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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설교 내용 요약
제 목 : 공관복음 강론14
주제 11. 산상수훈(4) 보여 주는 의와 흘러나오는 의
지난주 강론에서 우리가 예수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셨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보았고, 오늘은 이어지는 주제로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의로운 삶, 올바른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예수님이 세 가지 영역, 구제, 금식, 기도를 예로 들어서 말씀하고 있다.
서론
마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디카이오쉬네, 쩨다카, righteousness)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 휘포크리테스(hypocrite) “ 배우, 연기하는 자, (상징적으로) 위선자, 외식하는 자
(잠 16: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루아흐, 프뉴마)을 감찰하시느니라(타칸 / 저울에 달아보다, 평가하다)
(잠 21: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심령(루아흐, 프뉴마)을 감찰하시느니라(타칸 / 저울에 달아보다, 평가하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 자기의 멋진 모습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점을 지적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 의가 보여주는 의라는 것이다. 올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을 하는 그 자체는 바람직하다. 그런데 첫 번째는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고, 그 다음에는 그 올바른 삶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그 마음속 동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인정 욕구) 그런 게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보여주려고 사는 이 올바른 삶을 초월해서 흘러나오는, 즉 자연스럽게 그런 삶을 살게 되는 우물 밖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아라, 그리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이나 보상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으려고 노력하라는 뜻으로 오독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의미는 행위를 하는 그 마음과 동기를 하나님께서는 평가하신다는 것이다.(잠 16:2, 21:2) 따라서 6장 1절의 말씀은 사람들이 올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데, 사람들의 평가를 받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평가를 주목해야 되는데 하나님은 너희 마음을 평가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상을 받기 위해서 노력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인정 욕구다. 예수님은 인정 욕구 속에 묶여 있는 사람들이 사람들로부터 평가를 받든, 하느님으로부터 평가를 받든 인정 욕구에 목말라 있는 자들의 문제를 지적하시는 것이다
구제
6:2 그러므로 구제(엘레에모쉬네, 엘레오스, 즉 긍휼의 파생어)를 할 때에 외식하는 자들이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6: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긍휼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너무도 불쌍하기에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제를 할 때 외식하는 자들이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구제하는 것같이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니까 원하는 거 다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다르다는 것이다. 너희는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갚으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개인 구원에 대한 말씀으로 해석해서, 하나님과 거래를 하라는 말씀처럼 읽히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아니다.
기도
6: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6: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중간의 주기도문은 다음 강론에서~)
이 말씀도 똑같은 구도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기를 좋아하는데,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칭송과 칭찬을 받았으니까 그걸로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흔히 골방 기도라는 말을 많이들 한다. 골방에 들어가서 아무도 보지 못하는 데에서 하나님께 은밀한 중에 내 소원을 말해라, 그럼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라고 독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한 중에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은밀히 기도하라는 것은 클레로스의 성장과 확산을 기도하는 것이다. “제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제가 원하게 되어서 열심히 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결과를 맺게 해 주시옵소서.” 즉 클레로스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서 기도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내 소원을 비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역할을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간구를 하는 것이다. 맡겨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 맡겨 주신 사명이 클레로스의 성장과 확산이다.
(그리고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기도 내용이 나오는데 이 부분은 다음 주에 우리가 함께 볼 것이다
금식
마 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6: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할 때 너희는 이렇게 힘들게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 인정받으려고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계속 똑같은 구도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도 금식을 열심히 하면 복을 받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오독을 하게 되어 있다.
세 가지 의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구제 기도 금식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은 유대주의자들의 구제 기도 금식의 잘못된 방향을 지적을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의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유대주의자들의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초월해야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 가지 의>
1. 유대주의자들의 구제, 기도, 금식
2. 기독교인들의 구제, 기도, 금식
3. 클레로노모스들의 구제, 기도, 금식
이 세 가지 종류의 의로운 삶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물론 클레로노모스들의 구제 기도 금식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A. 각자도생하며 인정 욕구에 불타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오류
사람들에게서 인정과 보상을 받으려는 함정에 빠진 율법주의자들
핵심은 외식하는 삶이다. 사람들에게 인정과 보상을 받으려는 함정에 빠진 율법주의자들 먼저 지적하시는 것이다.
B. 각자도생하며 인정 욕구에 불타는 기독교인들의 오독
사람들에게 보여 주지 말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보여드라고 독해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에게서 인정과 보상을 받으려 하지 말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과 보상을 받으라고 독해가 되는 것이다.
