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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공자 이야기 -
▶ 공자(孔子)시대의 중국
유왕이 죽은 뒤 태자 의구는 동쪽의 성주로 도망가 B.C.770년 즉위하여 평왕(平王)이 된다. 이후 주왕조는 성주에서 존속하다가 B.C.256년에 秦에게 멸망한다. 이 기간을 동주시대라고 부른다.
주왕실이 동쪽의 낙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왕조는 이전 서주시대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오히려 실력을 가진 제후가 패권(覇權)을 다투는 시대가 된다. 따라서 실제로 동주시대의 종말은 주왕조의 멸망시기가 아니라 진이 천하를 통일하는 B.C.221년으로 보고 있다.또한 이 시대는 춘주·전국 시대라고도 한다. 그것은 이 시대 전반기 대부분의 역사가 『춘추(春秋)』라는 연대기에 , 후반기에 활약했던 외교가들의 언론을 중심으로 한 내용이『전국책(戰國策)』이라는 서적에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춘추(春秋)』는 원래 노나라의 연대기였던 것을 공자가 편집하여 개정한 것이라 하는데 그 내용은 B.C.722년 노나라 은공(隱公) 원년으로부터 B.C.479년 애공(哀公) 16년까지의 사 건을 기록하고 있다.춘추와 전국의 분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한·위·조의 3家가 晉을 삼분하여 사실상 독립했던 B.C.453년을 그 분기점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 이 있다. 따라서 『춘추(春秋)』이후에 30년 정도를, 또한 그 이전의 50년 정도를 더하여 춘 추시대(B.C.770∼B.C.453)라 하고 B.C.452년 이후를 전국시대로 규명한다.
이렇게 춘추·전국시대의 두 시기를 구분해 보면 춘추시대에는 아직 명목적으로 주왕의 권 위가 온전하여 서주 이래의 예적(禮的)인 제도가 다소나마 시행되고 있었다. 이에 비하여 전 국시대에는 주왕이 완전히 권위를 잃고 이전의 예적 질서도 시행되지 않아 제후국이 서로 쟁탈을 반복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시대에는 일관된 역사의 흐름도 발견된다. 그것은 분열로부터 통일로 향하는 움직임이다. 춘추시대에는 초기에 서주 이래의 제후국이 170여개국이나 분립하고 있었으나 점차 제후국 상호간의 공방과 동맹을 통하여 패자에 통솔되면서 일종의 제후국연합을 이루 게 된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약소국은 점차 대국에 병합되어 주권이 없는 지방도시로 전락하고 이에 따라 대국의 규모는 보다 확대되어 전국시대에는 진·초·제·연·한·위·조의 7대국으로 병합된다. 이리하여 진·한 제국에 선행하는 소제국의 대립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추이의 배후에는 지배집단 내부의 변질과 군주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관료제의 성립 이라는 요인이 작용했으며 특히 농업생산의 발전에 따른 농촌사회의 변화, 화폐경제의 발달, 상업의 성행이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요인들은 춘추·전국 시대를 통하여 일 관되게 전개·발달되었던 것이다.
▶ 공자(孔子)의 생애
공자는 이름이 丘요, 字는 仲尼이니, 그 先代는 宋나라 사람이다. 아버지는 叔梁紇이요, 어머니는 顔氏이니, 노나라 양왕 22년(B.C 551) 경술년 11월 경자일에 공자를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출생하였다.공자는 아이가 되어 장난할 때에 항상 俎豆를 진설하며 예를 행하는 용모를 베풀었었다. 장성하여 季吏(창 고관리자)가 되어서는 料量을 平하게 하시고, 司職吏(축산담당자)가 되어서는 가축이 번식하였다.昭公 25년(B.C 517) 갑신은 공자 나이 35세였는데, 소공이 제나라로 달아나 노나라가 혼란하니, 공자께서는 이에 제나 라로 가시어 高昭子의 가신이 되어서 景公에 통하였다. 경공이 尼谿의 토지로 공자를 봉해 주고자 하였으나, 晏영이 불가하다 하니, 경공이 의혹하였다. 공자는 마침내 제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왔다.
定公 元年 임진은 공자 나이 43세였는데, 계씨가 강하여 참람하고, 그의 가신인 陽虎가 난을 일으켜 정권 을 독단하였다. 그러므로 공자는 벼슬하지 않고 물러나 詩書와 禮樂을 닦으시니,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정공 9년 경자는 공자 나이 51세였다.공산불뉴가 費邑을 가지고 계씨를 배반하고 공자를 부르자, 가고자 하였으 나 끝내는 가지 않으셨다. 정공이 공자를 中都의 읍재로 삼으니, 1년만에 사방에서 본받았다. 그리하여 아침내 司空이 되시고, 또 大 司寇가 되시었다. 10년 辛丑에 정공을 도와서 제나라 군주와 夾谷에서 會盟하시니, 제나라 사람들은 노나라 에게서 침략한 땅을 반환해 주었다. 12년 계묘에 중유로 하여금 계씨의 가신을 삼아 세 도읍의 성을 허물게 하고 갑옷과 병기를 거두게 하였는데, 맹씨의 집안에서는 成땅의 城을 허물려고 하지 않으므로, 포위공격하 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정공 14년 을사는 공자 나이 56세였다. 정승의 일을 攝行하여 소정묘를 베시고, 국정에 참여하여 들으시니, 3개월 만에 노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제나라 사람들이 아름다운 여자와 악사를 보내어 저지하니, 계환자가 이것을 받았으며, 郊祭에 또 제사지낸 고기를 대부들에게 주지 않자,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셨다.위나라에 가서 자로의 처형인 顔濁鄒의 집에 主人을 정하시었다. 진나라를 가실 적에 匡땅을 지나니, 광땅 사람들은 양호라고 여겨 拘留하였었다. 풀려나자 위나라로 돌아와 남자를 만나셨다. 위나라를 떠나 송나라에 가시니, 사마인 환퇴가 죽이고자 하므로, 또 송나라를 떠나 진나라에 가서 司城貞子의 집에 주인을 정하시고, 3년 동안 거주하다가 위나라로 돌아오셨는데, 靈公은 등용하지 못하였다. 계환자가 죽을 적에 강자에게 유언하여 이르되 반드시 공자를 불러 등용하라 하였는데, 그 신하들이 저지 하자 강자는 마침내 염구를 불러왔다. 초나라 昭王은 장차 書社의 땅을 가지고 공자를 봉해주려고 하였는데, 令尹인 子西가 불가하다 하니, 마침 내 중지하였다. 다시 위나라로 돌아오시니, 이때 靈公이 이미 죽고, 위나라 군주인 輒이 공자를 얻어 정치를 하고자 하였으며, 염구가 계씨의 장사가 되어 제나라와 싸워 전공을 세우자, 강자가 마침내 공자를 불렀으므 로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오시니, 실로 哀公 11년 정사년으로 공자 나이 68세였다.그러나 노나라에서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못하였고, 공자도 또한 벼슬을 구하지 않으시어 마침내 {서 전}과 {예기}를 敍하시고, {시}를 刪定하고 樂을 바로잡으셨다.
