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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 보다 더 붉디 붉은 핏빛이 여태도 그 서러움의 통곡을 멈추지 않는 그곳 함양 거망산과 황석산.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사십여년을 살면서도 어이타 단 한번도 발걸음을 해 보지 못했던 그 역사의 현장을 오늘에서야 우리
느림보 산악회의 도움으로 그 자취만이라도 더듬어 볼 기회를 갖는다.
차내에선 옆자리에 동석하신 일명 홍쉐프님 덕분에 오랫만에 주둥아리의 호사를 누려 본다.
느림보 리무진이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바쁘게 홍 마트가 문을 열기 시작하는데 그 메뉴가 참으로 버라이어티 하다.
고로케빵과 함께 나온 검은깨 미숫가루는 그 껄쭉한 맛이 천하일미 였었는데 후식으로는 놀랍게도 떠 먹는 야쿠르트 꺼정
제공하시더니 급기야는 자신의 등산 베낭에는 오늘 산 정상에서 끓여 먹을 된장국 재료가 준비되여 있는데 흐미 며칠전
어느 시골에서 직접 구입한 이따마시한 천연 송이버섯 세개와 다수의 잡버섯이 들어 있다는 것이지 멉니껴?
버섯이라면 일능 이송 삼표라 하여 능이버섯이 으뜸이면 송이버섯이 버금이요 여타의 버섯중에선 표고가 최고라고 하는데
홍두깨 대장님 말씀에 의하면 올 해는 천연 송이가 거의 전멸 상태라 현지에서도 상품일 경우엔 1 킬로에 팔십만원을 호가한다고
하신다. 오늘의 첫번째 개구라는 천연송이에 대해서
가난에 허덕이였던 60, 70년도엔 돈 되는 것이면 머리카락을 비롯해서 무어든 외국으로 내다 팔던 시절이였는데 그 당시에 가장
수출 효자 노릇을 했던 물건이 다름 아닌 천연 송이버섯이였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일본에선 얇게 슬라이스된 천연 송이 한 접시를 부모님의 상에 올릴 수가 있으면 평생 효자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는데
물론 이 천연송이의 대부분 물량이 한국에서 공수된 물품이였다.
상품의 송이라고 하면 우선 기럭지가 7~8 센티 이상이면서 좆처럼 생긴 대가리가 우산처럼 날개를 펴지 않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여야 하는데 날짜를 살짝만 넘기기만 하여 이 대가리가 나래를 펴기 시작하면 송이는 개값이 되는 특성이 있다.
당시 비행기 사정이 좋지도 않은 탓과 일본 현지의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여 송이 수출 비행기가 김포 공항에서 뜨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상품의 송이가 개값으로 전락하게 되고야 마는데 이러한 개값 송이를 몽조리 수거해 가는 멍청한 인물이
있어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 했었었는데 이 분에 대한 얘기는 80 년도 초반에 서울에 있는 모 재래시장에서 약초상회를
운영했던 한 지인으로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다소 의아한 부분도 있지만 내 지인이 전해 주던 진술의 구체성이 너무도 명확하여
잠시 소개해 올려 봅니다.
이 멍청하게만 보였던 인물은 재래시장에서 자그만 독립 창고만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 창고에서 송이를 보관하면서
송이의 성장을 억제하는 다시 말하면 천연송이의 좆대가리가 (넘 심했나? 강 대장님! 우리 느림보 카페는 성인들만 들락 날락
거리니깐 늘상 우리네 다리 밑에 붙어서 고생만 하는 젖 얘기 정도는 대충 눈 감고 넘어 가 버리지요 무어.)
꽃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서 길게는 일년녀를 버팅길 수 있는 노우하우를 갖고 있어 김포에서 비행기가 뜨지 못하면 개값에 송이를
구입하였다간 비행기가 뜨기 시작하면 금값으로 되 파는 한마디로 말 하면 봉이 김 선달이가 대동강 물을 팔아 먹는 방식으로
노다지를 잡아 들이자 주위의 사람들이 그 비방을 알기 위해서 색시집에서 곤죽이 되도록 술을 먹여 보는 둥 벼라 별 짓을 다해
보았지만 허사였다고 한다.
이 인간이 창고로 작업을 하러 들어 갈 때는 따라 갔던 예팬네도 외부 철조망 울타리 꺼정만 접근이 허용되었고 남편이 창고로
들어 가기 바쁘게 큼직한 맹꽁이 자물쇠로 창고문을 걸어 잠그는 역활만을 했다는 것이다.
