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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식으로 어법을 변경한 것과 구어체에 옛날 지명을 쓰지말자는 말이 특이합니다.
개벽 제6호 > 胡適氏를 中心으로 한 中國의 文學革命(續)
잡지명 | 개벽 제6호 |
발행일 | 1920년 12월 01일 |
기사제목 | 胡適氏를 中心으로 한 中國의 文學革命(續) |
필자 | 梁白華 |
기사형태 | 문예평론 |
胡適氏를 中心으로 한 中國의 文學革命
梁白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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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家의 所論에 響應하야 일어난 사람은 錢玄洞, 劉半儂의 二君이엇다. 錢君은 言語學으로써 北京大學에 敎鞭을 執하며서 에쓰페란트 (世界共通語)를 鼓吹하던 新學者라. 胡君의 說見하자 즉시 이를 贊成하야 陳君과 同時에 「新靑年」第二卷 六號通信欄에다 白話文學의 價値를 認하얏고 第三卷 第一號通信欄에는 아조 應援軍을 派하야 精論을 發表하얏다. 「不用典」의 1項에 關하야는 胡君보다 一步가 進한 徹底的 생각을 가지고 잇섯다. 胡君이 許容한 用典의 工者까지도 彼는 取치 아니하얏스니 工拙을 不關하고 一切의 典故를 斥함이 可하다하고 極論하얏다. 그리고 또 地名 人名의 呼稱에 關하야 中國文人이 好用하는 雅稱(例컨데 人을 呼함에 字, 號 또는 謚로써 하며 甚한 것은 官名, 地名으로써 하는 것과 地名에 古名을 쓰는 것 등)을 廢치 아니하면 안된다고 論하얏다.(이는 吾人도 大贊成이다. 李白을 呼함에 李翰林, 謪仙, 靑蓮(地名)이라 하는 것이라던지 常熱이 虞山도 되며 錢謙益이 虞山도 되어 地名인지 人名인지 不分明하게 쓰는 것이 만하 얼는 알기 어렵다.) 또 함부로 古字를 用코자 하는 陋習(例컨대 「夜夢不祥 開門大吉」이라할 것을 「宵寐匪禎, 闢札洪庥」이라 하는 것 등)이 잇스니 이러한 것은 用典과 同病이라 하얏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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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國語的 小說, 詩文, 戱曲이 世에 行하게 되는 날이 中國國語가 成立하는 時일다.
개벽 제30호 > 現中國의 舊思想, 舊文藝의 改革으로부터 新東洋文化의 樹立에 他山의 石으로 現中國의 新文學建設運動을 이약이함.
잡지명 | 개벽 제30호 |
발행일 | 1922년 12월 01일 |
기사제목 | 現中國의 舊思想, 舊文藝의 改革으로부터 新東洋文化의 樹立에 他山의 石으로 現中國의 新文學建設運動을 이약이함. |
필자 | 北旅東谷 |
기사형태 | 논설 |
現中國의 舊思想, 舊文藝의 改革으로부터 新東洋文化의 樹立에 他山의 石으로 現中國의 新文學建設運動을 이약이함.
北旅東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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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전사회에 純然한 文藝 及 思想의 혁명이 起하야 마치 歐洲의 文藝復興이 잇슴과 가타엿나니 第一에 新舊思想의 충돌과 辦論이며 第二에 新文學의 선전과 수립이엇다. 次第로 그 思想界의 推移과 각 新人界의 思潮를 들어보건댄 第一着 一邊에 過激한 新思想의 선전과 舊文學革命의 운동이 爆發되는 때에 먼저 新舊의 투쟁과 辯論이 激起하야 舊文學의 大家로 유명한 林琴南氏가 蔡元培氏에게 致한 長篇의 書가 民國 7년 10월경 公言報에 발표되엇는데 그 辭意의 대개는 孔子를 擯하며 倫常을 剷한다 하야 크게 공격을 加하고 又는 白話文의 주장을 반대하야 此는 文言에 能치 못함으로 通俗野卑의 語로써 其拙을 藏함에 불과하다 하얏다. 그의 一二節을 소개하면 必覆孔孟, 剷倫常爲快, 鳴呼, 因童子之嬴困, 不求良醫, 乃追責其二親之有隱·瘵逐之, 而童子可以日就肥澤焉· 有是理耶?하고 又는 若盡廢古書, 行用土語, 爲文學則, 都下引車賣醬之徒, 所操之語, 皆有文法(下略-원문)? 凡京津之稗販, 均可用爲敎授矣, (下略-원문) 蓋存國粹而說文可也以說文, 爲客, 以白話, 爲主, 不可也,-라 하야 기타 措辭의 懇摯嚴切함은 舊文學 舊思想 옹호의 유일의 대표적 好文字라 하겟다. 蔡元培氏는 此에 대하야 또한 謹嚴히 답한 중에 逐節하야 辨明하얏는데 「民國에 잇서 오히려 倫常의 大綱인 君臣의 義를 守키 가능하며? 