▶ 인간 공자(孔子)
그러나 그것이 정당한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겠 다.] 이것으로 공자가 금욕주의자였다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진 정한 금욕주의자는 보통 쾌락 자체를 죄악시하고 고통을 선으로 생각하기조차 하는데 공자에게는 이러한 요 소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철학으로서의 유교는 절제 있는 육체적 쾌락을 반대한 적이 없으며, 공자 자신도 덕과 성실에 배치되지 않는 한 쾌락을 반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였다. 그는 쾌락의 원천으로 서 학문을 찬양하였으므로, 순전히 향락을 목적으로 공자가 음악을 즐긴 것은 예외적인 것이다. 쾌락이 바람직한 것일 뿐 아니라 인생의 필요한 일부라는 심원한 심리학적인 진리를 인식한 점에서 유교 는 고대 중국의 주요 철학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는 문명의 전운명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극도의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의 확신은 너무나 진지하였기 때문에 부당한 비판에도 성내지 않고 미소로써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는 전지전능한 척하지 않았으며 어는 학자에게도 불가결한 [나는 모른다]라는 말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 지식을 얻었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를 무식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제자들이 그와 의견을 달리하였을지라도 그의 권위는 손상되지 않았으며, 그는 그들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인색치 않았다. 자신이 거창한 사명을 띠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말 겸손한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 은 평판보다 공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공자는 항상 주장하였지만, 때로는 친한 제자들에게 자기를 이해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한탄할 정도로는 세상의 평판에 관심을 가졌다.또 그는 인정도 많고 생각도 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공자는 맹인을 접대하였을 때, 그 눈먼 손님에게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을 소개하였으며 그 손님이 호기심은 있지만 볼 수 없는 것을 모두 알려주는 등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고 한다. 그는 인정이 많아 자기 재산보다는 사람의 안전에 더 관심을 가졌다. [마굿간 이 불탔을 때, 조정에서 돌아온 공자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는가고 물었을 뿐 말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으 며] 들어세 사냥을 할 때도 [낚시는 하였지만 그물은 사용하지 않았고, 주살을 던졌으나 앉은 새는 쏘지 않 았다.] 이 비범한 인물에 대해 가장 특기할 만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해학감각을 가진 열정하였다는 점 일 것이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그는 자주 농담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이는 일이 잦았음에는 틀림없다.그의 이야기 중에는 금방 이해되지 않는 해학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것이 많다. 그 해학 때문에 경건한 주석가들이 난처한 순간에 빠진 일이 많았는데, 주석가 중에는 농담을 하는 것은 성인의 체면을 손상하는 일이라고 철저하게 확신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어떤 사람이 크게 빈정거리는 어투로 공자를 이렇게 평한 일이 있었다. 즉 [과연 위대하구나, 공자는! 박 학도 하구나! 그러나 어느 분야에서도 명성을 얻지 못하지 않았는가?] 이 말을 들은 공자는 자기가 교사로 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고, 그 대신 즉시 이 것을 엄숙한 비판으로 인정하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무슨 일을 해볼까? 마차를 몰아볼까? 활 을 쏘아볼까? 좋다! 마차를 몰자.]공자는 자제력은 대단하였지만 초인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감정이란 자제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총애 하는 제자 顔回가 죽었을 때는 슬픔을 억제하지 않았다. 다른 제자가 공자에게 [선생께서는 너무 지나치게 슬퍼하십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과연 그랬던가?] 그러나 만약 이 사람을 지나치게 슬 퍼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그렇게 할 것인가?
▶ 공자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
{論語}를 주된 연구의 근거로 삼지 않을 수 없는데, {論語}를 보면 공자가 호감가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는데, 공자의 적대자들이 가한 공격에도 이 인상과 상충되는 내용은 없다. {論語}에 의하면 [공자는 閉居 할 때면 격의없고 온화한 태도를 보였으며], 또 [온화하지만 당호하였고 , 위엄이 있었지만 사납지 않았으며, 공손하였으나 편안감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아첨하지 않았지만 마땅히 그래야 할 경우에는 경의를 표하였 으며, 그 대신 다른 사람들도 자기를 존경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는 자신이 지켜야 할 일정한 위치가 있었 다고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료는 물론 미천한 사람들에게조차 고자세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공자가 항상 수많은 친구들로 떠들썩하게 둘러싸여 있는 型이었는지는 의심스럽다.그는 변함없는 친구가 많았지만 크게 인기를 모으는 型은 아니었다. 그는 너무나 생각이 깊었고 솔직하였으며 [원망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에게 그것을 숨긴 채 친하게 지내는 것을 ...... 나는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대개의 경우 그는 면전에세 사람을 비판하고 뒤에서는 칭찬하는 원칙을 따른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존경은 받지만 인기는 끌지 못하는 법이다.전체적으로 볼 때 그는 다소 과묵한 편이었다. 이 태도는 자기 아들에게도 적요 된 것 같은데, 그는 자기 아들의 능력에 실망하였음을 솔직이 인정하였다. 그는 예의가 발랐으나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위신을 손상하는 짓으로 생각하였다. 군주나 권세 있 는 세습귀족들과 말할 때도 비위를 맞추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일반적으로 몹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런 식의 처세가 실제 현명한 것이었느냐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공자의 교훈인 엄격한 성실성과는 일치한다.
그는 수다스러운 사람들을 혐오하였다. {논어}만 보아도 공자가 多辯家가 아니라는 것 을 알 수 있지만 맹자도 [나는 話術에는 재능이 없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공자의 말에는 때때로 감동적이고도 고상한 것은 있지만, 장황하거나 화려한 것은 거의 없다.다른 면에서도 그는 겉으로만 꾸미는 것을 선천적으로 싫어하였는데, 이것은 세상에 너무 닦인 사람보다는 소박한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성격이다.공자는 육체적인 안락과 부는 진정한 군자가 추구할 목표가 아니라고 믿었다. [선생께서는 만약 부 가 정당한 추구의 목표가 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으며, 채찍 을 잡는 마부라도 되겠다.
▶공자의 사상
禮를 수호화기 위해 공자는 도덕윤리의 측면에서 "仁"의 학설을 제시했다. "仁"이라는 어휘 자체는 공자 이전부터 이미 일상적으로 사용되어왔지만 철학범주로서 제기된 것은 공자에 의해서였다. 공자가 내놓은 "仁"은 이후 중국 철학사에서 중요 범주의 하나가 되었다. 『논어』에서 "仁"에 대한 언급이 아주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자가 안연의 물음 에 답한 한 구절이다. 이 구절은 "禮"와 "仁"의 관계를 개괄하고 공자의 "仁"학설의 기본 내용을 설명해준다.
안연이 인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자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 단 하루라도 자 신을 이기고 예를 회복한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그를 어진 사람이라고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克己"란 자기 억제이며 "復禮"는 "禮"에 부합되지 않은 언행을 "禮"의 원칙에 부합되도록 한다면 이것이 바로 "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라도 "克己復禮"를 이룬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어진 사람이라고 부르게 된다는 것이다.
안연은 한걸음 더 나아가 "克己復禮"의 내용이 무엇인지 물었다.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나아가지 말라"고 하였다. "仁"의 원칙에 부합되는 사람이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면에서 "禮"의 범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여기에서 말하는 "禮"란 주례이며 동시에 서주 노예제 사회의 등급제도인 것이다. 이로써 공자가 제시한 "仁"이란 일종의 도덕원리를 이용하여 "君子"들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 하는 모든 것을 자제케 하고 이들이 주례의 등급규정을 철저히 지키고 예를 범하는 행위를 방지 하려고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자는 당시 통치계급 내부의 귀족 사이에서 주례가 훼손당하고 위를 범하는 혼란과 자기가 섬기 던 임금이나 부모를 죽이는 등의 "無道"한 행위가 예사로이 발생하는 데 대해 유심주의적 관점에 서 그 원인을 살펴, 이를 귀족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고 보았다. 이리하여 공자는 "仁"을 또한 귀족 사이의 상호관계를 처리하는 도덕원칙으로 삼아 "仁"이란 곧 "사람을 사람함"이라고 강조하였다. 공자는 귀족들에게 자제와 상호협조를 통해 피차간의 모순을 조화시 킬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자기 억제와 상호타협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공자는 "仁"을 실행하는 기본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무릇 어진 사람은 자기가 서려고 하 면 남을 세워주고 자기가 이루고자 하면 남을 이루게 해준다." 또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 게 하지 말라"고도 하였다. 이 두 구절의 의미는 자기가 이루고자 원한다면 다른 사람도 이룰 수 있게 해야 하며,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 증삼은 "忠恕" 두 글자로써 "仁"의 이 두 원리를 개괄하였는데, 이는 공자의 본래의 생각과 부합된다. 충서의 도는 공자가 주장한 仁學說의 중심사상을 꿰뚫는 것이다.공자의 '충서의 도'는 역사적으로 착취계급과 그 대표자들에 의해 계급모순을 은폐하고 인민의 투 쟁정신을 마비시키는 부식제로 이용되어왔다. 이들은 온 힘을 다하여 "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는 소위 "용서의 도"를 모든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최고의 미덕"으로 선전하였고 나아가 초계급적인 "인류애" 또는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안다"는 식의 "위대한 덕성"을 고취하 는 한편, 이러한 도덕관념을 노동인민에게 적극적으로 부식시켜왔다. 이처럼 저의가 담긴 왜곡된 선전 아래 공자는 모든 사람을 사랑할 것과 남을 나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도덕유형을 만들 려고 한 것 같다. 사실상 공자의 "남"이란 다른 귀족을 말하는 것이지 노동자나 노예까지 포함하 는 것은 아니다.
