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과 운명윤재선 레오(보도총국장)
‘운명은 그대들에게 던지는 내 물음이다.’ ‘답은 그대들이 하여라.’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도깨비’의 대사 한 토막이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이 말은 긴 여운으로 뇌리에 남았다. 드라마 몰입도가 그만큼 컸던 탓도 있겠지만 드라마 못지않은, 드라마를 뛰어넘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기에 쉽게 잊히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필자의 글을 접한 독자들은 이미 그의 운명을 가를 심판의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대통령으로 지낸 지난 4년간의 영욕을 마감하고 새로운 심판대에 모습을 드러내야만 하는 처지일지, 아니면 극적으로 회생했다는 안도감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를. 그래서일까? 머릿속 상상의 장면은 금세 광장을 향한다.
서울 광화문 광장은 어제와 오늘 촛불의 환호와 환희로 온통 뒤덮여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또 다른 한쪽 서울광장은 울분을 토해내며 분노와 실의로 인해 악담에 찬 결의를 행동으로 옮길 수도 있으리라. 어쩌면 그 반대의 장면도 역사의 현실이 되어 있을 수 있겠지만 상상하기조차 끔찍하다. 공공연히 살인과 테러를 주창하며 내란 선동을 운운하는 세력의 환호가 대다수 선량한 국민에게서 피눈물을 쏟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라건대 운명의 주사위가 던져진 광장에 불의와 악행에 맞선 분노가 관용과 통합의 빛을 밝히는 촛불로 타오르기를 바랄 뿐이다.
사악한 정치 권위에 분노하고 불복하는 행위는 정당하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그의 첫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 “정의가 모든 정치의 목적이며 고유한 판단 기준이라면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28항)고 설파한다. 바오로 사도는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라고 강조한다(로마 12,21).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치 활동은 정권 창출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시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한 것이다.
탄핵 심판이 끝이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기에 국론 분열은 두고두고 걱정거리다. 어떤 형태로든 검찰의 수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지금 이 순간 이미 결정돼 있을 수도 있지만, 벚꽃 대선이든 눈꽃 대선이든 대통령 선거는 치러야 한다. 이 과정에서 갈라진 적대적 감정의 골은 더 깊게 팰 것이다. 어느 한쪽의 좌절과 실의도 더 커질 것이다. 그렇다고 좌절과 분노만을 대변하고 선동하는 인물을 국민을 섬기는 대통령으로 뽑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분노를 넘어서야 한다. 불의에 맞선 분노이든 그렇지 않든 분노가 우리 삶의 곳곳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진 않은가. 분노 바이러스에 전염되고 중독된 사회는 결코 건강하지 않다. 저주와 증오를 거두고 ‘행동하는 기도’로 너와 나, 우리 모두에게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갖도록 청하자. 예수님께서 용서하는 사랑으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이 세상은 이미 사라졌을 것이다. 악을 선으로 이기는 사랑의 전능이야말로 악을 회개시키는 지름길이다. 은혜로운 회개의 때, 사순이다. 그리스도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까닭은 예전의 내가 아닌 새로운 자아로서 거듭나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리라. 대한민국 공동체의 운명 역시 우리 스스로의 내적 변화와 그 역량에 달려있다.