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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十七 章. 동혈(洞穴), 음모와 심장
( 一 )
"독과 무공 중 어느것이 강하죠?"
"독이나 무공이나 쓰기 나름이다. 아침 이슬도 사슴이 먹으면
뿔이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 세상 모든 이치가 같은
것...배우고 익힌 것을 잘 쓰면 사람을 구하지만 못 쓰면 사람
을 해한다. 독도 마찬가지다. 어느것이 강하냐를 따지지 말고
깊은 성취를 이루도록 노력해라."
"그런데 지금 가시면 언제 오세요?"
"모르겠다. 영원히 오지 못할 수도 있고...너는 작은 일에 구
애받지 말고 목숨을 자중해라. 책에 적힌 것만 다 익힌다면 이
사부의 지식을 능가하게 될 게다. 그리고 나이 스물이 되기 전
에는 절대 사람을 치료하지 말아라."
단비하는 어린 제자에게 자신이 얻은 심득을 물려주었다. 그리
고 인생을 살아 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주었다.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에서 한 행동이지만 옆에서
보는 사람이 눈물을 흘릴 정도로 비장했다.
죽음을 향한 행로(行路)를 가기 전, 사제간의 마지막 만남이었
다. 당문주 당기룡을 향한 독로(毒路)는 승부를 예측할수 없었
다. 더욱이 당문은 외인의 출입을 불허했다. 하다못해 생필품
을 나르는 사람까지도 저지당했다. 검을 든 무인이라면 처참한
시신으로 변한 채 산곡 입구에 버려졌다.
산 전체가 독지(毒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스로 범의 아가리에 기어 들어가는 사람이 있을까? 단비하가
하려는 행동이 바로 그런 행위였다.
"사부님, 꼭 가야 돼요?"
반사영은 그새 정이 든 듯 떨어질 줄 몰랐다.
"가야한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면서요?"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지금 목숨을 자중하라고 했잖아요."
"그건 너에게 하는 말이다. 사람이란 처음 어떤 길을 걸었느냐
가 중요하다. 나는 가시 밭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그런 길을 걸어야 한다. 너도 나중에 크면 운명이란걸 알게 될
거다."
"사부님..."
"흠! 우리도 대를 이어야 하니 문파(門派)를 만들자. 이름은
활문(活門)으로 하자. 독에 연연하지 않고 사람을 치료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설혹 무공이 약해 다른 파의 침입을 받는다 해
도 그래서 멸문한다 해도 마지막 일인까지 생명을 존중해라."
"네."
"내가 죽으면 너는 활문의 이대 문주가 된다. 활(活)의 의미를
잊지마라."
"안 잊을게요."
"그럼 문규(門規)를 말해 주겠다."
단비하는 짧은 이 년간의 강호 생활에서 터득한 마음의 심도를
말해 나갔다.
활문육조(活門六條).
진행삼조(進行三條).
一. 성(誠).
성이라 함은 간단없는 마음을 말하며, 만사를 이루려 할때에
그 목적을달성케 하는 힘의 원천이다.
二. 건(建).
건이라 함은 질병없는 몸을 말하며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열
의와 끈기를 촉진하는 힘의 원천이다.
三. 은(恩).
은이라 함은 감사보은(感謝報恩)의 정신을 말하며, 만사를 이
루려 할 때에 인화(人和)와 신념(信念)을 일으키는 힘의 원천
이다.
불행삼조(不行三條).
一. 탐(貪).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인생에서 가져 갈 것이 무엇인
가, 욕심을 버려라.
二. 나(懶).
죽으면 썩을 육신이 아니던가, 아껴서 무엇하겠는가.
三. 굴(屈).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만물(萬物)에 성쇠(盛衰)가 있으니 의기
(義氣)조차 꺽인다면 무엇을 건지겠는가.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하며 굽힘이 없어야 한다.
반사영은 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며 몇 번이고 되뇌었다.
어린 나이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문구들이지만 자꾸구 되새김하
는 동안 그의 정신은 함양되리라.
단비하는 사제의 정을 떨치고 일어섰다. 그때,
"무산파의 이장로 독사우공 정태구, 활문 문주께 앙축드립니
다."