공자는 다음에서와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군자이면서 어질지 못한 이는 있 을지라도 소인이면서 어진 사람이란 없다" 또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사람을 부리려 든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공자에게 仁愛의 추구란 통치계급의 일 로서 통치대상인 노동자를 어떻게 지배, 복속시키느냐의 문제일 뿐 무엇이 인애이며 도덕인가를 밝히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의 忠恕란 노예소유주인 귀족들 사이의 忠恕이지 노예소유주와 노예 사이의 忠恕는 결코 아니며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는 오로지 착취제도와 착 취자만 옹호하는 것일 뿐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고 한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노예제를 지지한 공자로서는 그때까지 다음과 같은 생각은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곧 그 자신이 노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더러 노예가 되도록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며 또 그 자신이 착취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착취를 받아들이도록 하지도 않 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적대계급 사이에는 "忠恕"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피압박 노동인민으로서 말한다면, 소위 "忠恕"란 철두철미한 기만인 것이다.
공자에게 "復禮"란 "仁"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이다. "忠恕의 道"를 실행한다는 것은 반드시 주례에 서 규정한 준칙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자기가 바라는 것"이거나 "바라지 않는 것"이나를 막론하 고 주례라는 원칙적 제약을 벗어날 수 없다. 소위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귀족들에게 주례가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서로 타협하고 양보할 것을 유구한 것으로 자신의 이익 을 고려할 때는 동시에 다른 귀족의 이익도 살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이것의 목적은 모순을 조화시키고 주례의 구질서를 개선, 유지하는 데 있을 뿐이다. 공자는 당시 두 가지 종류의 소유제에 대한 모순을 반영하는 통치계급 사이의 투쟁을 모두 노예소유주 귀족들 사이의 군신 내 부의 모순으로 보았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禮"에 의한 제재, 사상적으로는 "仁"의 고취로써 이와 같은 모순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이 공자가 제창한 "충서의 도"의 역사적 내용이자 계 급적 정체이다. 공자는 결코 모든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며, 심지어는 착취계급 전부를 사랑한 것도 아니다. 그가 사랑한 것은 오직 착취계급 가운데 일부분인 노예소유주 귀족에 지나지 않았 다.
공자는 노예소유주 귀족의 입장에 서서 "자기가 서려고 하면 남을 서게 해주고 자기가 이루 려고 하면 남이 이루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허풍을 칠 수는 있어도 내가 참월을 생각한다면 남 의 참월도 지지해주고 내가 반란을 꾀한다면 남의 반란에도 공감해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이다. 이러한 충서의 도는 공자에게는 결코 허락될 수 없다. 일정 계급적 도덕이론은 이 계급의 정치제도에 기여하는 것으로, 공자의 "인"도 "예"에 종속되는 것이다.
공자는 "인"을 "復禮"를 추진하는 일종의 도덕적 동력이자 사상적 근거로 보는 한편, "인"의 실행 은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인이 어찌 멀리 있으랴? 내가 인을 바란다면 그 인 은 이미 와 있다."라고 공자는 말한다. 자신이 "인"은 바로 온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인"을 행 하려고만 한다면 "인"은 바로 온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인"을 양심이나 자아의식의 산물롤 보 는 것이다. 이러한 유심주의적 관점에서 출발하여 공자는 주관적인 도덕동기와 소위 "내성적"인 자아수양의 역할을 크게 내세웠다. 그는 "인의 실천은 자기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어찌 남에게 서 비롯되랴?"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인"의 실천이 바깥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개인의 자각과 주관에 따른 노력에 의거할 뿐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공자는 노예소유주 귀족들이 오직 "인"을 실행하고 자각적으로 자기를 억제하며 주례의 규정을 준수할 수 있으면 "인"의 원칙 이 실현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례 또한 옹호되고 회복될 수 있다고 보았다.
노예제 사회가 해체되어 봉건적 소유제 사회로 나아가돈 역사적 변혁기에 위치하는 공자의 인에 대한 학설은 한 역사시대의 복잡한 사회모순, 특히 통치계급 상층에서 발생한 모순으로서 분화와 투쟁을 반영한다. 공자가 중국 철학사에서 처음으로 통치계급의 내부관계를 조정하는 원칙으로서 하나의 도덕범주인 "인"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통치계급 내부에 새로운 위기가 출현했음을 나타내 는 것으로 불가결한 새로운 조치였다. 그러나 공자는 노예제 사회의 종법제도를 옹호하는 반동적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의 도덕학설도 위선과 기만적 성질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이 같은 본질이 일체의 반동계급의 수요를 충족시켰으며 이로써 그는 중국 역대의 반동통치자나 모 든 착취제도의 옹호자로 채용되었던 것이다. 공자의 "인"의 학설은 역대 봉건지주계급 사상가에 의해 지지, 보완되어 "三綱五常"과 "忠孝節義"를 중심 내용으로 하는 봉건 예교사상으로 발전하여 봉건통치를 옹호하는 냉혹한 사상적 압박도구가 되었다. 이리하여 중국 역사상 공자 때까지 "仁 慈"의 의미밖에 없었던 "인"이 봉건지주계급의 독재를 위한 마취제이자 항상 노동인민의 신체를 얽어매는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었던 것이다.
▶교육가로서의 공자
일개 私人의 자격으로 공자는 자질이 좋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면 누구나 제자로 받았으며, 종래의 정치와는 다르지만 공자의 생각으로는 훨씬 더 좋은 정치를 구현하려는 목적으로 그들을 교육하였다.그러므로 그의 교육목적은 실제적인 것이었으나, 좁은 의미에서의 실제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비록 교육의 목적은 善政을 구현하는 것이었지만, 그 교육의 결과 모두가 유능한 행정가가 되어야 하며,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었다.실제로 그것을 훨씬 넘어서서, 교육을 받은 사람은 모든 관점에서 가능한 한 이상적인 인간이 되어야 하며, 특정한 기술만 가진 단순한 전문가가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이다.공자는 지혜가 있고 탐욕스럽지 않으며 용감하고 교양도 있을 뿐 아니라 禮樂에도 정통한 사람을 이상적 인 인간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는데, 이것이 공자가 제자들에게 제시한 모범이었음에 틀림없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요구하였던 덕성 중, 예컨데 용기나 성실 같은 정치적 성공에 필수적인 요건은 아니었 다. 그러나 공자가 목표로 삼은 것은 입신출세가 아니라 훌륭한 정치였고, 이것은 통상적인 의미의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성실과 衡平의 덕을 갖춘 사람들이 정치를 운영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 공자의 신 념이었다. 가장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물론 제자들을 군자로 만드는 것이었다.그는 누구를 대상으로 이 작업을 하려고 하였는가?너무나 가난하여 마른 고기 한죽밖에 예물로 가져오지 못한 사람조차 가르치는 것을 거절한 일이 없다고 공자 자신은 공언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자랑이 아니며, 또 미천한 사람에 대한 그러한 친절이 계속 유교에 남아 있었던 사실을 시 사하는 재미있는 일화가 {맹자}에 실려있다. 즉 맹자는 대단히 호사스러운 여행을 하였는데, 그가 손님으로 머물고 있는 궁궐의 관리인이 신발 한짝을 잃어버리자 그의 제자가 그것을 훔쳤다고 비난해 와 그는 크게 화를 내었다. 그러나 그 관리인은 맹자가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심사도 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을 주지의 사실이며 자기가 혐의를 두는 것도 당연하다고 지적함으로써 그 혐의가 옳다고 주장하였다.
