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 사림파와 훈구파의 권력 다툼으로 사화가 일어나다
목차
- 1. 사림파가 새롭게 등장하다
- 2. 사림파, 무오사화로 화를 입다
- 3. 「조의제문」이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다
- 4. 연산군, 훈구파의 편을 들다
- 5. 「조의제문」과 관련된 자들을 모두 벌주며 포악한 임금으로 변해가다
여러분, 오늘 연산군이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일을 벌였다고 합니다.
사림의 우두머리 격이던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치고 그의 시체를 훼손시키라는 ‘부관참시’의 벌을 내린 겁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일이 왜 벌어졌는지 이유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림파가 새롭게 등장하다
성종은 훈구파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림들을 불러들였어요.
성종 시대에 그나마 유지되던 사림파와 훈구파 사이의 균형은 연산군이 되자마자 무너지고 맙니다.
앞서 보았다시피 세조는 자신이 왕이 되는 것에 도움을 준 사람들을 공신으로 임명하고 많은 상을 내리지요.
공신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재물과 권력을 얻기 위해 부정부패를 일삼았어요.
사림파는 그런 훈구파를 비판하며 등장한 세력입니다. 이들은 훈구파의 잘못을 비판하고 나섰고, 결국 두 세력은 권력 다툼을 벌이게 되었지요.
2. 사림파, 무오사화로 화를 입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권력 다툼의 결과 나타난 것이 바로 무오사화입니다.
사화란 ‘사림이 화를 입다.’라는 뜻으로, 시작은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었어요.
「조의제문」은 중국 초나라의 왕 의제가 항우에게 패한 후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항우라는 사람이 의제라는 왕을 죽여 강물에 던져 버린 일을 말하고 있지요.
사림파 신하 중 한 사람이 『성종실록』을 만들면서 여기에 사림파에게 존경받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으려고 했어요.
3. 「조의제문」이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다
사림파가 「조의제문」을 실으려는 사실을 알게 된 훈구파는 득달같이 연산군에게 달려갔지요.
죽임을 당한 의제가 단종, 왕을 죽인 항우가 세조를 상징한다고 여겼던 거예요.
그들은 「조의제문」이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일을 비유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주장했어요.
그리고 사림파들이 세조의 뒤를 이은 성종과 연산군의 즉위도 올바른 왕위 계승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몰아갔지요.
그러자 「조의제문」을 실록에 실으려던 사림파들은 갑자기 연산군을 반대하는 이들이 되어 버렸어요.
4. 연산군, 훈구파의 편을 들다
연산군은 신하들의 힘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시키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게다가 번번이 자신과 의견 충돌을 일으키는 사림파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지요.
이것이 하나의 기회가 되겠다 싶자 연산군은 불같이 화를 냈어요.
“감히 내 할아버지인 세조 대왕을 욕하다니. 내 그 죄를 단단히 물어 김종직에게 엄벌을 내리겠다!”
김종직은 벌써 오래 전에 죽고 없었어요. 그래서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토막 내는 ‘부관참시’라는 형벌을 가했지요.
죽은 사람을 다시 한 번 죽이는 거예요. 이를 실록에 실으려고 했던 김일손도 벌을 받았어요.
5. 「조의제문」과 관련된 자들을 모두 벌주며 포악한 임금으로 변해가다
연산군은 「조의제문」을 싣는 일과 연관된 사람들은 대부분 조정에서 내쫓거나 유배를 보냈어요.
이 사건이 무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무오사화’라고 합니다.
연산군의 문제는 무오사화에서 끝나지 않았어요. 사화를 통해 얻은 권력을 연산군이 국정 개혁이나 경제 발전 같은 일에 쓰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지키는 데만 썼던 거예요.
연산군은 곧 실정과 폭정을 거듭하며 점점 폭군으로 변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