孔子는 時의 聖이라 한즉 此時에 在하야 시대에 順應함이엇지 孔子의 意에 悖한다 하리오 하고 현재의 胡適 錢玄洞 諸君의 주장하는 白話文이 純然히 都下의 引車賣槳의 徒의 操語하는 바와 如함인지 又는 白話文으로는 결코 古書의 義와 人間의 의식을 완전히 발표키 불가능한지? 此 亦 深히 考索할 문제이려니와 확실히 시대에 順應하야 건전한 一切의 革新을 務치 아니할 수 업다 하얏다. 이가티 일시는 新舊의<28> 辯論으로 全般 思想界의 진전이 참으로 점차 튼튼한 新의 土臺上에 들어언치게 된 후로 先히 舊思想의 혁명은 물론이려니와 특히 普遍의 교육과 지식에 가장 부적당한 漢文字에 관하야 各 新人 及 學者의 辯論이 만어오다가 그 가온대 가장 극렬한 分子로서는 現 北大敎授 錢玄洞氏는 漢字廢止論까지 世에 발표케 되고 그 후 부득이한 新의 考案으로 注音字母의 법을 考究하야 英語의 綴語成音의 법과 가티 字母 39字(그 字母原字畧)를 特別形으로 제작하야 民國 7년 11월에 敎育部令으로 발표하야 各省區에 특히 傳習케 하얏스며 그 후에는 文言에 意思를 一層 明瞭히 하는 방법으로 新式의 標點과 符號를 作文에 사용하자 함이 多年間 各地 敎育會議의 만흔 提唱으로 民國 7년 敎育部令에 의하야 발표케 되엇는데 그의 내용은 전혀 西洋語學과 文字에 標點과 符號를 찍은 것과 가티 略 英語의 사용하는 表號와 一樣이엇다. 그런데 그 注音字母는 현재에 一邊에서 만이 提唱하는 터이로되 아즉은 將來로도 공통히 사용될는지 의문이나 그 表號에 대하야는 벌서 公私文字間에 恒用이 되다십히 되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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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舊文學의 革新에는 무엇보다도 복잡한 漢文字의 難關이 잇서기 때문에 누구나 문학의 혁명을 주장하는 이는 爲先 文字에 대하야 만흔 思考를 費하얏고 그 次에는 言文이 無知不一致한 것이 重大의 문제이엇슴으로 이상에 述한 바와 如히 錢玄洞氏는 직접 漢文字의 폐지를 주장하기도 하얏거니와 그 후에는 가장 원만하다고 할 만한 白話<29> 즉 현대 민중의 일반 通用하는 「官話」로써 그 舊文言을 代하자 함이 당시 各 新人界의 일반 主論이엇다. 그리하야 「死文字는 活文學」을 産出치 못한다 함이 文學革命의 標語가 되다십히 되고 당시의 出刊物 其他 著書 중에 혹 白話를 사용한 者이 잇섯스나 사회의 별 反響이 업고 新靑年雜誌가 다수히 白話文을 사용한 以來로 일부의 贊揚과 일부의 非難이 서로 만히 일어나오다가 胡適氏의 「文學改良蒭議」가 직접 白話文 사용을 주장하야 「新靑年」 誌上에 발표되고 이여 陳獨秀씨의 文學革命論이 또한 白話文을 高調로 하야 登載된 후에는 사회의 反響이 크게 振動되어 白話文學의 가치가 世에 어느 정도까지 표현되엇다. 그러면 中國의 文學革命이라 함은 곳 白話文學의 건설을 의미함이엇나니 此가 胡適氏의 具體論에 이르러 現下의 이마마한 대세력을 이루엇스나 白話文學의 倡導는 실로 그 이전에 잇섯다 할 수 잇나니 古代로 보면 元宋 이후 佛書가 飜譯되는 때에 文言으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업는 句節로 만히 語錄 즉 白話를 사용하얏고 그 후로 水滸誌 石頭記의 유명한 소설이다. 白話로 著作되어 원래로 白話文學이 漢文學의 일부에서도 한 위치를 점령하야 보던 바 더욱 근래로는 陳獨秀氏가 北大文科長으로 잇슬 때에 그 주장을 힘써 선전하얏고 錢玄洞 啓孟 諸氏도 만이 此에 主力하야 極力 선전하는 때에 胡氏는 米州의 學窓으로부터 그의 考案을 가저오다가 歸國하는 때에 곳 발표케 됨에 참으로 성숙되랴는 곡물의 추수와 일반인 셈이엇다. 今에 그 「文學改良篘議」로부터 그 骨子되는 바를 소개하면
「나는 생각컨대 현재에 문학의 개량을 言하려하면 반듯이 下列의 八事로부터 入手하여야 할지니 곳 그는
1. 須言之有物
2. 不模倣古人
3. 須講求文法
4. 不作無病之呻吟
5. 務去爛調套語
6. 不用典
7. 不講對仗(즉 對마추는 것)
8. 不避俗字俗語
<23-33>
동광 제24호 > 現代中國思想家列傳(其4), 實驗主義의 哲學者 胡適
잡지명 | 동광 제24호 |
발행일 | 1931년 08월 04일 |
기사제목 | 現代中國思想家列傳(其4), 實驗主義의 哲學者 胡適 |
필자 | 申彦俊 |
기사형태 | 논설 |
現代中國思想家列傳
申彦俊
胡適씨는 陳獨秀씨와 같이 安徽의 2대 사상가로 근대 중국의 역사 우에 爀爀한 인물이다. 安徽省은 역사적으로 보아 고래 漢民族 百戰의 地로 그 지세의 관계상 황하문명과 長江文明의 영향을 受하야 문화가 早開하고 고래 幾多의 英傑, 대문호, 대학자가 배출하얏다. 학자문인으로 보면 南宋의 大儒 朱熹, 대시인 梅堯臣, 淸代의 일대 학파를 成한 戴震 등의 桐城學派가 주목에 値한다.
