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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국의 방향
청나라는 신해혁명(1911)으로 망했다. 결과를 놓고 보면 청나라는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시작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가 위기에서 멸망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
20세기 초 중국의 철학자 량수밍의 사진. <출처: 天竺鼠 at Wikimedia.org>
청나라는 영국과의 아편 전쟁에 패배하면서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서양의 무기와 기술을 도입해서 서양을 따라잡자는 양무운동을 벌였다.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변화의 초점을 기술에서 제도를 옮겼다. 낡은 제도를 고쳐서 사회체제를 확 바꾸려는 무술변법(1898)을 실시하려다 좌절되었다.
이로써 청나라는 자체적으로 변화를 일구어내서 시국(時局)을 주도할 수가 없게 되었다. 청나라를 대신하여 새로운 세력(주체), 즉 쑨원(孫文, 1866~1925)의 혁명파가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하게 되었다. 더 이상 황제 체제를 지속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이전과 다른 신중국이 등장할 것으로 기대했다. 이러한 와중에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가 황제와 같은 권력을 장악했다. 혁명이 성공하여 청나라가 망했지만 사람들은 아직 황제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 체제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혁명을 했지만 정작 역사는 앞으로 가지 않고 뒤로 간 것이다.
거꾸로 가는 역사는 신중국을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다시금 ‘신중국의 방향’을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방향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신중국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는 역사를 받아들이는 구중국인의 의식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다수의 중국인이 아직 신중국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다. 어린아이가 어른의 옷을 입은 형국이었다.
먼저 20세기 초의 상황이 얼마나 시간적으로 뒤섞여 있었는지 일화를 통해 살펴보자. 1949년 또 다른 중국 혁명을 이끌었던 마오쩌둥은 옛날 방식대로 훈장의 감시 아래 회초리를 맞으며 고전을 외워야 했다. 중국 현대 학문의 길을 연 후스(胡適)는 전통적인 가숙(家塾)에서 고전을 암송했다. 전통 학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량수밍은 세계의 인문 지리적 환경과 당시의 세계 대세를 소개하는 [지구운언(地球韻言)]의 책을 배웠다1). 이들은 실로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인 환경 속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1920년대에 이르면 상황이 또 바뀌게 된다. 19세기 말에서 1910년대까지 유럽은 중국의 미래였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발발하고 그 참상이 중국에 전해지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량치차오가 전후의 유럽을 방문하고 [구유심영록(歐遊心影錄)]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유럽은 더 이상 중국의 미래가 아니다”라는 자각에서부터 오히려 “이제 중국이 유럽을 구원할 때이다”라는 기대까지 참으로 다양했다.
1927년 이전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의 사상가 천두슈의 사진. <출처: Sgsg at Wikimedia.org>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신중국의 방향은 두 갈래였다. 하나는 청나라가 망했지만 여전히 구중국에 갇혀서 신중국을 이해하지 못하는 다수를 계몽하는 문제였다. 다른 하나는 중국의 미래로 여겨졌던 유럽이 위기에 빠지자 중국의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 것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중국은 전근대를 넘어서 근대로 힘껏 나아가야 하고 동시에 앞으로 겪을 근대화의 문제를 미리 예방하는 탈근대의 과제를 수행해야 했다. 근대화(서구화) 하나만 해도 만만치 않은데 탈근대를 예비해야 하는 과제까지 생긴 것이다. 이를 이중 과제라고 한다. 이것이 1920년대의 중국이 처한 실제 상황이었다.
1920년대의 인식이 1910년대와 얼마나 다른지 천두슈(陳獨秀, 1879~1942)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신중국을 세우기 위해 1915년 [신청년]에 「청년에게 삼가 고한다(警告靑年)」라는 글을 써서 “자주적이고 진보적이고 진취적이고 세계적이고 실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살아야지 노예로 보수로 은둔으로 쇄국으로 허식으로 공상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라고 제안했다2).
이를 위해 그는 1910년 중국인의 정신을 문제로 삼았다. “원인의 대부분은 우리들의 정신에 뿌리 깊이 박힌 윤리, 도덕, 문학, 예술 등의 여러 영역이 검은 장막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고 때로 얼룩이 져서 용두사미 식의 혁명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단순한 정치 혁명이 우리 사회에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못했으며 아무런 효과도 가져올 수 없게 만들었다3).” 이런 인식에서 보면 중국의 전통적인 윤리, 도덕, 문학, 예술은 신중국을 만드는 데에 자양분이 되기보다 발목을 잡는 장애물로 여겨졌던 것이다.