독사우공이 장난기를 버리고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취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 사람밖에 없는 사충전이지만 활문의 번창함을 기원합니
다."
사두열목 마대 역시 동의에 앉은 채 포권지례를 취했다.
"사망산검 이철진, 무당파를 대신해 활문의 탄생을 축하합니
다. 무림에 홍복(洪福)이 될 거라 믿습니다."
"소림사 이십칠대 제자 요범. 소림사를 대신해 활문의 문주께
인사드립니다. 여기 계신 선배님들을 증인으로 활문의 정당성
을 무림에 공표하겠습니다."
"아니...왜들 이러십니까?"
단비하는 당황했다.
제자에게 해준 말이었다. 긍지를 가지고 살라는 뜻이었다. 문
파를 정식으로 세울 마음도 없었고, 문도를 받아들여 번창하고
싶지도 않았다. 기약없는 싸움에서 살아남을 자신은 더 더욱
없었다.
문파를 대신한다?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만약 장문이
신생 문파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경우, 말을 한 사람들은
파문 조처를 받을 만큼 중대한 발언이었다.
"낄낄낄! 이제 소제가 문주로 등극했으니 함부로 말할 수 없겠
군. 문주가 된 것은 좋은데 기분은 말이 아니야."
"멍청아, 너는 장로고 단 소제는 장문이니 앞으로 말을 올려
라. 그게 장문에 대한 예의야."
"이런 때려 죽일 늙은이가? 이놈아 네놈이 말하지 않아도 안
다. 알어!"
단비하는 울컥 목이 메었다.
살아생전 이만한 온정을 받을 수 있었다면 성공한 인생이 아니
겠는가. 진정한 벗이 한 사람만 있어도...행복했다. 기나긴 어
둠의 통로를 달려온 보람이 여기에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더 있으면 격앙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았다.
"몸조심하게."
"허허허! 당기룡은 너구리야. 조심해서 상대하게."
마을 어귀를 빠져 나오던 단비하는 이정표(里程標) 밑에 앉아
있는 갈홍아를 보았다.
"갈 소저 어쩐 일로..."
"나도 같이 가."
"당철휘를 아직 죽이지 못했잖아."
"...!"
"그놈이 죽는 모습을 봐야겠어."
단비하는 갈홍아에게 다가섰다.
"잘 알잖아. 그놈을 죽이지 못한다면..."
갈홍아의 어깨를 잡고 포근하게 안아 주었다. 순간 움찔하는
몸짓이 전달되었다. 비 맞은 참새처럼 오돌오돌 떠는 그녀의
어깨는 너무도 연약했다.
"비하...이렇게 부르는 것. 용서해 줘. 지난번 그 일도 용서해
주고...하지만 나는..."
"아무 소리 하지 마라. 잠시 이대로 았자."
갈홍아의 머리에서는 풋풋한 사과 향기가 풍겼다. 부드러우면
서도 탄력있는 육신의 감촉이 정답게 다가왔다.
"부탁이 있어."
"싫어 안 들을래."
"너는 여기 남이."
"싫다니까. 그런 말하려고나를 안은 거야?"
갈홍아는 거세게 도리질을 하며 품속에서 빠져 나오려고 발버
둥 쳤다. 하지만 철쇄(鐵鎖)처럼 꽉 조여진 단비하의 두 팔은
풀어치지 않았다.
"너는 참 바보구나. 아직도 내 말을 이해 못 해?"
"이해는 무슨 이해? 나를 떼어 놓으려는 수작을 모를 줄 알아.
그러지 마. 이제부터...흑! 이제부터 말 잘 들을게. 흑흑...!"
갈홍아는 울음을 터뜨렸다. 울며 사정하며 품속으로 파고들었
다. 단비하의 허리에 감긴 팔에는 영원히 놓지 않겠다는 듯 억
센 힘이 들어갔다.
"홍아."
"지금 뭐라고 했어?"
"홍아라고 다시 한번 불러 줘? 홍아."
"나를 용서하는 거야."
"용서하고 말 것도 없어."
"비하..."
"홍아 내 부탁을 들어줘. 나는 활문의 문주가 됐어. 활문에는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만이 남았어. 네가 그 아이
를 지켜 줘. 그 아이가 어둡게 살지 않도록 도와 줘. 그리고
무엇보다 나 혼자 간다면 몸 하나 못 빼겠어? 당문주 정도는
내 상대가 안돼."