가난하다거나 출생이 미천한 것은 공자에게 배우는 데 장애가 되지 않았으며, 방해되는 조건은 따로 있었다. 공 자는 멍청이를 가르치는 것은 거절한다고 스스로 말했고, 또 지적인 개발에 [정열을 불태우는 사람만]을 가 르치겠다고 선언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자는 단지 부와 지위를 얻으려는 목적뿐인 학생들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피하려고 노력 한 것 같으며, 보다 고상한 일에 관심을 가진 체하지만 초라한 옷과 거친 음식을 수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더불어 말할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내쫓았다.
그러나 그는 [3년 동안 물질적인 보답을 생각하지 않고 공부만 하려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고 한탄하기도 하였다. 집이 먼 제자들은 공자의 집에서 함께 숙식하였던 것 같다.
그의 교육방법은 완전히 형식을 떠난 것처럼 보이며, 수업시간이나 일정한 시험도 없었던 것 같다. 그 대신 공자는 한 명, 또는 동시에 몇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고 때때로 질문을 던지기도 하였다. 책은 그들이 스스로 학습하도록 했지만 공자가 학습해야 할 것을 지시해 주고 특별한 대목은 함께 토의하였던 것 같다. 이것은 공자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목적은 단지 학자를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할 군자를 양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그는 어떤 주제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가르쳤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방 법은 극히 개인적이었으며, 제자마다 다른 문제를 제기하였기 때문에 가르치는 방법도 제자마다 달랐다.따라서 각 학생의 인물됨을 관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훌륭한 교사가 모두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공자도 주의깊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성격을 관찰하였다. 그 방법 중에는 현대의 정신요법을 상기시키는 것도 있는 데, 그것은 학생들의 마음을 편안케 한 후 그들의 소망을 기탄없이 자유롭게 말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그는 중간에 말을 끊거나 논평을 하여도 속으로만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동안 그는 자 기가 받은 인상을 종합하여 그들의 장점을 어떻게 살리고 약점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였다.
일단 개개인에 대한 분석을 완료하면 공자는 그에 따라 교육내용을 조정하였다. 때때로 그는 동일한 질문에 대 해서도 제자에 따라 다른 대답을 하였다. 공자가 격식을 차리지 않은 것은 교육방법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공자가 죽은 지 오래지 않아 중국 의 교사들은 대단히 권위를 내세웠고 자기들이 말하는 것을 제자들이 무조건 받아들이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후세의 교사들이 충격을 받을 정도로 아무 격식도 없이 편안한 자세로 제자를 대하였고 엄격한 규율 도 내세우지 않았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으며, 後術하는 것처럼 그의 정치 및 지식철학과 상통하는 것이었다.모든 면에서 공자가 강조한 것은 잘못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선행이 권장이었고, 강제가 아닌 설 득이었으며 시종일관 부정적이라기보다는 긍정적인 것이었다. 공자는 자기에게 찾아온 모든 사람들을 [군자]로 만들기 위해 어떤 교육과정을 채택하였는가? 그것은 현 대의 어떤 교육과정도 달랐지만, 동시에 당시 귀족 청년들이 보통 받는 교육과도 달랐는데, 가장 큰 차이점 은 射術과 御術을 제외시킨 것이다. 공자 자신도 활을 쏜 적이 있었고, 공자의 제자 중에도 사술과 어술에 모두 숙달된 사람이 있었다.그러나 자기가 생각하는 [군자]에게는 그것이 필요없기 때문에 가르치지 않은 것이다. 귀족의 전통적인 기예 중 공자의 목적에 꼭 적합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공자는 그것을 계승하 여 그 특유의 강조점을 덧붙여 유가의 표지가 될 정도로 크게 발전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禮]라는 것이다.[禮]에는 제의를 행하는 형식도 포함되어 있지만, [내부의 정신적 仁心이 밖으로 표현되었을 때]만 비로 소 그 가치가 있으며, 진정으로 仁心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禮]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공자는 [마 음속으로는 전혀 경외심도 없는 사람들이 단지 형식만 갖추는 예를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고 말했으 며, 죽은 사람을 위한 喪禮에도 모든 격식을 세세하게 지키는 것보다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이 보다 중 요하다고 선언하였다. 단순한 외형적인 과시를 공자는 혐오하였다.
공자는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논어}에는 공자가 {시경}의 편찬과 정리에 관계하였음을 시사 하는 귀절이 있는데 고대에는 시에 음악의 반주가 붙어 있었다. 그는 류트와 비슷한 현악기인 瑟을 탔고 노 래도 즐겨 불렀다. 공자가 직접 음악을 가르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두 명의 제자가 瑟을 탔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랬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 은 확실하지만 다른 선생에게 더 깊이 배우기를 기대하였는지도 모른다. 공자는 완전한 인간이 되려면 인격 도야의 마지막 장식으로서 음악과 [禮]에 정통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있고, 또 한번은 학생들의 성품은 [시 를 배움으로써 자극되고, 예를 배움으로써 확고해지며, 음악을 배움으로써 완성된다.]고 말한 적도 있다. 확 실히 공자는 단순한 지성뿐 아니라 감정과 정신의 교사로서 [禮]와 음악을 결합시켰다.
▶ 개혁가로서의 공자
공자는 바로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깊은 번뇌에 빠졌고,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또 주위의 가치관과 맞지 않았던 그의 理想의 근원이나 세상을 개조하려는 수단으로 내세웠던 그 사상의 근원은 무엇인가?공자는 단순히 古道의 부활만을 추구하였고 사람들에게 유덕한 [先王]의 道로 돌아가라고 권고하였을 뿐 이라는 것이 종래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공자가 고도를 자신의 사상적 근원으로 시사한 적도 두 번 있었고, 과거와 비교하여 현재를 자주 비난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정권을 쥐고 있었던 사람들을 조 롱한 공자의 발언은, 단지 자기에게 개혁을 수행할 기회를 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만을 비난한 일면이 있다 는 점을 염두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그는 인간의 제도가 변화, 발전하다는 것을 인정하였으며, 적절하고 상식에도 맞는다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개변시키거나 그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가졌다. 이러한 공자의 태도는 漢代에 가서야 비로소 유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공자는 [周는 앞선 두 왕조의 경험을 살필 수 있는 이점을 갖고 있었다. 주의 문화는 정말 찬란하구나. 나는 주의 전통을 따르겠다]고 말했지만, 전통적인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방향을 추천한 예 는 거의 없었다.그는 정치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는 질문을 열한 번이나 받았지만, 전통적인 관행의 관 점에서 대답한 것은 단 한 번 뿐인데, 그때 그는 [夏代의 曆과 殷代의 輅, 周代의 冕을 사용하라]고 말하였 다.
