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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시편80편1~19절
제목 : 주의 백성을 돌보소서
본편은 북국 이스라엘의 포로를 회복시켜 달라고 호소하는 기도로서,
77편을 저작한 사람이 본편도 저작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저작 시기는 77편보다는 다소 늦은 시기입니다.
표제에 “소산님에둣에 마춘 노래”라고 하였는데 “소산님에둣”은
시편60편에는“수산에둣”으로 되어 있는데
“수산”은 단수이고, “소산님”은 복수입니다.
뜻은 “증거의 백합화들”인데 곡명이라고 합니다.
1~3절은 이스라엘 목자를 구하소서,
4~7절은 구원의 호소,
8~19절은 이스라엘의 번성과 쇠락입니다.
1. 이스라엘의 목자(1~3절)
1) 귀를 기울이소서(1절)
“[1]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백성이 포로 되어 곤욕당하는 것을 그대로 두지 마시고,
사랑과 능력으로 구원하여 달라고 애원하는 기도입니다.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하나님”으로 호칭한 것이 그 사랑에 호소함입니다.
목자가 양떼를 인도함은 양을 생명같이 사랑하는 자가 하는 것이요(요10:4),
삯꾼은 제 욕심이나 채우다가 위험할 때는 양떼를 버리고 도망갑니다(요10:12).
하나님께서는 선한 목자이시므로(시23:1, 요10:11)
양떼를 위한 지극한 사랑으로 인도하십니다.
이 양떼가 지금 이리에게 포로 되어 있으니 건져 달라는 것입니다.
“요셉”을 양떼 같이 사랑하신다고 하였는데,
요셉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아비이기 때문에 북국 이스라엘을 가리킨 것인데,
요셉도 야곱의 아들이므로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 반열에 들었음은 물론이고, 기타 여덟 지파도 다 야곱의 자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사랑으로 인도하신다고 한 것입니다.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는 능력과 위엄 중에 계신 하나님께 간구함을 나타냄입니다.
“그룹”은 하나님을 호위하는 영물입니다.(창3:24, 사6:2, 겔1:5, 계4:6)
그렇기 때문에 성전에 조각하여 세워서 속죄소를 덮게 하여(출25:17~22)
하나님께서 거기 좌정하신다는 상징을 삼은 것입니다.
이 그룹에 옹위되어 출입하심은 그 두려우신 위엄을 나타내심이요(시18:10)
거기서 그 백성에게 명령하시고 지시하심은 그 절대권의 발동이시므로
그 무소불능하신(욥42:2) 전능성(全能性)으로 하십니다.
사랑은 긍휼의 발로이므로 이 포로 된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어,
능력(能力)으로 구원(救援)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
하나님을 성전에서 말씀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시인이 본편을 저작할 때에는
예루살렘 성전 찬양대원으로 봉직하고 있을 때인 것 같습니다.
지성소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고 계신 하나님이시지만,
앗수르 땅에 포로 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수 있음을 확신함에서
이 기도(祈禱)를 드립니다.
“빛을 비춤”은 능력과 성실하심과 그 백성을 인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라는 뜻이니 곧 구원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2) 우리를 구원하소서(2~3절)
“[2]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3]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북국 이스라엘의 포로를 회복시켜 주심과
남국 유다를 돌보아 주심을 함께 곁들여 구함입니다.
“에르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아들들로서 친형제니 북국(北國)을 이름이고,
“베냐민”은 요셉의 동복동생으로 남국(南國)에 속해 있으므로 남국을 이름입니다.
