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 아집(我執)이라는 것, 나 아[我]자, 집착할 집[執]자, 아집이라는 것, 아집은 이것을 못 버리면 공부했다는 아무 보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참선해도 아, 한 철 보다도 두 철하면 두 철 된 만치 사람이 더 부드러워지고 모서리가 없어져야 돼야 할 것인데 가만히 더러 보고 있어놓으면 아, 참선도 선방에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모서리가 더 많아진다 말입니다.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유연선심(柔軟善心)이라, 유연선심이란 것은 부드러울 유[柔]자, 연할 연[軟]자, 우리가 마음이 부드럽고 온화하고 그런 것이 유연 아닙니까. 선심(善心), 착할 선[善]자, 마음 심[心]자, 우리 마음이 부드럽고 또는 선량하고 그런 마음이 유연선심인데, 우리가 불경 보면 공부를 하면 공부를 한 만치 차근차근 우리가 더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온화해지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유연선심이 되어야 공부를 많이 했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는 아만(我慢)이나 또 그야말로 교만심(驕慢心)이라든가 그런 것은 나올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차근차근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는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모서리가 떨어지고 말입니다.
자기라는 그런 고집이 떨어지고 또 내가 생각하는 것만이 옳다는 그런 법집法執이 떨어진단 말입니다. 그렇게 돼야 공부가 참 될 것인데 더러는 공부를 많이 했다는 분들이 모서리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더욱더 그냥 남 비판 좋아하고 남하고 화해도 못하고 그런다 말입니다. 우리 사람 가운데서 제일 보기싫은 것이 무엇인고 하면 아만심(我慢心)이고 교만심(驕慢心)입니다. 그 아만심과 교만심을 낼 건덕지가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무슨 필요로 아만을 낼 것인가. 이것은 아집이 있으니까 아만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집은 무엇인가. 아집 이것은 이 몸뚱이가 김 아무개라는 몸뚱이가 꼭 이것은 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말입니다.
이 몸뚱이가 절대로 내 것이 아닙니다. 김 누구도 그 몸뚱이가 김아무개 그 사람 것이 아니고 박 누구도 역시 몸뚱이가 그 사람 것이 아닙니다. 잠시간 업(業)으로 해서 그 김이란 사람, 김 누구같은 사람 몸뚱이같이 보이는 것이지 그것이 실지로 김이란 사람 몸뚱이가 있을 수가 없어요. 왜 그런고 하면 ‘인연소생법(因緣所生法) 아설즉시공(我說卽是空)이라.’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은 바로 공(空)이란 말입니다. 이 눈에 보이는 존재는 모두가 다 자기 몸뚱이든 이 세계 전체든 또는 금이든 은이든 모두가 다 이것은 하나의 참다운 존재가 아닙니다. 참다운 존재가 아니라 지금 시시각각으로 순간순간 변화해가는 하나의 이것이 허상(虛相)에 불과한 것입니다.
불자님들은 소중한 『금강경(金剛經)』을 부인을 못하시겠지요. 『금강경』 도리가 무엇입니까.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유위법(有爲法)이라, 하는 것은 우리 중생들이 보이는 이 대상이나 자기 몸뚱이나 모두가 다 유위법입니다. 이런 것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또는 이슬이요 번개나 같다 말입니다.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사실이 있지가 않습니다. 자기 몸뚱이가 아무리 말끔히 잘낫다 하더라도 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금생에 나와서 이것저것 주워 배워가지고서 하나의 그런 것을 우리가 이른바 전도몽상(顚倒夢想)한 것을, 그것을 주워모은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도 조건부인 것이지 꼭 자기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자기 몸뚱이도 자기 것이 아닌데 자기 집이 자기 것이 되겠습니까. 자기 공장이나 자기 회사가 자기 것이 되겠습니까. 모두가 다 조건부로 해서 잠시간 있는 것같이 보일 뿐이라 말입니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입니다. 불교를 공부해서 그 집착을, 나라는 집착을 부린다고 생각할 때는 공부를 안 한 것입니다. 나라는 집착을 끊어버렸으면 그때는 법집(法執)이라, 내 것이라든가 또는 이 대상이 내가 지금 눈으로 보는 대로 존재한다는 그런 집착이 나올 수가 없다 말입니다. 유위법(有爲法)이라, 유위법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같이 보이는 하나의 가상(假相)입니다. 유위법이라는 것은 우리 보는 모두가 유위법입니다. 우리 몸뚱이도 유위법이고 다 유위법입니다.
