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전투
콘라트가 돌아와 승리의 소식을 전하자, 오토는 이제 마자르족의 본대를 상대하기 위해 나아갔다. 문제는 이 중요한 대목에서 1차 사료들의 기록이 매우 소략하다는 것이었다. 가장 기본적인 사료인 비두킨트의 연대기는 오토의 영웅적인 면모를 묘사하는데 집중하고 있어서 마치 오토가 이끈 기병돌격 하나가 전부인 듯한 인상을 준다. 예전에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전투를 서술하기도 하였다. 특히 Leyser는 이 기록을 인용하면서 오토의 군대의 기본전술은 기병의 정면돌격이었다는 테제를 뒷받침하는데 사용하였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오토의 군대에서 기병은 아무리 정예라 하나 소수였고, 하인리히 시절의 개혁도 기병과 보병의 합동작전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때, 기병만으로의 전투를 치렀다고 결론짓기에는 무리가 상당히 많다.
결국, 많은 고대와 중세 전투가 그렇듯이 레히펠트 전투도 문헌사료만으로는 온전한 복원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료의 간략한 기록에서도 드문드문 전투의 실상을 짐작하게 도와주는 중요한 정보들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러한 기록들을 일종의 단서로 삼고, 가설과 추론을 동원하여 전투를 복원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예전 글에서 설명하였듯이, 기마궁수가 많은 마자르족이 선호하는 전투 대형은 초승달 대형이다. 마자르군이 다수의 보병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은 보병을 중앙에 배치하고 양익에 기병을 배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정면돌격을 해주는 것은 마자르군이 바라는대로 해주는 일이다. 오토가 중앙에 배치된 마자르군 보병을 상대로 기병돌격을 시도한다면, 마자르군은 양익의 스텝 기병을 동원하여 오토의 군대를 포위하고 사면에서 화살을 퍼붓는 방식으로 싸울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전술적으로 오토의 대처도 그의 아버지 하인리히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스텝 군대를 상대로 이미 위력을 검증한 전술을 사용하는 것이 여러모로 합리적이었을테니 말이다. 다시 말하면, 오토는 기병의 정면돌격이 아니라, 측면우회를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부대배치도 그에 따라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는 오토와 그의 귀족들에게 익숙한 로마식 전술(그들의 주된 학습자료는 베게티우스였다)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연대기도 기병돌격을 했다고 했지, 정면으로 돌격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중세 독일의 군대-레히펠트 전투보다는 약 1세기 뒤의 모습이다
오토는 우선 마자르 기병의 공격을 쉽게 격퇴할 수 있는 지형에 부대를 배치시켰다. 숲을 가로지르는 옛 로마 가도를 따라 그대로 행군했다면, 오토의 군대는 아마도 숲을 등지고 포진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우크스부르크를 구원하려면 방어만 해서는 안 된다. 공세로 나가 마자르군을 격파해야만 했다.
기병의 측면 배치에 있어서, 베게티우스는 상황에 따라 양익에 배치하는 것과 한쪽으로 몰아서 배치하는 것 모두를 소개하고 있다. 둘다 장단점이 있는데, 실행은 한쪽 측면이 지형지물에 의해 방어될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만일 오토가 Bowlus의 추정대로 슈무터 강을 좌측에 두고 포진했다면, 좌익을 걱정할 필요 없이 우익에 기병을 모두 배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익배치도 나름의 전술적 장점이 있기 때문에 어떤 배치를 취했는가는 확신할 수 없다. 만일 양익배치를 했다면 한쪽은 콘라트에게 맡기고, 오토는 다른 측면을 담당했을 것이다.
하인리히 때와 마찬가지로, 기병의 우회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려면, 보병이 방어막이 되어주어야 한다. 따라서 오토 군의 보병대가 먼저 마자르 보병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마자르 보병 뒤에는 분명 보병 궁수가 포진했을 것이다. 마자르족이 공성전을 벌일 계획을 세워놓고 침공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보병 궁수가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들을 포함한 마자르 궁수들이 오토 군의 보병대를 향해 화살비를 퍼부었다.
이에 대항하여 오토의 보병대는 팔랑크스 형태의 밀집대형을 갖추고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올린 상태에서 천천히 전진했을 것이다. 견고하게 방어대형을 갖춘 보병대는 화살 공격에 쉽게 타격을 받지 않는다. 게다가 전투 직후에 이 지역을 폭풍우가 휩쓸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날에도 이미 먹구름이 잔뜩 끼고 습도가 높았을 것이다. 이는 마자르 궁병의 전투력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오토가 양익에 기병을 배치했고 교과서적으로 군대를 운용했다면(다시 말하면 베게티우스의 이론을 따라서), 동시에 좌익에 배치된 콘라트의 기병대가 좌측으로 질주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는 적 기병대를 사정거리 밖에서 유인함과 동시에 적군의 대열을 옆으로 늘려서 얊게 만드는 목적이었다. 마자르 우익의 기병대가 콘라트 기병의 움직임에 따라 이동했다면 마자르의 초승달 대형이 얇아지면서 화살공격의 위력이 감소했을 것이다.