남국(南國)은 유다 지파가 주를 이루는 나라이므로 남국(南國)을 말할 때는 당연히 유다를 말할 것인데, 여기 베냐민을 말한 것은, 요셉과 형제요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함께 한 사단이 되어 진영을 같이하였을 뿐 아니라(민2:18~24),
시내산에서부터 줄곧 줄진도 유진도 함께하여 온 까닭에(민10:22~24),
이 세지파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이렇게 깊은 관계가 있는 두 지파가 속해 있는 나라의 포로 된 것을 슬퍼함에 있어서는 남국(南國)에서 당연히 베냐민 지파를 그 대표로 내세울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을 것입니다.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라고 하였는데 “능력(能力)”은 “힘”이라는 말이므로(삿5:31,시20:6) 힘을 내어 구원하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라고 한 것을 보니 살만에셀이 이스라엘을 포로로 한지 8년 후에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략하였는데(왕하18:10,13),
물론 산헤립이 참패하였다고 해도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을 치고 올라왔고 겁에 질린 히스기야 왕도 성전 곳간에 있는 은과, 전문의 금과, 기둥에 입혔던 금까지 벗겨 보냈던 것이므로(왕하18:13~16),
온 유다가 떨었으니 어찌 기도하지 않고 되었겠습니까?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은 원문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서셔”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 보기에 하나님은 멀리 계셔서 돌보지 아니하시는 것 같고,
원수들은 곁에 와서 협박(脅迫)하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 원수들을 쳐부수고 구원하여 주시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곁에 계셔서 다 보고 계시고,
이스라엘(북국)에 대하여서는 그 죄를 징계하고 계시므로,
때 되면 해제하시어 구원하여 주실 것이고,
유다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하룻밤 사이에 비참한 참패를 원수들에게 안기시고 구원하여 주십니다.
“돌이키시고”라는 말은 “돌아가다” (창28:21)라는 말로서,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심과 귀환시켜 달라는 것입니다(시126:1,4)
동시에 이 말은 “회복시키다” (시51:12,사1:26), “소생시키다”(애1:11),
“소성케 하다”(시19:7)로도 번역된 말로서
북국 이스라엘에게는 포로에서 귀환시켜 달라는 기도인 동시에,
남국 유다에 대해서는 산헤립의 손에서 구원하여 회복시켜 달라는 기도가 됩니다.
그리하여 둘을 합하여 돌이키사 구원하여 달라고 한 것입니다.
3절은 7절, 19절과 함께 각부로 마감하는 후렴구로서,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그 백성을 축복하게 한 축복을 간추려 기도로 한 것입니다.
2. 구원의 호소(4~7절)
4~5절에서는 눈물의 기도를 들으소서 함이고,
6~7절에서는 원수의 다툼거리에서 구원하소서 함입니다.
1) 눈물의 기도를 들으소서(4~5절)
“[4]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5]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통회의 눈물은 하나님의 진노를 바꾸어 잔이 넘치도록 부어 주시게 하나니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으로 내 편이 되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베드로와 유다는 똑 같이 주를 배반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통회는(눅22:62) 후일 대사도의 출발이 되었지만,
가룟 유다는 자기의 죄를 깨닫고도 통회함 없이 제사장들을 원망하고 받은 돈을 성소에 던져 버리고 자살하였으니(마27:3~5),
나지 않았더면 좋았을 뻔한 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마26:24).
“만군의 하나님”는 하나님께서 우주 전체를 주재하시는 분이심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면 못 주실 것이 없고,
하시고자 하시면 못 하실 일이 없음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께 저 포로 된 동포를 위해 간구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여호와”의 이름을 더하였으니,
언약하신 대로 그 백성으로 언약하신 땅에서(창15:18~21)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창9:1) 돌아오게 하여 달라고 함입니다,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라고 함은 기도하는 것을 노하심이 아니고 노하셔서 기도를 듣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동안은 안 듣는 것 같아도 기도는 반드시 응답이 있기 마련이니,
기도할 때마다 가까이하셔서 다 들으시고,
들어주시기로 언약하셨기 때문입니다(마7:7,사58:9, 렘29:12~13, 시91:15).
“노한다”는 말은 “연기”라는 말로서(출19:18, 시104:32,144:5),
하나님의 심한 진노를 상징합니다(시74:1).
그렇기 때문에 그 양떼인 백성을 포로로 잡혀가 학대에 견디다 못하여 부르짖게 하신 것입니다.
연기는 불꽃을 동반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불로도 표현합니다(신29:20).
