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잃은 자와 주운 자의 뒤바뀐 운명, 자신의 욕심을 위해 아이를 동생에게 맡기고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언니와 착하기만 한 동생의 대조, 성공을 위해 자신을 버린 남편을 둔 여자와 그녀만을 바라보는 한 남자, 그를 사랑하는 시누이의 삼각관계 등을 다룬 방송 3사의 <인생화보> <황금마차> <얼음꽃>. 평균 시청률 20%를 오가며 나란히 인기를 모은 아침 드라마들이다. 이 아침 시간대는 다른 때와 달리 시청자들을 배려하기 위함인지 시청률 경쟁을 피하기 위함인지 하여튼 친절하게도 30분 간격으로 나란히 편성돼 한 프로그램이 끝나면 연달아 다른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을 만큼 ‘평화’롭다. 이제 <황금마차>와 <얼음꽃>이 나란히 막을 내리고 각각 <그대 아직 꿈꾸고 있는가>와 <당신 곁으로>가 합류하면서 새로운 아침을 맞게 된다. 그렇다면 아침 드라마계가 새로운 지형을 갖추게 될까? 믿었던 남자의 배신과 세인들이 인정하지 않는 사랑, 악독한 시어머니, 미련스러울 정도로 참고 견디는 여자, 예기치 못한 임신과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는 미혼모 신세, 고결한 사랑을 실현하는 순수한 남자 등 ‘아침 드라마 필수 소재 목록’의 재료들이 여전히 등장하고 있긴 한데….
08:05 am 돈에 울고 돈에 웃는 인생사
우선 아침 드라마 릴레이의 첫번째 주자는 KBS-1TV의 TV 소설 <인생화보>. 지난해 8월 5일 6.25 전쟁 통에 전재산이 든 돈 가방을 잃어버려 전전긍긍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 한 집안과 이 돈 가방을 주워 가세를 일으키며 승승장구 하게 된 또 다른 집안을 두 축으로 “하루에 한 가지씩 돈에 대한 건강한 담론을 펼쳐갈 것”이라는 취지로 출발했다. 돈 가방을 잃어버려 아버지 이치도(송기윤)로부터 졸지에 몹쓸 딸 취급을 받고 억척스럽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정림(김지연), 돈 가방을 주운 신용석(한인수)의 둘째 아들 형식(송일국)과 우여곡절 끝에 결국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고 아들을 낳아 미혼모가 돼버린 정림의 언니 애림(김정란), 애림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마음 한구석에 품고 사는 한편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고아들을 가르치며 교육자의 길을 걷는 신용석의 장남 형우(이세창), 형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성장했지만 아버지 신용석이 돈 가방을 주워온 뒤 탁월한 사업 수완을 발휘하는 형식 등 돈 가방의 잃고 얻어 처지가 뒤바뀐 이치도와 신용석 두 집안 자식들의 얽히고설킨 관계와 가족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KBS 미니시리즈 <밥상을 차리는 여자> <컬러> <순수>, 일일드라마 <여자가 사랑할 때> <민들레> 등을 쓴 홍영희 작가와 <또 하나의 시작> <슈팅>, TV 소설 <누나의 거울>, 특별기획드라마 <천둥소리> 등을 연출한 이상우 PD가 의기투합한 작품으로 “내레이션의 비중을 높여 TV 앞에 집중하지 않아도 귀로 들을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어 시청자들로 하여금 소설 한 편을 읽는다는 느낌을 갖게 하겠다”는 제작진의 의도는 성공을 거뒀고 평균 20% 안팎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상식을 초월하는 캐릭터들이 판을 치는 여타 아침 드라마에 비해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평가를 받는 데다 소설처럼 탄탄한 스토리 전개가 가장 큰 강점. 지난주 드디어 이치도가 돈 가방을 주워간 사람이 신용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에 충격을 받은 애림이 형식과의 결혼식 전날 유산으로 쓰러지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인생화보>는 “땀을 흘리지 않고 얻은 돈은 결국 죄를 짓게 되는 원천이 되며 이것을 사죄한 후에야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담을 것”이라는 제작진의 기획 의도에 따라 결국 용서와 화해의 드라마로 전개될 예정이다.