여기서도 그는 단순히 옛것만을 따르라고 말한 것이 아니고, 각 시대에서 따를 수 있는 관행만을 선택하 라고 말한 것이다. 맹자에 의하면 공자의 敎說은 기원전 22세기경 중국을 통치하였다고 하는 上古의 제왕 堯.舜.禹로부터 전 수된 것이라고 한다. 그후 이 말은 전통적인 견해가 되어, 공자는 이 上古帝王들의 [황금시대]를 재현하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論語}에는 이것을 뒷바침해 주는 자료가 전혀 없다. 공자가 이 상고의 제왕들을 높이 평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맹자나 후세의 학자들과는 달리 완벽한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그들을 모방하기만 하면 된다는 따위의 제안을 결코 한 일이 없으며, 사실 {논어}보다 약간 뒤늦게 나온 저술과 비교해 보면 {논어}에는 상고제왕이 언급된 일이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다.
공자가 살았던 세상은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그 시대에 현저하게 결여된 것을 갖춘 국가, 즉 모 든 백성이 평화와 안전 및 풍요를 향유할 수 있는 국가를 그가 최선의 국가로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평화를 언급했지만, 공자가 평화론자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분명히 그는 평화론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불필요한 전쟁은 그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고, 당시 대부분의 전쟁은 살육전이었을 뿐 아니라 일반 적인 무법상태의 일부였기 때문에 만약 공자가 주장한 정치적 개혁이 성공만 한다면 전쟁은 자동적으로 소 멸될 것이다.
자공이 정치에 관해서 묻자 선생께서는 훌륭한 정부란 충분한 식량과 무기를 갖추어야 하며 백성의 신뢰 를받아야 한다]고 대답하셨다. [만약 부득이 三者 중 하나를 빼야 한다면 무엇을 먼저 빼야 합니까?] [식 량을 빼라. 옛부터 사람은 주기 마련이지만, 백성이 신뢰하지 않는 정부는 지탱하지 못한다.] 이것은 정부 자체의 존립을 위해 백성을 굶겨죽여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 의미라면 공자답지도 않 은 말이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백성들이 너무나 어리석어 군주의 眞意를 파악하지 못한다고 해서 군주가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구실로 무자비하게 백성을 몰아내고 착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 말이 국가는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다 같이 그 목적에 대한 이해를 함께 하고 그 이익을 함께 향유하는 협동체라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고대 중국에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민주정치의 가능성을 꿈꾼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이 점은 공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백성들은 한번도 권력을 장악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정치적 죄악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물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공자는 시종일관 백성들의 편을 들었고 모든 불의으 책임을 백성 을 착취하는 세습귀족에게 물었다. 그는 군주가 선량하고 유능하기만 하다면, 준엄한 처벌 없이도 백성들은 할 바를 다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가난한 사람보다는 부자가 정치문제에 다소 큰 영향력을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 정치이론가도 많 지만, 공자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고대 중국에는 상업이 미미하였기 때문에 주된 축재의 방법은 지배자가 되어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었고, 큰 부자를 압제자로 생각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 의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군주가 자신의 직분만 다한다면, 사치가 아닌 한 신분에 상응하는 생활을 누릴 자격 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군주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한다면 아무도 그 정도를 아까와할 사람이 없겠지만, 그 렇지 않다면 군주는 거머리에 불과할 뿐이다. [선생께서는 국가가 道에 의해 통치된다면, 빈천한 것이 부끄 러운 일이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부귀를 누리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공자시대에는 분명히 그의 주장에 아무도 경계심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은 공자가 개혁가로서 상당한 능 력을 갖고 있었음을 잘 말해 준다.
맹자와는 달리 공자는 결코 폭군을 죽여야 한다거나 제왕과 농민이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을 직선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의 전체적인 운동은 시작도 되 기 전에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좀더 신중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1세기 후 맹자가 아무 탈 없 이 직선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기초를 쌓았던 것이다. 이것은 확고한 방침에서 나온 것 같은데, 부패한 정부 아래 살고 있는 사람은 기회가 오면 용감하게 행동할 용의를 갖고 있어야 하지만 말을 할 때는 다소 신중해 야 한다는 견해를 공자는 표명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항상 조심만 한 것은 아니었으며, 인간이 그 자체로 위대할 뿐 아니라, 모두 동등한 가치가 있다는 신념을 숨기려고 한 일은 결코 없었다. 그는 언젠가 제자 자로를 [떨어진 삼베조각으로 기운 옷을 부 끄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칭찬한 일이 있었다. 맹자에 의하면, 공자는 자기가 옳지 않은 경우에는 가장 미천한 사람과 다투는 것조차 두려워하였으나, [자신을 돌이켜보아도 옳다고 느끼면 수천, 수만명이 앞을 가 로막고 있어도 밀고 나가겠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비슷한 의미에세 그는 군주의 명령보다 일개 대신의 양심 이 더 권위가 있다고 공언하기도 하였다.
그는 인간상호간의 차이가 발생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도덕으로 보았다. 도덕적으로 위대한 사람은 거의 없을지라도, 누구나 다 그렇게 될 가능성은 있으며,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가문이나 재산 또는 지위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자신의 행동 즉 자기 자신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 공자와 양호.
◐ 양호(陽虎) 춘추 때 노나라 사람으로 양화(陽貨)라고도 한다. 계손씨(季孫氏)의 가신으로 계평자(季平子) 즉 계손의여(季孫意如)를 받들었다. 평자(平子)가 죽자 그를 대신하여 노나라의 국정을 전단했다. 노정공(魯定公) 5년 기원전 505년 계손씨들의 적자인 계환자(季桓子) 사(斯)를 붙잡아 감금하고 자기에게 복종을 강요했다. 노정공 8년 기원전 502년 삼환씨(三桓氏)들의 적자들을 모두 살해하고 그와 사이가 좋은 그들의 서자들을 대신 세우려고 란을 일으켰으나 삼환씨들의 반격을 받아 싸움에서 지고 공실의 보물들과 대궁을 가지고 지금의 산동성 태안시(泰安市) 동남쪽에 있던 양관(陽關)으로 도주했다. 노정공 9년 기원전 501년 다시 삼환씨들의 공격을 받아 제나라로 도망갔다가 제나라에 의해 체포되어 노나라오 호송되던 도중에 탈출하여 당진으로 도망가 조앙(趙鞅)의 가신이 되었다.
◐ 공자는 모친 상중이었는데, 노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대부 계손씨(季孫氏)가 선비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공자는 자신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여 그 잔치에 참석하고자 계씨의 집으로 갔다. 당시 계씨의 가로(家老)로서 양호(陽虎)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양호는 공자를 보자마자 문전에서 박대하는 것이었다. “계씨는 선비를 대접하고자 하는 것이지, 너 같은 녀석을 대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季氏饗士, 非敢饗子也).” 이에 공자는 치욕을 무릅쓰고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孔子由是退). 사마천의 기록에서 단지 “향사(饗士)”와 “향자(饗子)”가 대립되고 있을 뿐 그렇게 공자가 모욕을 당해야만 했던 내면적 상황이 기술되어 있지 않다.
◐ 양호는 노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켜 삼환씨 전권에 도전하고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 인물로 그는 누구인가? 계손사의 가신인데도 많은 재물과 인력을 자기 휘하에 끌어모아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더니.. 그 위세를 믿고 자신의 일당인 계오(계손사의 아우), 공서극(계손씨 일족), 공산불뉴(계손씨의 가신), 숙손첩, 숙중지(숙손씨 일족)등을 선동해 삼환가에 도전해 정권을 통차지하려고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에 삼환씨가 총력을 기울여 양호의 반란군을 격파하는 도중에 노정공의 신망을 받던 공자에게 신랄한 비판을 받고 거사가 실패하자.. 제나라로 도망가 제경공에게 구원요청 했다가 안영의 중재로 거부당하고..
