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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十八 章. 노안(老顔), 어처구니없는 발상
( 一 )
무산파파는 미독환사의 뱃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뚫어지게 응시했다.
"전 장로 정히 안내하지 못하겠는가?"
미독환사는 무산파파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했다. 장문의 심정
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조만간 일이 끝난다고 하지 않았던
가. 잠시만 참았다가 나중에 따져도 될 것을, 옆에 있던 제갈
문이 불쑥 끼여들었다.
"장문, 지금은 참아야합니다. 장문은 일파의 장(長)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갈문. 닥쳐랏!"
무산파파의 입심이 거세졌다.
"전 장로가 정히 안내하지 못한다면 오늘 바로 당문을 칠 수밖
에."
"장문, 무례한 말씀 올리는 것을 양해 바랍니다. 저는 비록 늦
게 입문했지만 오늘의 무산파를 이룬 데는 저의 힘이 컸습니
다. 그렇게 일군 세력을 보람있게 쓴다면 누가 뭐라 하겠습니
까? 하지만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될 곳에 쓰는 것은 제가 말리
겠습니다."
"제갈문!"
"제갈 선생, 말씀이 지나치시오."
무산파파와 미독환사가 동시에 분노를 터뜨렸다.
"그러기에 먼저 양해를 바란다고...헛!"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무산파파의 손에서 살포된 붉은기류
가 제갈문을 향해 쏘아졌다. 제갈문은 황급히 자신이 알고 있
는 최상의 신법을 전개해 옆으로 몸을 튕겨 냈다. 하지만 허공
으로 몸을 띄웠던 그의 몸은 둔중한 울림을 내며 떨어졌다.
"자, 장문...왜?"
"말하지 말라고 했다! 나를 가로 막는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죽인다고 했다!"
무산파파의 진노는 하늘에 닿았다.
'휴우! 할수없지. 인연의 매듭은 풀어야 하니까.'
"안내하겠습니다. 그 전에 먼저 전서로 의사 타진을 해봐야 합
니다. 저도 눈을 가린 채 들어갔기 때문에..."
"전서구까지 받아왔단 말이냐? 좋아, 전서를 날려라."
미독환사는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면서 제갈문의 입에 해독단을
물렸다. 다행히도 제갈문이 당한 독상은 그리 중하지 않았다.
죽일 마음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 * *
단비하는 또 다른 혈뇌옥을 구경했다.
이번 뇌옥은 먼저 것보다 훨씬 나은 편이었다. 우선 횃불이지
만 빛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가.
두번째 동굴 입구에서부터 이십 장을 들어오자 좌우로 쭈욱 늘
어선 뇌옥이 나타난 것이다. 단단한 석문으로 가로막힌 뇌옥
의 안에는 누가 있을까.
예리한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뇌옥에 있던 복면인들은 청성 관도에서 만났던 복면인들보다
한수 위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단비하 또한 그때보다 몇 단계
진보한 상태였다.
무려 열일곱명의 복면인을 죽였다.
이제 남은 독은 단 한 봉지도 없었다. 지금부터는 순수한 무공
으로 앞길을 헤쳐 나가는 방법뿐. 만약 당문주를 만난다면...
죽음이 반갑게 어루만져 주리라.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돌아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복면인들의 허리춤에서 빼낸 열쇠로 석문의 자물쇠를 열었다.
끽이익...!
이번 석문도 힘들게 열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당신들은!"
단비하는 갑자기 멍해졌다.
청성 도인들...분명 청성파의 청 자배 도인들이었다.
"단비하...? 일수천명 단비하!"
누군가 단비하를 알아보았다. 청성산에서 칠성진을 펼쳐 일검
을 찔러 넣었던 도인이었다.
"네놈도 한패였구나."
청성 도인의 눈에 분노가 이글거렸다.
"지금 무슨 소리..."
"회유 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어서 죽이기나 해라?"