"정말이야?"
"믿어."
"알았어. 믿을게."
"몸조심하고..."
다시 한 번 힘껏 껴안은 단비하는 갈홍아를 떼어 내고 걸음을
옮겼다.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을 갈홍아였다.
"비하..."
갈홍아는 철철 흘러 넘치는 눈물을 닦을 생가도 하지 않은 채
점점 멀어지는 단비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기억해야 되는
데...저 모습을 기억해야 되는데...영원히 잊어버리지 않으려
면 그의 모습 하나 하나를 끝까지 주시해야 되는데...
단비마의 모습이 흐려졌다.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았다.
다급히 소매로 눈물을 닦아 냈지만 그는 이내 고갯길을 넘어간
후였다.
'비하 살아야 해.'
또 한 여인.
이경화는 먼발치에서 단비하를 배웅하고 있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길. 하지만 가지 말라고 말릴 수 없는
길이기에 따라왔는데....
이경화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황톳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
는 홍아처럼 끝없이 머나먼 길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이 보이고...청명한 날씨였다. 길을 떠나
기에는 아주 좋은 날씨...
* * *
무산파파는 넋을 잃은 모습으로 멍하니 창 밖에 흘러가는 구름
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앞에는 미독환사가 앉아 있었다. 그리
고 그가 들려준 말은 무산파파를 까마득한 심연 저편으로 끌
어내리기에 충분했다.
"장문, 당문을 쳐서는 안 됩니다."
무안파파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도들에제 희문(回門)할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이런 일이...도대체 이런 일이...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다니 있
을 수 없어. 이래서는 안 돼. 단편적인 생각들이 끊임없이 명
멸했다.
그러나 정확하게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늙
었고 세월이 많이 흘렀다.
미독환사가 일어서는 기척이 들렸다.
그는 무엇 때문에 일어서는가. 문도들에게 무슨 지시를 내리려
고...
무산파파의 심장이 자신도 억제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뛰었
다. 어느게 진실이고 어느게 거짓인가 자신이 인생을 잘못 살
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미독환사의 말이 사실이라면...정말 그가 살아 있다
면...무산파파의 생애는 볼품없이 변해야 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슬픈 울림이 계속되었다.
마음을 안정시키기에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가 정말 살아 있다면...확인해야 돼. 내 눈으로 직접 봐야
해. 도저히...도저히 용서할수 없어.'
무산파파의 정신은 끝도 없이 먼 허공을 맴돌았다. 그러나 급
하게 뛰는 심장만큼이나 난폭하고 광란적인 살기가 치밀었다.
"전 장로!"
가슴의 모든 울림이 소리가 되어 튀어나왔다.
"성도로 간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만약 전 장로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문의 씨를 말려 버린다. 무산파가 멸문해도
좋다. 내가 죽어도 좋고. 세상이 망해도 좋다. 간다...이 노
옴..."
"장문!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한마디만 더 꺼내면...죽인다."
미독환사는 장문의 말이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지금 무산파파
의 심정으로는 그보다 더한 말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리라.
그나마 무산신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온후한 성품이기에 이
정도로 그치지 범인들 같으면...
"내일까지 성도로 들어간다. 성도에 당도하기 전까지는 단 일
각도 쉬지 않는다. 그리 전해라."
"휴우!"
미독환사는 깊은 절망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갈문이 등장으로 다시 일어서는가 싶었는데 어찌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인가.
'휴우! 제갈 선생에게는 무어라 말을 해야 될지...'
전신의 기력이 다 빠진 듯 허탈하게 앉아 있는 무산파파이 모
습을 보았다. 장문의 얼굴에는 무심한 기색이 흘렀다. 하지만
그 마음속은 끊임없는 갈등으로 부대끼고 있으리라.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그러나 당문을 쳐서는 안 됩니다. 성도
까지 가는 동안이라도 다시 한 번 재고를..."
"혼자 하고 싶어."
나직하게 말하는 무산파파의 얼굴에는 고뇌가 물결쳤다.