또 송나라로 도주하다 다시 진나라로 도주해 조앙의 가신이 되어 진나라 삼분에 일조하게 된다. 또 양호의 반란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권신 소정묘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 또한 공자의 신망을 시기하며 숙손가의 서출인 숙손첩과 작당하며 다른 가신의 세력과 공자에게 도전했다가.. 노정공 앞에서 공자의 으름장같은 분언에 그만 목이 잘리고.. 이를 지켜본 삼가 또한 온몸이 오싹해 졌다한다. 공자의 새로운 포스와 당시 공자의 무소불위 권세?를 엿볼 수 있음이다.
이런 소정묘가 죽은 후로 공자의 뜻이 정치에 반영되면서 노정공과 삼가도 공자의 말이라면 사심없이 듣고.. 이에 공자는 기강을 세우고 예의를 가르치고 염치를 알게하면서 백성들은 안정되고 나라는 차츰 안정을 찾게된다. 하지만 이미 커질대로 커진 삼환씨의 전횡과 발호의 결과 노나라는 이삼류의 약소 국가로 전락하니.. 전국시대 이후 제나라의 부용국처럼 되다가 전국말 초나라에게 멸국당하고 만다. 암튼.. 이때 공자는 노나라의 혼미한 정치 현실과 삼환씨의 어지러운 전횡에 적잖은 실망과 환멸을 느낀 나머지 노정공마저 제경공이 보낸 선물과 미녀에 빠져살자.. 노나라를 떠나 B.C 498~484년까지 10년넘게 천하 열국을 두루 유람하며 각국 군주들에게 치국의 도를 설파하고 다닌다. 이때 제후들에게 문전박대하며 ---
◈ 공자(孔子 : BC 551~479)의 일생.
공자는 BC 551년 노(魯)나라에서 태어났는데, 본명은 공구 (孔丘) 이고, '자'(子)는 선생님이란 존칭어이다. 그의 부친은 '공숙랑 흘'이란 무사로 젊어서 전쟁 때 큰 공을 세운 장사였다 한다. 그는 본처와의 사이에 9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모두가 딸이었다. 그래 서 그는 다시 첩을 얻었다. 첩에게 서 겨우 아들을 얻긴 했지만 다리가 부자연스런 불구자였다. 그는 이미 늙은 64세의 노인이었지 만 끝내 자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안징제란 여인과 야합(野合)하여 결국 아들을 보고야 말았으니 이가 바로 '공구'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야합'이란 단어는 애매한 표현으로 정식 결혼이 아닌 것은 분명하며, 또한 첩도 아닌 것 같다. 즉 불 륜관계를 암시하는 듯하다. 이렇게 중국의 위대한 성인 공자는 기묘한 사생아로 태어났던 것이다. 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라났지만 그가 세 살 때 부친은 죽었다. 어린 공자는 각종 제기(祭器)를 늘어놓고 제사 지내는 시늉을 하며 놀기를 즐겼는데 일설에 의하면 공자의 어머니는 장례 담당(혹은 토속 종교자)가문 출신이었다고 한다.(호적:설유) 그런 그녀도 얼마 안가 죽었고, 사생아이자 고아가 된 소년 공자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원래 몰락한 명문 귀족의 후손으로 어렵게 살던 그의 집안은 부모의 죽음으로 더욱 빈곤해졌다. 9명의 누나와 배 다른 불구자 형은 별다른 직업이 없었으므로 어린 나이에 가업을 이어받은 공자는 실질적으로 가장이 되었고, 먹고 살기 위해 무슨 일 이든 마다 않고 열심히 일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허드렛일부터 시작하여 하역 등 하급부류의 사람 들이 하는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후일 자신의 미천한 과거를 결코 숨기려 하지 않았지만 약간은 부끄러웠다고 술회한다. 그래서 틈 만 나면 책을 구해 공부했고 얼마 안가 스스로 문리를 터득하게 되었다. 매사에 주 어진 일을 능숙하게 잘 처리하였으므로 마을 사 람들은 그의 능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록 미천한 시골 소년이었지만 야심이 대단하였는데 이미 15세에 큰 뜻을 품고 있었다. 그는 여가 시간 모두를 학문 연구에 투자했으며, 일할 때도 틈만 나면 문장을 외곤 했다. 그의 학문은 차츰 주위에 알려졌으며 그 결과 처음으로 유리(곡물 창고 관리 자)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농촌 마을에서는 그의 학문이 대단하게 생각되었지만 상류층에서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젊은이에 불과 했다.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그 시절의 예화를 들고 있다. 공자 나이 17세 때 노나라 대부 계씨가 선비들을 모아 향응 한 일이 있었다. 공자도 초대를 받았으나 계씨의 가신 양호가 공자를 함부로 대하며 내 쫓았다. 여기서 보듯 그의 소년 시절은 큰 포부를 지닌 그에게 굴욕과 고통의 나날이었다. 공자 나이 19세. 농촌의 조혼 관습에 따라 '견과'이란 아가씨와 결혼을 했고, 이듬해 장남인 이(鯉)가 태어난다.
이제 공씨 가문의 가장으로 당당하게 인정받은 그는 성실한 업무수행으로 직급이 승진되었고, '사공'(司工:공사를 맡는 직)이란 직급의 소리(小 吏)를 맡아 업무와 학문 탐구에 몰두했다. 비록 이 직급이 상급관리는 아니었으나 배경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던 농촌청년으로서는 대단한 출세였다. 공자는 높은 지위를 열망했으므로 더욱 학문에 몰두해 시·서· 예·악을 익혔다. 당시 교양인들은 시나 서(書)를 연구하였는데 그들은 이 고전들을 암기하되 자유자재로 인용해야 사대부(사회 핵심 엘리트)가 될 수 있었다. 또한 공자는 예(禮:예절) 와 악 (樂:음악)에 정통해 갔다. 공자는 말단에서 벗어나 사대부(士大夫)가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학문 연구에 매달렸다. 20대의 공자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가 주나라에 갔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공자세가>에 보면 남궁경숙이 공자를 추천하여 함께 주나라로 예를 익히러 갔다고 나온다. 옛날 찬란했던 고왕조 주나라는 당시 쇠락해 있었으나 왕성 유적을 둘러 본 공자는 크게 깨우치게 된다. 그는 바로 이곳에서 자신의 유가 사상을 정립하고 원대한 새 이론의 기초를 다진다. 이 새로운 철학에 그는 스스로 크게 감동했으며 불타는 투지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공자는 주나라를 떠나기 앞서 그 유명한 노자를 만났는데, 노자는 공자의 호승심을 경계하여 "스스로 치켜 세우는 것은 가장 위험한 일이네! 그대는 교만과 욕심, 그리고 출세욕을 버리게. 이런 것은 자네에게 이롭지 못하네!" 이런 말을 했다 한다. 공자는 주나라 유학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학원을 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미 시·서·예·악에 정통한 전문가로 이름이 높았으므로 그의 학원은 많은 문하생으로 붐비게 되었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수많은 무리들이 공자의 유가 학교를 찾아와 가르침을 청했다. 심지어 제나라 왕이 안영을 데리고와 공자에게 정치를 물었을 정도이니 이미 그의 명성은 하늘처럼 높아졌고, 그는 35세에 전국 시대 각국 제후들의 상담역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공자는 자신의 정치 이론인 '덕치주의'를 실현하려고 기회를 노렸으나 세력가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노나라 중앙 정부에서 본다면 아무 배경없는 공자따위는 한 사람의 학자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몇 해를 기다렸다가 헛수고임을 깨닫고 자신의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타국으로 떠날 결심을 했다.