단비하는 비로소 사태의 내막을 추측했다. 성도까지 온 삼절
진인은 문도들을 이끌고 당문으로 왔을 것이다. 그러나 싸우기
는 커녕 당문도들과 협잡하여 암습을 가했겠지. 구파일방의 일
석을 차지했던 청성파는 저항다운 저항 한번 못 하고 힘없이
무너졌으리라.
"잘됐군. 지금쯤 두보초당에서는 아미파가 급습을 받고 있을
텐데, 당신들이 도와주면 되겠군."
"무슨 소리냐?"
"방금 한 말 못 들었소? 두보초당에서 아미파가 당문의 기습을
받고 있다는 말. 자, 이 열쇠로 족쇄나 풀고 빨리 나오시오."
단비하는 석문 열쇠보다 조금 작은 열쇠를 던져 주었다.
도명(道名)을 모르는 청 자배 도인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황급히 족쇄를 풀고 동문들의 족쇄마저 풀어 주었다.
"어서 다른 석문도..."
단비하의 재촉을 받은 청성 도인들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청성 도인 이백오십이 명. 장문의 뜻밖의 변절로 인해 뇌옥에
감혔던 청성 도인들은 채 반 각도 지나지 않아 모두 자유의 몸
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이 통로를 따라 쭉 가면 다른 동혈이 나옵니다. 거기서 우측
으로 가시오. 하산할 때는 당문이 풀어 놓은 독을 조심해야 합
니다. 살포 장소는..."
단비하는 독과 암기가 설치되어 있는 곳을 소상히 설명해 줬
다.
"그런데 한가지만 물어 보겠습니다. 삼절 진인이 왜 도장들을
죽이지 않고 가둬 뒀는지...?"
"하하하! 삼절 그놈은 우리를 회유하려 했습니다. 당문과 손을
잡으면 사천을 지배할수 있다면서...하지만 우리가 배운 것은
지배가 아닙니다. 무공을 배웠다고 약한 자를 괴롭히지 말고
설사 악인이라 할지라도 포용하라고 배웠지요. 그리고 무엇보
다. 장문의 죽음이 의심스러웠는데 삼절은 전혀 조사하려고 하
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놈이 장문도 죽인 것이 아닌가 의심스
럽습니다만..."
도인은 약간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무래도 자파의 치부를
남에게 밝힌다는 게 내키지 않았으리라.
"어서 가십시오. 아미파가 위험합니다. 전갈을 해주려고 했는
데 여기 일도 급해서..."
"소협은..."
"저는 아직 남은 일이 있습니다."
단비하는 뇌옥 안쪽을 바라봤다.
스르릉...!
절묘한 기관이었다.
안에 있는 손잡이를 잡아 당기자 막다른 벽면이 옆으로 이동했
다. 커다란 석문인데도 열리는 소리조차 극히 미약했다.
'어엇!'
단비하는 석문 너머를 보고는 기절할 듯 놀라고 말았다.
당문주 당기룡, 영원히 잊어버릴 수 없는 얼굴이었다.
유명원주 당치대, 그를 이곳까지 안내해 준 사람이었다.,
삼절 진인 제갈부, 그의 미소는 소름 끼치도록 능글맞았다.
그는 머리를 뒤로 돌려 질끈 묶었으며 평생 입고 있었던 도복
을 벗고 강호의 무인들이 즐겨 입는 백색 주자복(綢子服)을 입
었다.
또 한 사람, 꼭 어디선가 본 듯했지만 다시 보면 생소한 얼굴
의 중년인이 묵묵히 앉아 찻잔을 홀짝거렸다.
아! 뇌옥의 안쪽에 위치한 곳은 바로 당문주 당기룡의 집무실
이었다. 호랑이 굴로 스스로 기어 들어왔다.
독이 없으면 한 걸음도 움직이지 마라.
만채실장과 겨루면서 절실히 느꼈던 사실이 영원한 진리였음을
결정적인 순간에 또 한번 깨달았다.
사인 또한 놀란 모양이었다. 그들의 비밀 통로를 통해 단비하
가 들어왔으니...하지만 그들의 놀람은 즉시 가라앉았다. 모든
사태를 파악했고, 그 정도는 무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
였다.