胡適씨는 1927년 秋 上海 同文書院에서 「중국근대300년래의 4개사상가」란 題로 戴震을 그 중 1인으로 擧하고 근300년래의 중국 사상계가 反理學時期라고 述하얏다. 戴震은 宋明의 理學을 배격하고 유물론을 근거한 「樸學」을 제창하야 일세를 풍미하얏다. 「樸學」이란 것은 「실사구시」를 표방하고 중국 고문화에 대하야 새롭은 연구를 가하는 일종의 史學的 운동으로 此로써 근세 중국문예부흥시기를 전개한 것이다.
戴震과 고향을 같이 한 胡適씨의 「푸랙마티즘(Pragmatism)」 즉 실험주의(일본 학자들은 실제주의 혹 실리주의 등 여러 가지 譯名이 잇다. 실험주의는 胡適씨의 譯名이다)는 戴震*의 桐城學派가 표방하는 「樸學」과 깊은 인연이 잇을 것을 짐작할 수 잇다.
胡適씨의 부친은 臺灣에서 관직을 가지고 잇엇으며 5세 시에 永別하게 되어 씨의 가정은 극히 빈곤하얏다. 그러나 씨의 모친은 근검절용의 현모로 씨의 독서를 독촉하얏다고 씨는 「先母行述」중에 自敍하얏다. 13세부터 上海에 와서 신학문 배우기를 시작하얏는데 당시 씨의 사상에 가장 심각한 영향을 준 것은 上海의 「時報」엿다고 씨는 自述하얏다. 그 自述에 의하면 당시 「時報」는 애국사상의 고취와 고문체를 버리고 창신한 문체를 쓰는 두 가지 특색으로 언론계의 重鎭이 되고 일반 청년학생의 애독하는 신문이 되엇다. 「時報」는 애국사상의 고취로써 이후의 사상혁명의 종자를 심으고 창신한 문체로써 문학혁명의 선봉을 양성하얏다. 胡適씨의 白話文 연구에 대한 흥미는 실로 時報에서 비롯한 것이다.
胡適씨는 上海 震旦學院에서 신학문의 기초를 修得하고 관비 유학생으로 미국 「컬럼비아」대학에 입학하얏다. 최초는 농과에 재학하다가 철학연구에 취미를 두어 철학과에 전학하야 철학박사의 학위를 득하얏다. 씨의 자서전에 의하면 「컬럼비아」 재학 시에 씨의 학과의 3분지1은 정치경제엿고 또 일면으로는 중국 정치와 세계 정치에 주의를 가지고 잇엇다. 1916년부터야 중국철학사의 연구로써 씨의 종신사업을 삼고 문학으로 오락을 삼기로 결심하얏다고 하얏다. 1917년 7월에 귀국함에 張勳의 復辟運動이 이러나고 또 上海에서 출판계와 교육계의 沉寂한 것을 보고 사상과 문예방면에서 중국을 위하야 새롭은 기초를 세우기로 맹서하얏노라고 하얏다.
악정치의 祖宗父母는 곳 2천년래의 사상문예다. 나태한 마음, 천박한 사상, 방관태도, 숙명관-이 모든 것이 우리의 仇敵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씨는 政論을 피하고 사상문예 討究에 潛心하얏다.<20>
文學革命
「一時代는 一時代의 문학이 잇다」하고 문학 혁명의 봉화를 擧한 胡適씨, 陳獨秀씨는 난형난제의 2맹장으로 당시 頑固者들과 논전을 試하야 白話文 문학의 신시대를 산출케 하얏다. 胡陳 2씨의 문학혁명에 在한 공적을 비교한다면 陳은 파괴적이고 胡는 건설적이다. 문학개혁의 정신은
1. 古人을 모방치 말 것 2. 문법을 강구할 것 3. 無病呻吟하지 말 것 4. 사상과 정감을 가지게 할 것(須言之有物) 5. 묵은 套語(예하면 玉樓, 芳草, 斜陽, 春閨 등)를 쓰지 말 것 6. 典(古人이 만든 譬喩. 예하면 退避三舍, 舊雨 등, 문자 쓰는 것)을 쓰지 말 것 7. 對놓지 말 것 8. 속어와 속자를 피하지 말 것 등이다. 실험주의에 철저한 씨는 씨가 저작한 白話文集을 「嘗試集」이라 칭하얏다. 「
<20-23>
삼천리 제16호 > 新興中國展望, 中國現下 運動과 統計
잡지명 | 삼천리 제16호 |
발행일 | 1931년 06월 01일 |
기사제목 | 新興中國展望, 中國現下 運動과 統計 |
필자 | 金東煥 編 |
기사형태 | 논설 |
新興中國展望, 中國現下 運動과 統計
金東煥 編
文學革命運動
文學革命은 中國의 時文에 代함에 白話文 卽 口語體를 使用하자는 것이다. 文學革命의 首唱者는 北平大學敎授 胡適氏다. 氏는 孔子學說의 自由批判者로 民國5년에 처음 文學改良趨議를 發表하여 文學革命을 唱導하엿다. 胡適의 論은 文學은 時代에 의하야 變化할 것으로 一時代에는 一時代의 文學이 잇서야 올홀 것이라 함이라, 그 뒤 陳獨秀가 文學革命論을 지어 讚成하엿다. 그런 뒤 白話詩가 나타나 決局 今日과 가치 白話의 全盛을 보기에까지 至하엿다.