1920년대 유럽의 위기를 전해들은 량수밍(1893~1988)은 천두슈와 전통적인 윤리, 도덕, 문학, 예술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세 가지 방향을 가능성으로 제시했다.4)
첫 번째 가능성은 천두슈가 1910년대에 내놓았던 길과 닮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가능성은 1920년대에 들어서 점차 세를 얻어가는 길이다. 량수밍은 세 가지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 단정할 수 없지만 애매하게 정리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매듭지어야 한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근본적인 매듭이란 세계 문화의 일원으로서 중국 문화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정체성이 드러나지 않는 상황에서 중국 문화를 회복하자는 주장도, 중국 문화와 서양 문화를 조화시키자는 주장도 모두 알맹이 없는 말의 잔치로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량수밍은 그의 주저 [동서 문화와 그 철학]에서 1920년대 신중국이 나아갈 길을 찾고자 했다. 이 길은 이전에 누군가 걸어갔던 길이 아니라 걸어가면서 만들어야 하는 길이었다. 량수밍은 제1장 서론(緖論)에서 “이 길을 따르라!”라는 식이 아니라 “함께 찾아보자!”라는 제안으로 운을 떼고 있다.
근본적 해결을 향한 그의 열망은 솔직하면서도 진지하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특별한 바람이 있어서 연구를 늦출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의 타고난 성격이 생활과 행위의 무책임함을 대단히 싫어하며, 타당하지 않은 생활과 정확하지 않은 행위를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하려고 하면 옳아야 하고 문제가 없어야 한다. …… 편의에 따라 생활하는 다른 사람들은 사상과 견해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확실하고 편안한 주견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我若是沒有確實心安的主見, 就不能生活的!)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한 주견이 없다는 것이 결코 중요하지 않겠지만,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모른다5).”
이제 량수밍이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을 살펴보자. 그는 유럽을 중국이나 세계의 보편적 미래로 보는 관점을 부정했다. 이것은 유럽의 이성과 과학이 결국 제1차 세계전쟁으로 귀결되었다는 상황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유럽이 세계 문화의 미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중국 문화가 부활하려면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바로 여기서 량수밍의 독창성이 드러난다. 유럽 문화가 보편성을 잃게 되면 다른 문화가 그 보편성을 대체하거나 아니면 복수의 문화가 공존할 수가 있다. 량수밍은 후자의 길을 제안했다. 그는 세계 문화를 서양, 중국, 인도 문화의 유형으로 나누었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양 문화는 문제가 생기면 전향적인 방향으로 해결하여 의욕(요구)을 최대한 충족시키려고 한다.(意欲向前要求) 이에 따라 자연은 사람에게 길을 안내하는 도의 세계가 아니고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재화를 가진 창고로서 개조의 대상이 된다. 그 결과 서양 문화는 자연 정복, 과학만능주의, 민주주의의 특색을 지니면서 근대 사회를 지배하는 생활양식의 지위를 차지했다.
똑같이 비가 오는 상황에서도 문화권에 따라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
중국 문화는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낳는 대상보다 상황을 재설정하여 만족을 구하려고 한다.(意欲自爲調和持中) 예컨대 집에 비가 새면 집을 수리하여 비가 새지 않도록 하는 데에서 만족을 구하는 것이 서양 문화의 방향이다. 반면 중국 문화에서는 집이 없는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비가 새는 상황이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할 상황이 아니라고 여긴다. 즉 자신의 의욕을 상황과 조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인도 문화는 문제가 생기면 문제 자체 또는 해결을 추구하는 요구 자체를 가지지 않도록 한다.(意欲反身向後要求) 즉 서양 문화처럼 문제를 낳은 상황 자체를 근원적으로 뜯어고치려고 하지도 않고 중국 문화처럼 자신의 생각 자체를 바꾸려고도 하지 않고, 다만 문제라고 설정하는 사고 자체를 없애려고 한다. 예컨대 집에 비가 샐 경우, 관심을 해탈에 집중시키지 비가 새는 것 자체를 문제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량수밍은 세계 문화의 유형론을 통해 중국 문화가 살아남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여 중국 문화가 결코 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중국 문화가 지금 당장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지만, 미래의 운명이 불투명하다면 중국 문화가 살아남아도 살아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량수밍은 세계 문화 유형의 단계론을 들고 나왔다. 현재는 서양 문화가 세계 문화를 주도하고, 가까운 미래에는 중국 문화가 주도하고, 먼 미래에는 인도 문화가 세계 문화를 주도하게 될 것이다.