* * *
성도(成都), 삼국(三國) 시대(時代) 촉한(蜀漢)의 도읍이었으
며 당나라 말의 오대십국(五代十國) 시기에는전촉(前蜀)이나
후촉(後蜀)이 나라를 세웠던 유서깊은 도시.
그러나 당금 성도의 인심은 흉흉했다.
아미파의 고수들이 검을 차고 활보하는 거리.
비록 이백여 명밖예 안 되는 승려들이지만 일견하기에도 무승
임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들은 수많은 성도 주민들의 틈새에
묻혀 벼렸지만 군계일학(群鷄一鶴)격으르 단연 두드러졌다.
성도 주민들 사이에 그들의 우상인 당문을 치러 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신에 오가는 사람들이 달갑지 않게 여기
는 눈총이 부담스럽게 꽂혀들었다.
청성파의 도인들 이백오십여 명이 성도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부터는 아예 밤에는 길을 나다니지 않는 지경이었다.
그들은 무림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당문이 무너진다면 생활에 막대한 지장
을 초래할 것은 자명했다. 당문에서 재배하는 신종 약초들, 새
롭게 개발한 약재 배합법은 많은 약초상들을 성도로 불러들였
다.
그들은 그 약초상들에게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만 얻어 먹고도
충분히 살 수 있었다.
향락문화(享樂文化)와 예술(藝術)이 공존하는 몇 안되는 도읍
중 하나가 된 것도 그런 연유였다.
표국, 마방, 기루...
약초상들의 주머니에시 나오는 은자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
은 수를 혜아릴 수 없었다.
하지만 당문이 무너진다면 그들의 배를 살찌웠던 약초상들 돈
들은 철새처럼 날아가 버릴 것이다. 성도가 아니더라도 약초를
구입할 곳은 많으니까.
하물며 검을 찬 무산파 문도들까지 우르르 몰려드는 데는 기가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무산파는 당문에 선전 포고를 했다.
무산 일대에 있는 약초 도매상들을 쓸어 버린 것이 바로 싸움
의 서곡(序曲)이었다. 그런데 성도까지 진입했으니...당문이
설혹 천하제일 문파라 해도 그들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는 노
릇이었다.
성도 사람들은 당문이 고개를 수그렸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당문이 치욕을 당하든 오욕을 당하든 존립만 해준다면 기존의
생활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백년 전 귀속칠가가 당문
에 합병 되었을 때처럼 생체 실험 정도는 잊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싸움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당문으로 오르는 산로(山路)는 독으로 가득 덮였고 곳곳에 매
복된 암기는 다람쥐 한마리 빠져 나갈 틈이 없었다.
한연지는 차분히 앉아 축을 두들겼다.
재미없었다. 그녀의 정서에는 단조로운 음만 퉁겨 내는, 음이
랄 것도 없는 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단비하의 마음
을 사로잡 위해새라면 이런 일쯤은 문제될 것도 없었다.
"금화(金花), 그는 지금쯤 어디까지 왔을까?"
"성도에 들어섰겠지요."
"호호호...!"
텅! 텅! 텅!
축에서 나오는 소리는 맑지도 탁하지도 않았다. 심금을 울리는
소리도 아니었고 목탁 소리처럼 청아하지도 않았다. 도대체가
악기라 할수 없는 나무통에 불과했다.
'이걸 만든 노인을 내가 죽였지. 이름이 뭐라더라...? 그래,
맞아. 주숙아라고 했지.'
한연지의 일생에서 가장 꿈과 희망에 들떴던 시기였다. 당철휘
가 당문주에 오를 것을 의심지 않았고 그를 징검다리삼아 자신
의 야욕을 달성하려고 했다.
여자의 몸으로 당씨 성을 쓰지 않으면서도 당문의 주인이 된
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러면 당문이 귀손칠가를 합병한 것
이 아니라 한가가 당문을 삼킨 것이 된다.
그런 꿈이 산산조각났다.
그때 주숙아의 집에서 단비하를 놓아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래서 세상은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예측할 수 없다고 않던
가. 당철희에게 패배란 것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함
이었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는데...지금은 꿈을 이
루어 줄 거목(巨木)이 되었다니.
"촌장,아미파는 문수보관(文殊寶關)에 묵고 있다고 합니다. 청
성파는 종적을 찾을수 없고, 무산파는 단비하가 머물던 성도
외곽의 농가로 집결했다는 소식입니다."
