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편집: 묵은지

▲6.25전쟁 중에 일부가 불에 탄 철종 어진(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후기에는 왕의 외척들에 의한 세도정치가 극심하였던 시기로 나라 전체가 타락한 관리들의 세상이 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착취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민심 이반이 심각했던 시기였습니다. 나라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으며 나라의 운명은 바람앞의 등불과 같은 신세가 되었고 보위에 오른 왕들마저 이런 스트레스를 받아서 였는지 명줄이 짧아 요절하는 왕들이 많아지면서 수시로 임금의 자리를 갈아 치워야 했습니다. 이런 왕들의 연이은 죽음은 조정에서 대를 이어갈 인물을 선택하는데 애를 먹게 되었고 설령 보위에 올랐어도 정사를 제대로 돌보기도 전에 요절하는 바람에 자손들 마저 귀해져 후사를 정하기가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의 역대 임금 가운데 나이 8살이라는 최연소로 보위에 올랐던 헌종이 후사가 없는 상태로 23살에 요절한 것은 더욱 심각한 왕통의 인맥난을 불러왔는데 이때에 안동 김씨인 순원왕후(순조의 정비)와 인척들이 함께 자기들 멋대로 조종할 수 있는 허수아비 임금을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영의정 정원용이 왕으로 모시기 위해 철종을 태워 한양으로 향하는 강화도 행렬도(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이런 안동 김씨들의 음흉한 내막을 안고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임금에 선택된 철종의 가계를 살펴보니 정실부인 외에 하나같이 모두가 첩을 두었으며 제 19대 숙종의 첩인 숙빈 최씨로부터 그의 아들 영조를 낳고 영조의 첩인 영빈 이씨는 사도세자를 낳고 다시 사도세자의 첩인 숙빈 임씨는 은언군을 낳았고 또 다시 은언군의 첩인 이씨는 이 광을 낳고 또 이 광의 첩인 염씨(용성부대부인)는 철종을 낳아 언뜻 보기에는 엄청나게 복잡한 가계로 보이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첩에서 첩의 자식들로 이어진 가계로 사실 봉건주의 사상에 젖은 조선이라는 유교 국가에선 왕통이라고 내세우기에는 너무도 형편없는 그야말로 곁가지에 불과한 계보였습니다. 그러나 워낙 왕통을 이어갈만한 적합한 인물을 찾을 수 없었던 탓이기도 하였지만 당시 궁중에서 최고 웃어른인 순원왕후 김씨와 나는 새도 단번에 떨어뜨릴 권력을 쥐고있던 외척 세도가인 안동 김씨들의 농단에 의해 강화도령 이원범(철종)을 점 찍어 새 임금으로 보위에 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허수아비 임금을 앞세우고 정권을 자기들 마음대로 휘두르려는 지극히 정략적인 차원이지만 이 덕분에 역모죄 연좌제로 유배지 강화도에서 한낱 나무나 줍고 전답이나 갈며 살아야 했던 강화도령 이원범은 졸지에 임금에 오르는 놀라운 행운(?)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강화도령 이원범이 왕이 되자 그가 살았던 헌집을 헐어내고 새로지어 용흥궁(강화읍 관창리 441 소재)이라 했다.

하지만 이원범은 비록 첩의 소생들로 이어진 자손이긴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사도세자의 몇 안되는 직계 후손으로 엄연한 왕가의 자손이었으며 다만 사도세자의 서자였던 이원범의 할아버지 은언군이 정조 때 홍국영과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게 되면서 은언군과 아들 이 광(철종의 아버지 전계대원군)을 비롯한 식구들이 다같이 교동도로 유배를 가면서 고통의 나날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당쟁으로 권력 싸움이 치열했던 조정에서 시파와 벽파간 당쟁은 계속되었는데 나이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벽파측의 정순왕후(영조의 계비) 경주 김씨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니 정조 때 세력을 형성했던 남인과 소론 시파들이 시련을 당하게 되었고 기회를 잡은 벽파는 계속하여 주로 남인들이 주축이 되어 전파된 천주교에 박해를 가하면서 1801년(순조1년) 신유박해를 일으켰습니다. 이때 은언군의 부인과 며느리가 왕족으로 세례까지 받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사사되었고 은언군 자신도 계속되는 탄핵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석달 뒤 48세의 나이에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아 죽고 말았습니다. 이 광을 비롯한 남은 식구들은 유배지인 교동도에서 줄곧 생활해오다 1830년(순조30년) 어느정도 안정적인 자신의 친정 체제에 들어선 순조에 의해 기나긴 40년의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한양으로 돌아갔는데 그 이듬해에 이 광은 아들 이원범을 낳고 제법 여유롭게 첩까지 들이며 살다 이원범이 10살 때인 1841년(헌종7년), 원인모를 병에 걸려 5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강화 옛지도(18세기 후반)

