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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 )
소석 선사는 이미 장로 구 인과 마주 앉아 다과(茶菓)를 즐겼
다.
"청성파가 어디 있는지 알아보셨소?"
그의 질문을 받은 아미 장로는 믿망한지 고개를 수그렸다.
"허허허! 그렇게 자책할 필요는 없소. 청성파는 반드시 꼬리
를 드러낼 테니까."
"장문, 우리가 너무 드러내 놓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것도 염려할 게 없소. 성소 법사가 당문에 잡힌 이상 우리
를 재촉할 만한 사람은 없소. 문제는 무림의 이목인데...그래
도 공격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이 좋겠지. 하지만 문제는 우리
의 명망(名望)이오. 아미파가 당문을 쳤는데 굴복시키지 못했
다면 위신이 말이 아니지."
"그럼 좋은 복안이라도 있으신지?"
"허허허! 급할 게 뭐 있나? 천천히 생각합시다. 한데, 오늘 무
산파가 성도에 들어 온 것으로 아는데...?"
"조만간 인사하러 오겠지요."
"아닐게요. 우리가 성도에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냥 지나
쳤지 않소?"
"그건 장문이 성도에 안 계시다는 소문을 퍼뜨려서..."
"무산파가 인사를 할 것 같으면 내가 있고 없고는 문제가 아니
지. 그들과의 밀월 관계는 끝났다고 생각하는게 옳을 거요."
"이런 배은 망덕한 놈들이..."
"허히허! 원래 무림이란 눈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 아니오."
아미 장문과 장로들의 대화는 무척 여유로웠다. 그들에게서는
싸움을 하려는 기색이 엿보이지 않았다.
소석 선아는 차를 한 모금 음미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성도에만 있는 것도 갑갑하니 네일은 문도들을 데리고
두보초당(杜甫草堂)이나 둘러보시오. 시성(詩聖) 두보의 발자
취를 더듬어 보는 것도 좋을 게요."
한담(閑談)은 밤이 깊도록 계속되었다.
종루에서 사경(四更)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순간 아미 문도들이 묵고 있던 객잔의 봉창이 열리며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는 황급히 창문을 향해 조그만 물체를 집어던졌
다.
극히 낮은 소리가 울렸을때 어둠 한쪽에서 나타난 그림자는 돌
맹이로 무지게를 얹은 서신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
보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겨 사라졌다.
봉창에 어른거렸던 인영은 소리없이 봉창문을 닫았다. 순간,
콰당!
문짝이 거칠게 열리는 소라와 함께 소석 선사를 필두로 아미
장로들이 들이닥쳤다. 화악 일어난 화섭자의 불길이 방안의 정
경을 말없이 그려 냈다.
"법상(法霜)..."
"자, 장문!"
"법상 무엇이 부족해서 당문과 손을 잡았소?"
"과연 장문이오. 영원히 들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영원히 숨길 수 있는 비밀이란 없는 법이오."
"언제부터 알았소?"
"십 년 전부터."
"응? 하하하! 대단한 인내심이구려. 그 동안 얼굴빛 한번 바꾸
지 않았다니."
"아미파를 위해서 말해 주시오. 당문이 날뛰는 이유를...미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자신이 죽을 자리를 파는 사람은 없소.
아미와 청성을 상대로 싸움을 할 정도라면 그만한 자신이 있다
는 건데."
"하하하! 과연 장문이시오. 역시 장문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닌
모양이오. 장문이 그렇게까지 세밀하게 생각했을 줄은 몰랐
소."
"말해 주시겠소?"
"천만에 나는 아미 사람이기 이전에 당문도요. 나의 속명(俗
名)은 당천기(唐天琦). 당문 전위대주인 암안독살 당천우의 형
이오."
"허허허! 고맙소."
순간 당천기의 표정이 급변했다. 장문 소석 선사의 계략에 말
려들었다. 내일 두보초당에 나타날 당문도가 바로 전위대임을
말해 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전위대로는 인원이 부족할 테고...또 말해 줄 것이 없
소?"