"그래? 단비하와 무산파파가 만났나?"
"길이 서로 엇갈려서 만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호호호! 잘됐군. 무산파에는 여우가 두년이나 있지."
"저...당문으로 가는 길은 이미 독으로 뒤덮였다고..."
"호호호! 금화, 걱정하지마. 당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없어. 나를 못 믿어?"
"그런 게 아니고...아이들이 동요해서..."
"금화가 가서 진정시켜 줘. 호호호! 기은촌 여인들답지 않게
왜들 그래? 소정 언니의 복수를 앞에 두고 물러설 거야?"
금화는 사십줄에 이른 중년인이었다. 그러나 한연지의 눈에는
나이 값도 제대로 못하는 풋네기로 보였다. 쓸 만한 구석은 자
위(自衛)하기 위해서 익힌 활 솜씨뿐.
"그럼 저는 아이들에게..."
"호호호! 가봐. 가서 걱정 말라고 일러줘. 걱정할 시간이 있으
면 활시위나 한 번 더 당기라고 해."
한연지는 다시 촉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단비하는 불현듯이 다가온 여인의 입에서 한연지의 근황을 알
게 되었다.
기은촌의 촌장이라...
말은 많이 들어 본 마을이었다. 여인들만 사는 마을이지만 그
녀들을 어찌해 볼까 하는 마음은 접어 두는 게 좋다는 말. 그
러나 좋은 말만들은 것은 아니었다.
기녀보다 더러운 년들, 사네 서넛은 잡아먹을 년들...
한 달애 닷새씩 개방하는 화궁에 대한 인식은 무척 나빴다.
화궁을 드나드는 사내들조차 기은촌의 여인들을 매도했다.
자신과 접촉했던 여인들을 나쁘게 말하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
책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달 초하루가 되면 어김없이 화
궁을 찾아가곤 했다.
그런 곳의 촌장을 맡았다면...
단비하는 한연지가 점점 헤이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 드는
것 같아 마음이 울적했다. 얼마나 천진난만했던가. 티 한 점
없이 맑은 얼굴로 빤히 올려다 보면서 입을 쫑긋거리던 모습이
아직도 떠오르는데.
기은촌의 촌장이라니.
성도에 들어서자마자 여인이 나타난 점으로 미루어 한연지는
오래전부터 자신을 주시해 왔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만나려 하는 것은 이유가 있겠지.
당문에서 내쳐전 것과 연관이 있으리라.
'한연지...제발 정신을 차려야 할 텐바데...'
만나기로 작정했다.
"잠시 기다려 주시요."
여인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길가의 점포에서 지필묵을 빌려
서신을 작성했다. 수신인은 농가에 있는 독사우공이었다.
인편을 구하는 일까지 꼼꼼하게 처리했다.
"그녀는 어디에 있소?"
도강보관(都江寶關)에 여장을 풀었어요."
"갑시다."
단비하는 여인에게 길 안내를 부탁했다.
한연지는 단비하가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도 축 타는 손길을 멈
추지 않았다. 자세를 옆으로 돌린 채로 고즈넉이 앉아 축을 탔
다. 악기에 몰두하는 여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분홍빛의 무복(武復)을 있었는지라 화사한 아름다움이 돋보였
다. 그녀의 칠흑같이 검으면서도 윤기가 흐르는 머리, 양젖같
이 부드러우면서도 하얀 살결과 어울려 도발적인 미태를 자아
냈다.
그녀가 연출할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중 하나였다.
또한 이런 모습에 단비하의 마음이 흔들릴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까무잡잡한 계집은 탄력적인 아름다움이 있지만 상대
가 되지 않았다. 이경화라는 계집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촌
여자처럼 꾸밀 줄 모르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여자는 딱 질색
이었다.
"오랜만이다."
단비하의 입에서 가벼운 인사가 나왔다.
한연지는 그의 음성에서 가벼운 떨림을 읽었다.
'호호호! 그럼 그렇지 넌들 별수없어.'
"오랜만이에요. 이 축이라는 것 타면 탈수록 매혹되네요."
"축은...소리를 듣는 게 아니야.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악기.