오랜 연구 끝에 주위의 사람들이 알아 낸 유일한 것이 어떻게 사용을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 인간이 타다 남은 재를 사용한다는
것 뿐이였는데 식품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우리 조상들이 냉장고가 없던 시절 이 재를 사용하여 식품을 장기간 보관했다고 한다.
단청이 이미 오래 전에 퇴색된 일주문이 우뚝하게 서 있는 지장골 주차장에서 하차를 하여 채비를 마치곤 이내 산행을 서두룬다.
한참을 계곡길을 오르다 보니 참으로 묘한 장면을 만나게 된다.
중간이나 후미를 선도해야 할 쏘가리,김,산미인 대장님을 비롯한 여타 대장 나부랭이를 한 인간도 후미에서 찾아 볼 수가 업따.
오는 길 차내에서 홍 쉐프님의 자연송이를 넣은 된장찌개 소식을 듣고는 죽기 살기로 홍 대장님 뒤를 쫒아 선등하여 올라
갔음이 틀림 업다.
엄청난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한참을 오르다 보니 산 중턱에서 느림보우 느림보우 하는 소리가 들린다.
후미에 무전기를 든 대장이 없다는 사실을 감지하신 아리수 총대장님께서 후미를 자처하심이 틀림 없어 보인다.
덕분에 오랫만에 아리수님과 함께 등산을 하는 즐거움을 갖게 되었는데 비교적 쉬운 계곡길에서 다소의 여유도 있어 건강에 대한
대화가 이뤄 지게 되었는데 상당히 유용한 정보인듯 하여 잠시 소개해 올리면
아리수 대장님은 어릴 적 시골에서 성장할 무렵에 중이염을 앓다가 만성으로 진전되면서 무려 50 여년이나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니시면서 고생을 하셨는데 요 근자에 증상이라도 완화 시킬 요량으로 분당 야탑역 부근에 있는 표 이비인후과를 찾았었는데
서울 의대를 나오신 젊은 의사분이 약 한달의 말미를 달라고 하여 반신 반의하셨는데 놀랍게도 신의처럼 완치를 해 주시더란
것이다.
잘 들리지 않던 소리가 깽하게 잘 들려 너무도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명문 의대를 나오시고 나름대로 의술이 뛰어난 이 젊은
의사분이 불필요한 과잉친절을 베풀지 않는 약간의 불편한 점이 있기는 했었지만 그 빼어난 의술 하나만은 만방에 널리 알려
자신과 가튼 질환으로 고생을 하시는 모든 분들이 그 은덕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자신의 직무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전문 직업인은 낯짜기 반반한 년이 괜스래 딱딱거리는 것 처럼 궂이 자세를 낮추지 않는다고
한마디 씨부렸는데 옆에서 듣고 계신는 한 여성 산벗님께서 고개를 끄덕이시며 돌삐 동생의 말을 듣고 보니 이제서야
우리 느림보 산악회에서 남정네들만 눈까리에 띄면 갖은 교태와 아양으로 사람의 얼을 빼 놓는 과잉친절의 대가이신 어술리
여사님 나부랭이 무리들의, 자신들의 처진 외모를 극복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이제서야 이해를 하시겠다고 하신다.
마자 디 질때 디 지드래도 난 그자리에서 긍정의 표시로 잠시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외모가 뛰어 나지 않은 건 눈에 대구 비늘 덮어 쒸운 에술리 여사님의 옆지기님 외에는 다 아는 사실이니께네.
드디어 평탄한 계곡길이 끝나면서 가파른 고개길이 시작된다.
돈도 않되는 급한 핸펀이 울려 한참을 씨름하노라니 일행들은 꼬리도 보이지 않는다.
허겁 지겁 다리 사이에서 골든벨 소리가 나도록 죽을 힘을 다해 오르니 오른쪽으로 거망산의 음전한 자태가 보이는 능선에
다 다른다.
묵직한 육산 형태의 거망산은 우리나라에서 마지막 빨치산으로 맹위(?)를 떨쳤던 정 순덕이라는 순박한 한 시골 처녀가
1963년 체포될 때 까지 무려 13년이라는 세월을 숨어서 암약하던 주 활동 무대가 아니던가?