세계 문화의 유형론과 단계론을 통해 량수밍은 신중국이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 1920년의 신중국은 당연히 서양 문화를 나아갈 방향으로 설정해야 한다. 하지만 가까운 미래에 중국 문화가 세계 문화를 주도하게 될 것이므로 중국 문화가 미래의 방향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량수밍은 중국 문화를 먼저 세계 문화의 일원으로 등록시켜야만 먼 미래에 세계 문화를 주도할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량수밍은 중국 문화가 갖는 특성을 정확하게 해명해야 한다고 보았다.
량수밍은 세계 문화의 유형과 단계를 설명하고서 다시금 중국 문화의 정체를 밝히는 데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 정체가 서양 문화와도 달라야 하고, 인도 문화와도 달라야 세계 문화의 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 문화의 정체를 ‘중국 형이상학’으로 불렀다. 그는 문제와 방법의 측면에서 중국 형이상학이 서양이나 인도와 어떻게 다른지 밝히고 있다.
중국 문화는 서양이나 인도처럼 우주 본체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세계를 고정적인 실체로부터 연역하거나 연관 지으려고 하지 않고 변화의 과정으로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제 설정이 다르므로 그것을 푸는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인도와 서양은 고정적이고 정적인 개념에 의존해서 구체적인 사물과 현상을 설명한다. 변화는 개념에 의해 포착되지 않으므로 직각(直覺)에 의존한다. 따라서 중국 문화는 직각으로 변화를 포착하고 인도와 서양 문화는 개념으로 실체를 탐구하는 것이다.
인간이 나이먹고 성장하는 과정에 대해서 중국 문화에서는 서양과는 다른 개념을 보여준다.
예컨대 사람은 아이에서 성인으로 성장하고 다시 노인으로 노화한다. 사람의 생애를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의 개념으로 구분할 때 사람을 각각 서로 겹치지 않고 독립되는 시기로 분할하여 생각한다. 그리하여 유년기는 어떠하고 청년기는 어떠하고 장년기는 어떠하다고 서술할 수 있다. 이것은 서양과 인도 문화의 특징이다.
반면 중국 문화는 사람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에 있으므로 사람을 고정된 시기에 의한 개념으로 포착할 수 없다고 본다. 극단적인 예로 사람이 지금 어떠하다고 말하는 순간에 바뀌고 있는데, 개념을 적용하면 지나간 상황을 묘사할 뿐 실상을 포착할 수가 없다. 개념의 매개와 추론의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곧바로 사태의 실상을 포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 문화에서는 이데아, 신과 같은 실체가 아니라 음양, 강유(剛柔)와 같은 상호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가 많은 것이다. 아울러 중국 문화는 변화가 적합한 정도(適度) 안에서 일어나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서로 돕고 어울리는 ‘조화’를 중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량수밍의 결론은 그렇게 참신하지 않다. 좀 가혹하게 말한다면 전근대 학인들이 이야기하던 것을 새 시대의 언어로 바꾸어 말했을 뿐이다. 그의 최대 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 문화의 유형론과 단계론은 이론적으로 탄탄하지 않다. 량수밍은 누구도 풀지 못한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그 결실은 실지 조사나 인터뷰, 통계 자료나 텍스트 비평이 아니라 사변적 논의에 근거하고 있다. 예컨대 “서양 문화가 직선적이다”라는 주장은 인상 비평에 지나지 않는다. 그 테제를 주장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후스의 용어를 빌린다면 량수밍은 대담하게 가설을 세웠지만(大膽提出假設) 세심하게 사실을 수집하지도 세심하게 실증을 펼치지도(細心搜求事實, 再細心搜求實證) 못한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날 동양철학의 연구 실태를 량수밍의 고군분투와 비교해보면 지금의 우리가 큰 성취를 일구어냈다고 자부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즉 우리는 과연 량수밍이 설정한 문제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우며 그가 내놓은 제안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 있는지 확신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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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確實心安的主見(확실심안적주견) ; 주견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