識字運動
中國에는 義務敎育이 施行되어 잇지 못하기 때문에 國民의 大部分은 文盲이다. 그럼으로 此를 救濟하기 위하야 民間에 識字運動이란 것이 이러낫다. 이 運動에 一層의 氣勢를 놋는 것은 國民革命이엇다. 國民革命에는 民衆에게 宣傳이 必要하엿슴으로 宣傳밧을 民衆에게 爲先 어느 程度의 文字를 短時日 사이에 敎育식힐 運動이 이러낫다. 民間에 잇서서는 中華平民敎育促進會가 設立되어 압장을 섯다. 千字課」라 하는 普通 使用하는 千字의 基本漢字로<35> 씨운 敎科書에 의하야 各處에 學校을 設하여 敎育하엿는데 千字課의 發行部數는 3百萬에 達하엿다함 으로 그 効果는 不小하엿슬 것이다. 只今도 文盲打破運動은 盛行되고 잇는 中이다. 더욱 半日學校라 하는 것이 잇는데 學資가 업서 小學校에 갈 수 업는 者에게 筆墨衣服 等을 주어 小學敎育을 식히는 것으로 午前午後의 두 班에 나누어 半日式 授業한다. 敎師는 大槪 警官, 經費는 民間有志의 寄附로
國語統一運動
中國言語는 南北에 의하여 顯著히 差異가 잇다. 南北人은 全혀 會話도 아니되는 極端의 例까지 잇슴으로 言語統一을<36> 위하야 南京의 標準語를 全國에 普及식히려하는 運動으로 漸次 効果가 나타나고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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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戴震
청나라 초기의 3 대 사상가가 죽은 뒤로, 수많은 철인哲人 지사들이 더 출현하여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그 전체적인 수준은 고염무, 황종희와 왕부지의 포용력과 영향력에 미치지 못했다.
건륭과 가경황제 대에 이르렀을 때는 종전의 출렁이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으나, 문자옥文字獄의 비바람이 사람들을 질식할 정도로 몰아쳤다.
그리하여 중국의 지식인은 전대前代에 남은 실마리를 가지고 시류에 맞는 노정을 개척하여, 고증학 방면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중국 고문화古文化 위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놓았다.
그러나 철학 사상에서의 역사적 성취로 말한다면, 건륭과 가경 때의 인물은 거대한 영향을 끼치지 못했는데, 청대의 고증학 대가 대진戴震만이 그 중에 고염무, 황종희와 왕부지 3 대 대가에 견줄 만큼 뛰어났다.
대진은 자가 동원東原이고 자는 신수愼修로, 안휘성安徽省 휴녕休寧 사람으로, 1724년에 출생하여 향년 53 살이 되는 1777년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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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은 저술을 많이 했는데, 또 섭렵한 범위도 특히 광범하여 음운音韻·훈고訓詁· 천문·지리·방지方志(지방의 지리특산풍속과 인물들을 기록한 책)·정론政論·산술·기하幾何·시문·경학 등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중요한 저작으로는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証』, 『상서의고尙書義考』, 『모정시고정毛鄭詩考正』, 『고공기도考工記圖』, 『중용보주中庸補注』, 『성운고聲韻考』, 『방언소증方言疏証』, 『수지기水地記』, 『구장산술九章算術』, 『원선原善』, 『원상原象』, 『서언緖言』, 『굴원부주屈原賦注』 등이 있다.
세간에는 『대씨유서戴氏遺書』와 『대동원선생전집戴東原先生全集』이 전해졌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책을 빌려 읽으며 독학했다. 향시에는 합격했으나, 권력과 명예의 관문인 진사(進士)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했다.그러나 학자로서의 명성 때문에 1773년 황제의 부름을 받아 사고전서관(四庫全書館:청대의 황실도서관)의 찬수관(贊修官)으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대진은 희귀한 책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문관시험에 6차례나 낙방했으나, 1775년 황제의 특명으로 마침내 진사가 되어 한림원에 들어갔다. 주로 고대 지리학과 수학·언어학·경학 분야에서 모두 50여 권의 책을 저술하거나 편집했다.
王力
어음 어법 사휘 문자 음운 훈고에 정통하고 모두 저서를 가진 천재로 아무도 그를 능가하지 못한다 하는데 기재로 고대와 현대한어를 모두 섭렵하였다.그러나 개창성으로 특히 인정되는데 중국최후의 언어방면의 전재라 한다.
1984년 왕력은 84세로 마음에 가졌던 사전을 쓰기 시작하고 고한어사전으로 가장 완벽하다는 평가를 얻는다.
120만언의 홍편거제로 중일전쟁시부터의 宿願으로 50년만에 현실화하는 것으로 식사시간을 제외하고 매일 3천자를 목표로 집필을 한다.중국저명의 辭源 辭海는 결점이 있어 나열식인 것으로 체계가 없다는 것인데 드디어 4년후 고한어사전을 탈고한다.1926년 청화국학원의 스승 조원임에게서 중국학을 배운지 60년이 지나서인데 프랑스유학시절을 제외한 50년간 독서와 강의세월이다.그는 자신이 서방의 언어학이론에 불과한 것을 중국에 응용한 것이라 겸손해 한다.
갑오청일전쟁의 전패후 중국지식인들은 망국의 위험으로 民智를 솔선하여 여는데 언어의 개조도 불같은 여론으로 백화문이 십수년만에 유통한다.한어의 현대식연구는 마씨문통으로 시작되는데 중국현대언어학의 개산지조이다.
馬建忠이 1898년 찬사한 것으로 최초로 한어의 어법체계를 세운 것인데 영어의 결구로 쓴 것이다.
*참고;마건충은 파리정치대학의 국제법학박사학위자로 프랑스의 변호사자격을 취득한 이홍장의 조수로서 양무운동의 기획자이며 1882년 임오군란시 오장경과 대원군을 납치하여 보정부로 납치해간 인물로 정치가이자 언어학자이다.
