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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15일
말씀: 행2:1-4
제목: 성령으로 세워진 교회
교회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2020년 교회 목표가 바로 ‘복음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교회’입니다. 목표라기보다 교회가 이렇게 세워져야합니다. 저번 주에는 교회의 기초가 그리스도가 되어야하고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죽음’이 있어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교회가 세상과 소통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세워진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먼저 성령이 오심에 대해 요약을 좀 하자면, 첫째, 언어의 통일성입니다. 시날지역에서 이들이 하나님이 주권을 도전하는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능력을 탑을 통해 증명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인간이 힘을 합치면 더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주권을 도전하게 된 이유가 이 무리들이 한 족속이요 한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고 언어를 흩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언어를 혼잡케 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들이 흩어진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오순절 성령님이 오셔서 이 언어를 하나로 통일되게 하셨습니다. 하나의 언어로 복음을 전하는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언어를 하나로 통일시킨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 세상, 열방을 향해 누구든지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한 민족이 될 수 있다는, 새 예루살렘이 될 수 있다는 천국백성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두 번째로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나라에 가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요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로 가야 누가 온다는 말입니까? 성령임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 하나님나라에 가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을 향해 지금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에 가셨다는 것을 성령의 임재로 증명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로 성령님이 오셨다는 것은 너희들이 죽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증거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그토록 부인해 온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온 천하에 선포하는 것이며, 너희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14장에서, 대제사장이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이렇게 물어볼 때, ‘네가 그로다’ 그랬지요. 이 말을 제사장이 듣는 순간 옷을 찢었습니다. 제사장의 옷을 찢었다는 것은 신성모독의 말을 들었을 때 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일 때 어떤 죄목으로 죽었습니까? ‘참람죄’입니다. 신성모독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이 그렇게 반응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데 하나님의 아들이라 사칭하고 다니는 예수를 십자가에 심판했는데 결국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말입니다.
네 번째, 성령의 오심은 죄를 보고, 죄를 이기게 하십니다.
미가3:8절을 봅시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능력과 정의와 용기로 충만해져서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이 보이리라’
성령 충만하면 권세와 능력, 즉 죄를 이기고 유혹을 이기고 사탄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천하제일이라고 힘주고 다녀도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권세와 능력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부장이 새로 부임을 해 왔습니다. 이제 잘 보여야할 입장에 있는 과장 집사가 있었는데 부장이 과장보고 주일 날‘김과장 둔산동 일식집에서 식사나 같이 하지, 서로 당신과 내가 뜻이 잘 맞아야 회사가 잘 돌아가지 않겠나?’그러면 ‘부장님 주일에 예배 때문에 저는 좀 곤란합니다. 날짜를 좀 변경하시면 어떨까요?’이래야 되는데 바로 ‘주여 어떻게 합니까?’하고 기도에 들어갑니다. 기도할 필요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좀 쪽팔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령의 충만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회개로 끝나서는 안 될 이유입니다. 성령을 강력이 사모해야합니다. 그래서 권세와 능력을 받아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축복된 약속을 이루어내야 합니다.
다섯 번째, 성령이 오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고 그 뜻 앞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주안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왜입니까? 우리의 힘으로 하려면 굉장히 힘들고 어렵습니다. 경험이 있으시지요, 그래서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인 줄 알지만 끊임없이 핑계를 늘어놓습니다. 왜요 성령이 함께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으로 하려고하기 때문에 힘들어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 오늘하고 있는 일에 힘과 능력과 지혜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자기 맡은 부분에서 내가 희생하고 죽고, 헌신하는 마음은 그 생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에 젖은 아주머니가 끓이는 라면과 성령충만하지 못한 아주머니가 끓이는 라면은 격이 틀립니다. 왜냐? 성령으로 이끌리는 집사님은 남편이 밤10시에 들어와서 ‘여보 출출한데 라면 하나 끓어오지’, 그러면 보던 T.V 그 즉시 끄고 ‘여보 무슨 라면’ 이러는데 성령 충만하지 않으신 집사님은 라면 끓여달라고 하면 T.V 보는 거 안 보여 인간아 너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이렇게 나옵니다. 성령에 이끌리는 집사님이 그리는 립스틱은 테두리까지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편안하니까 잘 그려지지요, 그런데 성령이끌리지 못한 집사님이 그리는 립스틱은 삐딱하지요 짜증이 나고 불안하니까 손이 떨릴 수밖에 더 있습니까? 성령 충만하여 육체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여섯 번째,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15:26 ‘내가 아버지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그러니까 성령의 역할은 우리를 예수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일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끌릴 때, 우리는 여러 가지 중에 거룩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우리가 거룩한 자로 세움을 입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생각이 거룩해야합니다. 우리의 언어가 거룩해야합니다. 우리의 행동이 거룩하고, 우리의 계획이 거룩해야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람의 생각과 방법으로 간다는 것은 육신이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존귀히 드러내는 삶을 성령을 통해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그리스도의 승리와 구원을 증거 해 나갈 것입니다.