불이 다 타면 꺼지고, 연기도 사라질 날이 있으니,
그때는 하나님의 진노가 도리어 사랑으로 변하는 시간이 됩니다.
그렇게 함에는 눈물의 기도 곧 통회의 기도가 따라야 합니다.
통회의 눈물은 불을 끄고 하나님 앞에 상달하는 향연이 되고(계5:8,8:4),
분향하고 헌신하는 저녁 상번제가 됩니다(시141:2).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는 통회 기도하는 눈물이 흘러 입으로 들어감을 일컬음입니다.
2) 원수의 다툼거리에서 구원하소서(6~7절)
“[6] 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 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 [7]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웃 나라들의 다툼거리가 되어 있으니,
구원하여 주셔서 그들보다 더 강한 나라가 되게하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웃”이란 이웃에 있는 강국들을 지칭함이니,
애굽과 앗수르와 바벨론 등을 대충 들 수 있겠습니다.
“다툼거리”란 저 강국들의 경쟁 재료라는 뜻입니다.
그것보다는 전투 원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서로 먼저 점령하려고 경쟁거리가 되었고,
또 먹이는 하나인데 먹고 싶은 자가 많으니 저들끼리 서로 싸운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놓고 이웃 열강들이 서로 다투며 싸워서 이긴 자가 삼킬 수도 있고,
거리 관계로 먼저 와서 집어 삼키는 자가 이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는 국력의 강함에 있을 것이니
이스라엘(북국)은 앗수르가 선점하였으나, 바벨론에게 빼앗기고 말았고,
유다를 놓고 애굽과 바벨론이 다투다가 바베론이 유다를 삼켰을 뿐 아니라
애굽까지 정복하였습니다(렘43:8~13,44:30).
“서로 웃나이다”라고 함은 이스라엘이 이웃열강들이 기뻐할 좋은 밑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곧 저들이 좋은 삼킬 것이 생겼다고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3. 이스라엘의 번성과 쇠락(8~14절)
8~11절에서는 이스라엘의 번영에 대하여,
12~14절에서는 이스라엘을 허시 었음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1) 이스라엘의 번영(8~11절)
(1) 건국(8절)
“[8]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건국을 식물에 비유하여 설명하였습니다.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킴이니(사5:7,호10:1),
이스라엘을 애굽 종살이 하는 가운데서 구원하여 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서 거기 정착, 건국하게 하여 주셨음을 말함인데,
이는 벌써 아브라함에게 430년 전에(갈3:17) 언약하신 것이요(창15:13~21),
하나님께서 신실되어 그대로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극상품 포도나무로 심으시고(사5:2),
망대도 술틀도 준비하셨고(사5:2),
물주고 간수하고 보호하셔서 아무도 상해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사27:3).
“민족들을 쫓아내시고”는 가나안 땅에 거주하던 원주민 전부를 쫓아냈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도시국가였으므로 큰 도시 하나가 한 국가여서 열방이라고 한 것입니다.
(2) 번영(9~11절)
“[9]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10]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11]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번영도 나무가 크게 자라고 가지가 무성하여 넓게 뻗치며 뿌리가 깊이 내려 그 넝쿨이 온 땅을 덮어 버리는 것같이 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앞서 가꾸셨으므로”은 포도를 심기 위하여 밭의 돌을 주워내듯이(사5:2),
가난안 땅에 사는 열방 민족을 다 쫓아내신 것을(8절) 가리킵니다.
땅의 준비는 아브라함 때부터 하셨고(창12:1,7, 13:15, 17:8),
돌을 주어 내는 것은 가나안 까지 인도하신 후에야 하셨습니다(수6~11장).
“뿌리가 깊이 박힘”은 뿌리박는데 장애되는 돌덩이를 다 치워 버렸기 때문이고, 뿌리가 깊이 박히면 가뭄도 타지 않고 열매가 잘 맺게 됩니다.
이스라엘로 이렇게 번성하게 할 수 있는 기초까지 다 하나님께서 잡아 주셨으니 그것은 좋은 열매 맺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사5:7).