미국등과 조선의 통상조약을 체결하는데 관여하여 장정을 남기기도 하고 아편문제로 인도에가 영국과 협상한다.
형인 마상백은 복단대학과 진단대학을 창설하는등 4형제도 중국근대화의 기수들로 유명하고 개량주의 사상가로 고문의 이해를 돕도록 서양이론으로 문법서인 마씨문통을 저술한다.
강소성 단도현사람으로 박영효에게 태극기를 그려준 인물로 알려지고 있는데 김홍집의 청국문답에 보면 일본에 사신으로 간 박영효가 황준헌 마건충과 만나는데 황준헌은 청의 용기를 마건충은 역의 태극을 이용하여 고안해준 것이라 한다.
왕력이 마씨문통을 24세에 접하고 계통적인 서양식 어법서를 처음 본 것으로 언어학입문의 시작으로 1932년 프랑스유학에서 돌아와 청화대의 국문계 전임이 되는데 마씨문통의 발간 30년후에도 한어문법은 체계서를 만들지 못한다.
마씨문통은 중국에 국제언어용어를 소개한 것과 중국인들은 문법보다는 감각으로 서면어와 구두어를 서로 다른 체계로 운용하여 문장부호를 사용하지 않아 애매한 표현으로 오독이 많은 것을 지적한 의미가 큰 저서로 아직도 활용가치가 크다.왕력은 중국은 문법체계상 황무지로 보고 고로의 문자가 문법이 없어 대학생들의 문자불통으로 침통해한다.
이는 서양에서는 보기 힘든 현상으로 종전에는 고문의 숙어로 사용하는 습관으로 불통한다.
사람들은 자유와 해방을 외치면서도 문법도 도덕처럼 방황하는데 파괴하나 재건설은 무망하여 중앙연구원과 교육부에 호소하여 표준문법의 제정을 요구한다.그는 5년간 초안을 만들고 3년간 수정하고 8년후 완성을 말하나 아무도 관심이 없어 무망한 상태로 1936년 왕력은 중국문법초탐을 써서 모방을 떠나 서방의 이론공구를 웅용하여 한어중에서 어언규율을 찾기로 한 것이다.그는 기존의 중국어법에 대한 회의로 파괴는 어렵고 건설은 더욱 어려운 상태여서 어언건설의 중임을 맡기로 한다.마씨문통을 초월하기로 하고 실제의 현정에서 규율을 찾기로 하는데 사회도 동탕과 복잡함으로 문언 반문언 백화문 백화 서구화의 백화등과 천차만별의 방언으로 얼키고 설켰던 것이다.이는 간난한 일로 서양학자들보다 수백배의 躊躇로 수많은 시간적노력이 필요한데 중일전쟁이 시작된다.그는 가족과 2개월만에 장사에 도착하고 중국문화의 위기가 더해옴을 느끼고 모든 의복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데 1937년 10월 어느날 고서점에서 홍루몽을 구입하고 고아한 고판본으로 悟道를 느낀다.홍루몽은 청대 북경의 순정한 구어로 어법연구의 최적자료임을 각성하게 되는데 홍루몽은 표준어로 방언의 잔영이 없어 고대한어를 배격한 보귀한 표준재료로 본 것이다.더불어 청대의 백화소설인 아동영웅전을 구입하고 곤명으로 떠나기전까지 연구를 시작한다.두권의 책에서 나오는 모든 용법상의 규율을 단어별로 기록하고 카드단어장을 만든다.이후 분류 귀납 정리하는데 일군의 공습으로 청화대와 북경대 남개대는 곤명으로 천이를 서둘러 전시서남연대를 열기로 하여 남하한다.이후 곤명에 도착하나 매일 공습을 피하는 생활중에 연구를 계속하고 곤명에서 10리인 용두촌에 들고 학교를 오가는데 처인 하울화는 바느질로 왕력은 등도 없어 호롱불아래에서 연구를 계속한다.
80세에 왕력은 처에 당시 5년간의 고난에 처량한 시로 헌정하는 사랑을 보낸다.이러한 형극의 세월로 5년만에 중국현대어법과 중국어법이론이 완성되어 두권의 내용을 합한 중국어법강요가 나와 전국에 통용되는데 왕력은 언어의 어법을 족어의 결구방법이라 정의한다.그는 이러한 독자적연구로 마씨문통을 돌파하고 서구식연습의 이론에서 탈피한다.
왕력은 句法이 우선으로 詞法은 다음으로 한어는 형태변화가 필요없어 서양어와 같은 형태변화가 많은 언어의 사법위주와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왕력과 동시에 고명개의 한어어법론 여숙상의 중국문법요략이 발표되어 한어어법연구의 성취가 이루어진 것이다.1940년대 세권의 어법서는 표준서로 기석을 놓는데 그중 왕력의 저서가 가장 영향력을 가진다.주자청은 왕력을 신어법의 존기자라 하고 중국현대어법의 서문에서 서양어법의 수십년간 득세를 청산한 것이라 말한다.주자청은 왕력보다 두 살위인데 온온군자로 매우 숭상하고 조취지은이라 말하며 그의 성원에 감사한다.
왕력은 1900년 광서성 博白현에서 출생하여 토비들이 횡행하는 변추로 7세에 사숙에서 삼국연의를 읽고 소설을 숭상하여 소설가가 되려한다.21세에 현성의 신식소학의 국문교원으로 초빙되어 3년후 왕력의 소양과 근면함에 교사들이 120원을 모아 상해로 구학의 길로 가도록 한다.그는 빈곤으로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인데 독학으로 교원이 된 것으로 24세로 상해로 떠나 남방대학의 전수반에 편입하여 국문을 전공하고 간행물에 시와 소설을 발표한다.