"단비하, 너의 생명력이 질기다는 것은 인정하지. 무려 십이
년 동안 나의 이목을 피해 살아 남았다는 점도 인정하고...아!
또 하나 너를 과소평가 했다는 사실도 시인한다."
당문주는 처음 만났을때 처럼 포근하게 말문을 열었다.
단비하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당문주처럼 여유
로울 수 없었다.
독이 없으니 독술로는 상대할 수도 없었다. 무공으로만 논한다
면 가람검공이 가장 강했다. 절음십이박은 요범의 말처럼 호신
무공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독을 싣기에는 아주 적절한 동작
들이었지만. 그 무엇으로도 이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탈출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한명도 아닌 네 명이나 되니 더 더
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
단비하는 내력을 끌어올려 장심에 집중시켰다. 검이 없으니 가
람검공은 전개할 수 없고 여차직하면 절음십이박을 펼칠 생각
이었다.
"흥! 점문 사람이 다 모였군."
순간 사인의 안색은 기묘하게 뒤틀렸다.
"점문을 아나?"
"당치대가 이야기해 줬지."
"이놈아! 내가 언제..."
당치대는 순간 무슨 느낌을 받았는지 말문을 닫았다.
"몇 가지 물어 볼 게 있는데 대답해 줄 수 있나?"
"건방진 놈...네놈은 여기서 말할 자격도 없는 놈이야. 그나마
말 대꾸라도 해주는 것은 네가 지닌 독술을 존중하는 의미다.
더 이상 나불대지 마라."
말을하는 당치대의 얼굴에서는 은은한 노기가 발산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벌레만도 못하게 여긴 놈에게 십이 년간이나
속았다는 것도 억울한데, 일수천명이란 외호까지 얻었고, 이제
는 버젓이 눈앞에서 막말을하고 있으니...
"내가 묻고 싶은 것은...나를 지금까지 살려 준 이유야?"
단비하의 말에 어디선가 꼭 본듯한 중년인의 얼굴에 어두운 그
림자가 드리워졌다. 비록 잠깐 사이의 변화였지만 사 인의 얼
굴을 세밀하게 응시하고 있던 단비하의 눈에서 벗어나지는 못
했다.
"네놈을 살려 둔 이유? 푸하하핫! 당연히 궁금하겠지, 하지만
모르는 것이 좋아."
당기룡과 삼절 진인,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고개까지 돌려 버렸
다. 아예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처럼 보였다.
그를 상대해 주는 사람은 당치대뿐이었다. 하지만 그도 다른
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형(大兄), 어떻게 하지요? 이놈이 여기서 나왔으니 청성파
놈들을 풀어 줬을 것은 분명하고...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습니
까? 진작에 죽여 버리자니까."
당치대가 대형이라 부른 사람은 뜻밖에도 삼절 진인이었다.
또 다른 혼선이었다.
당문주가 은점인 줄 알았고, 삼절 진인이 수하인 줄 알았는데
그보고 대형이라니 그럼 은점은 누구란 말인가?
"저놈이 신경 쓰여. 우선 제압해."
삼절 진인이 턱으로 단비하를 가리켰다. 순간,
쉬익!
번쩍 하는 순간 코앞까지 다가온 당치대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
였다.
"어딜!"
단비하는 미리 운기해 놓았던 내력을 방사하며 절음십이박을
펼쳤다. 그냥 절음십이박을 전개하려 해도 독과 함께 익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방사까지 따라나왔다.
"죽이지는 말게."
당기룡이 조용하게 말하자 당치대의 기세가 한결 누그러졌다.
하지만 절음십이박으로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단비하의 몸은 거세게 나가 떨어졌다.
무음무영이란 무명을 얻은 한연지까지 피하지 못했던 절음십이
박이 너무 간단히 깨져 버렸다.
'독이 있었어야 해. 독을 다 쓰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다.
단비하는 마혈까지 제압당해 꿈쩍할 수도 없었다.