동시에 오토의 우익 기병은 전진하는 보병의 뒤에서 우측을 향해 구보로 움직였을 것이다. 보병대열의 보호를 받으면서 우회공격이 가능한 위치로 이동하는 것은 선왕 하인리히가 사용한 전술이기도 하다. 여기서 적 전열의 상태를 주시하면서, 전속력으로 돌격할 타이밍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지휘관의 역할이다. 비두킨트는 이 전투에서 오토가 '가장 강력한 전사이자, 최고 지휘관으로서 두 역할을 모두 다 해냈다'고 서술하고 있다.
정확히 어떤 상황에서 오토가 판단을 내렸는지는 지금 사료만으로는 알 수가 없지만, 적기가 찾아왔다고 판단하자, 오토는 비두킨트가 '수천 명 중에서 특별히 선발된 용맹한 젊은이들'이라고 서술한 그의 직속 군단의 선두에서 돌격할 채비를 했다.
'그(오토)는 방패와 성스러운 창을 손에 쥐고는 그의 제일 먼저 적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작센 연대기, 권3, 46)
이어서 오토와 그의 기사들이 전속력으로 마자르 좌익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마자르 기마궁수들도 화살을 날렸고, 분명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작전이 제대로 진행되었다면, 콘라트의 기병과 보병이 마자르군을 분산시켰고, 화살도 소모시켰을 것이기 때문에 큰 사상자를 내지 않고 돌파에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다.(단 기병을 이쪽에 몰아서 배치했다면 보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오토의 기병이 마자르 기병과 충돌했다. 근접전에 들어간 시점에서 마자르의 합성궁과 곡도는 오토의 기사들이 지닌 랜스와 장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오토의 돌격으로 마자르 좌측면이 혼란에 빠진 상태에서, 콘라트가 이끄는 좌익 기병대가 방향을 선회하여 마자르 우익을 공격했다. 마자르군 전체가 포위될 위험에 빠졌다. 마자르 기병 입장에서는 포위될 위험 속에서 싸우다가 살육당하거나 더 늦기 전에 탈출하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만 남았다. 다른 중요 사료인 <울리히 성인전>의 저자 게르하르트가 아우크스부르크의 성벽 위에서 마자르 기병 다수가 비교적 전열을 잘 유지하면서 후퇴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서술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마자르 기병들은 오토의 기사들과 근접전으로 그리 오래 싸우지 않고 후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대신 마자르군의 보병대는 무방비한 상태로 사실상 버려졌다. 이들을 상대로 전면에서는 창을 겨눈 오토 군의 보병이 밀고 들어왔고, 후방에서는 오토와 콘라트의 중장기병이 밀어닥쳤다. 지금까지의 서술 상당부분이 추론에 의지하고 있어서 의문을 표시할 수도 있겠지만, 비두킨트의 사료도 사실 이러한 전개를 암시하고 있다.