당천기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무서운 사람이었다. 십 년 전에
당문의 세작임을 알았음에도 지금껏 묵묵히 참고 있었다는 자
체로 충분히 평가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됐소. 그만하면...사실 그 이상은 말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소.
당문에서 가장 강한 고수들은 전위대와 중위대. 그들이 함께
오겠지. 그정도면..."
"후후후...!"
당천기는 너무 간단히 결론을 내리는 소석 선사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아차 싶었다. 과연 소석 선사의
눈가에는 잔주름이 퍼졌다. 만족한 웃음이었다.
적어도 전위대와 중위대를 합한 것보다는 강한 힘.
"법상 당신이 아무리 당천기라고 우겨도 나에게는 아미파 장로
법상일 뿐이오. 가시는 길이나 편히 보내 드릴까 하오. 아마타
불!"
"하하하! 소석 약 주고 병 주는구나. 차라리 그냥 죽으라고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지만 나 역시 당문도...그냥 죽을
수는 없지. 어렸을 적에 아미파에 입문하여 그 동안 갈고 닦은
무공이 있으니 몇 명이라도 끌고 가는 게 도리겠지."
"법상, 딱하시구려. 법상이 끌고 갈만한 사람이 이 자리에 있
을 것 같소?"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
"굳이 대봐야 안다면 미련한 사람이시요. 현자는 대보지 않고
도 알수 있답니다."
"와라!"
당천기는 고함을 버럭 지르고 아미파의 독문절기 금정신공을
끌어올렸다.
"해탈시켜 드리게."
아미 장문의 명이 떨어지는 순간 바로 조금 전까지만해도 웃고
한담을 나누던 동문들이 짓쳐 들었다. 그들 역시 금정신공을
운용하며 금광도법을 펼쳤다.
쉬이익! 쉬익!
조그만 방은 아홉 사람이 어울리는 통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당천기는 장문 소석 선사의 모습을 찾았다.
그는 방안의 결과에는 관심없다는 듯 등을 돌려 떠나는 중이었
다.
팔 명의 장로가 상처 하나 없이 당천기를 죽일 수 있다는 마음
이 그의 돌아선 등에서 엿보였다.
당천기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같은 무공 , 엇비슷한 수준에 상대는 여덟 명이었다.
등을 쳐오는 금도(金刀)를 피하는 순간 옆에서 날아온 금도에
목이 잘렸다. 소석 선사의 믿음은 무너지지 않았다. 당천기는
단 한 명의 동반자도 없이 홀로 구천을 향해 떠나갔다.
"저 내일 격전은 어찌하실 건지."
법상 스님을 해탈시킨 팔 명의 장로는 다시 소석 선아의 방으
로 모여들었다. 격전이 염려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전위대와
중위대의 힘이 합쳐졌다 해도 그보다 더한 힘이 있다해도 자신
이 있었다.
하지만 막대한 희생은 어쩔 수 없을 테고 그런 손실은 애초에
생각했던 계획 밖의 일이었다.
"허허허! 내일 싸움은 무산파에게 시키지."
"무산파요? 무산파는 아까 장문께서..."
"법상이 있기에 한 말이었소. 하지만 우리도 개입하지 않을수
는 없고...무산파가 싸움을 종결짓는 시점에서 가입합시다."
"그럼 무산파와 연락은..."
"연락은 벌써 되었소. 아마 그들은 지금쯤 두보초당에 가 있을
게요. 독문 사람들은 다른 것은 몰라도 암습 하나는 기가 막히
지. 시간적인 여유가 있으니 충분히 준비할게요."
"허어! 장문. 정말 너무했소? 우라도 전혀 몰랐으니."
"허허허! 미안하오. 하지만 비밀이란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새
어나갈 확률도 높은 법이지. 그럼 죄값으로 한 가지만 말해 주
겠소. 내일 싸움이 우리의 마지막 싸움이오."
"네에?"
"허허허! 나머지 싸움은 청성에게 맡깁시다. 우리가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는데 청성이 가만히 있다면 말이 되겠소? 삼절 진
인은 머리가 뛰어나니 청성이 처한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 것
이오."
소석 선사는 내일의 기습이 성공하리란 것을 장담했다.
하지만 세상일이 마음먹은 대로 행해진다면 얼마나 좋은가.