'음! 아미파 정도는 쉽게 무너뜨릴 줄 알았는데 뜻밖의 변수가
생겼군. 저놈이 청성 문도를 놓아 주었으니."
"구점 휘하에 있던 흑몽(黑蒙) 오십사 명이 전부 투입되었습니
다. 그들과 전위대, 후위대라면 비록 청성이 가세했다고 해도
승산이 있습니다."
"아니야. 이번에는 우리가 져."
삼절 진인은 무명인(無名人)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하지만 청성파와 아미파는 재기할 수 없는 타격을 당할 거야.
겨우 문파의 명맥만 이어 가겠지. 그 정도면 대붕전시는 완성
되었다고 보는데...동생들의 생각은 어떤가?"
"은점께서 그 정도로 이해하실지가 문제입니다."
"흠!"
삼절 진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같은 시각.
아미파 문도들은 아미파 장로인 중봉사(中峰寺) 주지 법적(法
積) 대사(大師)의 인솔하에 두보초당으로 들어섰다.
"아미타불! 정말 시상이 절로 떠오르는 군요."
"허허허! 빼어난 풍경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미산보다는
못하군요."
"하하하! 아미산만한 산이 또 어디 있겠소."
법적 대사는 화엄사(華儼寺) 주지인 법명(法明) 대사(大師)와
한담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한시도 쉬지 않고 두보초
당의 곳곳을 훑어 나갔다.
사위가 너무도 조용했다.
일반 주민들이 한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더욱 수상쩍었다.
'아차, 함정에 걸렸구나.'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 이곳을 보니 사 년이나 머물렀
던 두보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자등명법등명, 스스로를 등불로 삼아, 법을 등불로 삼아 부지
런히 정진하라는 말로, 석가(釋迦)가 열반에 들기 전에 한 말
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다른 의미로 통했다. 적이 매복해
있고 우리가 함정에 빠졌으니 즉시 원음진(圓音陣)을 펼치라는
소리였다.
원음진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천보(天寶) 구년에 아미파의
고승이었던 정문(靖文) 스님이 만든 진법이었다.
불가에서는 목탁을 빼놓을 수 없었다. 구도자와 목탁은 한 몸
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목탁은 항상 일정한 법도에 맞게 치
도록 되어 있는 서로의 약속이었다.
새벽 예불 시간에는 어둠이 가고 밝음이 오는 것을 상징화하여
처음에는 약하게 두드렸다가 차츰 크게 두드리며, 저녁 예불
때에는 해가지고 어둠이 찾아오는 것을 상징화하여 처음에는
크고 세게, 끝을 작게 두드렸다.
밝음과 어두움, 해와 달 등 자연의 원리와 음양의 이치에 순응
하여 소리의 강약을 정한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일체화하여 공심(空心)을 만든 것이 목탁
이니 바로 원음이기도 했다. 이러한 모든 것을 함축하여 삼,
오, 칠, 구 명이 일 조로 화합을 맞출 수 있는 진법을 개발하
니 이것이 즉 원음진이었다.
아미파의 승려들은 점점 거리를 좁혔다. 등과 등을 맞대는사
람, 서로 손을 다정스럽게 잡는 사람, 혹은 앉고, 혹은 허리를
굽혔다.
"쳐랏!"
어디서 들려 오는지 모를 일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두보초
당 근처의 땅거죽이 뒤집히며 당문복을 입은 무인들이 튀어나
왔다.
"도산지옥(刀山地獄)!"
법적 대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미 승려들은 둥글게 원을 그리
며 짓쳐 오는 당문도들을 맞이했다.
쉬이익! 차르륵...!
"으윽!"
"커억!"
죽는 것은 당문도들이었다. 그들이 선공과 기습을 겸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미 승려들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원음진은 바로
일수만수(一手萬手)의 합격진(合擊陣). 정심한 무공을 수련한
아미문도의 금도에 죽음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파아악!
하얀 독분이 피어오르면서 상황은 서서히 역전되었다.