그는 근공으로 학문의 길을 가는데 일년후 복벽문제로 퇴학되고 장태염이 교장이던 국민대학의 본과에 전학한다.
1926년 여름 청화대학 국학원에 입학하여 4대도사들에게서 학습하는데 왕국유는 젊은 문학도에 자신도 문학을 하려하나 고문자와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실사구시라 말하여 왕력도 언어학의 사부인 조원임의 지도로 언어학을 전공한다.
왕력은 중국고문법을 제목으로 한 논문을 발표하여 양계초가 精思妙語라 칭찬하나 조원임은 친히 연필로 수정하고 크게 비판한다.그는 평생동안 두사람의 批語를 간직하고 좌우명으로 삼는데 훗날 양선생은 창신으로 격려하고 조선생은 務實을 강조한 것이라 말한다.그래서 학문은 절대로 흠결이 있어서는 안되고 정확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졸업후 스승의 권유로 당시 언어학의 전당인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당시 어법이론의 대가인 에스페로교수에게서 강의를 받는데 자비유학으로 중국어로 프랑스문학을 번역하여 학비를 조달한다.상무인서관 주편인 엽성도의 지원인데 이러한 방법으로 수많은 유학생을 길러낸 것이다.4년후 1932년 회국하고 청화대의 언어학교수가 되고 상무인서관의 萬有文庫의 총서류에 희랍로마문학을 맡아 몰리에르전집등 외국문학작품을 번역하여 생활비를 버는데 교수재임용에 탈락한다.
그래서 크게 반성하고 청화대를 떠나고 곧이어 언어연구의 역작인 중국문법초탐을 상재하여 주자청이 매우 만족해 하는데 4년후 다시 초빙을 받는다.곧이은 중일전쟁으로 남하하는데 왕력은 생활의 곤란으로 다시 글을 파는 데 신문투고로 5년간 독자들의 호평을 받는다.그래서 이제 잡문가라는 별호가 생기는데 최후의 문학활동이 되고 만 것으로 주자청은 이제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한다.1945년 8월 10일 중국에는 일본의 항복이 빨리 알려져 왕력은 중국의 언어학의 미래를 설계한다.그는 옥스퍼드영어사전같은 저명한 사전을 만들기로 하고 영국의 대언어학자들을 돌파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문을 연 중산대학에서 왕력을 문학원장으로 초빙하여 언어학과를 개설하는 조건이었다.그래서 중산대학에 최초의 언어학부가 생겨 방광도 양수달 상승조 잠기양등 전문교수들을 초빙하고 과정과 장정을 제정한다.세사람이 입학하는데 두명은 병가휴학으로 한명이 수업에 참석하게 되는데 1950년 국공내전후 공산당집권으로 중산대학은 언어전공의 첫졸업생을 배출한다.1953년 4년동안 13명을 배출하여 보람을 느끼는데 1954년 중국문자개혁위원회의 설립으로 정부가 문자개혁을 시작한다.문맹퇴치의 문교공작으로 돌연 언어학 전공입학생들이 파천황으로 들어와 북경대중문계와 필적할 우수한 성적의 학생들이 확보된 것이다.중산대학은 이제 언어계가 북경대와 합병되여 왕력은 많은 술로 기쁨을 표하는데 왕력은 북경대일급교수로 사회과학원 학부위원 문자개혁위원이 되고 한어병음방안제정과 보통화추광방안으로 매우 바빠진다.중국은 1949년 공산중국건국시 문맹률이 85%에 달하고 신정권은 문화수준을 높이려는 노력을 한 것이다.
중공은 미래의 희망을 문자개혁에 두어 왕력이 제정한 병음을 소학입학과 동시에 배우도록 한다.
당시 라틴자모 러시아어자모등 사용방안으로 혼란중 결국 왕력의 주장으로 라틴자모를 병음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는 본격적인 보급운동이 필요하였는데 중국어언의 수준은 유럽보다 80년이상 낙후된 것으로 보아 自知之明으로 낙후를 인정하게 한다.그는 보급운동과 동시에 학습방안으로 사휘학 어문학 수사학 사전학과 실험어음학의 연구를 병행하는 인재를 육성한다.더불어 중국전통의 어문학의 유산을 계승하는 노력으로 박절한 수요로 연구에 몰두하고 90리를 가면 백리의 절반으로 생각하는 사고를 강조한다.최후의 십리가 가장 어려움을 강조하고 가치도 그곳에 있다 하여 협애한 공리주의의 夢寐에 빠지면 前途가 없다고 강조한다.그러나 이를 정치운동으로 본 이들의 비판을 받는데 寧靜致遠으로 대응하고 학문의 환경온정에 노력한다.그즈음 일본에서 중국어법사가 출간되어 수천년의 한어궤적을 연구한 것으로 중국어언사의 연구공백을한탄하고 어언현상의 발전적 규율성의 연구를 시작한다.왕력은 북경대에 온후 한어사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10년이상의 집체역량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몰두하게 된다.이제 문과대학생들의 고문독해능력의 퇴화로 한적중의 전통문화신식의 중단위기로 전승의 단절을 우려하여 고대한어교과서를 만들어 교육부에 제시한다.
그래서 일관성없던 고등교육기관과 중등학교에 표준적 고문교과서를 공급하게 된 것이다.이론과 현실의 결합을 목표로 전국에 추광하여 개혁개방이후에는 대만에서도 이교재를 채택하여 사용중이다.