일곱 번째 보증을 삼기 위해서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엡113-14 말씀에‘우리기업의 그를 보증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고린도 후서4:8-10절의 모든 것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보증을 삼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신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이제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실패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나와 성령이 구별될 수 없이 한 몸을 이루었는데 그러면 성령이 지옥갈수 있습니까? 당연히 천국가지요. 그러면 우리는 절대로 지옥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보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보장을 이 보다 더 정확하고 명확하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령이 넘어지지 않으니까 성령이 실패자가 아니니까 성령이 근심 중에 고통당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아무리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왜요 성령이 인치고 계시니까 말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강림은 이런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교회가 성령으로 세워져야하는가 하는지에 대한 답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나타난 교회가 바로 성령으로 잉태된 교회가 될 수밖에 없으며, 동시에 교회는 반드시 성령으로 세워져야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으로 잉태했습니다. 성령으로 해산된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난자입니다. 거듭난 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입니다. 우리를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세웠습니까? 예수님의 피의 대가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나라를 세워나가는 일입니다. 먼저는 부르신 목적이 우리를 부려먹기 위해서가 아님을 아셔야합니다. 우리를 얼마나 크게 대접하시는가? 그 하나님의 축복은 광범위하며 얼마나 크고 거대한가를 아셔야합니다.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나라에서 침례요한 보다 큰 자로 삼으시고 이 땅에서는 우리에게 권세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대접하시는가하면, 우리의 죄악이 구약의 제사에서도 비춰주는 것처럼 레위기 1장에서 나타난 말씀처럼, 그 심판의 잔혹성을 아셔야합니다. 우리의 이 추악하고 잔인한 죄인을 어떻게 심판하시느냐하는 내용이 레위기1:3-9절까지에 나와 있는데요, 피를 내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이런 형태로 짐승을 죽이는 것은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가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심판을 누가 지금 받으셨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어떻게 대접하시기 위해서입니까? 예수님보다 더 귀하게 크게 대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를 보셔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순간 우리의 질병도, 저주도, 죄악도 떠나가 버렸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예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오는 영육간의 모든 고통을 해결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런 자녀들이 가야할 길, 삶을 누리야 할 방법이 바로 하나님나라를 보여주고 확장하고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삶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남긴 우리들의 삶의 여정을 설명하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시다시피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이런 삶의 목적을 분명히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런 명령을 내린 것입니까? 우리가 지금 누리는 것과 같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받고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며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방법 이외는 다를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21:15-17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도 요한의 아들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이 말씀에 베드로와 주님의 사랑의 정도가 차이가 남을 볼 수 있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적도 있는데요, 주님은 ‘아가파스’로 물었고 베드로는 ‘필레오’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 차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친구의 사랑과의 차이입니다. 여기에 주님께서 베드로에 대한 성장의 의지를 볼 수 있고요, 그리고 결국 네가 맡아서 수고할 ‘양’을 어떻게 해야되느냐하는 것을 사명으로 제시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의 명령대로 마가 다락방에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쓸 때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는 순간, 마가 다락방은 주님을 모신 교회가 되었습니다. 고전3:16‘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이때부터 성령 받은 성도들, 즉 자기 심령에 주님을 모신 성도들이 교회가 되었고, 온 성도가 모여 있는 곳이 ‘에클레시아’ 곧 회중교회가 된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백이십 명의 성도가 있는 첫 번째 회중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교회는 예수님의 생애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머리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예수님과 함께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생애에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가 교회를 허락하시고 주님이 그 교회 머리되시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엄청난 비밀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교회가 주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전인 우리를 통해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성령으로 사신 것처럼 교회도 성령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을 나타내야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셨지요, 마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랬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이끌리시어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눅4: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성령으로 가르치시고 성령으로 명령하셨습니다. 행1:1-2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또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마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엡1: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생명구원을 위해 성령 안에서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성령 안에서 죽어야한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몸 된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각 지체별로 연합되어 있는데 이 교회가 어떻게 움직여야하느냐 하면 성령으로 움직일 때, 교회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역사, 이웃과 소통하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각 지체별로 연합되어 성령으로 말하고, 성령으로 섬기고, 성령으로 낮아지고, 성령으로 훈련받고, 성령으로 결단하고, 성령으로 움직이고, 성령으로 생각하고, 성령으로 복음을 전하고, 성령으로 충성하는 교회가 된다면 사람의 생각과 방법과 원리는 절대로 들어올 수가 없는 곳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역사하는 현실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합니까? 왜 예수님이 성령으로 일하시고 성령으로 말하셨습니까? 세상에 악한 영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왜 교회가 꼭 어려움을 당하도록 하나님이 만드시는가하는 질문이 있으면 부탁드리는데 수요예배 꼭 나오십시오. 수요예배 때 이 말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왜 성도들이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분명히 찾을 것입니다.