이 순간 무산파파는 깊은 고뇌의 속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미독환사는 당문을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연락을 받은 사람은 제갈문.
그는 미독환사에게 사연의 전모를 전해 들었고 즉시 회문할 것
을 제안했다. 미독환사와 같은 입장이었다. 그런 사연이 있다
면 굳이 당문과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었다.
무산파에서는 두보초당으로 간 문도는 한명도 없었다.
* * *
두보초당은 불빛 한 점 없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로 들끓었다.
그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않고 죽림에서부처 전각에 이르기까지
빈틈없이 매복했다.
잠시 후 장내에는 몇 사람 외에는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후후후! 네일이면 아미파도 끝장이군."
잔인한 살소와 함께 운을 뗀 사람은 중외대주 오독일지 당풍준
이었다, 평소 당문에서 늘 보던 근엄한 얼굴이 아니었다. 잔뜩
찌푸린 얼굴은 그의 심사가 좋지 않다는 의미였다.
"내일이면 대붕일성니 끝나는군요."
전위대주 암안독살 당천우는 감회가 새로운 듯 허공을 올려다
보며 깊은 회상에 젖어들었다.
"대붕일성이 끝나면 뭐 하나. 우리는 다 잃었어. 철휘 그놈의
자식은 제 아비를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고, 영지 ,동한이...다
죽었어. 당문을 이끌 후계자가 없단 말이야."
"휴우! 깊게 생각하면 머리만 아파집니다. 운점께 생각이 계시
겠지요. 확실히 동한이가 차기 문주로 지목될 줄 알았는데."
"나는 아무래도 께름직해. 정작 은점이 동한이를 차기 문주로
생각했다면 그까짓 계집 하나 죽이지 않았다고 척살령(刺殺令)
을 내리지는 않았을 거야...생각해 봐. 동한이가 내 자씩이라
서가 아니고 그럴수 있는 일이야?"
"형님. 저 아이들이 듣고 있습니다."
당천우는 얼른 눈짓을 했다. 당풍준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까닭이었다.
"저 아이들만 해도 그래. 어디서 불쑥 나타난 놈들이야. 사실
말이 났으니 말이네만 점문이란 것도 얼마 전에야 알지 않았
나? 그리고 암기실장과 수독실장, 형옥실장만 해도 그래. 그들
을 죽일 필요가 어디있어? 아 그들이 우리 사촌인 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데 같은 혈존이 아니라니. 그런 억지가 어디
있느냔 말야."
"휴우!"
당천우는 할말이 없는지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그 순간이었다.
"하하하! 전위대주 불만이 많든 것 같군."
쉰 듯하면서도 무게 실린 음성이 어둠 한쪽을 밀치고 들어섰
다.
"사점!"
"유명원죽께서!"
경앗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런...쯧쯧쯧! 오성정(悟性亭)외에는 점문의 일을 말하지 말
라는 철칙을 잊었군 그래."
유명원추 염라독개 당치대였다.
"원주님! 죄송합니다. 그만 당황해서..."
오독일지 당풍준은 얼굴이 사색이 되대 급히 변명했다.
"하하하! 괜찮네. 죄값만 달게 받으면 되지."
그 순간 당풍준의 얼굴은 가관이었다.
인상을 너무 찡그려 우습게조차 여겨졌다.
"저까지 죽이시려고..."
"내일이면 대붕일성니 끝나네. 점문은 정식으로 나설거야. 당
문으로 탈바꿈해서 그 전에 해결할 문제가 있어. 오점이 죽었
네. 왜 죽었는지 아나?"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 싶어 손에 공력을 운기하던 당풍준
은 느닷없이 들리는 엉뚱한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점이야 문주님 대신으로 단비하 놈에게..."
"'점(點)의 칭호를 듣는 사람은 신성한 사람들이야. 하지만 칠
점은 암기실 부대주 풍도건이었어. 왜 그럴까?"
"그는 당연히 이용물..."
