 목숨들을 내놓지?"
그녀는 몸이 들어갈 만큼 기와를 들어낸 후 그 안으로 비조처
럼 날아들었다.
"누구냐?"
소정의 앙칼진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녀의 음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지붕에서 뛰어내린 여세를 몰아 머리를 움켜쥐고 한 바퀴 빙그
르 돌렸다.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리는 가운데
소정은 혀를 쭈욱 빼물고 힘없이 늘어졌다.
사내들에게 구속되기 싫었던 여인은 끝내 동생처럼 자상하게
보살펴 주던 여인의 손에 죽었다.
"겁먹지 마라."
한연지는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사내에게 요염한 눈짓을 보냈
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난 털을 곱게 쓸어 내렸다.
"최대한 성의를 다해 봐. 마음에 들면...살려 줄수도 있어."
소정의 죽음은 월례행사(月例行事)가 끝난 다음에야 밝혀졌다.
그녀와 동침했던 사내는 가슴에 소검을 꼽은 채 죽어 있었다.
평소 소정이 무척이나 아끼던 소검인지라 한눈에 알아보았다.
누가 먼저 죽였을까, 목뼈를 부러뜨린 다음 검을 맞았을까?
아니면 검을 맞은 후 목뼈를 부러뜨렸을까?
"이놈은 당문도야."
한연지는 소정의 죽음이 못내 서러운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당문도라니?"
"언니, 제가 당문 후위대 부대주 이예요. 이놈을 봤어요. 후위
대 소속인데 대주의 명만 받드는 세작(細作:간첩)이에요."
"응! 여기 오는 놈들은 모두 사전에 신분 조사를 철저히 했는
데...이놈은 홍길촌(洪吉村)의 평범한 농군..."
"그게 바로 당문의 무서운 점이에요. 당문의 세작들은 어디에
있는 누구인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언니, 제가 왜 엉뚱한 소
리를 하겠어요. 기은촌 사람도 아닌데...도와 주려는 거니까
의심하지 말고 믿으세요."
"의심하는 것이 아니고 하도 이상해서..."
그때였다.
소정의 방을 정리하던 여인이 곱게 접힌 서신을 들고 한달음에
뛰어왔다.
< 한연지 전(前).
일전에 당문주로부터 서신을 받았다.
기은촌은 미풍양속(美風良俗)을 해치는 불결한 여인들의 집단
이니 해체하라는 통보였다. 해체하지 않는다면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는 경고성 서신이었다. 기한은 삼월 초하루까지.
나는 심각한 고민 끝에 여인만의 낙원을 버릴 수 없다는 결론
을 내렸다. 결론을 그렇게 내렸으니 조만간 죽음을 맞이할 것
이다.
연지야.
기은촌은 너에게 많은 정보를 전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쏟은 정만도 친언니 못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그런 인연으로 부탁을 하려고 한다.
너는 무공을 할 줄 알고 당문의 부대주까지 지냈으며 무림이
돌아가는 상황을 한눈에 꿰뚫어보는 능력을 갖줬다. 당금 기은
촌은 그런 능력이 필요할 때다.
촌장을 맡아다오.
이런 조그만 마을이 눈에 들어올 리는 없지만 여인만의 소중한
낙원을 만들겠다는 소박한 꿈이 있는 곳이다.
당문에 복수할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목숨의 대가를 받아 다
오. 기은촌 여인들은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쏜단다. 미약한 힘
이지만 한 팔이 되어 줄 거다.
만일을 대비해서...
소정(蘇貞). >
당문주가 보냈다는 서신도 발견되었다.
소정이 말한 내용과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동생 언니의 유언대로 촌장이 되어 줘."
한연지는 속으로 웃었다. 어린아이의 팔목을 비트는 것보다 쉬
운 일이었다. 이제 이 여인들을 격동시키기만 하면 일은 끝난
다.
"그럴 수는 없어요. 제가 기은촌에 들어온 이유를 장 알잖아
요. 저는 당문에 복수를 해야돼요."
"자신있어?"
"여기 올 때는 준비가 필요했어요. 연락할 곳도 있었고...이제
모든 준비가 끝나서 슬슬 떠날까 했는데..."
"그럼 우리도 따라갈게. 언니의 복수를 해야 돼."
"하지만 모두 죽을수도 있어요."
"복수만 한다면 상관없어."
"좋아요. 그럼 당문에 복수를 할때까지 제가 촌장을 맡겠어
요."
여인들은 지난 오일간 사내들에게서 들은 사천 일대의 모든 소
식을 말했다.
정확하지 않은 것도 있었고 어떤 것은 허황되기도 했지만 대체
적으로 믿을 만한 소식들이었다.
그 중에서 한연지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한 말은 바로 성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긴박한 상황. 아미파 고수들이 성도를 휘젓고
다니는 통에 싸움이 임박했다는 소문이었다.
'아미, 청성, 무산이라...단비하도 거기 있겠군. 좋아. 절호의
기회야. 가만...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좋은 기회를 그냥 흘려
버릴 수는 없지.'
한연지의 머리는 남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기은촌 여인들은 활과 화살을 챙기고 간단한 행장을 수습했다.
그리고 그 동안 기르던 모든 가축들을 잡아 성대한 연회를 준
비했다. 내일은 복수를 위해 떠나야 할 테니까.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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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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