1950년대 중기부터 1960년대 전반에 왕력은 고대한어 한어사고 중국어언학사등을 출간하여 제1대 한어사연구생들을 배출한다.그러나 1966년 문화혁명으로 흑방으로 몰려 홍위병들의 박해로 인격적 侮辱과 受侮를 감내하고 연구에 몰두한다.그러나 곧 60세의 왕력은 비판 원고몰수 연구실봉쇄 재산몰수로 탄광에 가 노동개조를 받는다.이제 조반파 홍위병이 된 과거의 제자들의 구타가 가장 모욕적이었다 하는데 늘 묶여 비판을 받는다.그의 일기에는 이미 절망을 말하는데 세상을 용납하기 힘들고 골육도 무섭다고 한다.그는 자식들에게도 비판을 강요당한 것으로 세상이 이렇게 변할수 있는가를 반문한다.그런데도 시간이 없다며 다시 연구를 계속하려 하나 돌아갈 수 없어 1966-1971년 사이 6년간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노동개조를 한다.낮에는 구타를 밤에는 연구를 하는 생활로 역경중에도 노력하는데 1972년 제자인 부우현이 광주에서 북경에 출장와 스승을 보러 북경대에 간다.돌아온후 최초로 제자가 찾아오자 1966년 자신을 찾은 유일한 제자라며 빨리 갈 것을 요구한다.그러나 결국 울고말았다는데 인생사의 비정함에 매우 놀란 세월로 회상하는데 놀랍게도 돌아온후 문화혁명이 끝나자 詩經韻讀 초사운독 同源辭典을 발간한다.문혁의 종결후 이제 왕력은 76세로 10년만 더살기를 바라는데 문혁시의 보상으로 연구를 가속화한다.83세에도 보통화성음심의와 강연 질문하는 서신에 일일이 답신하고 연구중 6개월후 별세한다.그는 정규교육을 늦게 받는데 25세에 영어를 배우고 27세에 불어를 배우고 50세에 러시아어를 학습한다.80세이후에는 일어공부에 노력하여 일본방송을 들으며 공부했다고 한다.문혁후 한어사고를 개수하고 84세에 최후로 개정하는데 한어어음사 한어어법사 한어사휘사를 출간보충한다.그래서 한어의 발전역사를 모두 정리한 것으로 7년간의 작업으로 저서마다 극찬으로 일본학자들은 책을 사들고 평생의 영광이라 하였다 한다.1984년 왕력은 마지막으로 중산대학에 돌아가 중산기념당에서 현대한어어음계통이란 강연을 위한 것으로 5천여명의 강당에 15000명이 모여 성황을 이룬다.이는 세계교육사상 최초의 일로 왕력은 크게 감동하는데 최후의 공개강연으로 북경에 돌아온후 고한어사전을 퇴고한다.일생의 희망이 이루어진 것으로 일생의 대총결로 일생의 노력으로 이룬 것으로 어음 사휘등이 고급한 사전이다.그는 어언이나 사휘는 늘 발전하는 것으로 고의는 지금과 달라 판별이 힘들다 한다.대사전은 법전과 같아 집체로 수십년 수백년동안 편집해야 함을 강조하고 날마다 마지막 정력을 기울인다.백내장과 건강악화중에도 매일 2천자이상의 글을 쓰는데 1985년 여름 산동교육출판사는 왕력대전집을 출판한다.출판의 인세는 북경대 왕력어언장학금의 기금으로 기증하고 문혁후 최초의 개인장학금으로 지금도 운용중이다.그는 이를 고독과 존엄의 산물이라 하는데 연말에 눈이 안보이고 1986년 혈관연화로 건강이 악화된다.이해에 왕력은 세상과 이별하게 되는데 최후의 宿願은 완성하지 못하여 사전은 결국 제자들이 최종 완결한다.제자들은 사전의 명칭을 왕력고한어자전이라 명명하여 출간한다.
중국 가톨릭의 대표 지성, 마상백(馬相伯)
동·서양 문화에 탁월한 조예… 천주교 토착화 운동 선구자
전통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신앙에 바탕 둔 인생관 소유
예수회 운영 서회공학 입학
사제품 받고 교육활동 힘써
근현대 중국 교육·정치 견인
마상백
17세기 중국교회사 연구에서 서광계(徐光啓)의 역할이 중요하다면 19~20세기 중국교회사에서 반드시 거론돼야 할 인물이 마상백이다. 한때 예수회 신부이기도 했던 마상백은 근현대 중국에서 유명한 교육가이자 정치가였다. 진단학원(震旦學院), 복단대학(復旦大學) 설립자이기도 하며, 보인대학(輔仁大學) 설립에도 참여했다. 그는 1840년에 태어나 1939년까지 1세기를 살았던 사람으로 그의 일생은 중국 근현대사와 함께했다고 할 수 있다.
■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다
마상백은 아편전쟁이 발발한 1840년 강소성(江蘇省) 단도현(丹徒縣)의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요셉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의 가족은 대대로 천주교를 신봉했는데, 명나라 말기까지 집안 신앙 내력이 거슬러 올라간다. 마상백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서당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고, 의술을 펼치는 등 유의(儒醫, 유학자로서 의술에 정통한 사람) 생활을 했다. 이런 이유로 전통 유교 사상도 마상백에게 자연스럽게 전해졌다. 또한 어머니 심씨(沈氏)의 독실한 천주교 신앙과 그것에 바탕을 둔 교육관은 그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상백의 어린 시절에 그의 어머니는 매우 엄격히 교육했다. 그는 모친의 영향으로 사람들을 대할 때 무례하지 않고 야박하지 않게 됐다고 한다. 또한 마상백은 덕행 교육 이외에 천주교 신앙에 바탕을 둔 지식 교육도 받았는데,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당시 중국사회의 전통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천주교의 계몽으로 유년 시절부터 천자(天子)도 일반 사람들과 같고,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조물주가 창조하고, 삶과 죽음이 하나이며,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함을 알고 있었던 것이 어린 시절의 천주교 가정교육에서 비롯됐음을 밝혔다.