"맞아. 풍도건은 바로 당신들을 속이기 위한 이용물이었어. 하
하하! 한때는 말야 당자인과 당철휘가 머리 터지도록 싸운 적
도 있었어. 하하하! 글쎄 독제실장이 당철휘에게 보내는 놈을
중간에서 후위대에게 공격시켰거든, 덕분에 독제실장과 후위대
주는 앙숙이 되었지. 만초신의는 덩달아 자책감에 빠져 단비하
의 손에 죽었고."
"그렇다면 이제는...?"
"너희들 당문 십절이 무서워서 머리를 쓴 것은 아냐. 하지만
너희들이 장악하고 있는 문도들은 보통이 아니지. 그들을 손상
없이 얻는 방법은 머리만 없애는 거였지. 음도란 것을 모르고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도록."
"우리를 죽이러 오셨군요."
암안독살 당천우는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차피 사점 이하는 소모품이야. 만약 회의청에서 네놈들이
문도들을 이끌고 대항했다면 당문은 큰 타격을 입었을 거야.
너희들이 가만히 있어 준 덕에 세 놈을 쉽게 없앨 수 있었지."
"그럼 지금쯤은 저희 수하들마저 장악하셨겠군요."
"그들은 너희 수하가 아냐. 당문의 문도들이지. 무슨 말인줄
알아?"
"전부 문주의 명령에 죽고 산다는 겨야."
"저희들을 쉽게 죽일 수 있겠습니까?"
"내가 손댈 필요도 없어. 쳐랏!"
유명원주는 빈 허공에 대고 일갈을 토해 냈다. 그러자,
쉬익! 쉬이익...!
땅속에서, 나무 위에서, 바위 뒤에서 독달같이 달려나와 검을
휘두르는 무인들. 아! 바로 자신들이 수하가 아닌가. 전문적인
살수 훈련을 받아 암습에는 천하에 당할 자가 없다고 자신만만
하던 중위대주 휘하의 수하들. 마지막 일인이 죽을 때까지 검
을 휘두른다던 당문의 늑대 전위대원들.
"하하하하하...!"
암안독알 당천우는 야공을 올려다보며 앙천 광소를 터뜨렸다.
그는 대항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찔러 오는 검을 무방비로 받
아들였다.
십여 개의 검이 박혀들었다. 전신이 짜르르 울리는 무시독도
투입되었다. 자신이 가르쳤던 환격검법, 그리고 자신이 일러줬
던 독술.
"아! 이 놈들이... 환격검벌의...요체는 변...화..."
그는 말문을 닫았다.
당문에서 태어나 한때는 문주의 물망에도 올랐던 사람. 그러나
당기룡이 문주로 부임하자 전위대를 맡아 당문 역사상 최강의
문도들을 양성해 낸 사람. 불세출의 기재 당영지를 보면서 천
하를 얻은 듯 즐거워했던 서민적인 영웅 당천우. 그의 나이 오
십사 세였다.
오독일지 당풍준은 암안독살의 장렬한 죽음을 목격했다.
"으하하하! 이놈들아 비켜랏!"
그의 손에서 당절삼해가 펼쳐지자 몰려들던 수하들은 썰물처럼
밀려갔다. 비록 오독일지가 자신했던 천하의 고수들이지만 당
문 십절 중 일인을 상대하기에는 큰 격차가 있었다.
"이놈들아! 네놈들이 감히 나에게 검을 들이댄단 말이냐? 내가
너희들의 숙부요, 할아비요, 아저씨다. 그런 나에게 검을 들이
댓."
당풍준의 싸늘한 일갈은 바람만 조용히 부는 숲속에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내가 죽어 주마. 하하하...! 당문이 존속을 살해하는 집단으
로 전락하고 말았구나. 으하하하!"
푸욱!
앙천 광소를 터뜨리던 당풍준은 자신의 심장에 스스로 검을 박
았다.
"치워라."
당치대의 명령에는 한 올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후후후! 대붕전시의 참뜻을 어찌 까마귀가 알까?"
혼잣말을 뇌까리던 당치대는 신형을 띄웠다.
숲속은 다시 정석에 휘감겼다.
당천우와 당풍준의 시신은 암매장되었으며 그 위에 풀잎을 덮
어 흔적을 제거했다. 전위대와 중위대의 문도들은 다시 매복
장소로 돌아왔다. 자신들 집안의 어른이 검의 이슬로 사라졌는
데도 그들은 전혀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휘이익!