"허억!"
"흠!"
아미문도들은 제대로 호흡을 할 수 없었고, 자연히 금도의 기
세는 약해졌다.
설상가상으로 해독약을 복용하고 달려드는 당문 전위대의 위용
은 놀라웠다. 역주만이 소지한다는 투골망이 펼쳐졌다. 모두
열 개, 십력이 출동한 것이다.
고주, 홍원 전투에서 위용을 드날린 전위대의 투골망. 갑자기
쭉 늘어났다 줄어드는 그물망이 펼쳐질 때마다 반드시 한명의
승려가 처절한 비명을 질러야했다.
이마에 푸른 건을 두른 당문도들의 검은 신랄했다. 그들의 검
은 일검을 전개할 때마다 반드시 피를 불렀다. 비록 죽음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해도 몸을 긋는 검날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바로 전문 살수라는 중위대원들이었다.
가장 골치 아픈 적은 흑색 복면을 한 오십여 명.
그들에게 걸리면 죽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전개하는 하얀
가루는 죽음의 안내자였다. 독분 근처에만 가도 소리없이 무너
졌다.
아미문도들의 행동 반경은 점점 축소되었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전멸...'
법적 대사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믿고 전문도를 맡긴 장문
의 신임을 저버릴 수 없었다.
"밀적금강(密蹟金剛)!"
고막을 찢는 듯한 외침이 터져 나오자 아미 문도들의 신형이
갑자기 활발해졌다.
쉬이익!
전면에 허리를 구부린 동문의 등을 발판삼아 허공으로 뛰어오
른 아미문도들의 금도는 허공에서 햇빛에 반사되어 당문도의
눈에 미쳐 들었다. 그 짧은 순간 허리를 구부렸던 아미문도들
의 금도가 당문도를 베어 갔다.
잠시 상황이 호전되는 듯 했다.
비슷한 인원에 한쪽은 고절한 무공, 또 다른 한쪽은 암기와
독. 치열한 싸움은 한시진 넘게 지속되었고 피가 내를 이뤄 흘
렀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법적 대사는 연신 불호를 외며 쇠로 만든 염주를 암기삼아 위
험한 문도를 구하기 바빴다. 수비가 바로 공격이었다. 문도도
구하고 당문도는 죽이고...
끝내 흑색 복면인들이 문제였다.
그들이 독을 날리는 것뿐만 아니라 본격적으로 싸움에 가담하
면서 사태는 순식간에 기울어졌다.
"아미타불! 세존이시여! 어찌 중생들의 미련한 살겁을 지속시
키오이까."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목향(木香), 목강(木綱)...선기(善棄), 선석(善石)...
이미 이백여 명의 아미문도 중 백오십여 명이 혈수에 잠겨 들
었다. 치명적인 손실. 아마 장문은 이렇게까지 희생이 많으리
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막대한 은자를 줘가며 재건을 도와줬던 무산파는 그림자도 비
치지 않았다. 자파의 이익이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시대이
니 그들을 욕할 필요는 없지만, 인간 이하의 행위를 저지른 당
문도를 징계하지 못하는 것이 원통했다.
"팔방풍우(八方風雨)!"
법적 대사는 마지막 일성을 토해 냈다.
무림에서 시전하는 팔방풍우의 초식이 아니었다. 아미파 장로
여덟명이 일심으로 펼치는 원음진 마지막 초식이었다. 원래는
아흡 명이 구품여래(九品如來)를 시전해야 되지만 법상이 당문
의 세작이었으니.
그때였다.
"와아! 당문도를 척살하고 아미를 구하라!"
"인간은 빈손으로 태어나니, 빈손으로 돌아가라!"
갖가지 함성과 함께 도복을 입은 도인들 이백오십여 명이 전장
으로 뛰어들었다.
"아미타불! 하늘이 버리지 않았음이야. 아미타불!"