C. 새 창조에 의해 우물 밖으로 건져내어져 하나가 되기 시작한 클레로노모스들의 깨달음
세 번째가 새 창조에 의해 우물 밖으로 건져내어져 하나가 되기 시작한 클래로노모스들의 깨달음과 올바른 삶이 있다. 여기에 올바른 독해와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올바른 삶이 있는 것이다.
(새로운 인지체계)과 올바른 삶
1.구제의 새 언약적 의미 : 하나 된 삶
구제의 새 언약적 의미는 내부의 하나 된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부의 하나된 삶을 지향할 때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구제인데 평균케 된 삶이다. 이것은 규칙을 준수하려는 게 아니고 하나가 되어서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게 너무나 강력한 소원이 됐기 때문에 구제로 대표되는 이 하나된 삶이라는 것은 소원을 이루는 삶이다. 즉 명령을 지키는 삶이 아니고 소원을 이루는 삶이다. 그것이 구제의 새 언약적 의미다.
2. 기도의 새 언약적 의미 : 하나 된 삶의 성장과 확산을 간절히 원하는 기도(주기도문)
기도의 새 언약적 의미는 하나된 삶의 성장과 확산을 간절히 원하는 기도가 되는 것이다.
3. 금식의 새 언약적 의미 :
금식의 새 언약적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은 금식을 직접 명령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율법에는 금식이 없다. 그럼 왜 금식이 그렇게 강력한 전통이 됐느냐?
(사 58:6)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그 금식이 이런 효과를 내는 금식일 때 내가 그 금식을 기뻐한다, 이렇게 오독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문장은 그런 뜻이 아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밥을 굽는 것이 아니고,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그것이 바로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밥 굶고 그런 거 좀 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너희가 밥을 굶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을 우물 밖으로 꺼내기 위해서 너희들이 애쓰는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지 너희가 각자 자기를 위해서 내 앞에서 밥 굽는 거 난 그거 원치 않는다는 말씀이다. 너희들 자신을 위해서 나에게 거래를 하려고 달려들면서 밥을 굶고 난리를 치는 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레위기에서 대속죄일에 금식하라고 명령하셨는데? 라고들 생각한다.
레위기에서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이것을 금식으로 오해하면서 금식의 전통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서 말씀에서 본 것처럼 중간에 하나님께서 금식 같은 거 하지 마라, 대신 이런 것을 해야 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것은 싸르크스를 제압하라는 것이다. 너희의 개인적인 인간적인 욕망과 공포와 탐욕을 제어하라는 것이다. 이사야서에서는 그것을 제어하고 다른 사람들을 우물 밖으로 꺼내는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희의 공포와 탐욕에 휘둘려서 허겁지겁 하지 말고, 내 코가 석자인데, 내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하면서 팔딱팔딱 뛰는 삶을 살지 말고, 그 인간의 본성을 제어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왜 이것을 금식으로 재해석을 했을까?
신에게 치성을 드리는 방식 중 하나가 금식인 것이다. 인간의 원초적인 종교의 모습이 들어와서 그 눈으로 해석을 하니까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의미를 금식을 하라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하나님은 금식을 직접 명령하지 않으셨음
-이스라엘이 금식으로 재해석하고 전통으로 굳어짐
-70인역은 오히려 자기 부인의 뉘앙스가 강함
(레 16:29-31)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흘(대속죄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이는 너희에게 안식일 중의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Anah Nephesh(맛소라 사본) (너희들의 목숨들을 괴롭게 하고)
너희 프쉬케들을 타페이노오하고(70인역)(너희 목숨들을 낮추고)
ye shall afflict your souls(KJV)
you must deny yourselves(NIV)
* 하나님은 모세 율법에서 ”싸르크스의 제압“을 말씀했으나
이스라엘이 종교 의식으로 오해했고 하나님도 묵인하신 것으로 추론할 수 있으나 위 이사야서에서 그들의 오류를 지적하셨고
후에 메시아는 자기 부인과 자유의 획득으로 그 의미를 밝히신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성령의 새 창조 사역에서 성취되었고
사도 바울은 이를 십자가에서의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으로의 부활로 표현했으며 그 모습은 클레로스 신학의 새 생명들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이중 윤리의 삶으로 나타난다
올바른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첫째는 구제, 둘째는 기도, 셋째는 금식인데 저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내놓고 드러내면서 그걸 하고 있는데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걸 왜 하느냐 하는 마음의 중심을 평가하신다는 것이다.
당시의 유대주의자들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기독교라는 종교의 구성원들은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것이 너희들의 자연스러운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 즉 새로운 창조의 결과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2.공지사항
다음 주 기도는 조혜자 권사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