단비하는 앞서 달리는 신형의 뒤를 쫓느라고 애를 먹었다.
당치대의 신법은 무천 빠르고 부드러웠다.
단비하 역시 천지봉에서 가람신법을 극성으로 익혔다고 자부했
지만 아직도 당문 십절과 비교하면 상당한 차가 존재했다.
더욱이 그는 당치대가 깨닫지 못하도록 미행해야 한다는 부담
감이 있었다.
두보초당이 일을 보게 된 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한연지와의 만남을 끝낸 후 바로 돌아갈 틈도 없었다. 그녀의
내력을 파괴하지 않았던가. 독사우공이 와서 한연지를 데갔으
면 싶었다. 그래서 한쪽에 숨어 일의 결과를 기다렸다.
다행스럽게도 한연지는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의 지시를 받은 듯 기은촌 여인들이 부산하게 움직였지만
무엇을 하려는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독사우공이 온 것은 삼경(三更)도 훨씬 넘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무림인이라도 여인들만 묵고 있는 숙소로 불쑥
뛰어 들어갈 수는 없었다. 둑사우공은 도강보관의 문가에 쪼그
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되었다. 이제 남
은 것은 한연지의 선택뿐. 분명 독사우공을 진심을 다해 설득
하리라.
'한시름 덜었어.'
한연지에 대한 걱정을 떨쳐 버렸다.
단비하는 부지런히 성도를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날이 밝기
전까지는 당문으로 잠입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봉창문이 열렸다.
야밤인지라 비록 작은 소리였지만 똑똑히 들었다.
무언가 땅에 떨어지고 한 사네가 그것을 주워 가고...
그는 문수보관이라는 현판을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사내의 목적지는 단비하와 똑같았다. 당문...
그리고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두보초당에서 그들이 하는 양을 보고 무슨 일을 획책하는지 깨
닫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리를 떠나려 했다.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려 줘야 하지 않는
가. 그것만 알아도 내일의 싸움은 피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또다시 나타난 사람은 당치대...
쉬이익!
당치대는 역시 당문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는 미행자가 없으리라고 단정을 내렸는지 뒤 한번 돌아보는
일이없었다.
'당철휘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음! 그럼 당문 십절 중 두 명만 남았군. 유명원주와 드러나지
않은 육실장.'
당치대는 독이 깔린 숲속을 무인지경으로 헤쳐 나갔다. 당문에
서 독을 살포했으니 위치를 잘 아는 탓도 있지만 독에 대한 자
심감이 없으면 할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들 문파의 이름이 점문이었다. 은점이 당문주인가?'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다.
삼절 진인에게 보내는 전서에는 '일점(一點) 전(前)' 이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삼절 진인이 일점, 유명원주 당치
대가 사점이라는 말이 된다. 오점 이하는 모조리 죽은 것 같
고...청성과 당문이 서로 연계된 것은 확실했다. 전서를 갈취
했을 때는 은점이 칠은방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문이 돌아
가는 모습을 보니 당문주가 은점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청성파의 장문이 무엇이 아
쉬워 당문주의 밑에 복속하겠는가. 차라리 삼절 진인이 은점이
고 당문주가 일점이라면 말이 되겠지만.
은점, 이점, 삼점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 내는 것이 해결의 열쇠였다. 그러고 보
니 아버지의 죽음은 대붕전시라는 그들 계획의 발단이었던 셈
이다. 먼저 당씨성을 쓰지 않는 사람들 중 있으나마나 한 사람
들을 죽이고 다음은 귀속사가를 죽여 순수 혈통으로 이루어진!
당문을 만들고, 혈반사접의 독을 실용화시켰다면 귀속칠가는
거추장스러운 짐이었다.
'내가 그들을 죽였군.'
남악 형산에서 혈반사접을 잡아 당문에 보내지만 않았던들...