모든 일의 시작을 의미하지. 의미를 새기지 못한다면 음률을
이해할 수 없어."
"역시 가가(哥哥)다운 말이에요. 가가는 어렸을 적부터 유별났
어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렸죠. 호호
호! 그때가 그립군요. 아마 가가의 그런 성격이 오늘날의 가가
를 만든 것 같아요. 축도 잘 알고 독술도 천하무적이고...호호
호! 일수천명이라는 외호는 정말 멋있어요."
"당문에서는 타락방자로 불렸지."
한연지는 눈꼬리를 상큼 치켜올렸다. 하지만 단비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이놈이 이거...마음을 열지 않았잖아!'
한연지는 축을 놓고 일어섰다. 그리고 단비하에게 사뿐히 걸어
가서 쪼그려 앉으며 맑디맑은 눈망울을 흘려 냈다. 철없던 시
절에 단비하가 제일 좋아하던 눈빛이었다.
"가가, 제가 잘못한 것은 알아요. 주숙아를 죽인 것도 사과할
게요. 하지만 전들 어쩌겠어요. 제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당
문주는 저마저 죽였을 거예요. 가가, 제가 죽는 게 좋아요?"
"너의 사과를 받았으니 주숙아도 편히 눈감을 게다."
"저도 얼마나 마음이 아팠다고요. 하지만 당문에 돌아온 후 저
에게는 가가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얼마나 가가를 보고
싶어 했는지...결국 당문을 뛰쳐 나왔지만 갈 곳이 없잖아요.
할 수 없이 기은촌에 몸을 의탁했어요. 가가는 저의 이런 심정
을 알기나 해?"
한연지는 처연하게 맡을 이으면서 결눈질로 단비하의 표정 변
화를 면밀하게 살폈다.
'이놈의 새끼, 마음이 공꽁 얼어붙었어...'
단비하 정도 된다면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문제는 그의 마음이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화를 낼 것이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그때 미안하자고 말하면 용서하지 않을 사네
가 없었다. 거기에 안겨 들기라도 하면 지난날의 원한이 봄눈
녹듯 사라지리라.
단비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에도 변화가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 들어왔을 때의 무심함을 계속 유지했다.
'이럴 때는 부딪치지 게 상책이야, 아무리 목석 같은 놈일지
라도 여자 살냄새를 맡으면 발정난 수캐처럼 달려들 테지.'
"가가, 저는 정말 외로웠어요."
한연지는 단비하의 무릎에 슬그머니 손을 었어 놓았다. 그리고
서서히 얼굴을 묻어 갔다.
"연지 나를 부른 이유를 듣고 싶다."
"그런 말든 나중에 해요. 우선은 저를 안아 주세요. 여자가 꼭
이런 말을 먼저 해야 돼요? 저는 외로웠다고요."
"기은촌 여인들은 평판이 안 좋다. 그들과 맺은 고리를 끊어
라."
"그럴게요. 가가를 만났으니...말씀만 하세요. 어떤 일이든 가
가가 시키는 대로 다 할께요."
한연지는 '어떤'이라는 단어에 특히 힘을 주어 말했다.
"무림을 떠나라. 무림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조용한 곳을
찾아 편안한 마음으로 일생을 보내라."
'개새끼, 육갑떨고 있네. 무림을 떠나? 호호호! 조금 있으면
같이 무림을 종횡하자는 말이 나올걸."
한연지는 뜨거운 정사를 생각했다.
남과 여의 관계는 서로를 가짐으로 해서 종종 위치가 바뀐다.
아무리 콧대 높은 여자라 해도 잘 길들인 양처럼 순하게 변할
수도 있고 천하를 벌벌 떨게 만드는 악당도 여인의 말 한마디
에 숨죽이며 검을 꺾는다.
그것이 남과 여의 관계, 이미 당철휘와 당건해를 통해 확인한
일 이지 않은가. 당동한처럼 쓰레기 같은 인간은 말할 건더기
도 없지만.
"알았어요. 가가의 말을 따를게요."
한연지는 단비하의 무릎을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그녀의 손은 정점 노골적으로 변해 갔다. 무릎에서 허벅지로
그리고 그 안으로...