“땅에 가득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움”은 포도넝쿨이 온 땅에 뻗쳐 나가서 돌은 물론이고 산까지도 그늘지게 했으니 산악 지대까지 다 뻗쳤다는 것입니다.
포도는 남방에 많은 산물이니(민13:23) 남부 유다의 번성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음”은,
백향목은 레바론에 무성한 나무로서 북국 이스라엘을 지칭합니다.
레바론 쪽에는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나라들이 있으므로(왕상5:6),
이스라엘 백성을 호칭하기 위하여 “하나님 백향목”이라고 한 것입니다.
시편104:16에서는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남북이 다 그 지면에 가득 차고 넘치도록 창성하게 하여 주신 은혜를 잊음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무서운 큰 죄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국민이 번성하니 또한 국토가 크게 확장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다”는 지중해를 이름이고, “강”은 유브라데 강을 지칭함입니다.
서편은 지중해에 닿았으니 더 확장될 곳이 없고,
동쪽은 유브라데 강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동쪽 한계선입니다(창15:18).
그리고 이 국토 경계선 지역 안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전 지역이요(창15:18~21),
요단강 동편에서 여호수아에게 일러준 한계선으로서(수1:4),
다윗과 솔로몬 때에 그렇게 번영하였습니다(삼하8:1,6, 왕상4:24).
하나님의 언약에 일점일획이 어긋남 없이 다 그대로 이루지나니(마5:18),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의 짝 없는 것이 없고(사34:16),
말씀하신 것은 한나도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다 이루신 다고 하였습니다
(사45:23, 55:11).
주님께서도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눅21:33)고 하였습니다.
2) 이스라엘을 허시었습니다(12~13절).
“[12]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13]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왕성하던 나라가 왜 사로잡히고 또 침략을 당하였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담을 허셨기 때문이라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국가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습니다.
(대상29:11~12, 단4:17, 롬13:1).
그렇다고 이것이 담을 허신 하나님을 원망함이나 불평함에서 나온 발언은 결코 아닙니다.
자책에서 나오는 회개이니, 좋은 열매 맺기를 바랐는데,
들포도를 맺었지 때문에(사5;2, 렘2:21) 이사야를 시키시어 사5:5~6절에서
“[5]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6]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고 경고하신 대로 하신 것인 줄 알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전 봉사하는 찬양대원이 그 시대의 대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모를 리가 없지 않겠는가?
“담”은 국방력을 이름이니,
국방력이 무너진다는 것은 나라가 망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는 자”(“아바르)”는 “거만하다”, “격노하다”의 뜻을 가진 말로서 “범하다” “어기다”“폐하다”“거스르다”, “노하다”, 등등으로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거만히 이스라엘을 침략한 자를 가리킴이니,
북국 이스라엘에게는 앗수르 왕 “불”(왕하15:19)과 살만에셀(왕하18:9)이겠고,
남국 유다에게는 산헤립이겠습니다(왕하18:13).
“따게 함”은 과실만 딴것이 아니고 가지고 꺾고, 넝쿨도 자른 것이며,
나라가 망해 버렸으니 뿌리까지 뽑혔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남은 그루터기가 있어서 남국이 바벨론 포로 70년 후 귀환할 때에 귀환한 자가 있었습니다(대상9:3).
“숲 속의 멧돼지”는 적국의 침략자를 지칭함입니다.
숲 속의 멧돼지는 성질이 사나운 자입니다.
“들 짐승”은 숲 속의 멧돼지 앗수르 왕을 돕는 추종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주변 약소국가들의 주권자들로서 앗수르에 부역하는 자들입니다.
애굽 왕 바로를 용 또는 악어라 하였고(시74:13, 사51:9, 겔29:3,32:2),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큰 독수리라(겔17:3),
여기 앗수르 왕을 멧돼지라, 또 그 추종자들을 들 짐승으로 모두 사나운 야생수로 그 잔인성을 표출하였음이 공통됩니다.
3) 권고하시기를 간구함(14절)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하나님께서는 심으신 포도나무이니 버리지 마시고 잘 돌보아 달라는 간구입니다.
