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호 吳基鎬 (1865~1916)】 1905년 자신회 조직, 을사오적 처단의거"
1865년 11월 18일 전라남도 강진(康津)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호는 손암(巽庵)이다. 32세 되던 1894년에 서울로 올라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인사들과 교류를 가졌다. 그리고 공직에 입문해 주사(主事)로 발령받아 생계를 해결하다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침략 야욕이 내정간섭으로 나타나고 나라의 정세가 위기에 처하는 것을 보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904년 나철(羅喆)·이기(李沂) 등과 함께 비밀결사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6월 나철·이기·홍필주(洪弼周) 등과 함께 국제여론을 파악하고 외교항쟁을 벌이기로 하였다. 당시는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포츠머스 조약 체결을 앞두고 있는 시점으로 한국 문제가 불리하게 전개될 것을 예상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국제 여론에 호소하여 국권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이에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을 찾아가 이 문제를 협의하고, 대한제국의 정식대표로 강화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하영이 반대하자 나철과 함께 포츠머스 강화회의 참석을 위한 청원서를 외부(外部)에 제출하고 대미(對美)외교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방해 책동으로 무산되었다.
이에 더욱 적극적인 방략으로 전환하여 1905년 7월 26일 제1차 대일외교항쟁(1905. 7. 26~1906. 1)을 실행에 옮기고자 일본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일본에 도착한 일행들은 한국 침략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臣)·모치즈키 류타로(望月龍太郞) 등을 차례로 만나 동양평화를 위해서는 한·중·일 삼국이 함께 동맹해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린(善隣)의 교의(交誼)로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아울러 이토 히로부미와 일왕(日王)에게 격문을 보내 평화조약 준수를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또 일본의 한국 침략이 동양평화를 파괴하는 무익한 처사이니 이를 지양하고 양국의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충고하였다.
이렇듯 일행과 일본에서 대일 외교를 전개하던 중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 강제체결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대일외교항쟁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1906년 1월 24일 일단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제2차 대일외교항쟁을 추진하고자 1906년 7월 3일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귀국하였다.
이어 1906년 10월 20일, 나철·강기환(姜基煥)과 함께 일본 도쿄(東京)로 가서 제3차 대일외교항쟁(1906. 10. 20~1906. 12. 30)을 전개하였다. 이때 한국침략 정책을 수립한 일본 정계의 핵심인물 마쓰무라 류노스케(松村雄之進)·도야마 미쓰루(頭山滿)·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등을 만나 ‘동양 평화’와 ‘한국 독립’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수차례에 걸친 일본에서 외교항쟁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고 내정간섭을 노골화하여 한국을 반식민지화하려 하자 투쟁방략을 바꾸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동지들과 ‘을사오적 처단의거’를 전개하고자 일본에서 단도 2자루를 구입하고, 1906년 12월 귀국하였다. 1907년 2월 3일 나철 등과 함께 ‘을사오적 처단의거’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비밀결사인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200여 명에 달하는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어 박대하(朴大夏)·이홍래(李鴻來)·김동필(金東弼)·이용채(李容彩) 등과 상의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며 ‘을사오적 처단의거’를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모금된 거사 자금으로 김동필이 인천에서 권총 50정을 구입하고 거사 일을 1907년 2월 13일로 정하였다. 2월 13일은 음력 1월 1일로 문무백관(文武百官)이 진하(陳賀)차 입궐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경계 강화로 지방에서 모집한 결사대원들이 서울로 집결하지 못하자 박대하가 거사 일을 연기하였다. 결사대원 30인이 선발되자 이기가 자신회취지서(自新會趣旨書)를 작성했고, 이때 애국가(愛國歌), 동맹서(同盟書), 참간장(斬奸狀)를 작성하여 무기와 함께 휴대하였다. 그리고 윤주찬(尹柱瓚)은 이광수(李光秀)와 함께 대한제국 정부에 올리는 글과 통감부와 일본군사령부 그리고 각국 영사관에 보내는 공문을 비롯하여 내외국인들에게 알리는 포고문을 작성하였다. 이때 참정대신 박제순(朴齊純)을 처단하기로 결정하였고, 김동필은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을, 이홍래는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박대하는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서태운은 법부대신 이재극(李載克) 그리고 이용채는 전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을 각각 맡아 각각 결사대원 10명 내외의 동지들과 함께 처단하기로 정하였다. 거사는 3월 18일, 3월 21일, 3월 25일 3회에 걸쳐 5개 행동조로 나뉘어 시도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삼엄한 경계 때문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때 서창보(徐彰輔)가 붙잡혀 일제 경찰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거사 전말을 밝히면서 동지들이 차례로 붙잡혀 가게 되자 자발적으로 일제 수사기관에 출두하였다. 이로 인해 1907년 7월 3일 유형 5년을 받아 지도(智島)로 유배(流配)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고종(高宗)의 특사로 유배 4개월 만에 나철·이기 등과 함께 풀려났다.
이후 1908년 11월 12일에 다시 나철·정훈모(鄭薰謨)·이건(李健)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제4차 대일외교항쟁(1908. 11. 12~1909. 1. 26)을 계속 전개하였다. 약 2개월 보름 동안 일본에 체류하며 일본 정계 인사들과 만나 한국인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보호 대책을 요청하였다.
1909년 (음)1월 15일 나철·이기 등과 함께 서울 재동(齋洞)에 모여 단군교를 ‘중광’하였다. 단군교 중광에 참여한 인사들은 강우(姜虞)·최전(崔顓)·김춘식(金春植) 등 수십 명으로 함께 대일외교항쟁을 전개한 동지들과 을사오적 처단의거에 참가했던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단군교 중광을 위해 모인 인사들은 취운정(翠雲亭) 아래 6간(間) 초옥(草屋) 북벽(北壁)에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단군교포명서’를 공포하고 단군교를 중광하였다. 다음 해인 1910년 8월 5일 대종교(大倧敎)로 교명을 바꾸었다. 이후에도 대종교 포교활동에 진력하다가 1916년 12월 24일 서울 권농동(勸農洞)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