'응? 그것도 아닌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당기룡이 아버지를 죽인 것은 단비하가 한연지, 당철휘와 함께
사대독문을 찾으러 다닐 때. 그렇다면 귀속칠가의 말살 계획
은 단비하가 당문을 떠나는 시점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당문주는 무슨 자신이 있었기에 당문 세력의 사 할 가까운 인
원을 죽일 생각을 했을까?
도무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목적은 이해하겠는데 발단 동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 당문이 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혈반사접이 독이 있는 이상 무림도 안중에 들어오지 않으리라.
그만한 실력을 갖췄다는 것은 인정해야 했다. 더욱이 청성파와
연관을 맺었으니 아미파 정도는 우스웠을 것이다.
청성...또 청성이 걸렸다. 삼절 진인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자신이 이용 가치.
아무리 생각해도 쓸모없는 인간인데 왜 살려 뒀을까?
'응?'
단비하는 생각을 접고 바위 뒤로 몸을 은신했다.
여태까지 아무 생각 없이 달려온 듯한 당치대가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당문이 자리한 산속, 당문이 살포한 독이 천연의 경계를 서고
있는 곳. 그런데도 주위를 살필 정도라면 상당히 중요한 곳이
리라.
당치대는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절벽 쪽으로닷\가
섰다.
"대붕이성(大鵬二聲)."
그러자 절벽 앉족에서 화답하는 흑호(黑號)가 들려 왔다.
"대붕비익(大鵬飛翼)."
"대붕전시(大鵬展翅)."
잠시 후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절벽의 한쪽이 벌어졌
다.
아! 천연적인 동굴이었다.
입구를 바위로 막아 봉쇄했기에 얼핏보면 절벽처럼 보였지
만...
'데붕이성, 대붕비익, 대붕전시.'
단비하는 그들이 나누던 흑호를 되뇌었다.
동녘이 밝아오는지 어둠을 몰아 내며 세상이 환해졌다.
'좋아, 해 보자.'
단비하는 슬그머니 일어서 주위를 예리하게 살폈다. 아무도 없
었다. 그러나 체감(體感)은 위험을 경고했다. 동굴 안쪽은 겉
으로 드러난 것보다 더욱 무서운 실력을 갖추고 있을 당문주가
있을 수도, 아니면 당문 전체를 능가하는 세력이 숨쉬고 있을
지도 몰랐다.
단비하는 동굴 입구로 다가가 당치대가 발했던 흑호를 말했다.
"대붕이성."
"대붕비익."
과연 안에서는 똑같은 흑호가 들려 왔다.
"대붕전시."
꾸르르릉!
움직인다. 과연,
커다란 바위는 꿈적거리는가 싶더니 스르륵 밀려났다.
단비하는 품에서 독 여덟 봉지를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는
조심스럽게 진입했다.
"누, 누구냐?"
동굴 입구에서 출입구를 관리하던 복면인은 처음 보는 얼굴에
당황했는지 더듬거리는 음성으로 물어 왔다.
파악!
그의 말이 끝나는 것보다 단비하의 손에서 절음십이박이 터지
는 게 빨랐다.
복면인은 신음 한마디 터뜨리지 못하고 이승을 하직했다.
찰나간에 발생한 일이었다. 이미 완숙으로 접어드는 절음십이
박과 함께 내력이 발산되는 방사가 만들어 낸 절묘한 한수였
다.
쉬이익!
단비하는 눈을 부릅뜨고 신속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에는 일 장 간격으로 횃불이 걸려 있어 전혀 어둡지 않
았다. 그러나 그런 점이 오히려 단비하의 행동을 방해했다.
"헉! 여기는..."
단비하는 진정으로 놀라고 말았다.
진땀을 흘리며 무려 오십여 장을 달려온 끝은 혈뇌옥이었다.
당문 뒷산을 통해 들어갔던 혈뇌옥은 머리털을 곤두서게 할 만
큼 음침했다. 시신 썩는 냄새와 지하 특유의 습기와 냄새가 진
동했다. 푸석하게 밟히던 흙, 시체에 맛이 들린 쥐들...
흑호까지 주워대며 들어온 길은 깨끗했다. 너무 깨끗해 지하
궁전으로 향하는 길인 줄 알았다. 점문이라는 단체의 비밀 거
처로는 적당하다 싶었다. 그런데 혈뇌옥이라니.