순간 단비하의 억쎈 팔이 한연지의 두손을 꽉 움켜 잡았다.
"나는 치욕적인 삶을 살았다."
"알아요."
"그런 나에게 너는 전부였다."
"미안해요, 어쩔 수 없었어요."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내 말을 들어라. 무림을 떠나.
네가 더 타락하는 모습은 차마 볼수 없어."
한연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하얗다 못해 파랗게 변한
얼굴을 들어 단비하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어찌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오빠로서 마지막 충고르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부디 잊지 말
기 바란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
단비하는 미련없이 일어섰다.
"못 가."
한연지의 음성에는 귀기스러움과 악독함이 진득하게 묻어 나왔
다.
"호호호! 여기가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는 곳인 줄
알아? 그래도 나는 너에게 성의를 표시했어. 그렇지? 분명히
맡해 두겠는데, 나의 호의를 먼저 무시 한 건 너야. 호호호!
내가 왜 너를 버렸는지 알아? 바로 너의 그런 성격 때문이야.
세력을 키울 줄도 모르고, 무림에 대한 욕망도 없고..."
단비하는 그녀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걸음을 옮졌다.
휘이익!
한연지는 신형을 날려 단비하의 앞을 가로막았다.
"호호호! 못 간다고 했잖아. 네 말이 말 같지 않아?"
"나를 막지 마라. 너에 대한 인상을 곱게 간직하고 싶어."
"병신, 웃기고 있네. 왜 그렇게 자신의 처지를 모를까? 너는
나에게 잡힌 거야. 알아?"
"...!"
"의자에 가서 앉아."
단비하는 안쓰러운 눈길로 한연지를 바라보았다.
구제불능의 여인. 이미 타락의 길로 접어든 그녀를 끄집어 낼
방도는 없었다. 격랑의 세월이 얼마나 흘러야 순결한 영혼을
되찾을 수 있을지. 영원히 되찾지 못한 채 세류에 휠쓸려 허우
적거리다가 일생을 마칠지도 몰랐다.
그녀를 피해 걸음을 옮겼다. 순간,
쉬익!
번개같은 일지(一指)가 마혈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예측했던 일. 몸을 옆으로 틀며 절음십이식 중 제오식(第五式)
찬권노목(贊拳怒目)을 전개했다.
퍼억!
"허억!"
슬픈 단말마가 울렸다. 그리고 멀리 탁자로 날아가 부딪히는
음향이 들렸다.
절음십이박 자체는 절학이라고 할수 없었지만 방사와 독을 접
목시켜 새롭게 탈바꿈한 무공이었다. 하지만 한연지가 방심하
지만 않았더라면 충분히 물리칠 수 있었던 무학. 가슴을 칠 일
이었다.
'이것으로...이것으로 너의 영혼이 구제받을 수 있다면...'
단비와는 걸음을 계속 옮겼다.
기분이 울적했다. 자신이 너무 심한 독수를 전개하지 않았나
자책도 해 보았다. 하지만 한연지를 더 이상 무림에 남겨 둘
수는 없었다.
그녀는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독화(毒花)이니까.
그러나 아직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칠십여 명의 여인들이 활에 시위를 매긴 채 노여움에 찬 얼굴
로 노려보고 있었다.
"활을 내려라. 너희들은 나를 죽일 수 없어. 나를 죽일 수 있
는 사람은 오직 당기룡 뿐이야."
칠십여 명의 여인들은 단비하를 막지 못했다.
금화가 활을 내려놓으라는 명령을 내리고 방으로 들어갔을 때
한연지는 입가에 피를 흘린 채 혼절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상처는 하나도 없는데..."
금화는 내상이란걸 알지 못했다.
무공에 약간이라도 조예가 있었다면 한연지의 기해혈이 파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텐데. 더욱이 산공독(散功毒)에
중독되어 세맥(細脈)으로 흘러든 내력마저 산산이 흩어 놓고
있다는 사실도.
무공을 잃은 여인이 편한 일생을 보낼 수 있는 방도는 많지 않
았다. 그대로 방치한다면 기은촌 여인들과 함께 영원히 구제할
수 없는 타락의 길을 걸을지도 몰랐다.
만약 한연지가 떠나기 전에 단비하의 서신을 받은 독사우공이
도착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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