결국 왜 이런 악한 마귀의 역사가 있느냐하면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들이 있기 때문에 이 악한 세력들이 끊임없이 교회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 안에서 최후까지 핍박을 받지만 마귀가 지옥으로 데려가려는 영혼을 끝까지 구원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세운 교회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바울의 생애는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몸에 채우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옥에 갇히고, 돌에 맞으며, 태장에 맞고, 채찍에 맞는, 육체로는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영혼을 사랑하는 힘으로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수요예배 때 말씀드렸지만 신비한 것이 우리가 볼 때는 참 힘들겠다, 고통스럽겠다,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 들겠지만 당사자는 더 큰 은혜와 감격과 감사의 삶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비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고난을 즐긴다고 할까? 왜 이런 일이 있느냐, 바로 성령의 힘이요 능력이요 사랑이라고 밖에 설명이 불가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을 기초로 해서 사도행전교회를 한 번 보십시오. 왜 이런 교회가 가능한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먼저는 성령으로 세워진 교회는 반드시 밖으로 뛰쳐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이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러분 성령의 운행하는 교회가 왜 되어야하느냐 그 첫 번째를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운행하는 교회가 될 때 성도들이 밖으로 뛰쳐나가 역동적으로 복음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이 임한 이후에는 그들이 모여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 감격과 감동과 능력으로 그들이 할 일은 밖으로 뛰쳐나가 ‘너희들이 죽인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밖으로 뛰쳐나가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그 일들 속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수많은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성령이 운행하는 교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성령의 지배를 받고 성령에 젖어있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운행하지 않으면 어찌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성령으로 말하고 성령으로 교제하고 성령으로 충성하고 성령으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교회는 잘 낫고 똑똑한 사람이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성령으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어야 교회가 살고 이웃과 세상이 변화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교회는 안에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흘러 보내고 예수님의 사랑을 흘러 보내는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반드시 생명이 충만하고 생명이 풍성하며 생명이 날마다 더해 져야하는 곳입니다.
뛰쳐나가 각 나라 말로 방언을 통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서 베드로의 설교가 나옵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너희들이 죽인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그리고 우리가 다 증인이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이 말을 들은 자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가 37절에 나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러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그 때 이 말씀을 마음에 받은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41-42‘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성령의 세워진 교회는 이웃이 우리의 삶을 보고 찔림을 받고, 우리의 삶을 보고 예수그리스도를 보고 믿으며, 침례를 받은 숫자가 해마다 늘어나는 교회, 구원 받은 심령들이 해마다 늘어나는 교회로 세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보면서 내 자신을 비추어보지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자신들을 비추어봅니다. 우리의 삶을 보고 자신을 비추어 찔림을 받은 삶을 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성령으로 이끌리고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삶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비추는 삶에서 세상의 평가는 미련한사람들, 어리석은 사람들, 바보 같은 사람들,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렇게 평가하고 우리를 무시하며 조롱하더라도 그 속에 비춰진 진리는 그들의 심령을 찌를 것입니다. 그들의 뇌리에 우리의 삶이 맴돌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이어서 사도행전교회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