■ 예수회 신부가 되다
마상백은 1851년 고향에서 상해(上海)로 왔고,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서회공학(徐匯公學, Collège Saint Ignace)에 입학했다. 서회공학은 1850년에 예수회가 상해에 설립한 최초의 서양 학교로 중국 최초로 서양식 모델에 따라 설립한 학교였다. 마상백은 서회공학에서 8년간 공부를 마치고 예수회가 1862년에 건립한 신학교에서 일련의 과정을 거쳐 1870년에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사제로 서품됐다.
마상백은 서회공학과 신학교의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통해 서양 고전 라틴어와 그리스어 그리고 서양 현대어인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아어와 그들 문학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심리학, 윤리, 음악, 철학과 신학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다. 유년 때부터 중국 고전교육을 받았던 마상백이 다년간의 예수회 교육을 받고 30세가 됐을 때 이미 동서문화에 대한 조예를 갖추게 돼 후일 그가 중국 가톨릭의 대표 지성으로 발전하는 견실한 바탕이 됐다.
■ 사제복을 벗고 세속의 길로
당시 중국의 강남 선교지를 관할하던 예수회는 프랑스 예수회 소속이었으나 비프랑스 국적 선교사들도 가입돼 있었다. 그러나 다양한 국적의 선교사가 함께 모여 있어 마찰이 일어났는데, 그 모순은 1870년대에 폭발됐다. 당시 프랑스는 선교 보호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천주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프랑스 예수회는 당시 서회공학 교장을 맡으면서 중국인 학생들에게 중국 고전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이탈리아인 조톨리(Angelo Zottoli) 신부의 교육방식에 불만을 표출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마상백이 1871년에 서회공학 교장에 임명된 후, 그는 스승 조톨리 신부의 신념에 따라 중국인 학생들이 반드시 먼저 중국 고전을 배운 후에야 서양 학문을 배우도록 했다. 그러나 그가 학생들에 대한 중국 고전교육을 중시할 때 이미 예수회에서는 이러한 정책이 허용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한직으로 밀려났고, 후에 예수회와 여러 차례 충돌을 겪은 후인 1876년에 예수회를 탈회했다. 이때 그의 나이 37세였다.
마상백은 사제복을 벗고 세속의 길로 간 20여 년간 양무운동(洋務運動, 19세기 후반에 중국 청나라에서 일어난 근대화 운동)의 현장에서 활동했다. 그는 다양한 유럽 언어에 능통해 양무파 고위 관료들에게 인정받아 외교가로서 활동했다. 일본 고베 주재 영사, 조선 국왕의 정치고문, 차관 문제 협의차 미국 파견 등의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 다시 교회로
청일전쟁 패배 이후인 1895년 마상백은 정치의 길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는 교회를 떠난 후에 결혼해 아이도 있었지만 사제복을 벗은 것에 대한 회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1886년 그는 로마에 방문해 레오 13세 교황을 알현한 후 교회를 떠난 것에 대해 더욱 회의하기 시작했다. 또한 1894년 임신한 그의 부인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다음 해에 모친이 세상을 떠났다. 부인과 모친의 죽음을 경험한 후에 마상백은 다시 교회로 들어갔다.
1897년 그는 서가회의 예수회에 들어가 지금까지의 죄를 인정하고 독신생활의 회복을 맹세했다. 비록 마상백이 신부의 직무를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예수회 또한 이전의 죄를 묻지 않고 그가 교회에 다시 들어오는 것을 환영했다.
그는 교회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교회 밖의 영역에서 많은 일을 했다. 개혁과 혁명, 그리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역할에 최선을 다했고, 그의 실천적 행동은 천주교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마상백의 두드러진 업적은 그의 교육 활동이었다. 진단학원과 복단공학(復旦公學, 현재의 복단대학)을 설립했고, 천주교 대학인 보인대학 설립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천주교인으로서 마상백은 무엇보다도 당시 중국 천주교의 상황을 변화시키고 개혁하고자 노력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호적(胡适, 1891-1962)은 수개국어에 능통하고 나중에 장개석을 따라 대만으로 이주후, 주미대사를 지낼정도로 탁월한 역량을 보유했던 인물입니다. 백화문학에 일조를 한 사람이며, 나중 딸이 남자친구를 따라 중공으로 망명하자, (등잔불의 심지는 다 탓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살하게 됩니다. 이념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의 피해자라 볼 수 있겠죠.
震旦(진단)이란 말도 중국이란 단어를 일본,베트남.조선.청 나라가 각기 사용했듯이 조선과 淸이후 한족들이 사용한 보통명사로 이해해야 할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고금지명대사전에 나오는 진단이란 말도 진단이란 단어를 통해 고금지명대사전이 진단 즉 조선의 지명이다라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하겠지요. 진단이란 말이 이마우스의 동쪽 즉 히말라야에서 알타이산에 이르는 축선의 동쪽정도로 이해하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시대에 따라 단어와 강역이 변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오히려 이해가 쉬울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