'적군 중 가장 용감한 이들은 처음에는 저항하였으나, 곧 그들의 동료들이 등을 돌리고 달아나는 것을 보고 충격과 두려움에 빠졌다. 그들은 아군 부대 사이에서 끼어버렸고, 우리 병사들이 그들을 베어 쓰러뜨렸다. (작센 연대기, 권 3. 46)'
짤막한 서술이지만 적군이 오토 부대 사이의 함정에 빠졌다는 서술은, 오토 군이 예전 설명대로 정면돌격한게 아니라 포위전법을 시도했으며 이 전술이 멋지게 들어맞아서 적군을 포위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전에는 이 전투의 두 주요 사료인 비두킨트와 게르하르트의 서술이 일견 달라보여서 해석에 혼란을 주기도 하였다. 비두킨트는 적군이 덫에 걸려 혼란에 빠졌다고 서술하고 있는 반면, 게르하르트는 마자르군이 질서를 유지하며 다수가 후퇴했다고 서술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Bowlus 선생이 잘 지적하듯, 면밀히 사료를 분석해보면 이 두 서술은 상충되는게 아니다. 후퇴에 성공한 것은 기동력이 있는 마자르 기병이고, 함정에 빠진 꼴이 되어 혼란에 빠진건 마자르 보병이었다고 보면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게르하르트는 거리가 제법 떨어진 아우크스부르크 성벽 위에서 보고 있었기 때문에, 후퇴하는 적 기병의 모습은 볼 수 있어도 전장의 모습은 목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자르 기병이 질서를 유지하면서 후퇴한 것으로 보아, 오토가 추격해왔다면 조직적인 반격을 가해왔을 가능성이 높다. 스텝 기병의 특기인 위장 후퇴를 구사하려 했을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하인리히 때와 마찬가지로, 오토도 여기에 걸려들지 않았다. 오토의 군대는 짧은 거리만 추격하다 정지했다. 그러나 이 추격 와중에도 전투는 끊임없이 벌어졋다. 마자르군이 유인전술을 쓰려 했다는 증거 중 하나다. 그 와중에 이날 전투에서 맹활약을 했던 콘라트가 전사하고 말았다. 8월의 더위 속에서 맹렬히 싸우다 기진맥진한 그는 잠시 갑옷 끈을 느슨하게 풀었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오토의 군대는 레히 강을 건너 마자르군의 진영을 점령하고, 포로를 구출했다. 오토는 여기서 추격을 멈추게 하고 아우크스부르크로 입성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오토의 군대는 마자르군의 별동대와 본대를 상대로 두 차례의 격전을 치렀다. 그들은 완전히 체력이 고갈되었을 것이다. 오토가 성문을 들어서자 이 전역의 또다른 영웅인 울리히 주교가 국왕을 영접했다. 오토는 승리를 축하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의 군대의 사상자도 컸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날의 일등공신이자 사위인 콘라트를 잃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 마자르족을 완전히 물리쳤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전투 직후
우리가 흔히 레히펠트 전투라고 부르는, 성 라우렌시오 축일에 벌어진 격전은 막을 내렸다. 쌍방간에 많은 피해를 낸 격전이었지만, 여기까지만 본다면 아직 그렇게 결정적인 승리는 못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를 구원하고 마자르군의 보병대를 섬멸하는데 성공하였지만, 주력인 스텝 기마 궁수들은 이번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빠져나갔다. 어떻게 보면 부왕 하인리히의 리아데 전투와 흡사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와 다른 점이 있었다. 리아데 전투는 거의 국경지대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따라서 마자르족은 무인지대로 쉽게 물러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마자르족은 바이에른 깊숙이 들어와있었다. 그리고 오토도 이 전투를 결정적인 한방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는 점을 분명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하인리히의 작품인 종심방어 체제가 다시 작동할 차례였다. 마자르군이 후퇴해야 하는 길목 요소요소마다 수비군으로 가득한 견고한 요새들이 들어차 있었다. 그 말인즉, 안그래도 고달프게 후퇴하는 마자르군 입장에서는 물자도 얻기 어렵고, 어디 한군데 마음 편히 쉬었다 가기도 힘들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전투 직후에 이 일대에 격렬한 폭풍우가 몰아쳤다. 이 때문에 강물의 수위가 급격히 불어났다. 쳐들어올때는 말을 타고 손쉽게 건넌 물도 배가 필요해졌거나, 몇몇 지점 외에는 도강이 불가능해졌다는 뜻이다. 오토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국왕은 특히 여울목과 나루터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전령들을 급파하여 도망치는 마자르족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실 종심방어만 아니었다면. 마자르족은 물이 빠질때까지 기다렸다가 철수작전을 펼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왠만한 곳이 다 적군의 요새로 들어찬 상황에서 그들은 서둘러 철수할수밖에 없었다. 이 며칠이 레히펠트를 역사에 남을 결정적 전투로 만들었다. 주요 도로는 적군이 철통같이 지키고, 뒤에서는 추격해오는 오토의 군대의 압박에 밀린 마자르군은 점차 잘게 분산되었고, 차례차례 섬멸되었다. 마자르의 지도자들도 차례로 붙잡혀 처형되었다.
전투가 막 끝났을때만 해도, 그렇게 거대한 승리는 아니었지만 이제 오토의 승리가 얼마나 결정적인 것이 되었는지는 누가 보아도 명백해졌다. 부왕 하인리히 때부터 오랜 세월에 걸친 치밀한 준비와 대결 끝에 거둬낸 대승리였다. 비두킨트에 따르면 감격한 오토의 병사들은 그에게 "조국의 아버지이자 임페라토르"라고 부르며 환호하였다.
나오며
정확하게 얼마나 많은 마자르족이 죽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 전투 이후로 마자르족의 서유럽 침공은 멈추었다. 이 패배 이후 마자르족은 정주민이 되었다(단 비잔티움에 대한 공격은 970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빠르게 유럽 문명권에 편입되었다.