공자 나이 35세. 그는 권력 다툼이 일어나서 시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마침내 노나라를 떠났다. 제 나라로 간 공자는 그 곳의 권력자인 고소자란 대부를 찾아가 가신이 되었다. 공자는 고소자 밑에 있으면서 어떡하든 기회를 엿보아 제나라 왕의 눈에 들려고 했다. 우선 그는 제나라의 태사(太師:음악 장관 )에게 접근하여 음악에 관해 토론하며 환심을 사기로 한다. 태사는 음 악에 관한 한 공자보다 한수 위였던 것 같다. 공자는 소(韶) 라는 음악을 듣고 "석 달 동안 배우며 고기 맛까지 잊을 만큼 열중했다" (<논어>)고 찬탄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나라 사람들도 공자의 다방면에 걸친 학문적 깊이를 찬탄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제나라 왕이 그를 부름으로써 기회를 잡았다. "정치란 무엇이오 ?" 제나라 왕이 물었다. 공자는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아들은 아들 다워야 합니다."라고 대답하 자 왕은 크게 기뻤다. 당시 제나라는 실력 있는 신하들이 반역을 일삼기 다반사였으므로 제나라 왕은 공자의 한 마디에 당장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공자를 중용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나라 재상 안영이 강경하게 반대했다. 현실 주의자 안영은 예와 군자의 도만 강조하는 공자를 조목조목 반박하여 그의 중용을 거듭 반대했다. 또 제나라 대부들도 공자의 이론이 자기들에게 불리하다고 보고 노골적으로 반발했다.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자를 해치려 하였다. 반발에도 불구하고 공자를 기용하려던 제왕은 신하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마침내 중용을 못한다는 뜻을 밝혔다. 이렇게 하여 공자는 자신의 야망을 펼치기 직전에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공자의 나이 40세. 좌절감과 자신감이란 상반된 감정 속에서 '내 나이 마흔,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으리라(<논어>)' 이렇게 되뇌었다.
제나라에서 벼슬길을 포기한 공자는 제자들을 데리고 일단 고국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다시 학교를 열었는데, 당시 교육은 전적 으로 국가 기관에서 맡았으므로 사인(私人)으로는 그가 최초의 민간 교사였다고도 평가된다. 상류층 자제들은 대부분 국립학교에 다녔으므로 공자의 학교는 비교적 하층계급 출신이 많았다. 하지만 제나라에서 돌아온 이후 그의 학교는 부유층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니 그 만큼 그의 명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후 10여년간 공자는 제자들을 지도하면서 스스로 정립한 사상을 가다듬고 전파하기에 힘쓴다. 그 시대의 정치사상은 왕정제가 확립되지 못했으므로 능력있는 대부들이 곧잘 정권을 찬탈하곤 했는데 당신 노나라의 권력은 왕이 아닌 3인의 실력자(계손씨·숙손시(맹손 씨)손아귀에 놀아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최고 실력자는 재상인 계손씨였는데 뜻밖에 도 그는 자기의 가신인 양호(陽虎)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꼭두각시가 되어있었다. 그러므로 사실상 노나라 실권자는 양호였고 그는 독재자처럼 정권을 좌지우지했다. 음모와 배반의 연속 속에서 실력을 키워 온 양호는 공자의 사상이 권력자에게 유리함을 깨닫고 공자에게 값비싼 고기를 선물로 보내 은근히 접근하고자 했다. 공자는 그런 양호가 싫었다. 하지만 감히 실력자에게 정면으로 대립할 수 없었던 공자는 그가 없는 시간을 택해 찾아가 예의를 지켜주려 했는데 공교롭게도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양호를 만나게 된다. 양호는 그 자리에서 은근히 공자를 회유했다. 양호는 세월은 계속 흘러가고 머무르지 않으니 자기에 게 오라고 말하자 공자는 "예, 나는 훗날 벼슬을 구할 것입니다."라고 애매한 대답을 했으나 양호의 부하가 되는 것을 사양했다.
양호가 몰락한 후 또 다른 실력자인 공손불휴가 공자를 불러내려고 한 적도 있었다. 이때 공자는 강한 유혹을 받았다. 하지만 이계획은 제자들의 만류로 포기하고 만다. 공자는 이렇게 세상을 개혁하려는 정치가로서 자신의 뜻을 펼치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올듯 올 듯 기회는 닿지 않았고 마침내 노년기인 50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마침내 기회는 왔다. 양호, 공손불휴 등의 반란이 진압된후 노나라 왕은 반란군에 가담하지 않았던 공자를 높이 사서 '중도'라는 지방의 재상으로 임명하게 된다. 바라고 바라던 기회가 오자 공자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중도재상으로 부임한지 1년 만에 공자는 큰 성가를 올렸고 사방의 관리들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고 한다. 노나라 왕은 그런 공자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벼슬을 올려 주었으니 1년만에 중도 재상에서 건설 장관으로, 또다시 '대사구'(법무장관)으로 승진가도를 달리게 된다. 한편 제나라에서는 노나라에 대한 논의가 벌어졌다. 그리하여 제나라 왕은 노나라와 화평조약을 맺기로 하고 노나라에게 연락하였다. 당시 제나 라는 노나라보다 강대국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 조약에 따르기로 했다. 노 정공은 공자와 군대를 거느리고 협곡으로 향했고, 두 나라 정상은 그곳에서 동맹을 맺는다. 제나라는 동맹을 맺으면서 자국에 유리한 조항을 삽입했고, 노나라의 공자는 이에 맞서 그 대가를 요구했다. 이에 제나라는 공자를 못 마땅하게 생각했고, 동맹의식이 끝난 후 제나라에서는 일단의 음모를 진행시켰다. 즉 제나라의 무악대에 잘 훈련된 병사들을 섞어 넣어 춤을 추면서 노나라의 왕을 살해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를 눈치챈 공자는 단상으로 올라가 교묘하게 위기를 막았다.
이렇게 하여 공자는 불리한 동맹회담에서 잃었던 땅까지 되찾고 제나라의 음모를 분쇄하는 큰 공을 세웠다. 외교적 성과를 올린 공자는 내치에도 개혁을 착수하게 된다. 공자의 뜻에 의해 노나라의 성벽은 모두 철거되었다. 이로써 세도가였던 3인의 실력자의 세력은 급속히 위축되었으며 공자의 명성은 노나라를 뒤 흔들었다. 공자 나이 50세에 수상이 되었으니 이로써 노나라의 제일 실력자가된 셈이다. 공자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수상이 된 공자는 정사를 교란시킨 죄로 대부 소정묘를 처형시키는 등 실권을 장악했다.
그가 정치를 맡은 지 3개월이 지나자 양과 돼지고기를 파는 사람들이 값을 속이지 않았으며 인심이 좋아 나그네가 편했으며 길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가는 사람도 없었다.(<<사기>>)
이렇듯 노나라가 부자 나라로 발전해가며 융성해지자 이웃 제나라는 더욱 불안해졌다. 제나라왕은 노나라의 정사를 어지럽게 하고자 얼마 후 제나라는 노나라에 미녀 80명과 말 120필을 보냈으니 그것을 본 왕과 계환자 등은 크게 기뻐하며 사흘 동안 정사를 잊고 가무에 빠져 놀았다 한다. 그 날 이후 왕이 정사에서 손을 놓자 공자는 탄식했다. 공자의 충언은 먹혀 들지 않았고 그의 정책에 반감을 갖고 있던 사대부들은 그를 배척했다. 현실을 꿰뚫어 본 제자 '자로'가 공자에게 노나라를 떠날 것을 권했고, 그는 결국 직책을 사임하고 위나라로 떠난다.