법적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청성 도인들이 가세했음에도
상황은 수평적 관계를 유지했다. 이쪽 두 명의 목숨과 저쪽 한
명의 목숨이 맞바뀌었다. 그만큼 투골망과 복면인들이 펼치는
독은 무서웠다.
그 순간,
컹! 커컹! 커엉...!
느닷없이 개 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십 마리의 개가 전장에
달려들었다. 개들은 특별한 훈련을 받은 듯 무서움을 모르고
당문도들에게 달려들었다.
"이런, 개새끼들이..."
퍼억! 컹!
화가치민 당문도가 개를 발로 걷어찼다. 물론 개는 내장이 으
스러져 주둥이에서 피를 흘리며 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그 순
간을 노리고 짓쳐 들어온 청성 도인의 칠십이파검에 그는 그만
목을 내 놓아야 했다.
여러 곳에서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그것은 흑의복면인들이라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과 달라서 개들은 죽음이란 글자를 몰랐다. 본능은 남아
있을 텐데. 득달같이 달려드는 모습이란...
전위대는 명예를 고수했다. 그들은 단 한 명도 물러서지 않고
죽음을 맞이했다. 적이지만 그러한 용기만은 칭송 할 만했다.
중위대는 사십여 명의 시신을 버렸다. 살아 돌아간 당문도는
겨우 열 명 남짓.
복면인들의 시신이 가장 적었다. 중위대와 비슷한 숫자였음에
도 그들의 시체는 열아흡 구였다.
반나절에 걸친 지루한 싸움은 청성과 아마 그리고 가장 나중에
개떼를 몰고 온 토비들의 승리로 장식되었다.
삼절 진인의 예측은 틀렸다. 아미파는 그의 예측대로 멸문에
가까운 치명타를 받았다. 살아남은 무승은 겨우 삽십여 명. 백
칠십여 명이 해탈했다. 그 중에는 법명(法明) 장로(長老)와 법
건(法乾) 장로(長老)도 포함되었다.
청성파 이백오십이 명의 도인 중 죽은 사람은 육십삼 명이었
다. 거의 무공이 약했던 하자배 도인들이 대부분이었다.
후일 무림이 두보초당의 초당이란 글자를 따서 초당(草堂) 전
투(戰鬪)라고 부른 대겁난은 이렇게 해서 막을 내렸다.
* * *
단비하는 조그만 방에 나뒹굴었다.
마혈은 풀렸지만 산공독을 복용하여 내공을 운기하지 못했다.
"끄응!"
당치대에게 일장을 맞은 가슴이 얼얼하게 아파 왔다. 당시에는
숨통이 꽉 막히는 듯했으니 이만한 게 다행이었다. 만약 당기
룡의 제지가 없었다면 가슴뼈가 으스러져 피를 토하고 즉사했
으리라. 구사일생이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방안을 둘러보던 단비하는 한쪽 구석에 죽
은 듯이 앉아 있는 괴인을 보고 깜짝놀랐다.
"너는...당철휘!"
"크흐흐흐...!"
당철휘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팔과 다리가 관절 부분에서부터 잘려져 혼자서는 한 발짝도 움
직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거기에 코와 귀, 혀까지 잘려 이미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뿐인가! 그의 하초(下焦)가 있던 곳에서는 누런 진물이 흘러
나오며 심한 악취를 풍겨 냈다.
"설마 당치대가!"
단비하는 당철휘에게 다가가 천천히 바지를 벗겨 내렸다. 그리
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아! 그의 하초는 잘려진 상태였다.
치료조차 하지 않아 점점 썩어 들어가는 몸. 진정 죽는것보다
못한 삶이었다.
아비를 죽인 자식이 받는벌(罰)이라고하면 간단했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너무 잔인했다.
"크흐흐흐! 끄으...!"
당철휘는 괴성을 질러댔다. 동물이 울부짖듯 처절한 괴성을...
죽여 달라는 소리였다. 그의 차가운 심장에도 눈물 담을 곳은
있었던지 눈물을 철철 흘리며 죽여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나는 내공을 잃었어. 내가 죽이려면 네 고통이 심할거야. 괜
찮아? "
당철휘는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단비하의 마음이 변
할까봐 애절한 눈빛을 보내 오면서.