이후 그동안 서유럽을 괴롭혀왔던 헝가리는, 다른 스텝 부족의 공격으로부터 유럽을 지키는 일종의 완충지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레히펠트에서 마자르족을 격퇴한 뒤, 라틴 그리스도교권은 스텝 부족으로부터 안전해졌다. 근대 초기까지도 유라시아는 스텝 부족과 정주민 간의 싸움으로 계속해서 피를 뿌려댔지만, 서유럽은 비교적 안전하게 떨어져서 중세 전성기 문화를 쌓아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오직 이 한번의 싸움에서 결정났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겠으나, 이후 역사의 전개에 있어서 레히펠트 전투와 그 전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들이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지금까지 짧은 연재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참고문헌
1차사료
Widukind, Res Gestae Saxonicae, translated by Bernard S. Bachrach and David S. Bachrach, Deeds of the Saxons (Washington D.C., 2014).
Gerhard, Vita Sancta Uodalrici Eposcopi Augustani, Gerhard's Life of Bishop Ulrich of Augsburg, in Bowlus (2006)
2차사료
Bernard S. Bachrach and David S. Bachrach, Warfare in Medieval Europe, c. 400-1453 (London, 2017).
David S. Bachrach, Warfare in Tenth-Century Germany (Woodbridge, 2012).
Charles R. Bowlus, The Battle of Lechfeld and its Aftermath, August 955 (Aldershot, 2006).
Bernard S. Bachrach, 'Charlemagne and the Carolingian General Staff',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66 (2002), 313-357.
John France, 'Close Order and Close Quarter:The Culture of Combat in the West', The International History Review27 (2005), 498-517.
John France, 'Recent Writings on Medieval Warfare: From the Fell of Rome to c. 1300',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65 (2001), 441-473
R. P. Lidner, 'Nomadism, Horses, and Huns', Past and Present 92, (1981), 3-19.
첫댓글 와우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자르가 헝가리가 되는 셈인가요? 아무튼 저 전설의 창은 빈에 전시돼 있죠.
망치 모루작전은 정말 이론은 쉬운데 실천은 어려워요. 잘못하면 포위가 아니라 군사력만 분산시키는 꼴이 되니...
네 헝가리 대공국이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주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재미있게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재미난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리고 300년 뒤에 몽골이 옵니다.
그리고는 마자르족의 후예를 마자르족 선조들이 했던 방법으로 신나게 두들겨 패기 시작~~ㄲㄲ
어쨌든 서유럽은 안전...
레히펠트 전투의 배경, 전개, 의의에 관련하여 정말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즉, 철저한 대비, 단합하여 하나되어 적과 대결, 유럽 문명을 수호. 무엇보다도 중기병 기사들의 일방 활약이라기보다는 각 병과, 중앙-지방군들의 조화로운 활약에 의하여 승리하였다는 것이 매우 감명깊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중세 전쟁사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의 변화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랄 뿐입니다 ㅎ
참으로 재밌네요. 세계사 책에서 오토 대제는 헝가리의 마자르 족을 물리치고 신성로마~ 하던 대목이 이제야 머리에 들어오네요.
한가지 생각. 콘라트가 과연 전사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오토 대제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전투가 승리로 접어든 상황에서 콘라트가 굉장히 껄끄러운 존재였을 것 같아요. ' 콘라트 이 녀석은 최근까지도 반기를 들었고, 황가의 일족이면서 전공도 나 이상으로 세웠다. 이 놈을 전사한 것처럼 꾸며 왕권을 단단히 하자 ' 라는 생각 충분히 했을 법한데요.. , 동시대인들도 비슷한 음모론이 있지 않았을까요? ^^
봉건사회에는 나름의 룰이 있습니다. 귀족, 특히 친인척은 어떤 처벌을 내리던지 목숨만은 빼앗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잉글랜드의 존 왕이 조카 아서를 살해한 일로 인심을 잃은것 생각해보십시오. 끈질기게 존 왕 자신의 자리를 노린 아서를 죽일 나름의 당위성은 충분했는데도 말이지요. 실제로 그런 음모론이 돌았다면 오토의 명망에는 오히려 해가 되었을거고, 그랬다면 사료에 남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욱이 전장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보고 있는 마당에 콘라트를 암살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그걸 적에게 전사한 것처럼 꾸밀수 있었을지 심히 의심이 듭니다. 게다가 콘라트는 천 명의 직속부대를 거느리고 싸우고 있던 입장이었는데요
@mr.snow 그렇군요. 오토에겐 그냥 행운이 따랐던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