아버지를 잃었지만 남은 삼형제는 서로를 의지하며 살고 있었는데 1844년 또 한번의 평지풍파가 휘몰아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세도 정치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약 70여 년에 걸쳐 정권을 잡았던 노론의 거두로 우의정을 지낸 민응수의 4대 손인 민진용이 오래전 당파싸움으로 가문이 몰락하여 중인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품고 이원범의 큰형 이 명(회평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 계획을 세웠으나 이 역모가 탄로나면서 이 명과 민진용이 처형되었고 애꿋은 이원범과 작은형 이경응(영평군)은 연좌제에 의해 다시 강화도로 유배를 가야했습니다. 이원범은 이때부터 작은형과 함께 강화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는데 외떨어진 그곳에서의 생활은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나무를 줍거나 논밭을 일구는 농사일 외에는 딱히 다른일을 전혀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유배 생활이 5년째 접어들며 나이 19세가 된 어느날 우째 이런일이? 잠자다 일어나보니 세상이 바뀌었다는 말이 있듯이 강화도령 이원범은 갑자기 하루 아침에 생각치도 못한 임금이 되는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간정일록:임술민란의 주동자 김 령이 임자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남긴 일기 기록서
이렇게 외딴 섬 강화도령에서 느닷없이 임금이 된 철종은 본인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 자신을 모시러온 영의정 정원용의 행렬을 보고 나라에서 자신을 잡으러온 것이 아닌가 착각하여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을 갔었는데 그의 형 역시 급하게 도망을 치다 다리가 부러지기도 하였습니다. 안동 김씨의 각본대로 철종을 임금의 자리에 올려놓고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펼치면서 김문근의 딸(철인왕후)까지 왕비로 들여놓게 되니 그야말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는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처음으로 망국의 세도 정치 길을 다져놨던 김조순(영안부원군)은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자신의 딸(순원왕후)을 순조의 정비로 들이면서 비롯되었는데 한때 헌종 때는 신정왕후(일명 조대비,헌종의 어머니)의 풍양 조씨들마저 어울려 양쪽 집안이 세도 정치를 펼치며 정국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권력을 움켜쥐고 짭짤한 맛을 들인 이들은 허수아비 임금 철종을 보위에 올려 놓음으로써 더욱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챙기게 되었으며 이로인해 조선 사회는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탐관오리들의 갖은 수탈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져 민란의 집단적 저항을 불러왔습니다.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어지간한 벼슬아치들끼리는 재물이 오가는 매관매직이 성행하였고 부패한 사회의 뇌물에 소요되는 과도한 비용 지출은 탐관오리들의 무차별 수탈로 이어져 힘없는 농민들만 피폐해지면서 이에 집단적인 반발로 민란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1810년대에는 끊임없이 이런 민란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는데 주로 곡물이 많이 생산되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삼남지방이나 상인들의 상거래가 활발했던 평양 등의 이북 지역은 소위 물 좋은 곳이라하여 탐관오리들이 선망하는 자리였는데 그만큼 백성들을 착취하기가 좋은 지역이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조세제도인 삼정(전정, 군정, 환곡)은 제멋대로인 탐관오리들의 잣대로 놀아났고 이들의 혹독한 수탈과 착취에 참다못한 백성들은 집단적으로 항거를 하였으며 평안도 지방에서 일기 시작한 소요는 1811년(순조 11년)에 홍경래의 난이 되어 순식간에 크게 확산되었지만 약 5개월간을 저항하다 원래 농민군이 그렇듯이 지리멸렬하면서 관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소규모 도적떼들의 약탈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고 1862년(철종 13년) 임술년에는 제주를 포함하여 전국적으로 통틀어 70여 차례의 민란이 일어났으며 그중 진주민란은 진주에서 제법 규모가 크게 시작된 항쟁으로 이후에도 전국적으로 확산된 농민들의 항쟁이 줄을 이었습니다.