"그럼..."
단비하는 두 손으로 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꾸욱 눌렀다.
"끄으윽...!"
당철휘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눈을 희번덕거
렸다.
잠시 후, 그는 만면을 찡그린 채 숨을 거두었다.
쫘악...!
무명인은 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귀싸대기를 후려쳤다.
당철휘를 죽인 것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다. 당철휘의 참혹한
육신은 그의 걸작품이었다.
얼마나 노려 보았을까?
눈싸움에 지기 싫어 뚫어지게 쳐다보던 눈이 뽑혀질 듯 아파올
즈음 무명인의 입에서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네놈이 아니고 다른 놈이었다면 바로 죽였을 게다. 네놈은 죽
이고 싶지 않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구차하게 살아 왔던 목
숨이니 잠시 외도했다 생각하고 다시 구차하게 살아라. 그것만
이 너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잊지 마라."
"호의를 베푸는 이유를 알고 싶다면?"
"네놈이 얼마나 치욕스럽게 사는가 지켜 보고 싶으니까. 다른
이유는 없다."
아니다. 그의 말에는 정감이 배어 있다. 분명 처음보는 사람인
데.
"이상하군. 그날 당치대는 분명 나를 죽이려 했어. 그런데 당
기룡이 말려 줬지. 이번에는 당신이 살리려고 애를 쓰는군. 후
후후! 내 몸값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지?"
"천둥벌거숭이. 네놈 말 한마디에 목숨이 오간다는 사실만 알
아둬라."
그의 말에는 정이 스며 있었다. 생면부지의 타인에게는 줄 수
없는 정이...
단비하는 작은 방을 나오며 눈이 부신 듯 인상을 찡그리며 밝
은 햇살을 쳐다보았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햇빛이었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요?"
"전에 한 말이나 잊지 마라."
"그런데 가면은 뭐 하러 썼소?"
"나불대지 마라. 죽는 수가 있다."
무명인은 단비하를 데리고 인공 연못에 있는 정자로 데려갔다.
정자안에는 삼절 진인, 당문주, 당치대가 의자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 전면에는 갈색 장포를 입고
은색 가면을 쓴 사람이 호면을 감상하고 있었다.
"단비하를 데려 왔습니다."
무명인은 은색 가면인에게 예를 취하고는 한쪽 자리에 가서 앉
았다.
그역시 마치 대죄라도 지은양 고개를 푹 떨꿨다.
은색 가면인은 잠시 더 호면을 감상하다 고개를 돌렸다.
"네가 일수천명이냐?"
"단비하라 한다."
"허허허! 겁이 없구나."
"당신도 독제실의 독을 맛보며 십사 년간 살아 보면 알 거야.
겁이란 편한 사람들이나 갖는 사치스러운 감상이란 걸."
"허허허! 당신이라...참 오랜만에 듣는 말이구먼. 반말도 오랜
만이고."
은색 가면인은 단비하의 당돌한 말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상한 것은 삼절 진인 등의 태도였다. 그들은 마치 은색 복면
인의 수하라도 되는 양 입조차 벙긋거리지 않았다. 그것은 말
을 조심하라고 누누이 당부했던 무명인도 마찬기지였다.
"네가 당철휘를 죽였다고?"
"그게 인간이 할 짓인가? 죽이고 싶으면 깨끗이 죽이는 게 인
간의 도리야. 혈뇌옥, 독제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후손이
존장을 살해하고. 이런 망할 세상을 만든 사람들이나 당할 처
벌이지."
"허허허! 네 아비는 누가 죽였다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아비를
죽인 사람을 어떻게 할 작정이냐? 그들을 용서할수있나?"
순간 단비하는 차디찬 한광을 발산시켰다.
"그전에...당신이 은점인가?"
"그래, 내가 은점이야."
"가면을 벗는 게 어때? 하늘을 우러러 얼굴을 들지 못할 일이
라도 저질렀나?"