“만군의 하나님”이 절 머리에 있고,
“이 포도나무”가 절 끝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를 잘 나타내었습니다.
이 두 말을 강조하는 위치에 두어서
첫째는 돌보실 수 있으신 하나님이심을 그 명칭에서 보이면서 그 위치가 제일 먼저 나오므로 가장 강조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돌보시라고 함이고,
그 다음에는 무엇을 돌볼 것인가 하니 “이 포도나무”입니다.
“이 포도나무”는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다 쫓아내시고 미리 준비하신 그 땅에 심으신 “이 포나무”를 가리킵니다.
담이 헐려 사나운 짐승이 뜯어먹고 새들이 쪼아 먹은 “이 포도나무”이 그루터기가 남아 있으니 이를 돌보셔서 다시 잘 가꾸시어 좋은 열매 맺게 하여 달라는 간절한 간구입니다.
그러므로 보아 달라고 하는 데도 삼중 묘사를 연속적으로 하였으니,
원문에서는 “하늘에서 하감(감찰)하사 살려보시고 찾아오소서”로 되어 있습니다.
“굽어보시고”라는 말은 “바라본다”(출33:8),
“감찰한다”(시33:13)는 말이고, “살피신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4. 회복의 기도(15~19절)
15~16절에서는 간구의 이유를,
17에서는 권고의 방법을 ,
18~19절에서는 서원을 말합니다.
1) 간구의 이유(15~16절)
“[15]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16] 그것이 불타고 베임을 당하며 주의 면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오니”라고 하였습니다.
권고하여 주시기를 간구한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하였습니다.
첫째가 주께서 심으신 포도원이라는 것이요,
둘째가 주의 징계로 망할 것이라고 함입니다.
“주의 오른 손으로 심으신 줄기”라고 함은 “오른 손”은 능력을 상징하므로(출15:6,12), 능력적 역사로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가나안까지 인도하실 뿐 아니라 가나안 7족을 진멸하시고 거기 정착시키심이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셨음을 뜻합니다(8절).
그렇게 하여서 포도원이 되게 하셨는데 이 포도원을 헐어 황폐하게 하심은 하나님의 능력에 손상이 오는 일이니 권고하여 주셔서 그 권능으로 다시 일으켜 세워 달라는 것입니다.
모세도 이스라엘의 범죄 함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진멸하려고 하실 때에
그렇게 기도하였으니, 민14:15~16절 “[15] 이제 주께서 이 백성을 하나 같이 죽이시면 주의 명성을 들은 여러 나라가 말하여 이르기를 [16]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하였습니다.
“줄기”라는 말은 “포도원”이라는 말로서 견고하다는 뜻이므로 “줄기”로도, “뿌리”로도 됩니다.
“포도원”이스라엘을 상징적으로 말한 것이고(사5:7,호10:1),
이는 또한 교회의 예표니(요15:1~5),
하나님은 이 포도원의 농부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가지”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스스로 계서서(출3:14),
창조하신 까닭에 창조도(사43:21), 백성을 택하심도(렘18:7, 롬9:21),
사죄하심도(사43:25),구원하심도(시98:1,106:8) 모두 자신을 위하여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전심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자를 위하여 능력도 베푸십니다(대하16:9).
그러니 결국 이스라엘을 좋은 포도나무로 구별하여 심으심도,
그 가지가 힘 있게 뻗어나가 번성하게 하심도 모두 자기를 위하여 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포도원이 황폐하면 하나님의 이름에 훼손이 있을 것이므로 권고하셔서 다시 일으켜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불타고 베임을 당하며”은 나무로 비유한 것이기 때문에,
그 진멸도 태우고(겔15:4,6), 베는 것으로(신20:19~20) 말한 것입니다.
“주의 면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오니”라고 함은 이스라엘의 멸망이(망국) 하나님께서 치신 것으로 말한 것으로서 앗수르가 하나님의 막대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임을 뜻합니다(사10:24).
