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촌강 전투
‘일본 속의 한국문화’ 강의 시작에 강사가 백촌강 전투를 아십니까? 하고 묻는다. 생전 처음 듣는 소리라 모두가 벙어리가 되었다.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망하자 백제인 대부분이 일본으로 피신한 모양이다.
韓土에서 日本列島로의 大量 移住는
ㅡ 첫번째, 伽倻 聯盟王國 亡後의 伽倻 遺民
~ 두 번째, 百濟 亡後의 百濟 遺民
廣開土大王 碑文의 辛卯年 (AD 391年) 記錄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白殘○○○羅以爲臣民’
왜로 피신 한 의자왕의 아들 풍은 왜의 황극천황(고오교쿠 덴노오-여자천황)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자 천황은 이에 즉각, 800척과 27.000명을 백촌강(군산부근 금강하류)전투에 투입하고 大宰府(다자이후)까지 와서 병사들을 격려 했다. 하지만 백촌강 전투에서 왜군들은 전멸하다시피 대패했다. 그게 667년8월 28-30일경이다.
백촌강 전투는 동아시아의 당, 백제, 신라, 왜 간의 최대전쟁으로 일본은 백촌강 전투에 사활을 걸었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국사교과서에는 ‘백촌강 전투’에 대한 기사는 한 줄도 없다.
그 후, 왜의 황극천황(고오교쿠 덴노오-여자천황)의 죽음도 신라인에게 암살되었다고 믿고, 천황의 아들은 5년간 상복 차림으로 군주에도 오르지 않았다. 그만치 이 전투의 패배가 그들에게 한으로 남은 가 보다. 일본인들은 ‘되로 당하면 말로 반드시 갚는다.’는 것이 그들의 한풀이 방법이다. 이 전투의 패망도 그러 했나 본다. 일본 씨름, 스모는 그들의 민족성을 나타낸 듯 한판 승부로 끝난다. 일본은 전투가 나도 군과 관만 싸우고 백성은 불구경한 듯 있다가 나중에 승리한 쪽을 따라만 가는 것이 그들의 생활이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 왕, 선조가 피난길에 나서고 경복궁이 불에 전소해, 일본군들은 전쟁이 끝난 줄 알았지만 그때서야 조선은 전쟁이 시작돼 전국 각지에서 의병과 승병이 일어나자 일본군들은 의아했다.
그들은 지금도 신라에게 당한 백촌강의 패배에 대한 복수로 이를 갈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게 일본의 ‘칼의 문화’이다. 그들은 계백 장군이 황산벌에 출정할 때 그의 가족들을 칼로 다 베고 출전한 것과 이순신장군의 백성을 위한 구국충정을 존경해 일본사관학교의 특정과목으로 신설해 두었다 한다.
8월15일은 우리에게는 광복절이지만 일본은 패전일로 기념하고 있다. 이날 한일양국은 야스쿠니 신사의 참배를 두고 미묘한 감정을 표출한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일본국 전범들을 모신 신사로 그들 입장에서는 국가를 위해 싸운 전사들을 모신 신사라 아베총리는 ‘총리로서 순국선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내뱉는다.
부여 부소산에 고란사가 있다. 고란사 대웅전에 삼천궁녀가 낙화암 밑으로 뛰어드는 벽화와 백제 군사들이 장렬하게 싸우는 벽화가 있지만 고란사는 백제가 망한 뒤 300년 후에서야 지어졌다. 이게 신라와 백제 사이의 깊은 골이 아닌가. 고 최인호의 소설 ‘잃어버린 왕국’에서는 백촌강 전투에 패한 후 왜는 나당군의 역습을 막기 위해 쓰시마에서 혼슈의 아마구치 히로시마와 시코쿠 사이에 이르는 해안에 기네다성, 나가초토성, 다기이성, 가쿠카성, 야지만성, 다카애성 등 수많은 성을 쌓아 대비하였다. 왜는 백촌강 전투에 국가총동원령을 내린 셈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여우는 죽을 때, 고향으로 머리를 둔다더니 일본인들은 죽으면 한국으로 머리를 두고 죽는다고… 지금도 일본에서는 신라계 후손과 백제계 후손과의 결혼은 금혼이란다.
아키히토 일황은 일본이 백제 부흥을 위해 군사를 파견한 백천강 전투, 무령왕, 성왕, 백제의 일본 불교 전파 등 백제에 대해 깊고 심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간무(桓武)천황(737-806)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記)에 기록된 것과 관련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 천황의 당국이 부여를 방문해 무령왕릉을 참배하면서 일본에서 가지고 온 침향목으로 향을 피웠다는데 그 침향목은 1300년 전 무령왕 시기의 침향목이라 한다.
日本書紀에는 ‘白村江’, 三國史記에는 ‘白江’, 구당서에서는 ‘白江口’로, 기록하지만 군산앞바다, 금강하류가 맞을 것 같다. 일본 역사서에는 기(紀: 벼리 기)로 쓰고 우리는(記; 기록할 기)를 쓴다.
수년전 조용필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 유행가가 일본에서 히트를 친 것은 일본인 심중에는 아직도 백촌강의 참패를 기억하고 있다는 말일게다. 흡사 임진왜란과 식민지 시대를 잊지 않는 우리처럼 일본인의 한은 반드시 갚는다는 말을 명심들 하였으면 한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 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멀리 보면 일본인들은 백제유민으로서의 恨일 것이고, 짧게는 자기 식민지이었던 한국에 대한 향수일지도 모른다. 일본역사의 반은 백제요, 반은 신라라 했듯 일본을 보면 한국이 보인다는 말이 헛말이 아닌 듯하다. 역사적으로 백제는 어려울 때 일본과 고구려에 도움을 청했고, 신라는 어려울 때 고구려와 당의 도움을 청했다. 앙숙지간, 백제와 신라는 흡사 영호남이 그러해 더욱 놀랍다. 지금 신라 땅, 영남은 어디다 구원을 청해야 하지. 일복속의 한국문화를 다는 아니지만 많은 것을 느끼고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