막다른 곳에 있는 돌문을 열자마자 코끝을 파고드는 악취는 분
명 혈뇌옥 특유의 냄새였다. 시궁창 냄새가 오히려 향기로울
정도의...영원히 잊지 못할 냄새.
'끝까지 가보자.'
단비하는 조심스럽게 한걸음씩 움직였다.
이 년 전 어둠이 익숙해지고 가느다란 소리가 천둥 소리처럼
크게 들릴 무렵 유난히 활기 찬 목소리를 들었다. 바로 당씨
혈족 중 가장 복없는 사람들의 말소리였다. 혈뇌옥을 제집처럼
여겨야 하는 뇌옥지기들이었다.
그들의 숫자는 모두 열여섯.
'하나!'
파아앗! 쿵!
이들은 무공을 할줄 몰랐다.
혈뇌옥에 관한 사항은 철저한 비밀이었으니, 혈뇌옥을 지키는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졌다. 그들은 특수한 환경 속에서
자랐고 고독에 익숙해졌다. 말이 좋아 뇌옥지기지. 그들 역시
수인(囚人) 신세였다.
단비하는 첫 번째 뇌옥지기가 있던 뇌옥문을 열었다.
끼이익...!
문은 잘 열려지지 않았다. 혈뇌옥에 있는 문 치고 잘 열리는
문은 하나도 없었다. 지반이 물러서 뇌옥문의 육중한 무게를
이기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뇌옥문을 고칠 필요는 없었다.
혈뇌옥에 들어온 사람들은 전부 생체실험의 마지막 단계를 이
겨 낸 사람들로 극히 내 성이 강한 인간들뿐, 그런 사람들은
흔치 않았고 한번 들어오면 살아서 나갈 생각을 버려야했다.
단비하는 안을 들여다 보고 치를 떨었다.
안에는 한무더기의 백골이 엉켜 있었다.
완전히 살이 썩어 반짝이는 인광(燐光)을 발하는 것이 대부분
이었지만 개중에는 아직도 살점이 붙어 있는 유골도 보였다.
그런 유골에는 한결같이 독충이며 쥐들이 달라붙었다.
'잔인한 놈들! 인간 백정들...!'
단비하는 분노가 치솟았다.
이들에 비하면 생체실험의 대상자들은 편안한 죽음을 맞이한
셈이다. 그들처럼 한곳에 몰아넣으면...상상하기도 섬뜩했다.
철저한 강자존의 세계가 연상되었다. 약한 자는 강한 자의 먹
이가 되는...
다른 뇌옥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들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당문에서 이렇게 몰살시킬 만한 사람들이라면...아! 있었다.
귀속칠가의 식솔들. 사내들이 청성산 한 귀퉁이에서 억울한 죽
음을 당하는 동안 그들의 식솔들은 혈뇌옥에서 약한 자의 살점
을 뜯어먹으며 목숨을 연명했다. 결국은 모두 이렇게 죽고 말
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의 육신처럼 자연적인 독이 많은 동물도 드물었다. 특히
죽어서 발산하는 시독(屍毒)은 독사우공의 비홍사보다도 치명
적이었다.
'모두 죽인다.'
단비하의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자신이 당한 것은 용서할수 있다고 해도, 아비를 죽인 원수는
당문주의 죽음으로 보상받는다 해도, 이들의 죽음은 누가 책임
질 것인가.
하기는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후손이 존장을 살해하는 당문이
니 무슨 짓인들 못하랴.
단비하의 행동은 민첩해졌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을 죽이기로 작정한 것이다.
파아앗! 둘! 파아앗! 셋!...파앗! 열여섯!
뇌옥지기들이 모두 심장이 정지되어 쓰러지는 데는 채 일 각도
걸리지 않았다.
단비하는 격앙된 마음을 가라앉혔다.
혈뇌옥에 들어온 목적이 다시 상기되었다.
흑호까지 주고받은 곳이 아닌가? 그런데 무인은 한 명뿐이라?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혈뇌옥으로 들어온
당치대는? 당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혈뇌옥의 다른 문을 이용하
시는 않았을 텐데...