경남 산청군 내원리의 까마득한 산골에서 십대의 나이로 이웃 총각과 혼례를 올렸던 정 순덕은 6.25 동란이 발발하여 인민 괴뢰군
들이 들이 닥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새세상을 만들겠다는 감언이설에 속은 남편이 부역을 하다 또 다시 세상이 바뀌어서 국군
선발대가 들이 닥치자 일신의 위협을 느껴 인민유격대를 자처하며 지리산으로 숨어 들게 되자 국군의 위협과 고문을 못 이겨
결국에는 남편을 찾으러 산으로 올랐다가 본인도 그 자리에 주져 앉게 되고 만다.
산에서 만나 남편과는 약 두어 달을 함께 보내며 신혼의 달콤한 꿈을 꾸는 것도 잠깐이였다.
남편이 전투에서 사살되면서 주로 식당에서 잡역부 일을 하던 정 순덕도 마침내 손에 카빈 소총을 거머 쥐게 된다.
빨치산이란 말은 러시아어 파르티쟌에서 유래되었으며 한국전쟁을 전 후해서 대한민국을 엄청나게 괴롭히던 무시하지 못할
세력이였는데 이들의 실체는 거론 자체가 금기시 되다가 처음으로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게 된 계기는 김 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등산화를 신고 민주화 운동이란 걸 하던 이 태 (본명 : 이 우태)씨가 남부군이란 책을 출간하면서 부터이다.
영화배우 안 성기씨도 남부군이란 영화에 출연을 하였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작자들을 우리 대한민국에게 총부리를 겨눈
불순세력이란 점 보단 억울한 점이 많아 산중에서 투쟁을 하는 낭만적인 휴매니스트로 보는 경향이 있어 몹시 아쉽다.
정 순덕은 내부자의 밀고로 고향땅 내원리에서, 함께 했던 동료는 현장에서 사살되고 본인은 다리에 총상을 입으며 생포된다.
다리를 절단한 정 순덕은 약 이십 여년을 감방에서 투옥되어 있다가 전향서를 쓰고는 석방이 되어 어렵게 살다가 김 대중 정부
시절 남북 화해의 일단으로 몇 몇의 비전향 장기수를 북송시킬 무렵 본인도 북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을 하였지만 거절되어
본인이 원치 않던 이곳 자유 대한민국 땅에서 한 많은 생을 마친다.
흔히 말하는 빨갱이에도 세 부류가 있다.
체포되어 감방 생활을 하면서도 죽어라 전향서를 쓰지 않는 겉과 속이 몽땅 붉은 토마토같은 진빨갱이,노 무현 전 대통령의 장인
어른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다음으로
정 순덕이란 여인은 산중에서 무지랭이로 자라다 어찌할 수 없는 사정으로 십대에 지리산으로 숨어 들어 빨치산 노릇을 했으니
사실 이념이나 사상에 대해서 알면 얼마를 알았겠는가? 그리고 이 우태란 분도 본인이 쓴 남부군이란 책자의 말미에 보면
국군의 손에 불가항력으로 생포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목전에 이르자 스스로 손을 들고 투항을 한 것이다.
내가 볼 적에는 이런 분들은 사과처럼 겉만 빨갛고 속은 흰색인 반빨갱이인데 어쩌면 우리 대한민국에서 가장 골치 아푼 존재는
다름 아닌 민주화니 참여 정부니 하면서 준동하는, 수박처럼 겉은 시퍼렇지만 속은 뽀알갛게 물든 헛빨갱이들이다.
종이 쪽지에 도장 한번 찍는 어쩌면 요식행위에 불과한 전향서란 것을 쓰기만 하면 감형이 되어 석방이 되지만 비전향을
고집할 경우엔 무기수로 평생을 감방에서 썩게 된다.
정 순덕이란 여인처럼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송될 적에 자신은 전향할 의사가 없었는데 감언이설이나 추후를 도모하기 위해서
거짓 전향서를 작성했노라 하면서 슬쩍 전향서를 작성하고 일단 감방을 벗어 날 수도 있는데 이들이 끝내 전향서를 작성하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북에서 남파된 사상범이 거짓이든 감언이설이든 일단 전향서를 작성하고 나면 북쪽에서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선을 끊어 버린다.