그러니까 『금강경(金剛經)』에서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라.’ 그 우리가 보는 것이 단지 상(相) 아닙니까. 나라는 상相, 너라는 상相, 좋다는 상, 궂다는 상, 상(相)이라 말입니다. 그런 상이 사실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이, 상(相)이 아닌 것을 봐야 그래야 즉견여래(卽見如來)라. 그래야 부처님을 뵈온다. 부처님은 바로 우리 마음자리입니다. 우리 마음과 부처는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부처란 것은 우주의 도리고 우주생명(宇宙生命) 아닙니까. 우주생명이 바로 부처입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무엇인가? 우리 마음은 지금 보입니까.
부처님 말씀이나 또는 조사스님들 말씀에 마음 떠나서 부처가 없고 부처 떠나서 마음이 없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 마음과 부처가 온전히 하나입니다. 부처도 석가모니 부처님은 2500년 이상에 역사적으로 나오신 그런 어른이겠지요. 그러나 참다운 부처, 참다운 부처는 법신불 아닙니까. 석가모니가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우주의 생명, 우주의 진리가 바로 법신 부처인데 그 우주의 생명인 법신 부처와 우리 마음은 똑같습니다. 달마대사께서 2조 혜가스님한테 말씀하신 법문도 오직 그 마음법문이라 말입니다. 마음이 어디가 있는가? 우리 마음이 지금 어디가 있습니까?
우리 마음이 우리 머리에가 있습니까? 뇌에 가 있습니까? 우리 가슴에 가 있습니까? 내 몸뚱이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아무리 찾아봐도 마음이 있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밖에 가 있는 것인가? 밖에 어디에도 마음이 어디가 보입니까. 그러나 내가 살아있는 한은 틀림없이 지금 있기는 분명히 있다 말입니다. 있기는 분명히 있으면서 모양은 없는 것이 마음입니다. 생명은 틀림없이 나라는 존재가 있으니까 마음은 있지 않겠습니까. 마음은 분명히 있는 것인데 모양은 어디에도 없다 말입니다. 모양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은 더 확실히 말하면 천지 우주에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말씀이나 똑같습니다.
마음과 부처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법신 부처님의 모양도 어디에도 없단 말입니다. 석가모니가 나왔다고 그래서 부처가 둘이 있고 셋이 있고 그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주에 항시 계시는, 석가모니가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없이 언제나 존재하는 법신 부처님, 그 법신 부처님은 이것은 그 무슨 제한된 한정된 그런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말입니다. 그래서 법신 부처님하고 우리 마음은 똑같습니다. 똑같은데 다만 우리 중생들은 그 법신 부처님도 모양도 없고 사람 마음도 모양이 없으니까 다 똑같다 여기까지는 생각을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 마음은 그럼 어떤 작용이 있는 것인가? 마음 작용을 잘 모른단 말입니다. 마음 작용은 이것은 우리가 깊은 삼매에 들어서 마음을 깨달아야 비로소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공부하는 것은 보통은 암중모색(暗中摸索)이라. 참선도 암증선(暗證禪)이라. 암증선이 무엇인고 하면 내 공부가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인가? 내 공부가 지금 옳게 되는 것인가? 또 공부를 해가면 그 닦아나가는 그런 과정은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을 모르고서 덮어놓고서 참선한다고 앉아있는 것, 그것이 암중모색하는 암증선입니다.
우리는 참선한다 하더라도 그 소중한 시간, 소중한 시간을 몇 개월 동안이나 애쓰고 앉아서 공부하니까 꼭 분명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정곡 그대로 우리가 닦아야 그래야 우리 생명도 낭비 안 되고 우리 공부도 더욱 더 진척돼 가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은, 부처님 법은 우주의 도리를 그대로 다 말씀하셨고 또는 부처님 법은 꼭 우리 중생들한테 유익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는 부처님 법은 부처님 법대로 닦으면 그때는 스스로 법희선열이라, 항시 기쁨이 온다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 부처님 법은 좋기는 좋은데 닦을 때 그냥 괴롭고 우리한테 아무런 기쁨도 없다, 이런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법은 틀림없이 틀림없이 우리한테 최상의 이익을 준다 말입니다. 부처님 법과 건강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모두가 다 부처님의 불심(佛心)으로 돼있습니다. 불심으로 돼있는데 또 불심 그 자리는 우리 마음, 그 자리는 항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만능의 자리입니다. 만(萬) 공덕(功德)의 자리입니다. 제대로 깨달으면 틀림없이 삼명육통(三明六通)이나 그런 신통지혜(神通智慧)가 나오는 그런 자리란 말입니다. 『아함경』이나 그런 데 보면 깨달은 그런 도인들 말씀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저는 어젯밤에도 얘기했습니다마는 부처님 당시에 다라표(陀羅票), 다라표 비구는 열네 살 사미승 때, 14살에 아라한도를 성취했어요, 열네 살에 아라한도를 성취한다는 것은 그 삼명육통을 다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우리 마음은 누구나가 다 삼명육통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원래 갖추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