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리나라에서 현재 가장 잘 나가는 강사는 김창옥 씨일 것입니다. 강의를 할 때 긴장을 전혀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이 강의를 잘 하는 줄은 안다고 합니다.
한 번은 그가 한 기업에서 남성 500명에게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강의는 너무 재미있게 잘 끝났습니다.
그런데 책임자 몇 명이 오더니 막 야단치는 것이었습니다. 여성비하 발언을 너무 많이 해서 난리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반성문을 요구하였습니다.
김창옥 씨는 수천 번을 강의한 내용이었고 다른 곳에서는 아무 항의도 없었으며 심지어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 그들도 재미있게 웃고 들었으면서 이제 와서 그러느냐고 따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강의료는 받아야하니까 참고 반성문까지 작성해서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강의를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미움이 자꾸 솟구쳤습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김창옥 씨는 딸이 유치원에 다니면서도 대변을 자신보고 닦아달라는 것이 이해가 안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도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두 명이 그를 판단하지 않고 그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마치 대변을 다 보고난 듯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그러고 났더니 비로소 자신의 잘못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으로는 이런저런 발언은 삼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기분이 좋아지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말하지 않아도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면 옳고 그름은 둘째고 기분 나쁘게 한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독화살을 맞았는데 화살은 뺄 생각을 못하고 누가 쐈는지부터 찾는 것과 같습니다.
옳고 그름을 잘 따진다고 해서 그 말이 효과를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기분을 살펴야합니다. 감정이 해결되지 않으면 옳고 그름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급류에 떠내려가는 사람에게 아침은 왜 안 먹었느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잔소리는 항상 옳지만 상대의 기분을 살피지 않기 때문에 잘 먹히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옳고 그름을 자꾸 따지게 되는 이유는 사랑의 정신을 잃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어떤 수녀님이 당신 수녀회의 회칙이 자꾸 복잡해지는 것에 대해 우려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윗분들은 세세한 규정을 정해 놓아야 그때그때 편하게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라 여겨 모이면 새로운 규칙들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썩 긍정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가족에 법이 생기면 어떨까요? 남편이 언제 일어나서 무얼 해야 하고 언제까지 들어와서 집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규정되어 있다면 그곳은 가정이 아니라 감옥일 것입니다. 아버지의 정신, 어머니의 정신, 자녀의 정신만 올바로 갖고 있다면 세세한 규정은 필요 없습니다. 세세한 규정이 생긴다는 것은 공동체를 하나 되게 만드는 정신이 사라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법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모든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니 하느님께서는 10가지로 규정을 정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십계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규율을 613개 항으로 세세히 구분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안 되어 관습법을 만들어 수천 개의 규정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모든 규정은 다 지키는데 사람은 미워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법에 얽매여있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들은 단식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 불평합니다. 단식의 정신은 신랑을 되찾기 위함입니다. 육체를 죽여야 영이 강해지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는데도 단식을 하면 그것은 예수님께 무례가 됩니다. 이에 예수님은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는 즐거운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즐거운 자리가 되는 이유는 신랑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좋은 지부터 살펴야합니다. 그렇지 않고 따지는 법들은 정신을 잃은 트집 잡기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래야 당연한 거 아니야?”, 혹은 “저래야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말하며 싸움을 한다면 잠시 멈추고 먼저 ‘지금 사랑하고 있고 그래서 기분이 좋은가’부터 살펴봅시다. 그렇지 않다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정신을 잃은 법을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는 상대에게 적용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랑하여 기분이 좋은 지부터 살피고 옳고 그름을 말해야합니다. 그래야 새 옷에 새 천 조각을 대어 깁는 것이고,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것입니다. 기분과 법 둘 다 지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