'다른 통로가 있을 거야.'
단비하는 뇌옥지기들을 죽이느라 간과했던 혈뇌옥의 모든 부분
을 샅샅이 훑어 나갔다. 뇌옥문도 남김없이 다 열어 봤다. 모
두 삼십 개의 뇌옥. 안에는 최소 두 개에서 많게는 아홉 구의
백골이 발견되었다. 당문은 잔인하게도 죽은 시신을 치우지도
않은 뇌옥에 수인을 집어 넣은 것이다. 아니면 처음처럼 한꺼
번에 집어넣었든지.
혈뇌옥에는 별다른 통로가 발견되지 않았다.
'통로?'
통로는 별다른 이상이 없을 텐데. 안으로 진입하면서 얼마나
신경을 곤두 세웠던가. 혹시 앞에서 적이나 함정이 불쑥 튀어
나올지 몰라 곳곳을 세심하게 더듬었는데.
하지만 지금 가장 의심스러운 곳은 통로뿐이었다.
동굴 입구는 천연적으로 형성되었으되 안쪽은 인공이 가미된
곳이었다. 지반이 물러 파기는 쉬웠겠지만 붕괴 우려가 있어
곳곳에 굄목을 받쳐 놓았다.
'여기다. 음! 이렇게 위장해 놓았으니 지나쳤을 수밖에."
동굴의 다른 벽면과 전혀 틀리지 않은 곳. 바닥에 떨어진 조그
만 돌부스러기가 없었다면 발견하지 못했으리라.
"대붕이성."
단비하는 혹시나 하는 심정에서 입구에서 주고받은 흑호를 나
지막한 소리로 외쳤다.
"...!"
잠시 기다렸지만 안에서는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대붕이성!"
이번에는 조금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역시 무응답이었다.
'이만한 곳을 한 명이 지킨다면 말이 안 돼.'
단비하는 다시 독을 꺼내 들었다.
독이란 것은 절독과 하독 방법이 탁월하면 절대 강자로 부상된
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수량의 한계를 느껴야 한다는 단점도
있었다. 지루한 소모전(消耗戰)을 펼친다면 절대 강자도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단비하의 사정이 그랬다.
열여섯 명의 뇌옥지기들을 죽이는 데 사용한 독이 모두 열여섯
봉지. 남은 것은 단 다섯 봉지뿐이었다.
끼이익!
직감은 옳았다. 돌 부스러기가 떨어진 곳은 또 다른 동굴의 입
구였다. 문에서 나는 소리가 적막한 동굴 속을 천둥처럼 울렸
다.
화아악!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하얀 안개.
'암습!'
단비하는 황급히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며 절음십이박을 전개
했다. 느낌이 강렬했다. 산중에서 호랑이를 만난 느낌이랄까.
오금이 저리면서도 짜릿한 전율이 전신을 관통했다.
'혈반사접의 독!'
절음십이박을 전개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무작정 하독했다면 자신의 독이 오히려 밀렸으리라.
청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난 복면인들은 치명적인 약점을 가
르쳐 주었다. 문제는 독을 하독하는 녹피수투에 있었다. 장심
에 독을 넣고 살포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러자니 자연 손의
위치가 문제였다.
대부분의 복면인들은 선 새로 하독했고 팔의 위치는 어깨 높이
였다. 절음십이박의 부드러움은 그 틈을 파고들었다.
여덟 명과 싸우면서 단지 네 봉지밖에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은 일독에 두 명의 목숨을 앗을 수 있었기 때문. 그만큼 미
세한 틈새가 크게 부각되었다.
안에서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급작스런 기습을 전개하고도 다음 행동이 없는 것이다.
'내가 이겼군.'
단비하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입구 근처에는 복면인
두명이 사지를 쭉 뻗고 누운 채 아무 말도 없었다. 흑호...흑
호가 문제였다. 여기서부터는 다른 흑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만약 이들에게 안으로 연락할수 입는 방법이 있다면?
고전(苦戰)이 예상 되었다.
'여기가 진짜 당문의 심장이군.'
팽팽히 당겨 오는 심장의 박동 소리가 북소리처럼 크게 울렸
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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