그래서 정 순덕이란 여인도 우리 정부에서 북송을 허가해 주었을 지라고 북에서 거부했었을 공산이 크다고 본다. 반빨갱이를?
거망산을 지나 황석산으로 향하는 어느 능선 안부에 늦게서야 당도하니 배 고문님, 신 고문님을 비롯한 후미 일행들이 마악
점심상을 펼치고 있다.
오늘은 우리 느림보 산행에 세번째로 등산을 함께 하셨다는 선한 기운이 뚝 뚝 흘르시는 산초보님과 옆자리에서 함께 맛난 점심을
먹었다.
닉네임만 구렇지 누가 보아도 산초보가 아니라 진정 산행을 탐닉하는 열혈 골수분자 같아 보이신다.
이야기가 엉뚱한 길로 흘러 넘 길어 지는 통에 정유재란 당시 정규 왜구 7만 여명을 맞아, 관군이 아닌 인근 지역 주민들이 급조한
의병들인 벌인 결사항전과 거망산의 여성 빨치산 정 순덕같은 인물들과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섰었던 토벌대와의 인연이 서린
황석산과 황석산성에 관한 잼난 얘기는 아무래도 다음 화요 정기산행인 치악산 산행기로 기약을 미루면서 이만 글을 줄입니다.
연이은 연봉에 선 거망산의 빨치산 인연과 황석산 토벌대의 묘한 인연을 머릿속에 떠 올리며 낙타 등어리 처럼 길고도 길었던
황석산 능선길을 걷노라니 피로 얼룩진 대한민국의 역사서가 파노라마 처럼 내 뇌리를 스쳐 간다.
유동마을로 하산을 하니 최 기사님의 느림보 리무진이 우리를 태운다.
아마도 원래의 날머리 유동마을은 주민들의 동의가 없어 뒷풀이가 여의치 못한 모양이다.
지장골에 당도하여 급수대에서 대충 낯짝만 물로 몇 번을 문지르고 뒷풀이 장소에 자리를 잡았는데 오늘은 횡재를 하는 날이다.
멀찌거니서 보기만 하여도 간이 떨리는 산미인님이 내 옆자리에 앉는 거지 멉니껴?
갈증이 심해서 잘 먹지 않는 맥쐐를 거푸 세잔을 바삐 마시노라니 옆에 앉으신 산미인님께서 그것이 알고 싶다 처럼 꼬옥 내게
물어 보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이다.
뒷풀이에서 볼 때 마다 돌삐 당신께서는 밥도 마다 하고 과하게 술을 퍼 마시는데 대체 어찌하여 술꾼이면 일상사처럼 벌이는
흔한 실수 따위를 저질르는 것을 본적이 없는데 그 비결이 무어냐는 것이다.
으 으 음 사실 알고 보면 간단한 일이긴 하지만 공개하기는 무척 껄끄러운 일이긴 한데...
마침 내 앞에 자리를 하신 경자 언니의 입술이 요염하게 보이고 눈살이 섹시하게 보이기 시작하면 들었던 술잔만 비우고 언능
자리를 털고 일어 나면 된다고 했다. 이미 꼭지가 돌아 만취한 수준이 아니면 절대로 구렇게 보인 적이 없기 때문이져.
경자 언니! 다음 산행 때는 꼬옥 맛있는 것 마니 마니 싸 오세요 내가 금새 얼굴이 반반하여 늘 딱딱거리는 여성분으로 맹글어
드리께요. 히 히.
탄천변에서 병코 돌고래 돌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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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빨치산 정순덕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산행을 나가면서 그 산에 대한 공부를 대충은 하고 나가는데
어떨때는 저 자신도 자세히 인지하지 못하여 잊어버릴때가 많습니다.
돌삐님의 산행기를 보면서 지리산과 경남일부에서 빨치산의 활동이 왜 성했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외침을 많이 당했던 우리민족이 일제치하와 6.25동란을 겪으면서
그 삶이 얼마나 피폐했었는가는 역사나 소설에 의해 조금씩 알게 되었지만
황석산 같이 역사의 현장에 가면 더 자세히 더많이 알고 싶어지는게 사실입니다.
지금은 평화롭고 기름져보이는 유동마을도 역사의 저편에서는
亂을 피해갈 수 없었을테지요..
다음편을 기대합니다.
돌삐 작가님..더 많은 공부를 하셔야 할것 같습니다.ㅎ
아...........재미만땅.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