▲철종의 능(서오능 예릉)
◀정원용의 일기(걍산일록)
철종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고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3년간에 걸친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으며 그 기간에는 그동안 생소하기만 했던 궁중의 법도를 익히는데 노력을 하였습니다. 수렴청정이 끝나고 친정을 시작하였지만 안동 김씨의 입김이 워낙 거세었던지라 철종 본인의 의지대로 이룬 것은 하나없었는데 철종으로서도 순조 때부터 3대를 내려온 세도 정치를 없애보려고 부정부패의 온상인 삼정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기도 했지만 불과 몇 달도 채 되지않아 안동 김씨들의 압력과 반대에 부딪혀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철종의 혼자 힘으로 안동 김씨들의 세도 정치를 타파해 가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않고 번번히 벽에 부딪치자 철종은 무기력에 빠져 정사에 싫증을 느끼고 매일같이 후궁들과 어울려 술과 향락으로 나날을 보내었습니다.


▶흔히들 철종을 강화도령이라 깍아내리면서 무지한 임금으로 말들 하지만 이 철종의 작품을 보면 사실과 달리 실력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정사를 그릇친 임금으로 그를 다분히 낮게 평가하려는 일부 세력들에 의해 이미지가 많이 조작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사를 외면하고 주색에만 빠져있는 이런 의욕을 상실한 무기력한 철종의 행동은 어찌보면 그를 임금으로 앉혔던 안동 김씨들이 조선의 모든 권력을 독차지하여 정사를 마음대로 조정하기 위한 바라는 바였습니다. 이런 지도층들의 분별없는 지나친 사리사욕의 결과는 부정과 부패를 만연시키고 탐관오리들의 난립과 백성들을 고통 속으로 빠져들게 하여 나라가 피폐해지면서 결국 조선을 회복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하였습니다. 철종 또한 밤낮없이 계속되는 주색에 곯아 결국에는 그 강화도의 야산을 내달린 강건한 청년이었던 몸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지 15년 동안에 어느새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병약한 몸이되어 자리에 누운지 2년여의 병석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1864년 1월 그의 나이 33세의 짧디짧은 젊은 나이에 후사도 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조선 후기의 임금들 단명한 수명들을 놓고보면 그리 놀랄일도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자연인 이원범이라면 아직 팔팔하게 살 나이였고 묵은지의 생각일진 몰라도 강화도에서 지금껏 살았더라면 양순이와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철종은 궁중 생활중 가끔씩 강화도쪽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젖기도 하였는데 특히 그곳에서 즐겨 마셨던 모주(막걸리)를 몹시 그리워해 그의 부인 철인왕후 김씨가 불쌍하게 여겨 사람을 통해 막걸리를 구해줄 정도였으니 그 곳 생활이 그리웠던 철종은 스스로 그런 것 조차도 가져다 마실 능력이 없을 정도로 무능에 빠진 가여운 임금이 되었던 것입니다. 철종은 임금이 된 것이 결코 축복이나 행운이 아닌 왕이 되어 슬픈 강화도령 이원범에 불과했으며 세도가들의 폭정으로 희망의 불빛마저 꺼져가고있는 암울한 어둠이 찾아드는 조선을 그저 두손놓고 지켜보아야 했으며 결국에는 온갖 스트레스와 이를 벗어나려는 문란한 어리석은 나날로 온 몸과 마음이 병약해져 추악스럽게 부패된 왕실과 온갖 음해와 암투가 난무한 조정의 냉랭한 그 바닥에 드러누워 옛시절 마음껏 뛰놀던 산야를 한없이 그리며 눈을 감아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