왜 그 권능을 심고 가꾼 포도원을 이렇게 치셨는가는 자명한 일이니,
포도는 열매를 위하여 심고 가꾸는 것으로,
극상품 포도를 심고 그 이상 더할 것이 없도록 다하여 가꾸고 정성 다하여 배양하였는데 먹을 수도 없는 악한 들포도를 맺었으니(사5:4),
예레미야는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렘2:21)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이것을 권고하시라고 간구하니 그 남은 그루터기에 접붙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롬11:17~18)
그러나 이 접붙임은 이스라엘로 시기하게 하여
저들은 다시 일으킴이 되는 것이니(롬11:14,24, 26~27).
결국 이스라엘의 회복의 간구를 들어주심입니다.
2) 권고의 방법(17절)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 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권고하실 방법은 주의 손을 얹어 특별 은총을 베푸심입니다.
주의 은혜를 입지 않고 구원될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엡2:5,8).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란 주의 특별하신 은총을 입는 자를 이름이니
이스라엘 남북국 12지파 전체를 다 이름인 것입니다.
“주의 손을 얹으소서”도 특별 은혜를 베풀어 주심을 가리킵니다.
주의 손은 만복의 근원 되신 손이며,
그 손을 얹으심은 만복을 주심입니다. 어찌 특별한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인자”는 “벤 아담”(아담의 아들)이니 이스라엘 전체 곧 앞에서 말한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이는 그리스도이 예표입니다.
3) 서원(18~19절)
“[18]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특별하신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회복시켜 주시면 다시는 주를 거역 배반하지 아니하고 주를 경외하겠다고 하고,
소생시켜 주시면 주의 구원하여 주신 은혜를 찬송하겠다고 합니다.
받은 은혜를 찬송함은 그 은혜 간증함이요 감사함이니,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드시는 찬미의 제사라고 하였습니다.
히13:15~16절 “[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였고,
시편69:30~31절에“[30]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31]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받은 은혜는 힘써 감사와 찬송으로 증거함이 아름답습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시인은 하나님이 광야에서 그들을 인도하시던 때를 회상하며,
그때처럼 다시 은혜의 빛을 비춰 주시길 간구합니다(1~3절).
이스라엘의 목자요 왕이신 주께서 수치와 폐허의 땅이 되어 버린(13절), 비참해진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 마음이 높아질 때(교만할 때),
하나님은 압박과 재난과 우환을 통해 우리를 낮추십니다.
하지만 가난한 심령이 되어 하나님을 의지하면,
고통에서 건지시고 양 떼처럼 지켜 주십니다.
일상에서 주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을,
또 고난을 통해 나를 만들어 가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2) 죽음의 땅 광야에서 ‘하늘 양식’과 ‘반석의 물’을 먹이시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고 이스라엘을 열방의 다툼거리와 조롱거리로 만드셨다고 탄식합니다(4~7절).
시인은 이제 모든 소망이 끊어지고 하나님의 부재가 강력히 느껴지던 바로 그때, 하나님의 임재(얼굴빛)를 강력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낙망 중에도 시인에게 호소할 하나님이 계셨듯이,
우리에게도 우리 사정을 다 아시는 분이 계십니다.
절망의 탄식을 신뢰의 간구로 바꾸어보십시오.
3) 시인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애굽에서 가져다가 약속의 땅에 심으신 포도나무로 비유합니다(8~14절).
그분의 돌보심으로 온 땅에 번성하던 때를 회상합니다.
그 나무의 그늘이 바다(지중해)에 까지 뻗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지닌 강성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그 땅의 풍요와 번영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잊고, 우상과 강대국을 의지하자, 그 화려하던 영화는 열강에게 짓밟히고 황폐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심판은 회개(19절)를 위한 회초리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리석고 교만한 일을 중단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4) 긍휼의 손길로 이스라엘을 다시 소생하게 하신다면, 다시는 주를 배반하지 않고 오직 “주의 이름만 부르겠다”고 맹세합니다(15~19절).
충성의 서약이자 예배의 다짐입니다.
예배와 순종은 받은 은혜에 마땅한 화답입니다.
새로 얻은 내 삶은 내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