순간 여태까지 너털웃음을 터뜨리던 은색 가면인의 안색이 싸
늘하게 굳어졌다.
"노옴...! 귀엽다고 봐 주었더니..."
"후후후! 당신이 귀엽게 봐주지 않아도...커억!"
단비하는 복부를 인두로 지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런 아
픔은 처음이었다. 정확히 건리혈(建理穴)을 맞았다. 건리혈에
그만한 통증이 일어날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놀란점은 은색 가면인의 놀라운 무공, 다가오
는 것도, 어떤 수법인지도 파악하지 못할 만큼 빠른 공격이었
다.
"도저히 구제 못 할 놈이군."
"크윽! 그런 말은...남들도 했어."
"제안을 하겠다. 독을 완성시켜 주면 목숨을 살려 주겠다."
"푸후후후! 그독으로 또 누구를 죽이려고..."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독을 완성하겠나? 아니면 죽겠나?"
"후우! 되게 아프군. 내 말했잖아. 죽음이라든가 겁이라든
가...그런 것은 두렵지 않다고."
은색 가면인은 잠시 분노의 화염을 발산했다.
"무슨 독인지 물어 보지 않나? 너도 독을 아니까 흥미있을텐
데?"
"내가 흥미를 느낀 독은 세상에서 하나도 없어."
"허허허! 말을 함부로 하는군."
그때였다. 하늘에서 꾸르륵, 하는 소리가 들리며 전서구가 날
아왔다. 털이 백설같이 하얀 전서구였다.
은색 가면인은 잠시 전서를 들여다 보고는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꾸르륵! 꾸르륵...!
전서구가 발하는 울음 소리만이 조용한 전각의 침묵을 깼다.
"이점, 혈반사접을 언제쯤이면 완성할 수 있겠느냐?"
대답을 한 사람은 당문주 당기룡이었다. 그가 바로 이점이었
다.
"마지막 변태를 중지시키지 않는다면..."
"않는다면?"
"자신 없습니다."
"허허허...!"
은색 가면인은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당문주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단비하에게 돌렸다.
"살아있는 생물의 진화를 본 적이 있느냐?"
단비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제 이들이 원하는 것을 알았
다. 혈반사접이었다. 혈반사접의 독기를 실용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혈반사접 자체를 원했다.
오오! 하늘이 전율할 일이었다.
살아 있는 독나방들이 중원 전토를 누빈다면...인간의 종말이
었다. 하늘에서 눈송이처럼, 여름에 쏟아지는 폭우처럼 내리는
독가루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하로 숨어 들어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다.
혈반사접의 독은 영구독이었다.
독에 중독된 대지는 적어도 오십 년이 지나야 원 상태로 회복
될 것이다. 자연은 자정능력(自淨能力)이 있어 그나마 오십 년
이었다.
"혀, 혈반사접!"
"허허허!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구나."
"다, 딩신들은 미쳤어."
"이놈! 말조심해라! 혈반사접을 만들어 유포시킨다면 그것은
누구도 말릴 수 없다. 그야말로 미친놈들이나 하는 짓이지. 그
러나 혈반사접을 인위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면? 허허허! 그보
다 강한 문파가 지상에 존재할 것 같으냐?"
"미쳤어. 정말 미쳤어."
단비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일,
그렇다고 치자. 독나방을 조정할 수 있다고 하자. 그러나 살아
있는 생물은 자연적으로 진화를 거듭한다, 혈반사접 역시 인위
적으로 조절하지 않아도 스스로 진화할때가 올 것이다. 그때는
아무도 감당하지 못한다. 생물은 속박을 벗어나고 싶어한다는
것도 모른단 말인가.
"삼점, 단비하에게 혈반사접을 구경시켜 줘라. 그리고 빨리 돌
아와라. 네 어미가...오고 있구나."
무명인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추스르고
단비하의 어깨를 쳤다. 따라오라는 표시.
단비하의 발걸음은 휘청거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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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고 갑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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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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