위나라에 간 공자는 거리를 오가는 많은 사람들과 번성한 도읍을 보고 가르침을 베풀 것을 다짐했다. 공자는 그 곳에서 자로의 친지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위나라 왕과 절친한 사이었으므로 자연히 공자는 위나라 왕과 만날 수 있었다. 위나라 왕은 연봉이 굉장한 고액인 6만속의 녹봉을 주기로 약속했다.
위왕이 공자를 이렇게 예우한 것은 그의 명성이 높은 까닭이었으나 이렇다 할 임무는 주지 않았다. 위나라 신하들은 그 소식을 듣고 공자를 헐뜯고 중상모략하기 시작했다. 신하들의 참소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 위왕은 공자를 은밀히 감시하기 시작했고, 공자는 억울한 누명을 쓸까 두려워 위나라에 온 지 열 달만에 떠날 결심을 한다. 공자 일행이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가는 도중 '광'이란 마을을 지날 때였다. 과거 양호를 쫓던 한 제자가 공자 수하로 들어와서 일어난 소동으로 공자 일행은 그 사건 때문에 구금되었고, 닷새 동안 갇혀 있었으며 생명까지 위협받게 되었다. 제 자들은 공포에 떨었지만 공자는 초연했다.
'광'사람들은 닷새 후에 공자를 풀어주었다.
위기에서 벗어난 공자는 진나라로 가려던 길을 되돌려 다시 위나라로 왔다. 위령공은 그런 공자를 다시 맞아주었으나 그가 정상에 관여할 기회는 전혀 주지 않았다. 공자가 초조해하고 있을 무렵, 위령공의 부인인 '남자'(南子)의 시자가 찾아왔다. 그녀는 대단히 악명이 높은 여자였는데 오빠와의 혼전 근친상간 등 여러 추문이 떠나지 않았다. 남자와 공자의 만남은 발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졌는데 그것을 본 자로는 무척 화가 났다. 돌아오는 길에 자로의 비평을 들은 공자 왈 "난 잘못이 없네! 군자의 예로 만났을 뿐이지. 만일 내가 잘못하였다면 하늘이 날 버릴 것이다." 남자와 만난 효과가 있었는지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위령공과 부인이 동반하여 거리를 행차하였는데 공자도 그 뒤에서 따라갈 수 있었다. 위나라 백성들이 위령공의 부인인 '남자'를 보고 하나같이 얼굴이 아름답다고 감탄하니 위왕은 기분이 좋아서 인지 연신 거드름을 피우며 뽐내고 있었고 공자는 실망했다.
끝내 발탁이 못 되어서 인지, 위왕에 실망을 느껴서 인지 공자는 다시 위나라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당시 소국이었던 조나라로 간 공자는 강대국은 물론이요, 작은 나라들조차 공자를 기용하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자 더욱 초조해졌다. 조나라로 갔던 공자는 다시 송나라로 발걸음을 돌렸고, 그러던 중 한 나무 아래서 제자들과 쉬고 있었는데, 송나라 대부 사마환퇴가 군사를 이끌고 왔다. 사마환퇴는 공자의 비판을 당한 적이 있었던 지라 그를 증오하던 차 송나라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가 명성 높은 그를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칼로 나무를 베며 위협했다.
이렇듯 공자는 자신을 알아줄 군주를 찾아 이나라 저 나라를 떠돌면서 수많은 고초를 겪었다. 도적을 만나기도 했고, 그를 배척하는 나라에서는 조직적으로 살해하려고 하는 등 위기를 수 없이 겪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떠돌던 중 정나라에 갔을 때 제자들과 길이 어긋나 그만 홀로 성문 앞에 서 있게 되었다. 제자들도 스승을 찾고 있었는 데 그때 한 사람이 제자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용모는 옛 성인이나 현자처럼 생긴 분이 동문에 있는 것을 보았소, 어찌나 지쳐있던지 상가집 개처럼 보이더이다." 공자는 나중에 제자들을 만나 그 말을 듣고 씁쓰러운 웃음을 지었다.
공자는 다시 제자들과 함께 약소국인 진나라와 채나라를 방문하였다. 아무리 눈치를 봐도 지위를 얻을 것 같지 않자 떠나려고 하는데 뜻밖에 강대국 초나라의 초청장이 왔다. 하지만 공자는 초나라로 갈수 없었다. 초나라의 압력을 받아오던 진, 채 두 나라의 수뇌들이 그곳에 가려는 공자를 포위하고 못가게 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들판에 묶여 7일 동안이나 굶게 되었으니 제자들은 일어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 상태 속에서도 공자는 태연히 강론을 펴고 거문고를 탔다고 한다. 이 시기에 일어난 일은 후세 사료에 여러 가지 형태로 묘사되고 있는데 그중에는 이런 일화도 있었다.
제자 안연이 그 때 어렵사리 쌀을 구해다 밥을 지을 때였다. 밥이 다되어 식사를 차리는데 밥 속에 재가 떨어졌다. 그래서 재가 들어간 곳을 버리지 않고 골라 펴서 자신이 먹었는데 멀리서 그 모습을 공자가 보았다. 공자는 그 모습을 못 본 체 한 후 밥을 가져 오자 음식은 정결해야 한다며 넌지시 나무랬다. 공자의 말 뜻을 깨달은 안연이 자신이 먼저 먹게 된 경위를 말했다. 공자는 자신의 성급함을 인정하고 사람을 진실로 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런 고생 끝에 얼마 후 공자 일행은 초 나라 군사들의 도움으로 초 나라에 갈 수 있었다. 초 나라가 공자를 초빙한 것은 그들이 강국이지만 변경 지역 사람들이라 중국 문화 권으로부터 천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와 예절에 정통한 공자를 기용함으로써 문화인 행세를 하고자 함이었다. 그 때 초 나라 재상인 자서가 공자를 예를 기둥으로 삼는 주 왕조 체제의 옹호자라고 날카롭게 비판, 반박했다.
자서의 말을 듣고 초 나라 왕은 당황하였다. 공자는 자서의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일찍이 여러 나라에서 공격을 받았지만 그것은 대부분 모함과 시기인데 반해 이 번 반대는 이론적이며 원론적이었던 것이다. 56세부터 68세까지 십 수년 간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려고 각국을 떠돌던 공자는 이때 생각을 바꾼 것 같다. 공자는 오랜 여행 끝에 외관상으로는 아무 성취도 얻지 못하고 늙은 몸으로 조국 노나라에 돌아왔다. 노애공은 그런 공자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하지만 그들도 역시 관직을 주지는 않았다. 그들은 다만 공자를 사상가로만 존경하고 자문하는 것에 그쳤고 공자 스스로도 정치에 대한 생각을 포기했다.
그는 귀국 후(68~73세) 사망할 때까지 5년 간 자신의 학교에서 주역, 춘추 등을 편찬하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특히 그는 만년에 <<주역>>을 좋아하여 죽간을 꿴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만큼 열심히 읽었다고 전해진다. 공자는 위대한 성인이었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술도 손수 담근 것만 먹었으며 냄새가 나쁜 음식, 빛깔이 안 좋은 음식은 먹지 않는 등 식성이 까다로웠고, 의복도 화려하고 깨끗한 고급 제품만을 선호해 입는 멋쟁이이기도 했다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공자의 생활은 제자들의 추렴과 국가 원로의 대우로 비교적 풍요로웠던 것 같다. 그 당시 제자들은 약 3000명, 빈부귀천 상관 않고 배울 수 있는 자를 다 받아들였는데, 육례(예·악·사·어·서·수)에 능통 한 자가 72명이나 되었다 한다. 그의 사상은 그의 사후에도 크게 번성하여 중국 역사 5천년간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쳤으며 한국·일본 등 아시아 사상에도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출처] -◈ 인간 공자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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