08:30 am 미워도 다시 한번
고부간의 갈등과 남편의 배신, 엇갈린 사랑 등을 그린 <얼음꽃>으로 재미를 톡톡히 봤던 SBS는 3월 3일 방송을 시작한 새 아침 드라마 <당신 곁으로>에선 친구의 여자, 애인의 친구를 사랑하게 되는 아침 단골 소재 불륜과 이에 굴하지 않고 변함없이 사랑을 베푸는 한 남자를 선보인다. MBC의 <호랑이 선생님> <한 지붕 세 가족> <숙희> 의 이홍구 작가와 SBS <오픈드라마>의 ‘아빠 만들기’ ‘봉부라더스’ ‘우리가 어쩌자고 사랑했을까’ ‘악처클럽’ 등을 연출한 홍창욱 PD가 만났다. 푸근한 인상의 손현주가 지고지순 한 사랑을 펼치는 사진작가 원준으로, 변신에 능한 송채환이 험난한 인생길을 걷는 정아로, 김유석이 원준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정아의 옛 애인 경식으로, 이아현이 경식의 약혼자 연숙으로 분해 배반과 사랑의 굴레를 쓰게 된다. 여기에 박인환, 정혜선, 서승현, 남윤경 등 베테랑 연기자들이 가세해 자칫 침울할 수 있는 기본 스토리에 활력을 더하고 다양한 에피소드를 추가한다. 애초에 “고부 갈등, 낳은 정과 기른 정, 첫사랑, 유부남의 탈선, 황혼의 로맨스, 유산에 얽힌 갈등, 애증 등의 통속적인 소재를 밑바탕으로 아침 시간대 주 시청 층의 관심을 촉발시킨다”는 취지를 내세운 <당신 곁으로>의 제작진은 “꿈과 사랑, 좌절과 성공 등 굴곡진 인생 여정을 걸어온 한 여인의 이야기로 ‘사랑은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주제를 전할 계획’이라고.
09:00 am 여자라서 행복하다고?
MBC는 극명한 선악 대결로 시청자들을 자극했던 <황금마차>의 빈자리에 박완서의 1989년작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를 내놓았다. “십 년 정도 지난 책이지만 그때 원작이 제기한 남녀 위상과 결혼의 환상에 대한 허상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는 박지현 작가의 말처럼 제작진들은 “이기와 욕심으로 채워진 이 세상에 사랑과 결혼이라는 제도, 사회적 통념 속에 악몽을 꾸는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서도 희망과 용기, 신뢰와 사랑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낼 것”이라고 한다. 또 “변해 가는 세상 속에 아직 남아있는 남아선호의 잔재, 그리고 이로 인해 피해자라 주장하면서 스스로 가해자가 되어 가는 여자들, 그 와중에도 사랑을 믿고 지켜가려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아직은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도 장담한다. 하지만 이미 1991년 KBS에서 미니시리즈로 제작, 방송된 터라 ‘했던 거 또 하네? 그렇게 할 게 없나?’ 하는 비난도 면키 쉽지는 않다. 유학 간 남편으로부터 갑작스럽게 이혼을 당하고, 그 이후에 만난 동창생으로부터 버려져 결국은 이혼녀에 미혼모라는 타이틀까지 달게 된 차문경 역의 배종옥은 “작가, 연출자와 함께 조율해 문경이란 캐릭터의 현실감을 더할 것”이라며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그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는지 함께 고민하고 인간적 측면에서 생각해 문경의 입장을 공감할 수 있도록 표현하겠다”고 10년 만에 출연하는 아침 드라마에 대한 기대를 전했다. 또한 “사회에 아직 뿌리 깊게 남아있는 결혼과 여성 문제를 진솔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제기하고 싶다”며 “시청자들이 매일 아침에 ‘재미있는 소설을 봤다’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연기하겠다”는 자신감을 표하기도. 배종옥의 말처럼 얼마나 설득력 있는 캐릭터를 그려내느냐에 따라 재탕으로 주저앉을지 새로운 드라마로 자리매김하게 될지가 결정될 이 드라마는 답답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이브의 모든 것>으로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는 박지현 작가와 한철수, 김우선 PD의 깔끔한 구성과 노련한 연기자들의 호연이 더해져 순조로운 첫발을 디딘 것으로 보인다.
같은 시간대 방송하는 KBS-2TV의 <여고동창생>은 “각기 다른 현실 속에서 괴로워하고 힘들어 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꿈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찾아가는 세 명의 용감한 여고 동창생들의 삶을 통해 행복을 의미를 되새긴다”는 아줌마들의 이야기. 언뜻 활기찬 것 같지만 여기에도 과거 있는 여자, 출생의 비밀, 친구간의 시기가 빠지지는 않는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시간대를 점령한 드라마들은 그리 밝지 않은 소재를 다루는 동시에 한결같이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밤 시간대보다 자극적이거나 충격적인 사건이나 인간관계 캐릭터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결국 권선징악적 주제에 늘 충실하다. 이렇듯 아침 드라마가 일정한 틀거리를 갖게 된 것이 단순히 주 시청자 층의 요구 때문일까? 작년 초 ‘아침 드라마답지 않다’는 이상한(?) 평가를 받으며 인기를 얻었던 주찬옥 극본의 SBS 아침 드라마 <외출>을 떠올려보자. 아침 드라마가 어떤 변하지 않을 전형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좀 시대착오적이거나 안일한 생각이 아닐까. 아줌마 또한 ‘새것’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